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공원이나 산에서 꾸준히 몇 년 동안 아침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나치며 눈인사를 주고받는, 또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 줄잡아 대여섯 명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게 영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간밤에 꾸었던 시시껄렁한 꿈의 기억들을 얼굴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바른 채,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게다가 개기름인지 땀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추레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지을 때의 표정이란...
아무튼 나에게도 좋든 싫든 눈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사람이 몇몇 있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인사만 주고받다가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름은 물론 그 사람의 과거 경력 두어 가지 정도는 듣게 마련인데 웃기는 건 그 정보를 전달한 주체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마 바람이나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내가 아침마다 산을 오르면서 알게 된 사람 중에는 욕쟁이 할머니 A씨와 슈나우저 할머니 B씨, 순둥이 아저씨 C씨와 성악가 할아버지 D씨, 그리고 육체파 젊은이 E씨가 있다. 물론 그 별명은 모두 내가 지은 것이다. 본인들은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나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당연 욕쟁이 할머니 A씨이다. 과거에 젊었을 때는 발레를 전공하여 발레 학원도 운영했었다는데 여든두 살의 나이에 이른 요즘은 산을 오르는 것조차 힘겨워 한다. 그런데 유난히 에너지가 넘치는 순간이 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산 중턱에 위치한 밤 농장 주인과 시비가 붙을 때이다.
아, 요즘은 정말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철이다. 농장 주인 아저씨는 50대 중반이나 60대 초반쯤의 나이로 보여지는데 소문에 의하면 홀애비라고 한다. 등산로와 인접한 곳에 밤 농장이 있으니 자연 등산객들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다. 등산로에 떨어진 밤송이를 줍는 것까지야 누가 뭐랄 수 없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줍다 보면 욕심에 철조망 안쪽까지 기웃대게 마련이고 이 모습에 격분한 주인 아저씨는 매년 가을이면 등산객들과 사흘이 멀다 하고 시비가 붙었다.
그나마 밤이 열리지 않는 다른 계절에는 농장 주인 아저씨도 등산객들과 인사도 하고 가벼운 얘기도 나누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에는 욕쟁이 할머니 A씨와 느닷없는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이유인 즉슨 욕쟁이 할머니 A씨가 허락도 없이 밤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왕꼬들빼기 새순을 뜯으러 들어갔던 모양인데 평소에 억화심정이 있었는지 주인 아저씨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격하게 화를 냈다.
지나던 여러 사람이 만류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시비는 말싸움만으로 그럭저럭 끝이 났지만 그 불똥이 나한테까지 미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모여든 여러 사람 중에 그래도 내가 만만했던지 욕쟁이 할머니 A씨는 나를 붙들고 주인 아저씨에 대한 험담을 한나절 늘어놓는 게 아닌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할머니에게 붙들려 농장 주인 아저씨의 험담만 구구절절 듣다가 산을 내려왔다.
그나저나 욕쟁이 할머니 A씨에 따르면 농장 주인 아저씨가 아침 일찍 나오는 이유는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라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삼자대면을 하여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