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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ㅣ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평점 :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보는 드라마속의 한국의 모습은 부유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소설 삶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삶은 드라마속의 화려한 삶의 거울의 뒷면처럼 음습하고 어둡기만 하다. 마치 열두시가 되면 마법이 사라지는 신데렐라처럼 현실로 돌아와 나를 보는 것 같다. 소수의 일부만이 존재하는 직장속의 본부장님보다 일반 사원의 삶이 훨씬 많은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였는지 김이설의 <나쁜피>를 읽는 내내 드라마를 보면서 잊고 싶은 삶의 우울한 단면을 잘라내며 모른척하고 싶었던 지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속의 판타지만이 내 삶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김이설의 소설 속 하층 계급의 주인공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소시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소설의 트렌드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성인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성인이 등장하거나 성인이 아니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성인의 세월을 넘긴 미성년들이 나온다. <나쁜피> 또한 주인공 화숙은 노처녀이지만 상처로 인한 성숙도지 못한 청춘을 아직 보내지 못한 성인이다. 화숙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미는 밤이건 낮이건 딸 앞에서도 겁탈을 당하며 살았다.
뺨 한대만 맞아도 일어나지 못하는 손을 가지고 있는 외삼촌과 알코올 중독 할머니, 자신의 첫사랑마저 가져가버린 외삼촌의 딸 수연은 화숙에게 가족이 아니라 그녀의 더러운 피를 나눈 어쩔 수 없는 가족일 뿐이다. 그 가족은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선처럼 천변 어귀 저쪽과 이쪽으로 나눠진 이쪽의 고물상이 즐비한 퇴락한 도시의 후미진 곳에 살고 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화숙이라는 인물 때문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것을 마련해 본 오락실은 이제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생겼고, 결국 상가 주민들의 원망을 받으며 화숙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던 오락실을 잃고 말았다.
요즘은 늦은 나이의 결혼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화숙에게 결혼은 그녀의 삶에 더욱 평범하지 않을 일정 같은 것이 되었다. 정신지체의 엄마 밑에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게 자란 화숙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담임에게 말하며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화숙은 그런 담임에게 성추행을 당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자신의 서러운 삶을 사촌 수연에게 분풀이를 하며 세월을 지워냈다. 남들처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고 싶은 아주 평범한 서른 살 여자의 꿈을 수연이 이루며 사는 것을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다. 그저 남들처럼 그렇게, 자신의 옆에 있는 수연처럼 살고 싶지만 화숙에게는 그런 삶이 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지만, 시간은 그 주인에 따라 각각의 몫으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같은 10년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학부형이 되고, 빚쟁이가 되기도 하며, 생을 끝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과거에 매몰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앞만 보며 뛰어갔을 것이다.” (P122)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똑같이 소비하지 못한 화숙의 분풀이는 늘 수연에게로 돌아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화숙이 자신보다 십여 년이나 많은 아저씨와의 불륜이 애처롭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절대로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수연을 좋아하는 재현에게 향하는 연정의 마음을 접지 못하는 것을 보며 더욱 마음이 쓰렸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좋아지고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기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재현은 화숙이 아닌 수연에게 마음이 있고 끝까지 수연을 놓지 않았다. 사랑 따위도 화숙에게는 공평하지 않다.
화숙의 가정은 폭력적으로 그려졌다. 엄마의 성폭력, 외삼촌이 죽어가는 엄마에게 다했던 폭력, 걸핏하면 때려대는 외숙모에게 다했던 가정폭력, 딸이라고 예외가 없었던 폭력 속에 화숙은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었다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고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삼촌에게 밀고하거나 엄마가 당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수연에게는 화숙은 가해자가 되어 그녀의 지친 사람의 이면을 뒤집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주인공 화숙을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짧을 얘기를 들어주는 일을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화숙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녀의 지친 삶을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짧은 경장편의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것은 화숙과 수연의 딸 혜주, 그리고 아이를 잃고 아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오로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혜주의 엄마가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은 진숙과의 결합 때문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처럼 전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시간에 등을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던 영화처럼 <나쁜피>속의 세 사삼의 가족탄생은 지루했던 삶을 끝내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동화의 끝부분 같기도 했다. 수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있을 것 같지 않는 아버지의 분노로 떠났던 외삼촌은 의문의 죽음 맞이하며 지붕위에 올라가 호령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은 화숙의 몫이 되었다. 오락실을 잃고 다시 그녀의 소유가 되는 두 번째 그녀의 소유물이 되었다. 말을 잃었던 수연의 딸 혜주는 말을 찾아가고 아이를 잃었던 진숙은 어미를 잃은 혜주를 자신의 딸로 찾아갔다. 그들은 잃었던 것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리고 찾았던 것들을 자신의 자아에 넣으면서 새로운 가족이 된 것이다. 그들의 몸속에 어떤 피가 흐르건 그들은 그냥,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천변이 부옇고 흐려지고 있었다. 황사가 걷히면 더욱 따뜻해질 것이었다. 봄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p179)
천변에 봄이 오면서 그들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에 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엄마가 죽었던 분류장 앞에서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꺼내며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그 말처럼 이제 평등한 것들을 찾아 나갈 것이다.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것을 더 많이 찾아 나설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나는 화숙이 좀 더 편하게 하루를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어디쯤 머물고 있을 수연을 화숙이 조금 더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세상을 등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연을 많이 그리워하며 그녀의 삶을 같이 이어나갔으면 한다. 그래야 그녀의 피해의식이 그녀의 사람을 잠식시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화숙이 조금은 수연에게 미안해하며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