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ㅣ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친구들이 모두 미니홈피에 열광을 보이고 있을 때 나는 미니홈피는 처다 보지 않았다. 좀더 활발한 이웃을 만들 수 있고, 화면 가득 사진을 올릴 수 있으며 음악 또한 내가 선곡한 것들을 올릴 수 있는 블로그의 맛에 흠뻑 취해 있었다.
2003년 배타 시절부터 시작한 블로그를 1년 정도 하고나니 어느덧 메인에 올라와 있을 때가 몇 번 생기더니 수십 명이었던 이웃이 하루에 몇 백 명씩 늘어났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매스컴이란 참 대단한 것이구나! 놀랐었을 때였는데 하루에 수백 명씩 늘어났던 이웃보다 내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나의 포스트를 홀랑 마우스 그래그 하나로 자신의 블로그에 붙여놓기 한 사람들의 행태였다.
결국 그들을 발견하고는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그들의 행동에 분개하며 결국에는 아이디 삭제까지 감행하며 블로그를 없앴던 적이 있었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가는 그들의 행위에 분개했지만 그때는 그들 또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그 어떤 양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너무나 급속도로 변하는 인터넷 환경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익명의 존재들은 무섭고 양심 없고 무감각하다.
이런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었다.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의 가장 큰 취약점은 스크랩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정보를 공유하는 곳에서의 스크랩은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을 개선하고자 느끼는 오른쪽 마우스를 막아놓아 복사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에 나는 가장먼저 박수를 보냈고 좋아했었다.
친구는 몇 년 동안 드라마 보조 작가 일을 했었다. 친구는 하루에 열 개씩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따른 에피소드들을 써내야 했지만 오년 동안 한 번도 친구의 이름으로 방송된 적이 없이 보조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친구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메인 작가 이름으로 방송되었다. 이런 일들이 어디 방송국뿐이겠는가. 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올라가져 있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어글리 베티>에서 베티는 수도 없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올려놓지만 그녀의 이름으로 올라가기보다는 그의 사장이름으로 혹은 대표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 회사 구조의 익숙한 방법일 수 있겠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생각을 훔치는 것에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 많고 물건보다 덜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는 것만 같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속의 작가는 중학교시절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었다. 집 식구들을 두고 혼자서 전학의 꿈을 꾸거나 고아가 되고 싶다고 느끼는 엉뚱한 아이였다. 소리지른 것이 싫고 목만 아프다는 웅변을 때려치우고 시나 소설을 쓰는 백일장에 나가겠다는 작가는 결국 백일장에 나가게 되고 그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만다.
정류장에서 느껴지는 그 아릿한 향수와 함께 작가는 남의 글의 일부를 자신의 백일장에 인용하고 그것을 하필 자신의 백일장을 지도했던 국어선생님, 즉 작가의 담인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별이 내려졌다.
그것은 오백 매에 달하는 반성문을 쓰는 일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딱 한번 반성문을 써 봤던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열줄 이상 쓰지 못한 반성문을 다는 선생님에게 종이를 더 달라고 하면서 장작 10장의 반성문을 써내려갔다. 그 반성문을 읽으셨던 선생님은 내게 딱 한 가지만 말씀하셨다. 종이 한 장을 다시 주시면서.
“10장을 1장으로 요약해 놓고 집으로 가거라. 넘쳐서도 부족해도 안 된다.”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10장을 다시 1장으로 줄이기 위해 학교에 남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열장을 한 장으로 줄이면 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말이 더 꼬였고 힘들었다.
열장을 썼던 반성문의 시간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서여 한 장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다음날 나를 불러 다시 한 장을 열장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하셨다.
그때의 선생님의 생각을 지금에서야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게 되었지만 그때는 전혀 선생님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잘못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했건만, 남들보다 말이 많은 내가 좀 많이 반성문을 썼다고 한들 너무 한일 아니었나 싶었지만 지금은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의 담인 선생님이 왜 작가에게 오백 매에 달하는 반성문을 쓰라고 하셨는지 작가 또한 삼십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몇 달 남지 않았다는 작가의 담임선생님이 작가의 한 번에 다 쓰지 못한 작가의 반성문을 연재하듯 가지고 오는 그 날들의 기쁨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그것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들 알고 있으니 얼마나 벅차고 어련하고 애틋할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는 작가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 아내가 아이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목련이 지고 선생님이 떠나시고 하얀 목련 봉우리가 작가의 아내에게 심어졌다.
애틋하게 끝내는 작품 속에서 가장 마음을 울렸던 구절은 시인 신달자 선생님의 “성실성을 이기는 운명은 없다.”라는 말이었다.
모두가 평범하게만 살지만 성실하게 움직이는 자만이 원하는 것에 혹은 가혹한 운명 앞에 당당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을 알게 해 주신 작가의 담인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문득 내게도 그런 깨우침을 주셨던 나의 선생님이 보고 싶어진다.
이런 아련함을 선사해주신 작가에게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