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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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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언어 영역의 지문으로 출제되기까지 했었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여러 작품을 하나로 묶은 일종의 연작소설입니다. 이 책은 프롤로그인 뫼비우스의 띠, 에서부터 시작해 에필로그, 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은 얼핏 읽기에는 주인공들도 이 주인공이 나왔다가 저 주인공이 나왔다가, 하는 등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다 읽고 나면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에서 정말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상징들을 살펴보면, 수학 분야에서 이용되는 도형들을 그 상징으로 사용한 경우가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의 제목인 뫼비우스의 띠, 는 저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 그러니깐 하나의 띠를 잘라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게 한 번 꼬아 만든 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물론 정작 저 이야기에서는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이야기는 수학교사만 잠깐 언급하는 선에서 끝이 나지만, 책 전체의 프롤로그 격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후의 이야기들과 주제의식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을 계속 읽어가다보면, 다시금 뫼비우스의 띠, 처럼 비슷한 위상을 가지는 수학적인 상징이 등장합니다. 뫼비우스의 띠, 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의 제목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클라인 씨의 병입니다.

 

클라인 씨의 병, 이야기는 근처 교회의 학생들이 나무껍질을 벗겨서 생활하는 한 애꾸눈 노인을 찾아오면서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애꾸눈 노인에게 설문조사를 하는데, 그 중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의 생활은 어떻게 변할거라고 생각하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애꾸눈 노인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삶은 앞으로 아주 좋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에게 노인은 말을 덧붙이지요.

 

 

난 곧 죽을 거야.

 

 

애런라이크의 책 노동의 배신, 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 삶에서 무언가 이루겠다는 목표마저도 상실한 채 위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상황이었고, 당시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저자는 누군가가 직접 잠입 취재를 해서 그 실태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어느 편집장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본인이 직접 그 상황에 뛰어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상상만 하던 그녀였지만 직접 본인이 뛰어들어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웨이트리스 일과 요양원 일, 청소 용역 일과 월마트 일을 체험한 그녀는 그 경험들을 살려서 분석을 내립니다. 먼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어떤 절약 방법이 않을까,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절약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저 목숨만 하루하루 연명해 간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요소를 의, 식, 주라고 부르지요. 의복은 회사에서 입도록 지정된 색깔의, 혹은 아예 형식이 제한된 의복을 입게 되고, 그나마도 단벌이라서 그것을 입고 식사를 하다가 그 위에 음식물을 흘리면 세탁비, 거기에 더 나아가 여차하면 새 옷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주거 환경은 더욱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이 트레일러에서 잠을 자거나, 장기 모텔 투숙을 하는 현황이었고,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이서 한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한 방에서 이 위치는 누구의 것, 이 소파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누구, 등 이렇게 제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었지요. 저자인 애런라이크의 눈에 특히 더 불합리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상황이라면 좀 주거환경에 드는 비용이라도 적어야 될 텐데, 주거환경을 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지요. 그녀가 직접 집을 여러 곳에서 구해보면서 느낀 것은, 정말 가격과 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격은 지나치게 그 효용에 비해서 높았고, 상대적으로 적절한 곳으로 보이는 곳도 일자리를 구한 곳과의 거리 및 교통비를 생각해보면 또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은 저자에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모텔에서 장기 숙박하는지, 혹은 불합리한 선택을 고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들은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강요'당하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이 고를 수 있었던 식사는 다른 의, 주에 비해서 좀 더 상황이 나았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중산층에 이르는 사람들마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뚱뚱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관리를 안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자기 관리를 안하는 사람들은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음식물들은 그들의 예산 범위 안에서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즉석조리식품들, 패스트 푸드 뿐입니다. 요즘 슬로우 푸드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는 슬로우 푸드는 사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고열량의 음식들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느긋하게 먹을 수가 없다보니 자연스레 급하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게 되고, 여유가 있을때 한 번에 음식을 많이 먹는 등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악순환이 절대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다시 클라인 씨의 병, 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쏘공, 의 큰아들 영수가 이 병을 보게 된 것은 그에게 영향을 준 과학자의 공장 내 그의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영수는 ‘긴 대롱에 구멍을 뚫어 한 쪽 끝을 그 대롱에 넣어 만든 이상한’ 병을 보게 됩니다. 이 병이 바로 클라인 씨의 병, 인데, 이 병은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앞서 보았던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이지요. 처음에는 영수는 이 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됩니다. 클라인 씨의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이라는 것을. 닫힌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의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클라인 씨의 병의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여기에서의 깨달음은 이윽고 영수가 은강 공단의 회장을 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영향을 줍니다. 이 상징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가 되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그리고 그런 차이마저도 사라지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 가해자(은강공단의 총수)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은강공단의 노동자)가 가해자가 되는(이후 영수는 은강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의미를 받아들여,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가 없는 공간이라면, 왜 이 공간은 이렇게나 부조리가 만연할까요? 그렇기에 여기서 더 나아가서, 클라인 씨의 병은 닫힌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잡이인 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완전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클라인 씨의 병이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외부와 내부 모두를 아우르는 클라인 씨의 병, 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도대체 이 공간의 어디쯤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요. 그렇기에 영수는 벽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키기 위해서 총수를 살해하려고 나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노동의 배신, 은 인상적인 글귀로 마무리 됩니다.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요구할 것이고, 엄청난 분노와 파업과 혼란이 만연할 것이지만, 그 날이 오더라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모두가 더불어 잘 살 거라고 말입니다. 이 노동의 배신, 에 나오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워킹 푸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지금은 ‘곧 죽기에 앞으로 더 좋아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저 영수가 은강 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어떤 혼란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살인은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파업과 분노가 횡행하는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은 우리 모두 밖과 안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클라인 씨의 병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격차가 생기는 것은 이 병의 공간의 어느 구석에 각각 서로 모여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상황입니다. 어떤 부가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지요.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온다면 언젠가 충분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한 말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를 극한까지 몰고 간 철학자로, 그의 논문은 아인슈타인에게 지적 영감을 주기도 했었다지요.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단지 이성만으로 결코 어떤 행위를 산출할 수도, 의지를 일으킬 수도 없으므로, 나는 동일한 능력이 의지를 방해할 수도, 감정의 선호를 반대할 수도 없다고 추론한다.’ 복잡한 문장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다른 말, ‘이성은 단지 열정의 노예이고, 노예이어야 한다.’ 와 그 의미하는 바가 일맥상통합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성만으로는 우리의 소망을 현실화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이성은 열정이 그 자신을 이끌어주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노예입니다. 동시에 이성만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기에 그 자신이 한 계에서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노예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는 워킹 푸어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서 최저임금 등을 냉철히 따져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노동자들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구나, 등과 같은 판단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이 판단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그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열정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 는 열정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힘든 생활을 하는 워킹 푸어들, 노동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병의 벽을 붙잡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있던 위치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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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puha 2012-08-27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 글은 항상 쏙쏙 들어오고, 끝까지 읽게 되네요. 저도 어제 쓰고서는 오늘 조금 더 보충하고 다듬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

가연 2012-08-29 02:0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koopuha님 글도 자주 들러서 읽고 있습니다. 어제 쓰신 글이랑 이번에 보충하신 글도 보았습니다. 벌써 밤이라.. 좋은 밤 되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되려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