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Meaning of Life 시리즈 8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성난 독일인이 강의가 끝난 후 와서 논쟁을 했습니다."

 

1911년 11월 16일,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이 사랑하던 오톨라인 부인에게 저런 편지를 썼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러셀의 역설' 이라는 역설을 통해서 수학계와 철학계 모두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그는, 그 자신의 지적 능력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강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던가, 그의 여성편력은 처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지만, 불륜이라고 규정하는 사회적인 시선따위는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위의 오톨라인 부인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러셀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 살펴보면, 러셀은 수학원리, 라는 뛰어난 책을 막 펴내었었다. 그런데 그가 그 책을 쓰느라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책을 쓴 뒤에는 모든 '진력이 빠져버릴 정도'였었다. 그래서 러셀은 스스로에게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다. 아, 논리학자, 혹은 철학자로서의 러셀은 이제 죽었구나, 라고. 누구나 자신의 일, 이라고 규정지어진 그 무엇인가를 해내면 홀가분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할 것이다. 결국 그런 생각이 들면 감정적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 러셀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는 오톨라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그대는 나의 별이라고. 그대의 광채 때문에 내가 세계를 볼 수 있노라고.

 

이때의 러셀은 사실 합리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러셀의 독설과 날카로운 지성의 번뜩임은 '사랑'의 이름으로 잠깐 잠이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처음에 기껏해야 '성난 독일인' 에 불과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전형적인 천재' 라고 인정받을때에는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 의한 보정이 분명 있었으리라. 사랑에 빠져서 연약해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긴다. 자신의 일을 다 했다, 더이상 이것보다 나은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삼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 은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은 늘 똑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내가 이것을 시키면 이렇게 하겠지, 저렇게 시키면 저것을 하겠지, 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일상에 끼어드는 사람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왠지 더 능력이 있어보이게 된다. 그러니 이 때 찾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저 두 조건을 모두 갖춘 최적의 사람이었으리라.

 

그런데 러셀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러셀이 은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줄곧 자살충동에 시달렸노라고, 러셀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라고 인정하자 비로소 자신의 자살충동을 해소할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아무리 보석이 있더라도 그 보석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석과도 같은 재능을 발견한 사람이었고, 그 재능을 개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러셀은 분명 비트겐슈타인의 은인이리라. 그런 재능을 발견하는데 앞서 말했듯 오톨라인 부인과의 사랑, 큰 과업을 이루었다는 생각, 등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결국 이뤄낸 업적을 본다면 무의미할지라도)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에 러셀이 합리주의자에 강력한 무신론자인 채로 있었다면? 러셀이 아직 난 더 잘할 수 있어, 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을 구제해주었을까, 와 같은 일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한 답을 달아보자면, 그는 결국에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정하였으리라. 러셀은 스스로의 재능에 취해서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빠져서 구제를 받아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비트겐슈타인의 어린 시절에 읽은 책에 있다. 이 책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 따르면 오토 바이닝거의 책이었던 성과 성격, 이 어린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바이닝거는 자신의 책에서 천재성의 획득을 일종의 정언명령 - 칸트의 정언명령 - 으로 파악한다. 천재성을 가져라. 그것은 선이다. 그렇기때문에 그것은 무조건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천재성이란 어떤 것인가, 에 대한 규정이 (있기는 있지만) 세밀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천재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바이닝거의 이야기를 따라 정말로 정언명령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교하면서 파악해보자. 칸트의 정언명령 중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을 예로 들어보면, 거짓말을 하지 말라, 와 같은 말이 있다. 이 말은 정언명령이다. 그러니까 선이기에 무조건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만약에 정언명령이 무조건 절대적으로 모든 경우에서, 삶의 모든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정언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을때 수많은 고통과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절대적, 과 같은 말은 이상세계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살아가다보면 거짓말은 대부분 할 것이다. 당장 이 책의 주인공인 비트겐슈타인이 어릴 때 가졌던 의문이 '거짓말을 해도 이로울 때 진실을 꼭 말해야 하는가?' 였고, 그 의문에 대한 스스로가 가진 답이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도 꼭 잘못은 아니다' 였으니 말이다. (비록 사유의 과정은 다르지만 흥미롭게도 루소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에서 거짓말에 대해서 내린 결론과 동일하다.) 어느 누구라도 거짓말을 했으니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 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를 보고 칸트의 철학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분명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은 분명 절대적인 정언명령이다. 하지만 그 명령을 준수하는 사람도 있고, 준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치 법률이 있지만 범죄자들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토 바이닝거가 정언명령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천재성은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천재성에 대한 규정을 해보자. 우리가 쉽게 천재성, 이라는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 의 공통된 특성을 뽑아내는 것이 빠를 것이다. 천재들의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 뉴턴과 같은 사람이리라. 그런데 이들은 무엇을 했는가? 먼저 뉴턴의 경우에는 고전 역학의 세계를 열었다. 그의 프린키피아, 는 심지어 칸트의 초기 철학에도 (순수이성비판을 쓰기 전의 칸트의 철학) 영향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모조리 뒤바꾸어 놓았다. 정리하자면 무언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롭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동안 있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런 규정은 필연적으로 천재라는 이름에 타인에 대한 우월성을 부여한다. 바이닝거 또한 이런 사고과정을 따랐다.

 

그런데 천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고, 천재성이 그 천재들이 가지는 특성이라면, 오토 바이닝거의 이야기에는 결함이 생긴다. 천재성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고 정언명령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런 상황을 상정해보자. 모든 사람이 그 천재성을 실현한 상황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우월성을 가진다, 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럴 때 도대체 '천재성' 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오토 바이닝거의 이야기가 천재성, 에 대한 이야기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다음이 요구된다 : 모두가 천재성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이는 정언명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모순이 된다. 앞서 칸트의 정언명령의 예로 들었던 '거짓말을 하지마라' 와 같은 문장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사회고 정언명령이 이루어진 사회이다. 하지만 그 명령이 천재성에 이르면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기어코 모순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재가 되지 못하면 죽으면 된다. 죽은 사람은 그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천재성은 사회에서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산 사람들은 모두 천재이기에) 그리고 동시에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 비하여 우월한 위치에 있다. (죽은 사람들은 천재성이 부족한 사람들이기에) 이로서 이 모순이 해결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저 결론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에게는 천재와 죽음, 단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자살충동에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을 '구제받아야만 할 사람' 이었고 러셀은 그런 그를 (비록 합리적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죽음으로부터 '구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볼 부분이 있다. 앞서 말한 천재성의 규정을 따르자면, 천재성은 항상 한 업적이 이루어진 뒤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에 관한 이론을 세우지 않았다면 누가 아인슈타인보고 뛰어나다고 인정했을까? 카프카는 그 뛰어난 문학작품들을 남기지 않았다면 단순한 공무원 정도로만 여겨졌으리라.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러셀의 인정 - 너는 천재다 - 을 받고 난 뒤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구태여 부연하자면 러셀에게 비트겐슈타인은 다음처럼 계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위대한 일을 할 것이다.

 

네, 나는 위대한 일을 할 겁니다.

 

오토 바이닝거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던 비트겐슈타인은 (나중에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 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이 간극, '천재성을 판단하는 것은 업적이 이뤄진 뒤에 행해진다, 와 먼저 이루어진 러셀의 인정 ; 너는 재능이 있다. ', 을 어떻게 매웠을까? 여기서 그는 베토벤의 예화를 가져온다. 베토벤은 식음을 전폐하고 36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위대한 작곡을 행한다. 36시간이다. 바로 여기서 간극이 메워진다. 위대한 결과를 낳을 시간을 나에게 주겠다. 그 시간은 36시간이다. 36시간을 투자한 결과가 위대하지 않다면 주저없이 나는 죽음을 택하리라.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기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저 36시간은 그야말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전장이다. 베토벤에게는 그 시간이 지옥의 입구이자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럼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자신의 삶이 걸린 시간이었다. 왜? 36시간을 겪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을 세계대전에 참전해 직접 전쟁을 경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결국 그는 정신적 의미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 의미로도, 그 자신의 모든 부분에서 그 36시간을 겪었던 것이다. 

 

이 후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다른 업적을 선보였지만 죽을때까지 그는 저 자세, 천재성을 향한 경건한 자세, 를 잊지 않았다. 러셀의 인정으로 겨우 살 권리를 받았다지만, 그리고 위대한 과업을 남겼으니 이제 살아도 좋다, 라고 여기게 되었다지만 이제는 천재, 라는 그 개념 자체가 그 자신을 얽어매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 자신에게는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았고, 그것은 다시금 그 자신을 천재성, 이라는 것을 얻기 전의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시금 철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때때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의 수명은 이제 6개월 정도 남았을 뿐이라고. 왜 이런 말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했을까? 이것이 명료하게 되지 않는다면 (천재성을 다시금 얻지 못한다면) 그는 죽어야 하였기에 그런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그가 자신의 삶의 이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만들어낸 철학들은 지금도 논의가 계속되고있다.

 

그의 철학은 어렵다. 그의 철학이 특히나 어려운 까닭은, 그는 자신의 생각에 다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가 (자신이 쓴 책을 오독한) 괴팅겐 서평을 보고 자신의 철학을 쉽게 이야기한 형이상학 서설, 을 썼던 일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도움이 되는 글 하나 정도는 사실 남길 수도 있었을텐데, 끝끝내 그는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비트겐슈타인 평전, 은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이리라. 하지만 레이 몽크의 이 책이 가진 더 큰 장점은 아마 천재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으리라. 평생 칼날 위에 선 것 처럼 천재, 아니면 죽음, 이라는 일견 오만한 태도를 고수해왔던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어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은 독자들에게도 자신의 철학에 대한 태도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에 다다르려면 당신들도 죽을 각오로 뛰어와야만 한다, 라고. 하지만 끝내 그가 우리에게 천재,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재촉한다면

 

"답장하지 않을 생각이다." 라고 무어는 일기에 적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2-14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7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2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3-02-23 03:03   좋아요 0 | URL
사람도 만나야 할 때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을 나중에 인정했다 할지라도, 참지 못하고 죽은 뒤였다면...
비트겐슈타인, 이름만 아는 사람입니다
어쩐지 자기가 자기를 아주 힘들게 했을 것 같네요


희선

가연 2013-03-05 16: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읽을때 드는 게 바로 그 생각, 자기가 자기를 괴롭혔다는.
 
[얽힘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얽힘의 시대, 는 양자역학의 정립을 둘러싼 여러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히 연대기식으로 어느 연도에 무엇이 있었고, 그 다음 연도에 무엇이 있었다, 와 같은 책이 아니며, 마치 제목 그대로 얽혀있는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다. 그러나 쉽게 구성된 것 처럼 보일지라도 이 책 또한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다. 역사책으로 여기며 읽어나가더라도 물론 재미있겠지만,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기에 어느 정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을 짚고 읽어나가면 좋을 것이다.

 

처음 다룰 이야기는 얽힘, 이라는 것이다. 얽힘Entangled은 미시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양자역학적 현상 중 가장 특이한 현상들 중 하나로, 어떤 소립자 두개가 얽혀있다면, 그 소립자쌍을 아무리 멀리 떼어놓더라도 각각에 가해진 조작때문에 다른 소립자에도 영향을 미친다. 얽혀있는 소립자 한 쌍을 상상해보자. 이제 소립자 하나를 안드로메다 은하에 놓아두고, 하나는 우리 은하계에 놓아두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 은하계에 있는 소립자쌍을 괴롭히면 안드로메다 소립자도 즉각적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 얽힘 현상이 신기한 것은 바로 이 '즉각적' 이라는 부분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의 거리는 빛으로 250만년을 달려가야 한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걸 잘 이용하면 빛보다 빠른 전달 체계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구슬이 있다. 이 구슬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쪼개지는데, 이 쪼개진 단면은 매번 측정할 때마다 다르다. 만약에 이 구슬이 쪼개질 때 항상 단면이 매끈하다던가, 등등 일정하게 쪼개진다면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어떤 정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구슬은 거칠게 쪼개지고 (가끔가다가 매끈하게 쪼개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더 크게 쪼개질지조차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으로 정보를 보낼 수 있겠는가?

 

두 번째 다룰 이야기는 불확정성 원리, 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간단하게 말해서, 미시세계에서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 라는 이야기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모른다. 어떤 시점에서 우리가 소립자를 관찰했을때 그 소립자가 또렷하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고 설명을 해두도록 하겠다. 마치 진동하는 볼처럼 덜덜덜 떨린다거나(아주 안좋은 비유지만), 분명 본 것 같은데 알고보니 내가 본 녀석은 안드로메다 은하에 가있다거나 등등 말이다. 우리가 소립자 하나 하나를 맨눈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말이다. (물론 이 문장 자체가 모순이지만 더 나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굳이 현미경으로 소립자를 본다, 와 같은 예를 들지 않은 까닭은 자칫하면 광양자때문에 소립자가 교란당해서 생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산란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이다.

 

그 다음 다룰 이야기는 EPR 역설이다. EPR 역설의 이 이름은 각각 아인슈타인EInstein,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의 이름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인슈타인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고, 로젠은 웜홀을 상상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로 유명하다. 이 EPR 논문이 쓰여진 이유는 일반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었다.)때문이다, 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양자역학의 반감보다도 양자역학이 완전하지 못하다, 라는 감정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물론 완전함을 지향하는 사람이 불완전함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단순한 반감은 그 표현형은 같을지도 모른다.)

 

이 EPR 역설은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초를 이루는 것은 두가지이다. 실재와 국소성. 가장 먼저 실재, 라는 것이 있다. 실재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렵게 여겨지지만, 당신의 눈 앞에 있는 연필을 생각해보라. 그 연필이 실재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그 연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모두 다르겠지만) 지금은 침대 위에 놓여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필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바닥에서부터, 벽에서부터 등등 50c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라거나 좀 더 편리하게 기준점을 잡아서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침대로부터의 거리를 쓰도록 하자. 이건 논리학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방에서는 바닥에서 50cm위의 벽으로부터 50cm 떨어진 곳의 침대위에 연필이 존재한다"

 

논리학에서라면 한 명제에서 그 역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르겠지만, 이건 논리학적인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연필이 침대 위에~' 말고 위와 같이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 문장에서부터 일반화시키면(물론 몇가지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어떤 물리적 실재는 그 실재에 해당하는 물리적 값을 가진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를 연필로 두고 값을 거리 등으로 둔다면 자명할 것이다. 이제 저 연필의 크기를 매우매우매우 작게 만들어보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연필의 크기는 너무 커서 양자역학적인 법칙이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노벨물리학상을 탄 연구 중 하나가 원자 크기에서의 거시적인 면에서 양자역학이 성립함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원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너무나 작다.) 그런데 이 연필을 우리가 너무 작게 만들었는지, 갑자기 뻥, 하고 반으로 쪼개져서 서로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현상이 나타나버렸다. 말하자면 앞서 말한 '얽혀있는'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이제 원래 정지해 있었지만 쪼개진 저 연필의 한 조각을 A라고 하고, 다른 조각을 B라고 하자. 편의상 왼쪽으로 날아가는 녀석을 A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녀석을 B라고 두면, 모두가 아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 때문에 A의 운동량과 B의 운동량을 합한 값은 초기 상태, 그러니까 정지 상태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각각의 운동에 대하여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전제와 가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옳다. 그리고 가정으로는 첫째,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것 처럼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보어가 맞다. 이렇게 두 가정을 살펴보면 첫째 가정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값만 보아도 매우 든든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안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둘째가정) 보어는 이렇게 말한다. 아인슈타인, 신한테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지 마라! 이 두 가지 가정 중 일단 보어의 가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A, B 조각에서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들은 단면의 거친 정도, 속도, 질량(합쳐서 운동량), 그리고 얼마나 멀리 각각의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정도일 것이다. 보어의 세계는 양자역학이 날뛰는 세계이고 불확정성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불확정성 원리는 앞서 말했다시피 위치와 운동량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미시세계에세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 보듯이, 연필은 이미 미시세계에 접어들었으니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하기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잴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EPR 역설의 시작이다. A조각의 위치를 측정해서 +5라는 값을 얻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B조각의 위치의 값은 -5가 될 것이다. (초기가 정지 상태였기에 이후 설명한 국소성의 원리에 의하여) A조각의 운동량은 잴 수 없다. 왜? 보어가 맞다면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작용할테니 말이다. A조각의 위치가 운동량을 교란시켜서 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B조각이 있다. B조각의 운동량은 교란되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 B조각의 위치를 측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앞서 얻어낸 -5는 산술적 계산으로 나온 엄밀한 값이다. 하지만 어쨌든 측정은 하지 않았잖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B조각에서 운동량을 측정해서, 그 운동량을 가지고 운동량보존의 법칙을 이용 A조각의 운동량을 거꾸로 역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가지고 우리는 A조각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엄밀한 값을 모두 구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건 모순이다. 방금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구해낼 수 없다고 (불확정성 원리) 했는데 지금 사고 실험에서는 다 구해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보어는 틀렸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맞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본인 스스로의 이론, 그러니까 상대성 이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성 이론에는 아래에 이야기할 국소성이 있고, 그는 이 국소성을 바탕으로 보어를 논박한 것이다. 자신의 이론이 맞다고 여긴 아인슈타인은 숨은 변수 이론을 내세우게 된다. 자신의 역설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아직 완전하지못하다. 그렇기에 완전하게 만드는 숨은 변수가 필요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왜 EPR 역설이 역설로 불리겠는가? 옳다면 이론이라고 불릴 것이다. 결국 EPR 역설은 이후에 설명할 한 부등식과 그 실험 때문에 역설로 남게 된다.

 

참고 : 물론 위의 예가 완전히 옳은 예는 아니다. 정말로 연필조각이 한 쪽이 +5가 되었다고 다른 쪽이 -5가 되는가? B조각에서 운동량을 측정하면 B조각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것 아닌가? 등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질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초래된 국소성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 질문은 중요한 것은 A에서 둘 다 측정할 수 있다, 라는 것이기에 비껴나갈 수 있다. 또한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숨은 변수를 제안한다. 하지만 옳은 비유라고는 하기 어렵다. 실제에서는 파이온 입자가 전자와 양전자로 붕괴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그리고 위치와 운동량에서 확장해서 위치와 각운동량 등으로 확인해본다. 하지만 어느 쪽이는 결론적으로는 이 말이다.

 

네 번째로 이야기할 것은 국소성이다. 국소성은 이런 것이다. 태양 주위를 돌고있는 우리 행성계를 생각해보자. 모두 공전 궤도를 따라서 돌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태양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공전 궤도를 따라서 돌고 있는 수금지화목토천해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갑자기 원심력으로 튕겨져 나가버릴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실제로도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수성부터 궤도를 이탈하게 될 것이다. 중력이 미치는 속도는 빛의 속도와 동일하니(초끈이론이 제안하고 있는 중력자의 성질 중 하나가 질량이 0이다.)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할때쯤 걸린 시간이 지나면 이제 우리 행성도 궤도를 벗어나 우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이다. 어떤 것도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릴 수는 없다. 어떤 것도 빛의 속도 이상 가는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앞서 태양이 사라졌다면 태양이 사라졌다는 정보는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정보를 전달한다는 말이 단순히 인터넷에서 패킷 몇 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개념을 넓게 보면 우리 인체도 정보의 덩어리이다.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 자체도 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플라스틱과 쇠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당신이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화나 만화 등에서 나오는 양자 전송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말하면,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계에 무슨 작용이 미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이 국소성의 원리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는 물리적 작용이 멀리 떨어진 두 계에 동시에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면 앞서 연필의 한 쪽이 +로 나온다면 다른 쪽은 당연히 -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다른 쪽도 +로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다. 실제로는 파이온 입자의 붕괴를 상상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국소성의 원리는 정확한 것인가? 그렇다. 정확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정확한 만큼 정확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가장 최근의 실험에서도 그 완벽함을 자랑했다. 매우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고도를 바꾸었는데 실제로 시간이 달라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서 EPR역설과 위의 국소성을 종합해 만들어진 것이 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다. 앞서 말했듯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론에서 유추된 국소성의 원리를 가지고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를 기억하는가? 그 스스로가 최대의 실수라고 불렀던, 하지만 결국에는 옳은 예측처럼 여겨지고 있는. 바로 그런 상수처럼 변수를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숨은 변수이다. 이 변수를 넣으면 완전하게 양자역학적인 문제들이 없어질 거라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숨은 변수는 우주 상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아래의 벨 때문이다.

 

여기서 벨이 등장한다. 물리학자 벨은 고민했다. 과연 EPR과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 중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기존의 양자역학 체계는 불완전하고 현실을 기술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생각 끝에 나온 것이 벨의 부등식, 이다. 만약에 EPR 역설이 맞다면 물리적인 실재들, 그러니까 앞서 말한 연필은 절대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다른 연필로 정보가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연필들 사이에서는 분명 연관성에 있어서 한계가 지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 그리고 내가 거리에서 차를 모는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세 가지 사건에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은 내가 내가 오디션을 보는 사건과 내가 차를 모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에서 내가 노래하는 사건과 내가 차를 모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의 차집합보다는 항상 크게 된다. 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사건만큼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자면 상식적이고 논리의 문제이다. 불완전한 이론의 보완 및 현실의 기술을 위하여 숨은 변수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숨은 변수 또한 이 상식적인 부분의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걸 일반화하여 만든 부등식이 벨의 부등식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어보이는 사건들 간에 인과가 생길 수 있다, 혹은 동시에 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존의 양자역학이 옳았다. 벨 부등식은 지금까지 실험 중 한 번도 숨은 변수 이론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벨 부등식이 성립하는 상식의 세계는 양자역학의 예측 결과와는 여지없이 빗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벨 부등식의 실험 결과 나타난 현상을 사실 그냥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뭐? 정말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겹쳐있다고? 그럼 실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여러 상태가 지금 겹쳐지 있는 건가? 물론 이런 것은 비약이다. 그럼에도 미시세계에서는 우리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벨 부등식의 실험 결과 숨은 변수들을 폐기할 수 있었다지만, 엄밀히 말해서 벨 부등식이 폐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국소성의 원리였다. 양자역학에서는 실재로 얽힘이라는, 앞서 이야기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데이비드 봄의 이론이 생명력을 얻는다. 그가 주창한 것은 비국소적 숨은 변수이론이다.

 

물론 데이비드 봄이 자신의 이론을 편 것은 존 벨의 부등식이 나오기 전의 일이다. 데이비드 봄은 사실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한참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에서 적색으로 몰려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당하고 결국 풀려나와서 양자론을 세우게 되는데, 그의 양자론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은 전체성이다.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매우 영적인, 심하게 말하면 무슨 철학이나 종교의 사상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데이비드 봄은 신지학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대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자론은 수학적으로 매우 잘 뒷받침이 되어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 것은 전자기학을 정립시킨 제임스 맥스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 제임스 맥스웰은 당시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어떤 스칼라장을 예측했으나 정리되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맥스웰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드 브로이의 논의 또한 봄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제 그의 주장을 따라 몇 가지 개념을 이야기하겠다.

 

1. 파동함수는 실재하는 장을 나타내며, 이 장 말고도 입자가 있다.

 

2. 그 입자는 고전 포텐셜 뿐만 아니라 양자 포텐셜의 영향을 받는다

 

3. 앞서 말한 실재하는 장, 은 요동치며 존재한다.

 

이 세 가지 개념에 따라서 장의 요동(3)은 양자 포텐셜(2)에 따라서 입자(1)에 전달이 된다. 그런데 이 봄의 이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기존 양자역학의 예측과 수학적으로 동일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예측에 이르기까지의 논리 구조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다름 때문에 비판에 직면한다. 쉽게 말해서 숨은 변수를 가정한 봄의 이론과 숨은 변수가 필요없는 기존 양자역학이 있는데 이들 중 어떤 것을 따르더라도 예측은 같다면 굳이 복잡하게 숨은 변수를 넣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기에 파인만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임의로 대사의 순서를 바꾸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양자역학이 제대로 작동해.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어? 하지만 그건 내 것이 아냐. 난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 난 해결할 문젯거리가 있는 게 좋아."

 

마지막으로 촘스키의 이야기이다. 사실 촘스키는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과학에 대해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이런 말을 했었다. 거의 확실하게 옳은 과학적 이론이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된 우리 뇌구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이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현대 미술을 보자. 요즘 미술은 밑에 설명이 없으면 사실 이게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촘스키 자신은 이런 말을 한다. 19세기 후반에 돈많고 시간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정통할 수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성취 중 대부분은 일반인들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말이다. 19세기 미술은 지금의 미술과는 매우 달랐다. 적어도 보면 무슨 그림인지는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찬가지의 일이 지금 물리학에서 일어나고 있다. 양자역학의 신비함은 사실 어쩌면 거시세계에 익숙한 우리들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쉽사리 풀리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촘스키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의 정신으로 과학을 세울 수 없는 듯이 보이고 지금까지 과학을 세우지 못했던 거대한 영역들이 있다' 라고 운을 뗀 뒤 '반대로 우리가 진정한 과학적 발전의 능력을 발휘했던 영역이 있다' 고. 바로 그 영역은 물리학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촘스키의 말을 따라가본다면 '아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 정신의 본성에 관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 이라고 여겨진다. 물리학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우리 유전적 뇌의 구조때문에 양자역학에 고개를 갸웃거릴지라도 결국에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발전을 이루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요약 정리

 

글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여기는 분들은 이 요약 정리만 읽어도 충분하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내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에 이렇게 간단하게 얽힘의 시대, 와 관련된 내용들만 이야기해두겠다.

 

먼저 얽힘의 시대, 첫 부분을 읽고 나면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EPR역설이 옳고 기존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와 같은. 하지만 이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EPR역설에서 말하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이 정확하게 말하면 불완전성이 아니었다, 라는 말이 되리라.)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봄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책을 서술하고 있지만 실험 결과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양자 역학의 발전 순서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코펜하겐 학파의 기존의 해석, 양자역학의 세계는 정말 불가사의한 세계다. -> 그 다음 EPR 역설, 양자역학의 세계를 설명하는 기존의 해석은 불완전하다. -> 그렇다면 EPR 역설과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 중 어느쪽이 맞는지 확인해보자, 존 벨의 부등식. -> 벨의 부등식을 실험해보니 코펜하겐 학파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까지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순서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EPR역설은 그렇다면 폐기시켜야 하는가? 옳지 않으니?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EPR역설의 국소성 부분은 폐기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재론 부분은 폐기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숨은 변수도 실재를 기술하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면 완전히 배제하기도 힘들다. 관측될 당시에 바로 소립자가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비국소성 실재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EPR역설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은 현재의 해석으로는 전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이 그대로 남게 된다, 정도로 정리가 된다.

 

또 하나, 읽다보면 숨은 변수이론과 EPR 역설을 동일시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숨은 변수 이론은 EPR역설과는 다르며, EPR역설을 통해서 제안한 가설이다. 양자역학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숨은 변수를 넣어서 완전하게 만들자, 라고 하는 가설말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른다. EPR의 해석을 받아들여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생각하거나, 혹은 비국소성은 받아들인채 비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생각하거나.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제창한 전자의 경우에는 아인슈타인과 드 브로이(얽힘의 시대, 에서 소개하기로는)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봄은 비국소성 숨은 변수 이론을 제창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국소적으로 쪼개져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 강한 편이다. 그의 이론은 기존의 해석들에 비하여 더 보탤 필요가 없지만, 이런 저런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정도로 정리를 해두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하던 일이 하던 일이다보니 정신과에 내원한 사람들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학생 시절에 파견 및 실습을 가서 접하기도 했고, 싸이코드라마Psychodrama를 보기 위해 국립정신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한 번은 개방 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았고, 다른 한 번은 폐쇄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았으며, 지역 병원에도 나가서 살펴본 적이 있으니, 깊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범위에 있어서는 정신과로 내원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조금은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모두 합쳐서 3주도 안되는 짧은 관찰이었기에 그 한계도 분명 있겠지만, 대충 경향을 살펴보자면 지역 병원에 내원하던 사람들은 주로 우울증이 많았고, 입원을 하던 사람들은 조현병, 그러니까 정신분열병으로 입원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우울증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역학군이긴 하다. 보통 주요 우울증으로 입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살에 대한 생각을 몇 번이고 하거나, 혹은 자살을 실제로 실행해본 사람들이 입원하는 경향이 많은데, 물론 누구나 살아가다가 너무 우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반농담삼아 '죽어버려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걸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반대로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자살을 시도했거나 자살 사고를 진심으로 강박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반면에 정신분열병이 입원한 사람들 중에 많다, 라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흔히 '정신병' 이라고 이름 붙일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증상들, 갑자기 웃거나 미친 듯이 소리지르거나, 혹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휘두르는 (꼭 술에 심하게 취했을때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들이 주로 정신분열에 가까운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은 사실 찾아보기 드물다. 집 앞 슈퍼에 가는데 누가 칼을 들고 나를 찌를까 걱정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지 않는가. 그렇게 사회에서 별로 빈도가 높아보이지 않는데도 병원에서는 의외로 정신분열병 (이 책에서 '광기' 로 표현되는) 을 가지고 찾아오고 입원하는 사람들이 잦다.

 

물론 증세가 심하기 때문에 입원을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병원을 기준으로 사회에서의 빈도를 정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조용하게 정신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책, 광기에서는 '조용하게 미친' 이라고 표현한다.) 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말이다. 그렇게 조용하게 정신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 무엇인가에, 편의상 표현하자면 '벽' 에 부딪혀 정신병이 '뻥' 하고 터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양성증상을 보이게 되고 (위에서 서술한 타인에게 이유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등) 결국 입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촉발된 정신병은 그 사람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정신분열병은 계속 진행하는 병이고 감히 말하지만 그 진행방향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는다. 그 진행을 잠깐 멈추고 정신병적인 증상을 내재화시키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정신분열병이 완치가 되냐는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수 밖에 없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아니 그건 현대의학의 한계다. 저런 병에는 더 깊은 내재적인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교정한다면 나을 수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아마 내재적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재적인 원인이 실제로 교정가능한 일인가, 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애초에 내재적인 원인이 없이 그저 신경전달물질과 단백질 그리고 유전자의 이상때문에 생긴 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재적인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 원인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사례 연구한 것을 보면 각 사람들마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맞춤식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과연 치료자는 환자에게 얼마나 잘 맞춰줄 수 있는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맞춰준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처음 환자를 겨우 치료했다고 하자. 그 환자 한 명을 치료하고 난 뒤에는 (처음 환자에게 익숙해진 치료방식으로) 다른 환자를 더 치료할 수 있겠는가? 의학이 이런 문제와 반론에 대처하는 방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료를 검증하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비슷한 병이라면 유사성의 법칙에 따라 기전을 예측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효율적이고 긍정적인 치료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리고 실제로 내재적인 원인이 규명되었을때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일 뿐이리라.

 

이 책 광기, 의 첫머리는 책의 저자가 자신이 처음 상담소에 들어갔을때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며 시작한다. 저자는 처음 상담실에서 본 정신병 환자들이 대화나 일상생활이 너무나 '정상적이기에'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치료사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는 이야기들을 해준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부분을 발견해내었다는 언급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 그 인상을 책의 끝까지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광기의(정신병의) 긍정적인 면을 재발굴하자, 라고 말이다. 사실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의 경험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진료실에 앉아서 예진을 할 때의 일인데, 너무나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들어왔었다. 보통 정신병에 이환된 사람들은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나 물질 중독이 있는 사람들은 더 심한 면모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그런 환자들만 상대하고 교수가 있는 방으로 안내한 나는 심지어 나보다 더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들어오자 솔직히 놀랐다. 혹시 건강검진 받으러 왔는데 착각한건가? (정신과라는 이름은 정신건강의학과로 이름이 개명된지 오래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는 나는 그 사람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증상을 들었다.

 

어떤 점이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세계' 였다. 정말 '세계' 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정되고 조직화된 생각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 세계에서 자신은 주인이고 모든 것의 주재자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자신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세계이다. 자신의 세계가 현실에 부딪혀 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의 충고는 당신의 세계를 약간 변화시킬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 말하는 그런 광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외부세계의 말은 그들이 만들어낸 장벽에 퉁, 하고 부딪혀 다시 메아리처럼 되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분명 그들은 '정상적' 이지 않다. 요즘은 정상적이다, 라는 말이 도리에 획일적이다, 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 획일적이다, 라는 말과 정상적이다, 라는 말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정상적이란 말이 단순히 사회적인 규범을 존중한다, 라는 정도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재정의하면, 정상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 (덮어놓고 난 저 사람이 싫다, 그러니 저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싫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은 판단이든 그른 판단이든 내린 뒤 그 의견을 개진하고 다시 수정하는, 그런 면모를 정상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윤리학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사람들 사이의 선을 사랑하고 신성함을 경배하고 어디에 치우치지 않게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닫혀 있는 세계의 주민은 그럴 수 없다.

 

책에서는 정신분열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이야기를 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사람들은 예민하게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과 참을 구분해내고 그것을 지적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저자가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도된 경향이 크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치료자는 그 사람이 실제로 참 거짓을 구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덮어놓고 나에게 해를 끼칠까봐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치료자의 이야기를 그냥 거짓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속마음과 다르게 말했는데 그 속마음을 그대로 집어내는 경우가 인상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조용한 광기든 폭력적인 광기든, 어느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공통적으로는 자신의 '세계'에 상대방의 침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이런 사례들을 가지고 정신분열병, 그러니까 '광기' 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재발견을 하자, 와 같은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포용하자, 라는 말은 분명 옳겠지만, 다양성이 다양성이 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위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적어도 이런 닫힌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서는 적용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현 상황에서는 광기가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렇기에 설령 지나친 양성증상이 아닌, 무반응 등의 음성증상만 보이는 정신분열병 환자라도 정신분석을 시도한다거나 하는 일은 사실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약물만 던져주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약물치료가 비인간적처럼 보일지라도 약물치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치료한 사례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들은 치료라기보다는 '안정화' 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안정화시켰는가? 이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광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기괴한 망상이라도, 그 망상을 통해서 자신의 증상을 다스린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말도 안되고 기괴하게 보이는 망상일지라도 사실은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한 그런 기제라고 말이다. 옳게 들리는 말이고 옳은 말이지만, 이 말을 치료관계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이렇게 된다. '정신분열병 환자는 치료자까지 자신의 세계에 넣어서 광기를 조직화해버렸다' 라고 말이다. 결국 쉽게 이야기하자면 자꾸 밖에서 자신의 세계에 침범하려고 들자, 자신의 두텁고 단단한 세계를 아예 넓혀버렸다는 것이다. 저 귀찮은 치료자까지 나의 세계에 넣어버리자, 라고 말이다. 정신분석의 무가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유일한 치료 수단으로, 그리고 책에서 말하듯 이런 분석을 통해서 재발견을 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은 약간 잘못된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광기가 창조성의 원천이라면 그 광기를 왜 정신분석하면서 치료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정신분석이 끝나고 치료되어 잠잠해진 광기는 과연 다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이 책에서 뒷부분에 실린 사례중에서는 환자가 치료하기 전에는 스스로가 위대한 문학작품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문학작품을 써내려가다가 정신분석이 진행되고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는 전혀 그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모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일정 부분 받아들여서 판단해보면 분명 양성증상들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하게 살아가는 '광기어린' 사람들은 그 자신의 광기가 연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성증상과 음성증상을 떼어놓고 병을 다룰 수도 없는 법이고, 그런 양성증상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약물 치료가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약물치료가 그냥 획일화된 사람들을 양산한다, 라는 비난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갑자기 의자를 들고 던지거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보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속으로 자신이 자신과 분리되어 자신의 생각으로 너무나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결국 우리는 이런 막연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약물치료와 면담을 함께 하면서 최대한 환자를 배려하고 치료하도록 하자, 라고 말이다. 아니, 우리가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가? 그것도 사실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피해를 안준다면 그냥 놓아두자. 도움을 원하고 괴로워하면 도움을 주자. 피해를 준다면 별 수 없이 교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니,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덧붙이겠다. 우리는, 그러니까 정상인이라고 분류되는 우리는 그들, 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자격은 모르겠지만 기준은 있다. 우리가 '그들' 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 뿐일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행동을 고착화시키고 반복한다. 물론 이렇게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로 정상인과 정신병에 이환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을 지적받을 때에는 귀납적으로 그저 내가 관찰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이 책의 저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와 나, 둘 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또 처음에서는 조용하게 광기가 숨어 있던 사람들이 어느 '벽'에 부딪혀서 증상이 나타난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경우 광기가 숨어 있던 사람들은 설령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병의 전구병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상인인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록 이런 의문들을 남겨두었지만 이 책의 저자와 내가 도달한 결론은 동일하다. 내가 앞서 제시한 마지막 질문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은 줄 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렇다' 왜? '정상인' 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다시 영향을 주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쫓아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결론은 분명 이 '광기'의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리라.

 

 

 

 

 

 

 

 

 

 

 

 

 

p. s.

 

 

 

광기는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2-08 14:05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인용구 보니, 저, 광기가 있군요. - 정열에 휩싸인 어리석음이 광기인가 보죠? (글은 아직 안 읽었어요)

가연 2013-02-13 23:4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렇게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을 보니 확실히 그러하네요. 정열에 휩싸인 어리석음이 광기, 확실히 수긍이 가는 말씀입니다.

낯선이 2014-04-10 10:30   좋아요 0 | URL
저기...리뷰 잘 읽어보았는데요...조금 이 내용들에 대해서 오해가 있으신듯 합니다. 치료된 것에 대해서는 맞고 안정화시키는 것은 '약물'의 역할입니다. '약물'이 궁극적인 치료책은 아니죠. 그리고 이 책을 읽기전에 기본 전제로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관점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것 없이 의학적 관점, 즉 생물학적 관점만 갖다대면 이 책은 말이 안되는 책이 됩니다. 그리고 진단체계에 대한 관점역시 그렇고요. 편집증이라는 증상에 대한 이해도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정신분열병 환자의 망상에 대해서 약을 안쓰고 치료관계에 끌어들이시는 상상력은 인정하지만...제 경험상 그거 됩니다.그리고 정신분석의 목적에 대해서 '치료'라는 'cure'의 개념을 적용시키시는 것도 같은데...이때는 cure라고 볼 수는 없고요. 그 광기가 '현실'을 살아가도록 방향을 전환시키는 겁니다. 이책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슈레버분석을 좀 읽어보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물론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말이 안되겠지만요.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말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이다. 인것 같은데요. ㅎㅎ 우연히 들렀다가 글 남겼습니다.

가연 2014-05-30 21:19   좋아요 0 | URL
아, 댓글 이제 봤습니다.. 답이 많이 늦었네요ㅠㅠ 제가 사실 거의 글을 안써서 답글을 겨우 달게 되었습니다.

이 리뷰를 쓸때는 솔직히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너무 부끄러운 글이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인 입장은 그대로입니다. 정신의학적 입장을 저로서는 항상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프로이트 전집도 읽었고 사례들에 대한 분석도 어느 정도 하고.. 라캉의 세미나도 있으니 다시 리뷰를 쓴다면 이렇게 리뷰를 쓰지는 않을 듯 합니다. 입장은 비슷하더라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여졌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사실 변명에 가깝고 그래서 이 글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합니다. 긴 글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머리를 굴리는 기분이 아하하...
 
고백
장 자크 루소 지음, 김붕구 옮김 / 박영률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Quos vult perdere Jupiter dementat.

쥬피터는 그가 파멸케 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의 이성을 빼앗았도다.

 

 

 

일찍이 전례가 없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나설 그런 모방자조차 없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펜을 든 장 자크 루소는 일필휘지의 기세로 2부로 나누어진 글을 쓴다. 일각에서는 그를 음해하기 위한 사람들의 무기로 사용되어지고, 일각에서는 그를 추종하게 만드는 이 글의 이름은 바로 '고백Les confessions이다. 이 고백이 쓰여질 당시의 루소는 매우 힘든 상태였다. 물론 그의 그 '힘든 상태'는 그 자신이 자초한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밖의 상황이 그를 그렇게 '자초하도록' 몰고 간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루소가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인 디드로나 그림은 어느 새 그의 뒤에서 짐승같은 사람, 이라고 비난을 내뱉고, 그가 사랑을 주었던 두드토 부인은 그를 꺼리게 되었으며, 든든한 후원자들은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거나 발을 끊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교계에서의 서투룸, 어수룩함, 재치없음은 하나같이 큰 문제로 부각되어 그의 발목을 잡고 귀부인들의 수근거림을 듣게 만들었고, 이윽고 그에게 '에르미타주', 그러니까 당분간 거처를 잡고 살 시골 전원집까지 제공했었던 데피네 부인과도 멀어지게 되자, 그는 그저 한숨만 내뱉게 된다. 자신의 옆에 머무르고 있는 두 가정부 - 테레즈와 그의 어머니 르 바쇠르 부인 - 들은 정신적, 사회적 면에서 각각 자신의 편이 아니었고(테레즈는 정신적으로 루소를 따라가지 못했고, 르 바쇠르 부인은 더 나아가 루소가 친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루소의 이야기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실 이 고백, 이라는 저작을 쓰게 된 것이 글로 내 상처받은 가슴을 치유하겠다, 라는 그런 거창한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이 고백, 의 토양은 이미 이전에 마련되어 있었다. 루소가 위에서 언급한 저런 어려움들이 슬슬 싹이 보이기 시작할 때, 루소에게 어느 출판인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당신의 삶을 글로 옮겨보지 않겠습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루소의 삶은 당시에서 볼 때 흥미로울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루소는 프랑스인이 아닌 제네바인이었고, 그 제네바에서 도망쳤으며, 나중에 가서는 그 도망친 제네바를 '나의 마음의 고향' 운운하며 다시 찬양하게 되었으며, 기사처럼 칼을 잘 다루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후리는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음악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결국에는 불굴의 의지로 사교계 한 가운데 뛰어들어, 왕의 연금마저 거부해버리는 대담함과 소심함을 동시에 보여주니 그야말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판인이 그런 이야기를 쓰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일종의 관음증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루소란 인물을 한 번 보니까, 그 인물됨이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대담한건지 소심한건지 알 수가 없어서, 어쩌면 살살 부추겨주면 내밀한 육체관계를 다룬 이야기들까지 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들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거기에 끼여서 한 몫잡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을까?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한 사람이 자신만의 진솔한 경험과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용감한 일이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동시대에 자기 뿐이라고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루소는 몽테뉴의 글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비판한다. '아니, 이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척하면서 그 실수를 예쁘게 꾸며서 친근감있게 내놓고 있잖아? 이게 무슨 고백이야?' 그런 일종의 사명감, 용기 등이 얽혀서 결국 이 고백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의 거창한 목적, 그러니까 글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겠다는, 은 다른 일로 성취되게 되는데, 그의 찢겨진 마음은 '루소 - 장자크를 심판하다' 라는 이명이 붙은 대화, 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씀으로 간신히 한 곳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루소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살펴보니, 자신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실수와 후회와 죄가 있었다. 실수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자신의 실수는 그야말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었기에 더욱 더 큰 실수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 집을 나온 일부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도제 역할을 조금만 더 버틸 수 있었다면, 대문호라는 허명은 얻을 수 없었겠지만 뒷날 그의 마음을 그렇게 괴롭혔던 우정과 사랑의 문제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집을 나와서 어느 부인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부인의 집에서 나갈 무렵에 훔친 빗도 문제가 되었다. 그걸 왜 훔쳤지? 사실은 그는 좋아하는 하녀가 있었다. 그래서 그 하녀에게 주려고 빗을 몰래 훔쳤는데, 결국 들켜버린 것이다. 서슬 퍼런 추궁에 그는 자신의 좋아하는 그 하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바로 저 애에요. 저 애가 이 빗을 훔쳐서 저한테 줬어요. 평생 그는 그 거짓말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다른 세도가의 집에 들어갔을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그 세도가가 시키는데로 공부를 꼬박꼬박 다 하고 했더라면 뒷날에는 고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다 못하고 음악에 흥미를 느껴 뛰쳐나가고 만다. 결국 방황을 하게 된 것이다.

 

커서는 어떤가? 바랑 부인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재산을 축내는 경우가 잦았고, 뒷날 그를 그렇게 도왔던 바랑 부인에게 적절한 원조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서로 맞물리지가 않아서 자신이 매달린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열정은 베토벤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였지만 결과물로 그가 내밀 수 있었던 것은 어딘가 수상한 악보 표기법 (숫자로 음계를 표시하는)과 마을의 점장이, 라는 희곡 뿐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느끼는 쾌락, 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개 육체관계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 쾌락에는 한 생명의 수태가 따른다. 쾌락에의 의무라는 말이 적절할런지는 모르지만, 육체 관계 뒤에는 특별한 피임을 하지 않았다면 출산이 뒤따르게 된다. 이는 테레즈와 루소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그들은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낳게 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루소의 손에서 자라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루소는 고백, 에서 뻔뻔스럽게 '자신과 같은 부모에게서 자라느니 차라리 고아원에서의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라고 변명하지만 그 앞서서는 '끔찍한 죄악' 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서술한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빛은 있었다. 가장 그에게 먼저 다가온 빛은 후에 '벵상에서의 계시' 라고 불리게 된다. 감옥에 갇힌 친구 디드로를 만나기 위해서 매일 같이 감옥과 자신의 거처를 왔다갔다가 하다가 어느날 쉬려고 앉은 나무 아래에서 들고다니던 잡지를 보고는 머리속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 잡지에 실린 문제는 학문과 예술이 과연 실제 인류를 진보시켰는가, 혹은 타락시켰는가, 였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는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문제임을 예감한다. 대부분의 다른 인물들이 학문과 예술이 인류의 진보에 영향을 미쳤다고 쓰는 것에 반하여 루소는 그에 반대 입장을 전개하고는 당당하게 수상하고 만다. 그것이 그의 학운의 시작이었다.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그는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쓰기도 했고, 당시의 여러 지식인들과 편지로, 지면으로 토론을 진행하며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다. 볼테르는 그의 끈질긴 맞수였다. 볼테르의 눈에는 루소가 눈의 가시처럼 보였고, 루소 또한 볼테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편지 뒤 적어도 루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볼테르의 예봉을 꺾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루소는 자신 스스로에 뿌듯함을 느꼈다. 아, 자신의 왕국 속에서 안락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저 볼테르에게 한 방을 먹여주는 이 기쁨이란! 그런 일은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으리라.

 

신 엘로이즈, 의 성공은 당시로서는 놀랄정도였다. 그의 거처로 수많은 인물들의 각양각색의 편지들이 날아왔다. 신분의 고하는 상관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 엘로이즈, 를 보고 감탄을 하고 그와 친교를 맺고 싶어했다. 당시 인물들과는 거리를 두던 루소에게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성공이었다. 단순히 글만으로 이런 성과를 올린 것이니 말이다. 에밀, 또한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물론 그 에밀, 대로의 훈육 방식이 잘 들어맞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그 훈육 방식이 애를 한 번도 길러본 적 없는, 그러니까 고아원에다가 자신이 낳은 자녀를 모두 맡겨 버린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는 해도, 어떻게 하면 품위있게 기를 수 있을까, 와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의 최고의 선택은 에밀, 이었다. 그리고 앞서 마을의 점장이,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마을의 점장이, 는 상당한  인기를 가졌다. 국왕앞에서 시연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표절시비도 많이 겪고 (음악을 제대로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수 있겠어!) 제대로 된 저작권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의 질투심의 시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전역을 강타하는 그 마을의 점장이, 는 루소의 작품이었다.

 

이런 죄과와 빛을 감싸안으며, 그가 빠진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기형적인 사랑이었다. 친구의 정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랑의 주인공은 두드토 부인이었다. 사랑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결국 'Quos vult perdere Jupiter dementat' 그러니까 신이 마치 자신의 이성을 앗아간 것 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파국으로의 한 걸음이었다. 물론 이 사랑에 대한 고백, 에서의 언급은 사실 그리 객관적이지는 못하다. 루소는 자신의 모든 고백에서 '솔직함' 을 가지고 최대한 '객관적' 으로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이 스캔들은 그에게 빛을 가져다 주지만 동시에 그에게 어둠도 주게 된다. 그에게 자신의 정부를 소개시켜준 친구와의 사이는 아주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루소가 그런 두드토 부인에의 열정을 품고 있는 한 그들 세명, 그러니까 루소, 그의 친구(생 랑베르), 두드토 부인, 의 관계는 기형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자신이 꿈꿔왔던 환상 속의 여자와 그녀를 동일시했기에 쉽게 그 열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신 엘로이즈, 는 좋게 말하자면 루소 자신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가 망상 속에서 살아가고, 망상 속의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루소 자신도 신 엘로이즈, 의 출판 뒤에 언급한다. '만약 두드토 부인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이 신 엘로이즈는 순전히 망상만으로 쓰인 것이다, 라는 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그렇기에 이 사랑은 그에게 빛을 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둠을 주었다. 결국 그와 그의 후원자였던 데피네 부인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음모(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였던 사람들은 그에게 말한다. 그런 생활방식이 뭐가 좋냐고, 왜 자꾸 시골에 틀어박혀서 사냐,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그리고 그런 사랑은 그만두는게 좋다고. 그런 말들을 전해듣고, 혹은 직접 들은 그는 이제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조리 하직을 고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더 깊은 은둔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신이 있다면, 쥬피터가 있다면, 그가 원하는 파멸은 결국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었음을 당시 세상사람들은 결국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물론 이 고백의 후속편으로 앞서 언급한 대화, 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등을 내놓지만 이 고백,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잘 드러내주는 글은 없으리라.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뒤의 대화, 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자신을 위한 글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대화, 는 좀 수준있게 자신을 알리려는, 그러니까 고백, 만 읽고 자신을 곡해하고 음해하는 인물들에 대항해서 쓴 글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자신을 위한 글이다.) 이 고백, 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이니 말이다. 고백이 끝났다고 해서 삶이 끝나지는 않는다. 이 루소가 생을 다하더라도 저 루소가 등장하고, 결국 몇 십만번이고 또다른 루소가 등장해서 니체의 말대로 영원회귀를 하며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실질적인 의미에서, 실제로도 루소는 고백, 을 내놓고 꽤 오래 살아간다. 영국에 방문까지 했었으니까. 하지만 루소의 영혼이 고백, 을 경계로 조금은 바뀌었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자신의 죄과와 영예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었으니까. 그 깨달음의 끝은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였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야박한 신, 쥬피터에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신이시여, 내 가슴을 흔들고 내 삶을 흔들어 현실에 매몰되게 만들지라도

 

이윽고 그 죽음만은 평온하게 하소서.

 

고백, 이 끝난 다음에는 이제 나의 이야기이다. 언젠가 나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 못지않게 실수를 저질렀고, 죄를 지으며 후회로 생을 점철하며 살아가고, 앞으로 얼마나 더 죄를 지을지, 얼마나 더 많은 후회를 할 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지만, 나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이렇게 삶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고, 당신도 당신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 또한 당연하리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4-02-01 00:51   좋아요 0 | URL
루소가 자기 아이들을 다 고아원에 보내다니... 그런데 에밀을 썼군요 이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교육과 관계있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솔직하게 쓰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루소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있었군요 저는 남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쉽고 잘못한 일은 많지만 다 생각나지도 않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군요

저도 '내가 그렇지' 합니다^^


희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요즘 흔히 말하는 SNS는 하나도 하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런 SNS에는 일종의 유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서 SNS 유형의 서비스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어느 SNS도 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는 듯하다. 이전에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유행이었고, 그 이전에는 세이클럽이나 버디버디가 유행이었다고 여겨지는데, 나는 이 SNS의 세계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싸이월드를 제외하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을 지켜봤을 뿐이니 정말 좁은 부분을 견식 해봤구나,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SNS의 범위를 좀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인터넷 상으로 사교를 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카페나 블로그도 어쩌면 SNS에 포함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넓힌다면 나 또한 이 서재를 포함해서, 블로그 정도 (비록 이제는 거의 관리하지는 않지만) 로 SNS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사람들이 주로 SNS라는 말을 할 때 떠올리는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이다. 그렇기에 SNS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려면 이 둘을 중심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이고, 이 글에서도 범위를 그 둘로 한정한다. 물론 앞서 밝혔다시피 트위터 계정도 없고, 페이스북 계정은 가지고 있지만 조금도 업데이트 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둘에 대해서 자세히 논할 여력도 없고, 경험도 일천하다. 그러나 몇 가지 듣고, 본 내용으로 판단하자면, 이들 서비스들은 일단 블로그에 비하면 좀 더 즉각적이고, 무엇보다도 좀 더 짧은 내용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알라딘 서재나 기타 블로그에 글을 올려본 사람들은 아마 어느 정도는 느낄 것이다. 블로그 창을 열어 큰 공백을 마주하다보면, 왠지 모르게 그 공백을 어느 정도는 채워야 될 것 같은 기분을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짧게 글을 쓰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대개의 경우 블로그의 글은 적어도 트위터의 140자를 훨씬 상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트위터는 본디부터 짧은 글을 위해서 생긴 서비스이니 그 '트윗' 들을 살펴보면 모두 한 트윗, 길어도 서너 트윗 내로 문장이나 내용이 완결되는 경우가 많다. 내용 또한 트위터의 내용들이 더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에서 이 SNS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망일 것이다. A에서 시작하여 B로 향하고, C로도 뻗어나가는 그런 연결망 말이다. 그 망은 너무나 복잡해서, 순차적이지 않고, C로 향했던 것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A에게 되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B자신이 자신의 트윗을 돌려받기도 한다. 이 SNS 세계에서 우리는 (적어도 같은 서비스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결의 놀라운 면모는 연결된 사람들끼리의 유대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아니다. 이 연결은 사람들의 양가감정,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는, 또한 자신을 최대한 진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하는 그 이중성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의 거친 글은 감정을 여과하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처럼 보여주는 작용을 한다. 그 글을 다른 트위터 이용자가 보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트위터와 같은 도구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경우, 마치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비언어적인 표현이 중요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 내용만큼이나 그 글의 어조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대화와 트위터가 다른 점은 우리는 대화와 달리 트위터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과장되거나, 좀 더 축소하는 등으로 변경시킬 여지가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에 이중성의 충족이 작용한다. 비언어적인 표현(트위터 어구의 어조나 분위기)은 자신의 진솔함을, 언어적인 표현(글 내용)은 자신이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을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SNS는 인터넷이라는 환경 아래에서 이런 방식으로 발달해왔고, 우리는 이런 SNS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는 없을까?

 

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은 사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이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대두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 라고 규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향이 바뀌고 흔들리는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개념을 받아들여 논의를 지속시켜보면, 어떤 사람이 어느 행성에 서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지구에 이렇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다고 가정할 때, 갑자기 지구의 지반이 목성이나, 토성처럼 가스 등으로 바뀌어버리거나 혹은 액체 처럼 유동성을 가진 물질로 바뀌어버린다면, 우리의 걸음은 그 전까지 걷던 걸음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 물질에 먹혀버리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하여 헤엄도 칠 것이다.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자. 우리가 단독자로서 행성을 딛는다면, 그러니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행성을 딛고 있지 않다면 다른 논의는 무의미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유동하는 물질로 덮힌 행성을 나 혼자만 딛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똑같이 유동하는 물질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그렇게 서로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손이 맞닿기도 할 것이고, 어느 순간 눈짓이 오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협동일 것이다. 이 무른 지각 위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서기 위해서 말이다. 협동이라고 규정짓고 보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저 흔들리는 유체 위의 사람들을 우리 현대 사회의 모형이라고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 유체 위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발을 딛기 위해서 겨우 상대적으로 좀 단단해 보이는 지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등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이는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그 이전에 협동이 먼저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먼저 손이라도 맞잡아야 상대방과 함께 올라가거나, 혹은 밟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협동이 저런 상황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초기 조건이 조금 변함으로써 거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른다던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적용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비선형적으로 복잡한 양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복잡한 양식을 영위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초기에 가졌던 관계, 협동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다시 그 협동을 부활시키기에 이르는데, 그 양상은 이제 일종의 SNS 형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렇게 단정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어떤 점에서 현대의 SNS가 초기의 협동 관계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가? 계승했다면 어떻게 변했는가? 그리고 왜 SNS 형식이어야 하는가? 이는 이런 예를 들면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 여중생의 납치 사건과 같은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럴 때에는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어떻게든 범인을 찾고 여중생을 찾으려는 노력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초기의 협동관계가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초기의 협동관계보다 그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140자로 리트윗만 하면 우리는 정의를 구현했다는 마음과 동시에 사회에 무언가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초기에는 협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협동 방식의 간략화로 인하여 누구나 간단하게 협동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초기에서 변한 방식이며 동시에 SNS 형식이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저런 의문에 답을 했다고 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지금 와서 이런 형식을 빌려 협동이 재발견되었는가? 이는 현재의 SNS의 태생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현재의 협동은 유동하는 근대의 초기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초기에는 그 태생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원을 기업과 기술에 두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운영하는 기업,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서버들, 그리고 그런 서비스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저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자면 기업과 기술의 이권과 협약이 협동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저런 서비스들의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까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사회를 바꾸려는 기획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조정환이 지은 인지자본주의, 에서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점거한 상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기업이 지원하는 이 서비스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기계-사람의 형식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공장을 점거했다고 하더라도 가내 수공업이 아닌 이상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잃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이런 트위터나 페이스북 세계가 있는 온라인 세계는 '사람들 간의 접속이 지속 되는 시간을 축소시킴으로써 접속이 무한하게 증대되고' 동시에 '인간들 간의 유대관계를 약화시킨다' 라고 말이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어, 나는 트위터 팔로워가 몇 백명인데, 나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의아해할 수 있지만 그들과 나의 관계는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다른 사람보다는 나 자신의 양가감정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이런 양가감정의 충족은 사람-사람의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사람이 마주보고 있을 때에는 초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좀 관계가 진척되면 새로운 의심이 생긴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라고.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이나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람-기계-사람의 관계에서는 기존에 자신의 감정과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상대방과 맺어지기는 쉬워졌지만 깊이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부연하면 더욱더 진솔함은 많아졌지만, 동시에 더욱더 숨김도 많아졌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대관계의 약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고독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기에 사실 이런 결론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반대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독의 속성을 잘 분석해보면 그렇게까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SNS의 활용 때문에 고독을 누릴 시간이 없어진 것 처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피상적인 고독이다. 고독을 누리고 싶다면 사실 컴퓨터를 안하면 되고, SNS를 안하면 된다. 이 책에서 진정으로 고독을 언급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 보다는 어떻게 사람이 사람-기계-사람의 구성'물'이 되어 기계에 동화되어 가는가, 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가 될 수도 없다. 거기에서 사람은 진정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진정한 고독은, 사람-사람 관계 사이의 유대관계를 갈구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변모한다. 초기의 협동관계로 정말 먼 길을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초기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동안 쌓인 경험이 더욱 사람-사람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렇게 진정한 고독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면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잃은 유대관계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대답하도록 하겠다. 일전에 대학로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혜화역에 내렸을 때 왠 외국인이 돈을 조금만 빌려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었고 빨리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약속 때문에 혜화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홀끔홀끔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외국인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자신이 지갑을 잃어버렸고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였다. 사실 나도 고개를 저으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대사관에는 연락을 했나, 경찰에는 말을 했나 등등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를 돌리고 떠나간다면 이 사람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그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하고 조금 돈을 주었다. 끝까지 갚겠다고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그였지만 그냥 괜찮다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때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사실 나로서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당시에 주어진 정보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를 믿는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몰라도,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는 그는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 도움도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인 고독을 잃어버린,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말이 의심스럽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한 알 수 없다. 근거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가진 근거로는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를 믿는 것뿐이다. 계속 그를 의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진솔함보다 그의 숨김에 더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유대를 갈구하는 그런 진정한 고독에 빠질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 발 앞서 나가서 먼저 그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는 거짓말로 신음할 것이고, 때로는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신음하고 손해를 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2-10-05 08:46   좋아요 0 | URL
가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

가연 2012-10-05 2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랜만이네요ㅎㅎ

2012-10-06 09:11   좋아요 0 | URL
흠, 믿어야겠군요. (믿어야 할 이유를 이보다 더 잘 쓰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가연 2012-10-06 18:34   좋아요 0 | URL
ㅎㅎ 마지막 말은 ㅎㅎ 유대관계가 회복될 거라고 믿는 수 밖에 없다/상대방을 믿는 방법으로 유대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이렇게 좀.. 이중적으로 써놓긴 했는데, 본문에도 언급했다시피 안믿을 이유가 '없으면' 믿는 수 밖에요, 풋.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2-11-17 18:20   좋아요 0 | URL
전, 페북,트윗은 안 합니다.
한때 싸이에 한껏 열올리면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소중함에 확실히 눈떴거든요.
그때도 그렇고 끊임없는 의심에 빠질 때마다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믿는 만큼 손해보는 기분도 들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안 찍힐 만큼 조금씩 믿다보면
진실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생각으로 균형감각을 회복했습니다.

가연 2012-12-29 01:4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한때 싸이를.. 답이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