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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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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의 제목으로 붙어있는 낙천주의자 클럽 또한 정말 낙천주의자들이 모인 것은 아니다. 면면을 살펴보면 참 가관이다. 의사였던 이고르, 조종사 레오니트, 한때 나치와 맞서 싸웠던 독일인 베르네르, 배우 티보르, 그의 매니저 임레, 파벨, 토마시, 블라디미르. 그리고 가끔 클럽에 들르는, 그래서 외부인에게는 클럽인처럼 보이지만 정작 배척받기도 하는 샤사, 클럽인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마오. 그리고 아마도 정신적 지주일 케셀, 샤르트르.

 

이들의 공통점은 뿌리가 뽑혔다는 것이다. 마오나 케셀, 샤르트르는 언급되는 부분이 적으니 판단내리기 어려우나, 프랑스의 이 비스트로에서 클럽을 유지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망명자에 지나지 않는다. 망명자는 망명자끼리만 이야기가 통하는 법인가보다. 싸우고, 자기들끼리의 언어로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다툼을 벌이더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맞이한다.

 

 이 책의 주인공도 일종의 망명자인데, 맹랑한 녀석이다. 주인공 미셸은 책을 좋아하고, 아주 좋아하며,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으면서, 아마도 독서의 신의 가호가 있었을 것 같지만, 단 한 번 사고를 겪은 - 그것도 그 사고로 여자친구를 만든 - 녀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소설의 조숙한 주인공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분위기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지식을 펼쳐보이는 일도 거의 없다. 가끔은 친한 누나, 세실의 목욕하는 사진, 을 찍고 싶어하는 그런 사춘기 소년이리라.

 

이런 미셸이 어째서 저런 클럽에 들어갔냐면, 아마도 맹랑함 때문일 것이다. 이미 출생부터 비범하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만나 쁘띠 부르주아가 된 가정에서 태어났고, 수학은 젬병이며 언어는 곧잘한다.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본인이 남들과 달라, 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굽히려 들지는 않는다. 어른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래도 대등하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맹랑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리라.

 

이런 맹랑함은 클럽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클럽의 일원으로 넘어가는 순간, 테이블 축구에서 체스로 갈아타는 순간, 술집의 앞 테이블에서 커튼이 처진 영역으로 한 발 내딛는 때, 학교 친구인 니콜라를 버리고 어른 친구들인 이고르, 레오니트 등을 만날때, 그는 자발적인 망명자가 된다.

 

망명자들끼리는 방금도 말했지만, 사실은 자기들 밖에 없는 거다. 자신들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에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고 영영 다시 안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처음부터 누구도 붙잡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올 곳은 여기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느슨하게 이어간다. 정작 연이 빨리 끊기는 쪽은 망명자의 외부, 주인공의 학교와 가정이다. 학교에서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니콜라는 자신에게 말도 안하고 음악 시디를 가진 채 사라져버린다. 가정에서 미셸의 형인 프랑크는 여자친구를 놓아두고도 다른 여자와 바람피워서 사라진다. 주인공의 부모는 이혼한다. 글쎄, 소설적으로 묘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그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대가를 치뤘기 때문에 주인공이 결국 망명자가 된 건지, 아니면 '자발적' 망명자가 되는 대가인가?

 

미셸과 세실의 관계, 그리고 합쳐서 카미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실은 프랑크, 그러니깐 미셸 형의 여자친구다. 처음 미셸이 세실을 만났을때, 미셸은 세실에게 반쯤 반했지만, 세실이 프랑크와 찐하게 키스를 하자 그 마음을 반쯤 포기했다. 미셸이 세실의 옆을 맴도는 것은 어쩌면 형의 대신이라도 좋아, 그래도 그녀 옆에 있고 싶어 라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세실의 차례인데, 세실이 미셸을 대하는 것은 거의 반쯤 가족에 가깝다. 부담없는 남자사람친구, 그러니깐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높이가 다르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셸이 계속 열심히 '누나, 목욕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요' 라고 계속 졸랐다면, 세실은 다른 생각 없이 - 성적인 함의없이 - 어쩌면 여러 제한 조건을 붙여서 찍게 했을 것 같다. 미셸은 모르겠지만 세실은 미셸을 연애의 대상으로는 전혀 보고 있지않고 있으니깐. 프랑크의 존재가 그들을 그렇게 강제한다. 그러나 만약에 프랑크로 인하여 그들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파국을 맞이했을 것이다. 감정의 불균형이란 늘 그렇게 되는 거다.

 

카미유는 주인공이 세실과 헤어진 뒤 - 물론 사귄 것은 아니지만 - 책을 들고 읽으며 거리를 가다가 부딪힌 아가씨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불만인데 너무 늦게 나타나서 너무 빨리 미셸의 인생에서 퇴장하는 아가씨다. 처음에는 세실의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나타나려나 했는데, 왠걸 미셸은 그 짧은 단락에서 전형적인 한 눈에 반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좀 아쉬운 것은 이 책에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정말 많이 뒤섞여 있는데 이 부분이 두드러지게 그렇게 드러나 우울하다.

 

카미유는 점성술에 빠져있다. 미셸은 용케 점성술에 대하여 뭐라고 지적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보들의 왕'이 되지 않았지만 -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혈액형 심리학이라던가, 손금이라던가, 이런 것에 빠져있으면 굳이 그걸 반박하려고 하지 마라. 이해되는가? - 결국에는 그녀를 확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보냄으로써 바보들의 왕에 등극한다. 이 바보들의 왕, 이라는 말은 클럽 동료인 레오니트가 먼저 쓴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로 옆에 두고도,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는 이윽고 떠나보내고 만다. 그 당시에는 떠나보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얼마나 참담한 일을 했는지 깨닫고 비통해한다. 바보다. 아니, 바보들의 왕이다.

 

레오니트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밀렌이라고, 그녀와 운명적인 만남, 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을 겪고 그녀를 향해 날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비행기를 운행했던 전설적 소련의 영웅이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저 백수였을 뿐. 밀렌에게만 의존하게 되던 스스로를 비관하던 그는, 그 끔찍한 열등감과 비탄을 그녀에게 내뱉었고, 이윽고 바보들의 왕에 등극한다.

 

소설에서는 레오니트, 밀렌의 사랑이야기를 프랑크, 세실의 이야기와 병행하지만, 실제로 병치되어야 할 이야기는 미셸, 카미유이리라. 미셸 또한 레오니트 뺨칠 정도로 멋진 일로 여자친구를 만들어내었지만 레오니트 정도의 용기도 없었고, 없을만도 할 주변 상황때문에 사랑과 헤어지게 된다. 레오니트 이야기야 결국 해피앤딩이 되었다지만 미셸은 어떨까? 작가는 끝끝내 미셸의 상황은 숨겨버린다. 미셸은 어린아이였고, 나중에 크니깐 어릴 때 사랑이란 그저 추억에 지나지 않고 잊어버렸다고, 그렇게 해석해도 좋은걸까?

 

그리고 다시 프랑크와 세실이다. 미셸까지 엮인 이 복잡한 관계는, 미셸이 처음 프랑크와 세실이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랑크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겠다는 생각에 전선에 뛰어들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상관에 대한 불복종, 그리고 탈영, 그리고 다른 여자친구다. 세실은 기다리지만, 그리고 그 시간을 미셸과 떼우지만, 자신이 마음이 있는 사람은 프랑크이기 때문에 시간과 마음에 공백이 생긴다. 그 마음의 반만 미셸에게 향했다면 어쩌면 서로에게 더 좋았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차갑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끌리고,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편하게 생각하다니. 세실도 바보들의 왕이었나 보다.

 

소설의 다른 한 축은 사샤다. 앞서 이름만 잠깐 언급한 이 사샤는 클럽 회원들에게 배척받는 사람이다. 구성상 너무 뜬금없이 등장하고, 너무 뜬금없이 퇴장하지만, 그리고 너무 뜬금없이 모든 것을 밝혀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샤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다. 저 많은 클럽 회원들 중 미셸의 친구가 아닌, 도움을 주는 아버지같은 존재였으니깐. 사샤의 등장 타이밍이 주인공의 부모가 이혼하는 타이밍과 겹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쭉, 끝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끝나는 짤막한 이야기가 이 소설에 잔뜩 녹아있다. 샤르트르의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가 금방 사라지고, 망명자의 애환을 다루는 듯 하다가도 바로 주인공의 삶에 밑줄이 그여지고, 주인공이 여자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할 듯하면 다시 주변 가족의 이야기로 바뀐다. 한 권의 소설에 몇 권의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 결국, 이 책은 사실 잡탕이다. 그런데 잡탕이지만 두서없이 쓰여진 그래서 뭔가 불만족스러운 잡탕이 아니다.

 

그래서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뒤섞인 잡탕, 그러나 대작.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s. 중간에 세실과 주인공이 수학 문제를 푼다.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수학문제를 풀어본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일단 그 문제가 의도하는 정답은 30km/h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면 문제가 잘못되었다. 문제가 의도하는 정답을 이끌어내려면 현실적인 조건들을 모두 무시해야만 한다. 그러니 주인공이 세실의 말을 듣고 - 세실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상상해보자고 말한다 -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시도했을때 풀지 못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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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7 0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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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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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솔직히 이 책을 받기 전에는 혹시 홈즈에 관한 비사라던가 그런게 나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홈즈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었달까. 그래서 실망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연대기가 궁금한 것은 아니니깐.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에는 아서 코난 도일이 강령술에 한참 빠져있었다는 점도 한몫한다. 이 용감한 친구들, 이라는 책에도 나오다시피 아서 코난 도일은 강령술에 빠져있었던 사람이다. 마이클 페러데이가 debunker이라는 기계로 강령술을 파헤치기도 했지만, 그런 회의주의가 시대의 흐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아서 코난 도일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한 것도 잠시, 책을 읽다보니 도저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 이 책에는 주인공이 아서 코난 도일, 그리고 조지 에들지, 이렇게 두 명이 나오는데, 아마 하루키의 1Q84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익숙하겠지만, 두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가 서로 겹치는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이야기를 쭉 하다가, 다른 주인공으로 넘어가는. 그런데 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조지 에들지, 그러니깐 코난 도일의 삶이 아닌 다른 주인공의 삶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분들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라는 책을 떠올리셨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저 책을 떠올렸는데, 이 책에서 주인공과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에들지는 어릴때부터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누명에 대한 괴롭힘은, 조그만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불어나서 가족 전체를 괴롭히기에 이른다.

 

조지 에들지는 혼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은 (나중에 서로 마주쳤을때)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그 점이 에들지를 향한 '박해'의 주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에들지는 그 점에서 끝끝내 눈을 돌린다. 글쎄, 분명 작은 틀에서는 코난 도일의 분석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왜 에들지의 아버지가 아닌 에들지여야만 했을까? 그 아버지는 이미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깐?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겪고도 거기에 정착했으니깐?

 

아서 코난 도일이 조지 에들지를 위해서 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하여 백방으로 알아보지만, 결국 그가 조지 에들지를 구해낼 수 있던 (적어도 부분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옳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작위였다. 결국 이 소설은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나,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 그리고 인간은 권위에 마지못해 따른다.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스포주의.. 이지만 소설 초반부에 나오니 어쩔 수 없나) 총이 해결의 수단으로 쓰이지만, 물론 총으로 해결되지는 않았고, 에들지의 잃어버린 명예는 권위로 어떻게나마 수습이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영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진범이 잡히더라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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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6-23 01:04   좋아요 0 | URL
홈즈 이야기가 나올 것처럼 책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건 나오지 않는군요 이 책 이야기 나온 거 자세하게 본 건 아니네요 코난 도일 하면 홈즈가 생각나니 그걸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은 나중에 강령술에 빠지기도 했다죠 그 이야기 다른 데서 조금 봤는데... 탐정은 그런 것은 믿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 코난 도일은 탐정이 아니었군요

한번 잃어버린 명예는 바로잡기 어렵기도 하죠 권위가 아닌 다른 거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합니다 다른 것으로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겠습니다


희선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
제프 호킨스 &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지음, 이한음 옮김, 류중희 감수 / 멘토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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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제목을 공돌이가, 라고 하려다가 아무래도 제목에는 부적절할 것 같아서 바꿨다. 잠이 안오는 밤에는 결국 글을 끄적거리게 된다. 책을 읽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능동적인 일을 해야 나를 사로잡는 생각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운동을 하자니 달밤에 운동은 역시나 귀찮다. 결국 만만한 것은 글 찌끄래기를 끄적거리는 것인데, 외로울때는 역시 무엇인가 끄적거릴 수 밖에 없고, 아마 이런 점이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현대에 SNS가 발달한 원인이었겠지.

 

별 다섯개를 이 책에 줬는데 사실 나는 먼저 이 책에 대하여 비판부터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제목의 공대생이 책을 쓰면.. 운운하는 소리는 중의적 의미이다. 공학계열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있는 반면, 공학계열만 공부하였기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이 책의 저자는 세세한 부분에서 오류를 보이고 있다. 뇌의 작동방식을 병렬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 예로 이런 것을 제시한다. 한 사람이 백걸음에 할 수 있는 일을 백사람이 하게 되었다고 치자. 이 때 책의 저자는 백 사람이 하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백걸음을 걸어야 되기 때문에 이런 속도적 한계를 병렬로만은 해석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한 사람당 백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결과적으로 같은 양의 일을 백 사람이 하게 되었을 때는 백 사람 X 백 걸음에 비하여 한 사람 X 백 걸음 만큼 일의 양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간과한 예시이다.

 

좀 더 부연설명하자면, 한 사람이 백 걸음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이제 백 명이 있어서 그걸 백 걸음에 일을 동시에 하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일의 총량은 백 사람 X 백 명이고, 이걸 한 사람이 다 하려면 백 사람 X 백 명의 일을 다 해야 하니, 한 사람에 비하여 백 사람의 처리 속도가 더 빠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백 걸음, 이라는 것이 근원적인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에 병렬로 뇌의 작동방식을 해석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겠지만, 본인의 예를 든다고 하더라도 병렬이 직렬보다 빠른 것은 부정못한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현대 심리철학적 논제에 대하여 상당히 무지하다는 것을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데, 책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대략 밝힌다. "난 좀비라도 괜찮아요" 어느 세미나에서 어느 뇌과학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하는 이야기이다. 그 뇌과학자는 감각질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에 대하여 당신이 그런 내밀한 감각을 부정하지는 못하지 않느냐, 라고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그런 논의를 깔끔하게 무시해버린다. 그 말이 바로 위의 말이다.

 

심리철학에서 마음에 관한 논의 중, 메리의 방과 좀비 논변, 역전 감각질 논변에 기능주의에 일격을 가한 퍼트남의 다수실현논변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혹시 알고 싶은 사람은 구글링해보면 알 것이고 - 요즘 인터넷이 너무 발달해서 좋다 - 여기서 좀비 논변을 조금 끄적거리자면 1. 나는 내가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을 안다. 2.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럴까? 이다.

 

아마 저자가 심리철학적인 베이스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니 공학도가 책을 쓰면 이렇게 되는 법이다. 어디서 좀비를 듣기는 들었으니 이야기는 하는데, 의식에 대한 예로는 정말 오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좀비 논변은 먼저 내가 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라는 점에서 전제를 두며, 글쓴이처럼 난 의식이 없는 좀비야, 그래도 괜찮슴, 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 실험에서 의식이 사실상 기억에 의존한다, 라는 것을 밝히려하는 것에도 상당한 오류가 있다. 본인의 틀, 모델을 어떻게든 적용하려고 발버둥쳤겠지만, 사실 이야기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그의 사고 실험은 이렇다. 우리가 버튼을 눌러서 어제의 기억을 몽땅 지울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당신은 의식이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기억이 지워진 이후의 당신은 이제 어제 내가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른 논변이다. 어제 지워진 것은 어제의 기억이지 어제의 의식이 아니다. 이미 기억과 의식을 같은 거라고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오지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의식이 있었다. 오늘의 나는 의식이 있다. 어제의 기억이 사라졌더라도 어제의 나는 의식이 있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는가? 잘 읽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비슷한 류의 과학자인 라마찬드란 박사의 책을 읽을때에는 그래도 철학적인 베이스에 논리적 기본기가 있어서 그랬는지 상당히 납득이 갔는데, 이 책의 사변적 증명은 사실 와닿는게 하나도 없다. 아마 이 책은 뇌과학에서 고전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게 별 다섯개를 준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책 스스로는 고전이 되기 어려울지라도 마운트캐슬의 논문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읽히게 될 것이다. 뇌 피질들의 유사성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외계인의 눈으로 본 결과일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다시 말하겠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 그럼 사람들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눈에 번쩍 뜨일 것이다.

 

이런 시각을 뇌에까지 접목시킨 저 논문은 분명 찬사받을만하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일종의 틀로 만든 기억 - 예측 모델은 어렴풋한 복잡계, 창발 이런 단어에 괜스레 의존하게 되던 뇌과학에 분명 새로운 바람을 불어일으킬 것이다. 나중에 창발에 관하여 이야기를 좀 할텐데, 난 사실 저 개념에 대하여 상당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 사실 저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아마 공학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책을 썼다면 - 그리고 실제로 그런 책들이 많은데 절대 이 책처럼 청사진을 만들 생각은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그런 신경생물학자들은 뇌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고 있기에. 그러나 공학자이기 때문에 뇌의 피질에 집중할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걸 청사진을 만들어서 해석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말미에 적힌 예측들의 결과가 더욱 기다려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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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4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qualia 2015-06-17 23:26   좋아요 0 | URL
가연 님, 제가 관심 있는 분야라 위 리뷰 글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하더군요.

그런데 가연 님이 전개한 제프 호킨스(Jeff Hawkins) 비판에는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즉 ⑴ 제프 호킨스가 좀비 개념을 오용하고 있으며, 좀비 논변을 잘못 전개하고 있다는 가연 님의 비판은 전혀 옳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⑵ 제프 호킨스의 기억 지우기 사고 실험 논변도 그른 논변일 뿐이라는 가연 님의 비판 또한 전혀 옳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가연 님의 두 가지 비판이 왜 오류인지 자세히 밝히는 역비판글을 제 블로그에 올려놨습니다.

처음에는 윗글을 읽고 댓글란에 제 답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만, 글이 너무 길어지고 해서, 제 블로그에 역비판글 형식으로 완전히 새롭게 올렸놨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익한 논쟁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 비판글 제목과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프 호킨스의 좀비 논변과 사고 실험 논변이 과연 오류일까?
http://blog.aladin.co.kr/qualia/7601688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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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여덟 편의 소설 중에 내 마음을 움직인 소설은 단 한 편이다. 관통, 이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인데, 아마도 출판사에서도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소설인 모양이다. 표지를 보라. 표지에 검은색으로 주욱, 길게 금이 나있잖는가. 이게 바로 관통, 의 중심 소재다. 주인공인 미온, 은 결국 소설 마지막에 금에다가 '한쪽 다리를 깊이' 넣고 (p.95) 그림 너머에 있는 이계로 훌쩍 떠나버린다. 우리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갔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러니깐 소설이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다른 삶에 대한 동경, 정도의 주제일 것이다. 아니, 제대로 이야기하자. 물론 소설전반적으로 지금의 삶과 다른 삶이 평행을 이루며 서로 잇닿지만, 실제로는 다른 삶은 부가된 것이다. 결국 내 삶에 대한 절망, 그 끝없는 절망이 바로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이리라.

 

저 주제는 비단 관통, 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소설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아가씨는 재수없게 입에서 두꺼비와 뱀이 나오게 되었다. 뭐, 그 대가로는 가뭄에 찌든 마을에 비가 내리게 되었지만. (파르마코스, p.65) 뭐, 입에서 꽃과 보석이 나오게 된 아가씨도 그다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못했다는게 이 이야기의 포인트다. 어떤 아가씨는 '내일모레면 서른' (p.269) 인 채로 뿌리뽑혀 다니던 고객센터에서 뛰쳐나온다. (어디까지를 묻다, p.268) 사실은, 인생은 정말 X같은 거다. 너무 X같은데 또 살지 않을 수가 없는게, 이런 인생이라는 거다. 가장 큰 문제는, X같아서 그만둔다, 가 안된다는 거다. 그냥 살다보니깐, 그냥 살다보니 X이 되어가는 거다. 뭐, X에는 좋아하는 말을 넣어달라.

 

어쩌다보니 소개팅을 하게 되었는데, 주선자가 나에게 어찌나 상대방 집에 돈이 많니, 어쩌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주선자야 나에 대한 호의로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자꾸 어린왕자, 가 생각이 났다. 내가 어린왕자다, 라는 그런 호러블한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라, 앞부분에 저 집은 벽돌이 붉은 색이고 제라늄이 위에 장식되었네, 정말 예쁘네, 라고 하면 어른들은 못알아듣고, 저 집에 오억넘는 집이야, 라고 하면 으억하고 넘어가는게 어른들이라고. 아직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다니 나는 아직은 어른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인생 사는게 힘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나쁜 감정도 없고, 주선자에게도 그다지 나쁜 감정도 없지만, 그냥 그런 소리를 듣게 된 것 자체가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결혼도, 연애도 어딘가 조건에 맞춰야 될것만 같고, 그렇다고 정말 아무런 아가씨나 데리고 갔다가는 집에서 쫓겨날것만 같고 말이지. (우스개소리로 하는 소리지만) 뭔가 뭔가, 그래, 뭔가 불만족스럽고 힘든게 있다. 굳이 이 불만족스러운 것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써야만 한다는 점,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안다는 점.

 

결국 사랑이랍시고 떠들어대는 그 무엇인가는 호르몬의 문제이고, 어쩌면 최근에 읽은 단편처럼 - 곽재식의 신비한 사랑의 묘약 (사실 제목이 잘..) - 살살 조합해서 호르몬을 쫙, 하고 뿌리면 쩍, 하고 나에게 상대방의 마음이 달라붙게 만드는 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 호르몬의 혈중농도가 내려가면 따라 식어버리는 그런,

 

그런 마음이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조건에 맞춰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내 자신의 인생이 참 X같네,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될때가 있다. 당연히, 당연히, 이는 굳이 이런 애정문제에만 통용되는게 아니고, 애정문제같이 포기할 수 있는 (괜히 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닌, 당장 내가 이번해가 지나면 이제 뭘해야 되지? 하는 그런 삶이라는 무거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내 자신의 인생이 참, 참, XXX같네,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솔직히 이런 인터넷 공간에 끄적거릴 수 있는 문제는 그저 이런 애정문제다. 이런 공간에 끄적일 수 없는 그 수많은 내밀한 생각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소설 속 주인공들이야 뭐 금사이로 훌쩍 가버리면 되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이렇게 컴퓨터에 리뷰 쓰는 나는? 어디로 가야 되는데.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이 소설에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고 그저 철저히 X같네, 를 보여줄 뿐이다. 사실 소설 중 한 편은 X에 꽃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깐, 좋아하는 말을 X에 넣어달라고 했으니, 그 좋아하는 말이 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그런 소설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우울할 따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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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0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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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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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나는 소설보다는 과학 쪽 신간평가단을 했어야했다, 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고 있는 요즘이다. 상대적으로 마음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매번 글을 쓸때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나, 궁리하게 된다. 그러고보면 저번 글 - 비공개로 돌린 글 - 에 더불어 또 신간평가단 이야기로 시작하게 되는 것 같은데, 괜스레 신간평가단 추억팔이, 같은 느낌이 들어서 뭔가 미묘하기도 하다. 얼마나 시작할 말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서두를 꺼내려고 하겠는가. 내가 봐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고백하자면, 난 이 책의 저자인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서 고작 이름 정도만 들어봤을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그리고 쓴 책으로는 만엔원년의 풋볼, 정도. 이게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러니깐, 난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처음 이번에 처음 읽어봤다.

 

비공개로 돌린 글 이야기는 이 글 마지막에 조금 끄적거리기로 하고 - 그래도 혹시 만에 하나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 문제는 내가 몇 번이고 글을 쓸때마다, 아, 이 작가는 처음 보는 작가다, 내가 아는게 없다, 라고 쓴다는 점인데, 뭔가 그저 죄송할따름이다. 원래라면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라 하였거늘, 이런 글은 쓰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쓰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책을 받았으니 글을 쓰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고, 그래서 이렇게 서두에 변명을 잔뜩 늘어놓는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오에 겐자부로는 몰라도 이 책의 옮긴이인 박유하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 아는 편이다. 박유하를 어찌 잊겠는가? 다시 신간평가단 추억팔이를 해보자면, 나는 내가 가장 처음 신간평가단을 했던 때 받았던 책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서재의 가장 처음 글로 돌아가서 읽어보면 두 권의 책이 보일 것이다.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 이다. 그때 이 책을 처음 신간평가단 리뷰도서로 받고 골방에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서경식은 말하자면 한일관계에서 디아스포라, 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재일조선인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2세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에도, 일본에도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한 일종의 무국적자인 그는 한국과 일본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평의 칼을 들이대었었다.

 

매우 어렸던 그당시의 나는, 서경식씨의 그 멋진 논리에 감탄하면서 몇번이고 되새겨가며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매우 매우 어렸던 나는, 나도 저렇게 논리를 펼치고 싶다는 마음에 어설프게 논쟁도 벌이기도 했고 - 그리고 어설프게 알던 나는 현학적인 소리를 내뱉을수밖에 없었다 - 한편으로는 눈물날만큼 감동하기도 했었다. 그당시보다 조금 자란 나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당시의 나는 서경식씨의 글들을 찾아읽으면서 괜스레 눈물을 훔쳤었달까. 그리고 그 감동은 조금 더 자란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남아있고, 가면 갈수록 그의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혹자는 그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한다고 이야기한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같은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게 문제라는 걸 간과하신 것 같다..)

 

서경식씨의 책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으니 중심되는 이야기만 이야기하자면, 일본의 리버럴 세력 - 소위 말하는 양심세력 - 을 도리어 더 조심해야 한다, 라는 거다. 양심세력을 더 주의해야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양심세력은 얼핏보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의 사과를 주장하는 것 처럼 보이니 우리나라, 한국에게는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서경식씨는 이야기한다. 그런 행태는 도리어 자기기만적인 행태이며, 그런 양심적이라고 말하는 세력들 중에 진정으로 깊은 반성을 표하는 사람은 없다, 라고 말이다. 부연하자면 이런 거다. 이만큼은 사과할께! 우리 이만큼 인정하잖아! 그러니 너희도 좀 받아들여주라! 이런 프레임에서는 사과를 안받아주는 사람들은 그저 옹졸한 사람이다. 리버럴 세력, 양심세력이라고 일컫는 저 지식인 계층의 화해의 제스처에는 이런 이분법적 함정이 숨어있다.

 

그런 서경식씨의 칼날은 한국의 -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씨에게는 우리나라는 복합적인 대상인데, 조국이자 동시에 한국이다 - 리버럴 세력 또한 가리지 않고 겨냥한다. 그런 그의 비판의 대상자 중에는 바로 저 익사, 의 번역자인 박유하, 도 있다. 박유하의 책 중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한 두권이 아니지만, 나는 딱 두 권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화해를 위해서, 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의 위안부, 이다. 이름만 들어도 벌써 뭔가 느낌이 좋지 않지만, 제목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해봤자 선입견이라는 소리만 들을테니 넘어가고, 내용은.. 화해를 위해서, 까지는 그래도 읽을 수 있다고 치더라도 제국의 위안부는 조금 읽어봤는데도 벌써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제국의 위안부는 표현을 좀 고치고 수정해야만 팔 수 있다고 판결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유하의 스탠스 또한 저런 일본의 리버럴 세력들의 스탠스와 별반차이가 없더라는 이야기이다. 저들이 굽히잖는가? 우리도 넓게 인정해줘야되는거 아닌가? 이는 우리를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분법적 함정에 빠뜨리고, 선택을 강요하게 만든다. 자, 선택하거라, 옹졸해질래? 아니면 그냥 훌훌 털어버릴래?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는 너무 많이 나가버렸다. 위안부문제에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박유하에 대한 이미지가 영 좋지 않은 시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으니, 나는 사실 이 책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지금부터 시작하는 리뷰 또한 이런 관점에서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혹시나 내 시선이 너무 까칠하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속좁고 어리석기에 그렇다, 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애초에 내 관점자체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글을 쓴 사람과 번역자가 - 물론 어느 정도 유대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내용상, 그리고 정서상 동일한 지점을 바라볼 것이라는 것 처럼 글을 쓰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익사, 읽기에서 약간 - 어쩌면 어거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 박유하와 기타 리버럴 세력들에게서 보이는 스탠스를 약간은 읽은 것 같다. 물론 그들과 오에 겐자부로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격이 있는 것 같지만 - 내가 이렇게 칼날을 세워서 보아야 겨우 보일 정도니깐 이만큼 간격이 있는게 당연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스탠스를 읽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뭐, 변명하자면 나는 오에 겐자부로가 얼마만큼 세계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온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발언을 했는지도 모르고. 그러니 도리어 이 책 '익사' 만 가지고 독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 책의 시놉시스는 사실 두 개의 큰, 그리고 연속성을 지닌 흐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주인공인 코기토가 자기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익사, 라는 소설을 구성하다가 기획이 엎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 혈거인의 죽은 개를 던지다, 라는 형식의 연극이다. 그리고 이 두개의 흐름을 포괄한 외부의 익사, 그러니깐 지금 이렇게 세계문학전집 128번째 책으로 출판된 이 책, 을 오에 겐자부로 - 이하 오에 - 가 써내려가는 것이다. 책 중의 책이랄까, 일종의 자기지시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구분을 위해서 외부의 책, 그러니깐 128번째 책을 [익사]라고 할 것이며, 이 [익사] 내부의 가상의 주인공 코기토가 쓰려고 하는 책을 익사, 라고 두겠다.

 

여기서 익사, 의 주인공인 조코 코기토, 의 이름을 조금 분석해보겠다. 코기토는 작중에서는 줄여서 코기, 라고들 많이 부르는데, 철학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분이라면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운운 하는 말을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 아닌가? 그것의 라틴어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다. 코기토는 말하자면 라틴어로 생각하는 자아, 생각하는 나, 나는 생각한다 - 좀 더 정확히는 '생각한다',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익사]가 오에 스스로의 자전적 소설임을 나타내는 향취가 물씬 풍겨온다.

 

데카르트의 언명과 종합해보자면, 저 코기토는 오에 자신을 드러내는 말이다. 실제로 [익사]의 코기토의 행보는 현실에서의 오에의 행보와 비슷하다. 현실에서의 오에는 자폐아를 아들로 두고 있다. [익사]의 코기토 또한 아카리, 라는 자폐아를 아들로 두고 있다. 현실에서의 오에와 [익사]에서의 코기토 모두 만엔원년의 풋볼, 이라는 소설을 썼다. 등등, 이정도면 코기토라는 이름을 지우고 오에라고 두어도 무방할 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방금 코기토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는가? 단순한 자아, 자기로 해석되는 self, 라면 지우고 오에라고 두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코기토Cogito는 엄밀히 말하면 앞서도 말했듯 생각한다, 라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생각하는 자아, 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조금만 부연하겠다, 중요한 부분이라서. cogito와 닮은 말이 있지 않은가? cogni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인식, 자각 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cogito에는 원래 생각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런데 어디서 '나는' 이라는 뜻이 왔냐고? 이는 라틴어의 특성 때문이다. 라틴어는 주어에 따라 동사의 활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 언명의 경우 주어를 생략하더라도 일인칭 주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해석할때 앞에 '나는' 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는 나는, 에 더 강조를 두고는 자아, 자기의 의미가 더 부여되게 되었으니..)

 

결국 코기토, 라는 말을 쓴 이상 이 코기토는 생각한다, 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익사]안의 코기토와 외부의 오에 겐자부로의 생각이 꼭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둘을 완전히 서로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는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데카르트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 될 것 같다. 이 Cogito, ergo sum이라는 내용 자체는 사실 정확하게 똑같은 말로 나온다고는 보기 어렵고, 방법서설, 성찰 1,2 를 통틀어 조금씩 비슷한 문장이 나올 뿐이다. 그러니깐 명확하게 Cogito, ergo sum이 적혀있지는 않다는 이야기이다. 글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644년에 발간한 철학원리, 라는 책에는 저 언명이 명확히 드러난다고는 하는데 내가 안읽어봤으니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저 언명은 일종의 반성적 언명이다. 누구나 알고 있을테니 짧게 이야기하자면, 회의주의를 극한까지 몰아붙인 (적어도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리 말하자면 정말 극한까지 몰아붙인 사람은 흄이다) 결과 탄생한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법서설의 내용을 조금 알면 좋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학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떤 학문이든 간에 단단한 반석부터 놓고 그 기초에서부터 학문을 쌓아가는게 중요하다고 말이다. 특히 데카르트에게는 수학이 그런 이상적인 학문으로 여겨졌었다. 수학은 몇개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 - 공리에서부터 증명이 진행된다. 그렇다면 다른 학문들도 수학처럼 정말 반석에서부터 기초를 쌓아올리면 어떨까? 그러면 모든 것이 완전해지지 않을까? (이게 대륙의 합리론자들의 특징이다. 물론 지금 현대 수학적인 잣대를 들이밀면 저런 구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드러나겠지만, 당시의 학문적 깊이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강단철학도 좀 까주고, 풋, 너무 속된 말이니 정정하면 강단철학도 좀 비판하면서 (뭐, 지난 이야기이지만, 푸코식의 잣대를 빌리자면 정작 본인이 그 강단철학이 될 줄은 몰랐으리라) 자신의 학문적 작업을 시작했다. 그 작업의 방법은 바로 회의주의였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내 눈앞에, 그리고 지금껏 강단철학에서 무책임하게 받아들여지던 모든 사실들을 모조리 의심하라. 왜 의심을 하냐고? 바로 전 문단에서 말했듯 반석을 찾기 위해서. 의심해서 그 의심이 도저히 뚫지 못하는 핵심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런 그가 마침내 도달한 것이 바로 cogito이다. 생각하는 나, 내가 생각하는 사실. 이 사실 자체는 악마가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 아닌가? 여기서부터 신의 존재론적 증명과 완전성 논변등을 마구 쓰면서 신을 증명하고 만물을 증명한다. 이 작업은 더 설명하지 않겠다. 별로 안좋아하거니와 동의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런 과업을 [익사]의 주인공 코기토는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아말이다. 이런 코기토가 주인공이니 [익사] 소설 전체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불보듯 뻔하다. 그 - 코기토 - 는 계속 번민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핵심부에 도달할 것이고, 이윽고 거기서부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 재구성작업은 결코 쉽지 않기에 신체적, 정신적 불안정함을 동반하리라.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코기토의 핵심은 무엇일까?

 

위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일단 책 내용으로 돌아가면, 결국 익사, 를 쓰려고 자료를 모으던 코기토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반발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들이 건네준 자료를 보고 듣고는 결국 익사, 소설를 포기하고 만다. 왜 포기했는가, 하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기토의 어머니는 특히나 염려했다. 코기토가 익사, 를 쓰면서 미화하게 될까봐 말이다. 조금만 더 설명해보자면, 코기토는 자신의 글을 통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코기토와 주요인물인 우나이코의 대화를 인용해보겠다.

 

하지만 조코 선생님은 홍수로 불어난 강으로 배를 타고 나가는 아버지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싶으셨던 거지요?

 

그렇다네. 그런데다 행동하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강에 간 거라고 쓸 생각이었지. 그 현장에서 소년인 내가 그렇게 믿었고... (하략)

p.131

 

코기토의 아버지는 코기토가 어릴적 배를 저어 마을을 빠져나가다가 물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한다. (적어도 익사, 의 전반부의 코기토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코기토의 아버지는 외부로 빠져나가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익사, 전반에 걸쳐 세 번 변주된다. 처음 코기토는 자신의 아버지가 함께 어울리던 젊은 장교들이 궐기를 하려고 하자, 거기에 동조하여 밖으로 진출하려다가 익사를 맞이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코기토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이 실제로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소설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그릴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익사를 쓰기 전에 워밍 업, 으로 썼던 소설에서도 비슷한 서사구조에 자신의 아버지를 희화화한 부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기토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정상적인 사람, 으로 그리고 싶었던 욕망이 숨어있었다. 앞서 인용문에서 코기토는 자신에 대한 힐문에 담담히 인정한다. 그리고 어릴적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모두, 자신의 아버지가 행동하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고 미화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위의 인용한 부분의 대화는 '어머니에 의하여 진실을 - 적어도 진실이라고 생각되어지는 - 알게 된 이후의 대화라는 것이다.

 

사실 백번 양보해서, 코기토가 자신의 아버지를 미화시키려는 욕망을 품고 있지 않았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점이 하나가 있다. '코기토는 [익사] 소설을 쓰기를 원했다' 바로 이 점이다. 코기토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자신의 아버지는 코기토의 생각에 따르면 시대에 궐기하려는 젊은 장교들과 어울리는 풍운아같은 존재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는 말이 있다.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가 이야기한 이 말은 프레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말로 지금은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의도였든 간에,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에 대한 프레임이 짜여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을 코기토의 어머니가 우려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창조론자들의 논쟁에 대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가 리처드 도킨스에게 충고한 것과 비슷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야기한다. 리처드 도킨스씨, 창조론자들은 당신, 진화론자와 논쟁을 했다, 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 그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코기토야, 네가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다.

 

그리고 코기토의 어머니는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서 그런 코기토의 욕구를 좌절시킨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원래 젊은 장교들과 아버지는 당시 전후의 일본사회에 대한 불만때문에 궐기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불안감에 도망쳐버린거다, 라고. 이렇게 진실 - 이라고 알려진 것 - 까지 들었는데도 코기토는 자신의 아버지를 '정상적인' 행동하려는 사람으로 그려낼 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뒤에 이어지는 본인의 독백으로도 밝혀진다.

 

나는 기억 속의 영어 단어를 뜻과 함께 카드에 적었는데, 아버지를 절망적이리만큼

(desperately) 사랑하고 있다

p.167

 

이제 코기토의 핵심, 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려볼 차례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 이것이 바로 코기토의 핵심이리라.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레, 앞서의 논증에 따라 소설 내에서 코기토가 어떻게 거대 현기증, 을 앓게 되었는가, 에 대한 고찰로 넘어갈 수 있다. 글이 진행되면서 코기토는 거대 현기증, 이라는 일종의 현기증을 앓게 된다. 본인의 독백에 따르면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p. 144) 현기증이라고 한다. 앞서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번민하고 자신의 핵심부에 도달할 것이며, 그 핵심부에서부터 다시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 코기토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의 숙명이라고. 그런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정신적으로 자신의 에너지가 깎일 것이고, 한편으로는 육체적으로 활력을 잃게 될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는 바로 이 작업은 이전의 그가 결코 '경험한 적 없는' 작업이리라. 그렇기에 그 반작용으로 코기토는 '거대 현기증' 을 앓게 된 것이다.

 

사실 아버지를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마치 프로이트식의 자유연상을 거쳐 밖으로 내뱉듯이 나온 저 말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깊고 깊은 현기증 속으로 빠져들지는 못하였으리라. 이것이 바로 코기토의 이중성이다. 표면의 나-코기토는 극우에 대하여 반대하고, 이성적이고 일본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에 대하여 칼을 세우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나-코기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아버지를 사랑한다. 아니, 감히 말하건데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나(일본인)는 내 아버지(천황)을 사랑한다. 또는 내 아버지(일본)을 사랑한다.

 

이는 비약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식으로 읽을 수 있는 재료를 코기토는 글에서 준다. 나쓰메 소세키와 황금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더 부연하도록 하겠다. 작중에서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말은 이렇게 등장한다.

 

메이지 정신이 메이지 천황 시대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르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메이지 정신에 영향을 받았을까요? ...(하략)...

...(전략)... 시대에서 동떨어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떨어져 지내려 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는 거 아닐까 싶네. 내 소설은, 대개 그런 개인을 그리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시대정신의 표현을 지향하고 있지 않나.

p.135

 

마음, 에서의 선생님은 메이지 정신이 끝났으니 어쩌지? 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자 선생님의 아내는 이렇게 핀잔을 준다. 순사라도 하지 그래요, 라고. 코기토 또한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 스스로는 독자가 사라지게 되면 시대정신을 따라 순사하는 거, 라고 생각한다. (p.136) 우리는 여기서 코기토가 창조할 예정이었던 [익사]의 주인공이 어떻게 그려질지 알 수가 있다. 코기토의 아버지 또한 이런 시대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스트레오 타입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창조물인 조코 코기토가 창조한 소설의 주인공들은 원론적으로는 조코 코기토와 같지 않고, 더 나아가 오에 겐자부로와도 같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앞서, 코기토, 라는 이름을 들어 현실과 익사, 소설의 주인공의 관련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조코 코기토와 그가 창작해낸 소설 내부의 주인공들은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 조코 코기토의 또다른 현현이 바로 소설 속의 소설의 주인공들일까, 아니면 그저 마치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와 완벽하게 선을 그엇듯 (코난 도일 본인은 강령술을 좋아했지만 셜록 홈즈는 작중에서 미신을 뿌리친다.)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엄밀한 분석은 힘들겠지만, 이럴때는 수학적인 증명방법인 귀류법을 이용해보자. 반명제를 참이라고 정하고, 이것이 참일때 생기는 모순으로 참,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인 귀류법말이다.

 

명제 : 조코 코기토와 조코 코기토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닮은 점이 있다.

반명제 : 조코 코기토와 조코 코기토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닮은 점이 없다.

 

조코 코기토와 조코 코기토의 소설의 주인공이 닮은 점이 없고, 그저 본인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가치들을 믿는 인간형들을 그려낸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우리는 코기토가 쓴 소설의 인간형들을 이미 알고 있다. 그가 그려낸 인간형들은 '시대에서 동떨어졌으나, 그만큼 시대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문장은 매우 미묘하다. 우리는 이를테면 이런 사람들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어떻게 발전하든, 어떻게 굴러가든 난 모르겠다. 신경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씁쓸하다. (그러니 더 눈을 돌리게 되고 더 고립된다.) 누구나 시대에 대하여 욕망을 품고 있다. 완전히 아무런 욕구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이룰 수가 없거나, 이룰 마음이 들지 않기에 (욕구를 가지는 것과 그 욕구를 실행하는 욕구를 가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 않는다. 사실 저 두 문장 - 할 수 없다와 하지 않는다 - 은 정확히 같은 문장이다! 

 

이 경우 조코 코기토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창작해온 것일까? 자신과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을 그저 상상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데 만약 저자와 그렇게 동떨어진 존재라면, 그들에 대하여 굳이 코기토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왜? 그가 창작한 인물은 그를 조금도 투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으리라. 개구리는 올챙이를 지나 개구리가 된다. 우리는 개구리에게 그의 올챙이 시절을 물어보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안다. 개구리는 올챙이에게서 나왔지만 실제 개구리의 생활양식은 그 스스로였던 올챙이와는 전혀 같지 않다. 개구리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개구리를 살펴보아야하며, 굳이 올챙이를 살펴볼 필요는 없다. (속담에야 개구리 올챙이적 모른다, 라는 말이 쓰이지만)

이 논리대로라면 익사, 의 혈거인 극단, 은 사실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코기토에게 그의 창작인물들의 성격을 물어보고, 그의 작품의 연극화를 묻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익사, 를 읽어나가면서 코기토가 자신의 등장인물들을 그냥 던져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할 수 있다. 바꿔말하자면 결국 코기토 본인이 작중에 몇 번이고 투영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냥 던져둔 것이라면, 그저 아무 관련없이 전혀 모르는 존재를 상상하여 쓴 것이라면, 자문에 이렇듯 성실하게 답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겠는가! (사실 근본적으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고, 편견, 상식을 건너뛰어 전혀 상관없는 존재를 '모사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위의 반명제만 하더라도 닮은 점이 없다, 라는 말은 닮은 점이 있다, 라는 말의 부정이다.)

 

이 귀류법을 통하여 우리는 조코 코기토의 스탠스를 읽어낼 수 있었다. 조코 코기토 본인 또한 시대에 동떨어졌으나, 결국 그 흐름에 젖어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아버지를 절망적으로 사랑' 한다는 말에 연관지어진다. 하지만 좀 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황금가지,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황금가지 원본을 읽어본 사람은 우리나라에 거의 드물지 않을까, 짐작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번역되어있는 여러 출판사들의 책은 사실 축약본들이다. 원본은 아주, 아주, 아주 길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작중에 황금가지의 판본이 명시되어 있다. 총 세 권의 책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아버지의 황금가지, 다른 하나는 맥밀런 팩시밀리본, 다른 하나는 3판의 완역본이다. 그런데 사실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고작 앞부분이다. 앞부분의 앞부분이랄까. 1부 1장에서부터 3부까지다. 3부 제목이 dying god이라는데, 이는 완역본 기준으로 앞의 4권 정도다. 일단 먼저 여기에 대해서 상세히 밝히고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그저 영문판과 우리나라번역본을 기준으로 이야기할텐데, 물론 일본에서 출판된 책은 또 편집이 다르게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부분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작중에 코기토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22년 맥밀런 출판사에서 발간된 세번째 판본의 팩시밀리본 (p. 296)'이라고 명시되어있다. 그런데 1922년은 축약본이 나온 시기이다. 완전판은 1915년까지만 출간된 것이다. 작중에 말하는 dying god이라는 챕터는 완전판의 제목이다. 그러니 1922년 맥밀런 출판사에서 발간된 책을 코기토가 보았다면 저렇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뒤에 쓴 3판의 완역본(p. 297) 을 보고 이야기했다면 모르겠지만, 작중에서 코기토는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가진 팩시밀리본과 대조해보니(p. 298)' 결국 완역본을 봤다는 걸까, 안봤다는 걸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1922년의 판본은 축약본이다. dying god이라는 제목은 완역본에서만 나오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코기토는 아버지의 책을 완역본과 비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된다. 아마 작가가 황금가지를 읽어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읽어도 이런 세세한 부분을 신경쓰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다.

 

사실 이런 건 매우 사소한 실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속편한 이야기이리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책의 주요 부분을 전체 맥락에서 파악하고 싶다면서 축약본과 비교했다는 것이 사소한 실수일까? 사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책도 축약본이다. (p. 80) 축약본을 축약본과 비교하면서 코기토는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이부분에서 나는 감히 말하건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저 과거의 재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그는 조그만 아이였고, 아버지를 사랑했으며, 아버지에 대하여 일부분의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시대정신에 대한 약한 끌림 그리고 씁쓸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저 시점 저 상황을 맞이하여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니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완역본까지 받아둔 상태 (p.297) 이지만 완역본을 들춰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의도적인 누락이든, 아니면 익사, 의 작가의 무의식적인 실수든 어느 쪽이든 문제가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한계가 명확하다. 이 소설이 아무리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어쩌면 일본인들 거의 대부분의 스탠스일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증거가 없어서, 혹은 잘몰라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안했다고 하자. 오늘날에는 옆에 완역본을 두고도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얼마나 더? 얼마나 더? 너희는 언제까지 그렇게 옹졸하게 굴거냐, 라고. 그러면서 이들은 이야기한다. 자신들은 핵폭탄에 의하여 이미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인류애, 인류 모두에 대한 그런 사랑이라는 대승적인 차원으로 볼때, 자신들은 이미 커다란 고통을 겪었으니까, 이런 우리에 대하여 아픔을 씻어주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그런데 핵폭탄은 감히 말하건데 최근에 일어난 참사와는 다르다. 최근에 일어난 참사 - 지진 - 은 그야말로 자연재해때문이라면, 전자는 인간의 몫이다. 나는 여기서 당시의 연합군이 무슨 응징할 자격이 있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응징할 '자격'은 없다. 물론 원폭과 같은 무기는 그런 식으로 쓰여서는 안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 원폭으로 인하여 해방을 맞이한 - 설령 원폭이 아니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해방을 맞이하였겠지만, 그런 우리 나라에게 자신들의 피해를 보여주면서 화해라는 이름의 강요를 취해서는 안된다. 자신들의 피해를 인류애라는 큰 이름에 덮으려는 행위를 피해자 앞에서는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두 번의 능욕이다. 피해자의 마음조차 좌지우지하려는. 소설 전체에 이르는 화해의 분위기는 근대 일본의 시기와 맞물리면서 그런 불온한 뉘앙스를 자꾸 던져준다. 그러니 피해자에게 강요하지 말라. 이방인까지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말라. 그렇기에 이 책이 정녕 옮긴이의 말처럼 구원, 혹은 신뢰에 기반한 공동체 구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면, 나는 감히 말하건데 그런 방식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다고, 그런 공동체는 애초부터 없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리라. 그럼 이런 반문을 할 것이다. 뭐, 우리가 너희 이해해주려고 하잖아, 도대체 얼마나 사과하라는 거지? 답은 간단하다. 손이 발이 되도록. 그러나 그런 것은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듯 정치와 이해관계에 맞게 서로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s.

 

사실 이 리뷰는 반쪽이다. 우나이코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다. 우나이코를 한 축으로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이 리뷰와 그 축을 합친다면 제법 그럴 듯한 글이 되겠지만 시간도 없고 귀찮다..

 

아마 우나이코에 대한 분석은 이 글의 코기토의 행적을 모두 반박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리버럴 세력들에게서 보이는 스탠스를 중화시킬 것이다. 어쩌면 우나이코의 스탠스야말로 진정으로 취하고 싶어했다는 스탠스라고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도 별이 네개인 이유는 우나이코의 분석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물론 증명은 없거나 언젠가..

 

아, 그리고 글 하나를 비공개로 한 것 있다. 보신 분들이 의아해하실까봐 굳이 쓰는데, 신간평가단 관련해서 조금 끄적거린 것인데, 뭐랄까, 음, 일이 커지거나 귀찮아지는 것도 싫고, 사람이 실수도 할 수도 있고, 출판사 담당자님도 같은 노동자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괜히 거기다 컴플레인하는 것도 웃기고 등등.. 의 이유로 글을 비공개처리했다. 게다가 나도 생각해보니 괜히 경솔하다고 생각되는게.. 사실 조용히 메일을 보내도 될 일이었는데, 풋. 저 진짜 빈정안상했었어요, 풋, 거기다가 쓴 내용은 진짜 진심이었는데, 비꼬는 것 처럼 보였나보다. 역시 글로는 사람이 어떤 표정 짓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때 내표정은 말하자면 맨날 할아버지 수염을 태우던 꼬마애가 갑자기 '창의적인 골드버그 장치를 만들어서 할아버지 수염을 태울때' 를 목격한 표정이었달까. 창의력 대장일세, 같은 표정말이다. 불만스럽지만 그렇다고 그닥 또..

 

마지막으로 몇 마디 쓴다. 위 글의 요지는 결과적으로, 2차세계대전에 일본의 상황을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이 익사, 소설에서 주인공의 누이와 엄마가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과연 다루는 것 만으로 문제가 되는 걸까? 나는 이 경우에는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핵폭탄의 문제를 보자. 일본 정치사에서 핵폭탄을 다루게 된 것의 이유 중의 한 가지는, 미국에 대한 성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일본 내부에서는 결코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폭탄에 대한 문제를 가져와서 기본적 인권은 소중하다. -> 미국은 그것을 무시한다. 와 같은 도식으로 운동을 펼친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일본이 우리도 피해자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논리적인 설명이 우리나라에게도 통하는가? 미국에 대한 성토때문에 핵폭탄에 희생된 자국민들의 인권을 말한다. 인권은 물론 소중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덮어줄 수는 없는 부분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몇 개의 전가의 보도와 같은 개념이 있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편을 악의 편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아주 완벽한 전가의 보도인 셈이다. (실제로 이런 개념을 선취하여 발전한 나라인 미국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가의 보도의 문제점은 상대를 가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권 문제가 미국이 다르고 우리나라가 다를까? 양심이 미국인에게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을까?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미국을 향해 인권 운운한다면 그 말이 우리나라의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절대 아니다. 일본인들이 단순히 자신들이 피해자다, 라고 주장하려고 저런 사례를 가져오는게 아닐지라도,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사례에서 우리가 당황스러워 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을 때리던 사람이, 담임에게 맞았다고 학교 신문고에 찔렀다고 하자. 당신은 어이없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신문고에 찌르려고 할때는 기를 쓰고 막던 - 헤이그 특사 - 사람이 정작 자신의 피해에는 민감하다는 점에 대하여. 그럼 우리는 여기서 맞아, 네가 맞은 것은 너무 안된일이니 힘을 실어줄께, 라고 이야기를 해야하는 걸까? 우리는 여기서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대의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내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렇기에 나는 다루는 것,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가 있다고 본다.


하나만 더 나아간다면 이는 일본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결코 떳떳하지만은 않다. 아니,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도 다만 고개를 숙이고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하지를 말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진정한 사과를 다른 사람에게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더랬다. 누군가 과거사에 대하여 잊어야 하는가, 용서해야 하는가, 를 물었을때 지젝은  잊어도 용서하지는 마라,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마도 분명 폼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였을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도 그럴게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 라는 언며을 뒤집은 거잖는가. 나는 이 말이 생각보다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기억에는 사라지더라도, 감정은 남고, 감정이 바래지더라도, 그 감정이 남긴 흠집은 지워지지 않는다. 투명한 거울같은 이성은, 투명하기에 벽에 무엇인가를 새길 힘이 없다. 당신의 의식의 벽에 무엇인가를 새길 수 있는 것은 격렬한 감정 뿐이고, 그렇게 무늬든, 금이든 새겨진다면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용서는 허울 뿐인 말이 될 것이다. 그럴바에야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고 용서못하고 용서받지못하며 그저 정치적으로 조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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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