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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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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한 때 난 황우석 박사를 매우 좋아했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황빠, 라는 범주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황우석 박사는 서울대 수의대의 교수였었고, 젖소 영롱이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게 체세포 복제를 통하여 영롱이를 만들어낸 황우석 박사는 인간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에 도전하며 우리나라의 과학계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당시 침체된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나왔다니, 그 당시 나는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라며. 황우석 박사가 그의 배아줄기세포 관련 논문을 실은 사이언스지는 매우 유명한 학술지이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사이언스지 등의 학술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게다가 논문의 내용은 여간한 논문들과는 실용성 측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내용이었으니 (줄기세포의 복제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때 미쳐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대한민국이 그에게 모두 미쳐있었다.

 

하지만 보름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황우석 박사는 그의 절정에 있을 때 동시에 몰락을 준비했다. 2005년, PD수첩은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난자 채취과정이 비윤리적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었다. 그 방송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최고의 과학자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욕을 매우 많이 먹었고, MBC당국에서조차 PD를 경질시키는 동시에 대국민사과를 방송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당시에는 PD수첩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말도 안 돼, 감히 황우석을 건드려? 그래, 꼭 이런 기분이었달까. 물론 지금 와서 판단해볼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때 일을 떠올려보면 정말 부끄러울 따름이다. 굳이 한 가지 다행이라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도 황우석에 대한 옹호글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 정도이려나. 황우석 박사의 쇼는 결국 미즈메디 노성일 원장의 폭탄발표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 다음에는 솔직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PD수첩 2차 보도는 보는 둥 마는 둥했었고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는 더 충격이었다. 앞서 말한 영롱이마저도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복제를 통해서 만들어진 소인지, 아니면 어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지. 정말 눈을 돌리고 싶었고 그리고 정말로 눈을 돌렸다. 다만 내 머릿속에 끝까지 남은 것은 그나마 황우석 박사의 줄기 세포 일부가 처녀생식으로 발생되었다고 추측된다는 것. 그래, 황우석 박사가 완전히 거짓말은 한 것은 아니야, 정말 아깝다, 처녀 생식도 정말 대단한 발견인데, 그걸 그대로 말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부담감에 시달려서 거짓 논문을 썼을까, 라고 나는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북리뷰에 보면 당시에 진중권이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사건에 대해서 (진중권은 황우석 지지자들 때문에 감금당했다) 이렇게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겠다.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중략)... 왠만한 욕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중권은 하나의 사례를 들며 이런 의문을 던진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나는 오랫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야 겨우 대답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대답이 늦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나 또한 ‘이상한’ 사람들 속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에게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라, 라는 교훈을 전해주었다. 결국 이런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감정적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글에 대해서 읽었다고 하자. 그 후에 A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의 의견을 내놓으라고 요청받아서 의견을 내놓았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그 의견, 찬성이든 반대든 그 의견은 정말 그 글로만 판단되어진 의견일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A를 쓴 사람에 대한 편견이 먼저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A를 쓴 사람을 좋아한다면 설령 이상한 내용일지라도 이해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글은 이상한 글이다, 라고 단정 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어느 쪽도 옳은 것이 아니다. 편견이라는 말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데, 편견은 단순히 그 사람의 첫인상 이런 것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풍문으로 듣든, 이름으로 판단하든. 거짓말 같은가?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가져다주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더 강화하게 된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일컫는다.)

 

자, 이런 것들을 깨달았으니 나는 과연 완전히 저런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제법 객관적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 황우석 사건을 거치며 나는 어떠한 우상이라도 내 손으로 때려부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어떠한 주장도 객관적 근거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래서 어떠한 것이라도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하면서 판단할거라고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 자체 또한 일종의 편향, 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를 과신하는 그런 기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도 황우석 사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은 절대치로 비교하자면 황우석 사건에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만에 빠졌다, 라는 점에서는 인식에 거의 비슷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나는 가수다, 는 MBC에서 여러 가수들, 특히나 재야에 묻혀 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정말로 노래를 잘 부르는 그런 가수들을 초빙해서 경연을 붙여서 한 명을 탈락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가수다, 는 정말 사람들의 환상을 꼭 채워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환상인가? 방금 나는 재야에 묻힌, 에 강조점을 두었다. 바로 그 점이다. 재야에 묻혀있지만 실제로는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가수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혹은 보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에게 은근슬쩍이나마 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 혼자서만 갖고 있고 싶다. 나는 가수다, 는 바로 이 환상에 절묘하게 부합되었다. 예를 들어 임재범을 보자. 임재범은 나는 가수다, 출연 전에는 거의 방송출연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 노래방에서 제일 여자들이 싫어하는 노래 1위인 고해, 정도로 인구에 회자될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리고 여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임재범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박정현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 는 정말 말이 필요없는 노래였었다. 하지만 방송에 출현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든 전설, 이라는 이름 아래 잊혀져 갈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욕망과 나는 가수다, 의 욕망은 서로 만난다. 나는 임재범이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임을 알고 있고, 그의 노래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전설의 이름으로 더 이상 대중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더라도 그 또한 아주 섭섭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혹시나 우리나라의 가수들 중 가창력 1위에 대한 잡담을 할 때 남들이 거의 다 잊어버린 임재범의 이름을 당당히 말할 것이다. ‘야, 니들은 모르지? 임재범이 얼마나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였는지를.’ 그리고 난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심정을 공중파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이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임재범이 실제로 나는 가수다, 에 나와서 너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 을 열창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임재범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임재범의 갑작스러운 하차 선언으로 인하여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만다. 그리고 임재범의 대타로 들어온 것은 옥주현이었다. 여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옥주현이 과연 나는 가수다, 의 전설들 사이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 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는 큰 음모가 있다, PD와 방송국 전체가 임재범을 몰아내려고 했다, 등의 음모론으로 발전해나갔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옥주현의 관객반응 중 일부를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을때의 관객반응을 가져와 편집한 것이 드러나면서 나는 가수다,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터져나갔다. 그 게시판만 터져나갔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터넷 게시판이 터져나갔던 것 같다. 나도 생전 들르지 않았던 방송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면서 사람들의 댓글을 읽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스포일러, 그러니까 후기를 알기 위하여 (나는 가수다, 는 선행 녹화 후 방영이기에 노래를 들으러 갔었던 방청객들이 스포일러를 남길 수 있었다.) 인터넷을 밤새도록 새로고침하면서 뒤졌던 기억이 난다. 옥주현을 비판(혹은 비난)하는 글은 추천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옥주현이 전조(곡의 코드를 변화시키는 것)를 했다는 기사가 뜨면 함께 출연하던 조관우를 언급하면서 옥주현이 한 번 전조를 하면 조관우는 전조를 자유자재로 한다, 고 글을 쓰던 사람도 있었다. 옥주현이 오케스트라를 요구했었다, 라는 말들도 널리 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우석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도 글을 올리지 않은 것 정도다.

 

바로 몇 년전에 황우석 사건을 겪었었는데 겨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황우석 사건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지금 와서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옥주현 입장에서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을 겪고 나는 내 머리로 모든 것을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 논란을 보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애초에 내 마음 속에선 결론이 나있었다. 임재범이 없는데 옥주현이 들어왔네? 감히 임재범의 자리에 옥주현이 들어와? 빨리 임재범 다시 데려와, 라고. 이미 이렇게 결론이 나있는 이상 옥주현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만 쫓아 글을 읽었을 것이다. 누가 어떠한 증거를 내밀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의 사건을 겪으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신뢰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면 또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텐데, 분명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갑자기 돌변할 텐데. 결국 내가 스스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과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객관적 관점에서 사태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객관적이기 어렵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 또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논지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전개해나간다. 너를 공격은 안할 테니까, 나도 공격은 하지 말아줘, 라는 생각이라도 가진 것처럼. 결국 항상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늪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걷게 되는 길이 아닐까? 이런 길은 결국 절망만 남기게 된다. 어차피 이해 못할 거라면 그냥 내 의견과 비슷한 사람들로만 내 주위를 채우면 모두가 좋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기어코 나의 지옥은 상대방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궁리하던 나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이다. 책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저 사례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기만, 편향, 과신. 나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하였고, 황우석 지지자들의 집단을 일종의 내집단으로 판단하여, 거기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외집단으로 판단하면서 침묵으로 대응하였던 것 같다. 무슨 증거가 나오더라도 지지쪽으로 의견이 편향되었고, 그 사태가 모두 끝난뒤에는 쓸데없는 과신, 절대로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을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마저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대로 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이런 자기기만은 왜 생겼던 것일까? 결국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 책에 따르면 나는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면 나의 인지에서는 부하가 걸리게 되고, 그런 부하를 생물학적으로 겪고 싶지 않아서 환상을 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리라.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특히 생물학적인 연구를 언급한 장인데, 여기에서 나는 이런 기만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연구인데, 최근 연구 결과에서 의식은 도리어 일종의 관찰자에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책에서 언급한 연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 때 fMRI를 통하여 뇌의 부분의 활성화가 되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은 의식적인 부분이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겠다, 라는 의식을 가지기 이전부터 이미 운동에 쓰이는 부분이 활성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말이다. 내가 운동해야지, 하기 전부터 이미 몸은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내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기도 전인데 먼저 몸이 먼저 운동을 준비한다니. 보통 우리는 의식을 가진 뒤에야 운동이 발현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론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그런 명령이 먼저 내려진 뒤에 의식은 그걸 지켜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을 동반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질 수 없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면 저런 기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더 선호하는 그런 표상들에게 휩쓸릴 것이다, 영원히.

 

하지만 현대 과학은 그런 부정적인 결론만 우리에게 안겨주지는 않는다. 의식은 비록 관찰자이지만, 우리가 그럴 의식만 있다면 절대적 권리를 가진 관찰자이다. 적어도 어떤 행동이 있기 10초 전부터 무의식적인 단초, 책의 말을 빌리자면 의식과 행동 자체를 빚어낼 신경 신호가 가 나타난다고 하면, 이 신호는 행동이 시작되기 10분의 1초 전까지 중단되어질 수 있다. 무엇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의식이 그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거부하고자 하는 의식만 있으면 언제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좀 더 크게 확대해보자. 나를 어떤 집단으로 확대하고, 의식을 집단 내에서 중의를 모으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의견을 배척하지 말라,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라. 물론 이런 집단은 인간과 달라서, 설령 집단의 일부가 그런 의견을 중지한다고 마치 의식처럼 닥터스톱, 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지만 않아도 큰 소득이 된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글쎄, 이런게 또 다른 기만의 단초가 되면 어쩌지? 이런 이야기처럼 말이다 : 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다른 몇 명은 제대로 길을 걷고 있겠지, 뭐 양심은 그 사람들에게 맡겨두자, 나는 일단 다수의 편에 있어보겠다, 잘 안되면 그 사람들 편으로 돌아서면 되는 것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 s. 여담인데, 이 책은 상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p. s. 2 프라이머리의 입장정리, 를 들으며..

p. s. 3 사실 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여질 수도 있었다. 무한도전의 노홍철을 중심으로.. 내가 또 무한도전의 광팬이라서, 아니 글 내용을 좀 구상했었던 아이디어가 아까워 이렇게 몇 자 붙인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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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26 01:27   좋아요 0 | URL
올해 읽은 것 가운데 최고의 책이군요

자기 자신도 믿을 게 못 되기도 합니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또한 가연 님이 한 말처럼 자신은 벌써 결론을 내려놓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한테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한테도 늘 자기 마음을 열어두어야 해요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저도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려고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두 내려놓기... 사실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래도 황우석 박사 일이나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에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조금 억지가 있는 걸까요

마음을 진정시키면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이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26 20:10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오늘까지는 최고의 책인 것 같아요. 특히 생리학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부분을 읽는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옛날에 배우던 기억도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배울땐 그렇게 지겨웠었는데 말이죠, 하하하하하.

마음을 열어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리고 내려놓는것은 더 어려운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정말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여기 인간세상에 살기 어렵지 않을까..

마립간 2013-09-26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우선 가연님을 제가 신뢰하는 그룹의 사람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의지'는 제가 인지과학에서 남겨둔 마지막? 퍼즐입니다.

가연 2013-09-26 20:12   좋아요 0 | URL
아하하.. 신뢰하는 그룹은... 감사합니다만 넷상은 위험하니까 좀더 지켜봐주심이...ㅠㅠㅠ

그렇죠. 사실 궁금한 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의지에 관한 문제는.

드림모노로그 2013-09-30 09:53   좋아요 0 | URL
하하하 ~ 가연님께서 말씀해주신 과거의 일과 묘하게 감정의 교집합이 생기네요 ㅎㅎ
황우석 사태는 정말 , 대단했죠...^^
그리고 임재범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가수라, 가연님의 생각하셨던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가 되네요 ㅎㅎ.....
집단주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부분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지적하는 부분이죠..전 혼자 노는 것을 좋아라 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하하~
비가 와서 처지던 기분에 가연님의 글을 읽으면서 괜시리 즐거워지네요 ^&^
즐겁게 읽고 갑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

가연 2013-10-03 20:57   좋아요 0 | URL
어허허.. 오랜만입니다.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곧 태풍이 올라온다던데, 비가 또 오겠죠?

2013-10-01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