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한창 보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주류 음악과 비주류 음악의 논점들을 생각해 보았다. 특히 홍대에 가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는 인디밴드들의 음악이 어쩜 그림으로 치면 이런 민화와 같은 장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미술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고 나서인지 우리 민화들의 얘기에는 인디밴드 같은 생소하고 너무 담백하고 화려하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디든 기타 하나 들고 자리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속삼임임이 들리는 것 같은 민화들의 그림에 대한 감상은 민화를 채워 넣은 먹과 같은 움직임이다.

덧발라지는 유화와 다르게 점하나 찍으면 사르르 번져서 선이 그어지는 번짐과 여백은 아직 다 채워나가지 못하고 있는 삶의 단면이 아닐까.

 

책을 통한 민화에 대한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조금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민화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민화가 오히려 사실적인 그림이기보다는 관념적인 그림이 더 많다는 것이다. (P27) 대상을 현장이나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관념 속에서 재구성한 특색을 보인다고 한다. 풍자를 통한 그림이 민화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런 재구성을 통한 또 다른 현실 반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민화에 펼쳐진 추상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인 부분이 많다 (P26) 현실을 그린 것 같지만 현실성이 부족하고 상상의 세계인 것 같지만 현실에 기반을 주고 있는 것, 그것이 현실이자 꿈이고 실재이자 환상을 그려내는 것이 민화라고 할 수 있겠다.

 

“민화의 매력은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보다 대상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짜임새에 있다. 그림 속의 대상들을 하나하나 분해한 뒤 이들을 새로운 구조 속에 재편성했다. 그러한 점에서 민화는 시각의 세계가 아니라 관념의 세계이고,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다.” (P94)

 

 

무명화가가 펼치는 무한한 변화의 상상력은 기존의 모티브를 넓히고 해체하고 변형하고 있다. 하지만 민화는 문명 자유 속에서 태어난다. 인디밴드들의 음악이 훨씬 주류 음악보다 더 통쾌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런 부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민화는 소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서민들의 복잡한 표현보다는 단순한 표현을 좋아하고, 입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평면적인 이미지를 선호한다. 단순함을 극대화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민화의 특징으로 우선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억압적이 않다. 미술관에 관람표를 들고 들어가 한참을 뭔가를 생각하며 봐야 할 것 같은 그런 부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민화는 색체가 밝다. 또한 그런 부분의 정서적으로도 밝게 표현되는 것 같다. 여기에 서민 특유의 긍정적인 가치관이 덧붙여지면서 단순히 정서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어려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민화에 배어 있는 흥취는 개인적인 정서 못지않게 사회적인 정서 차원의 요인도 있는 것이다. (P48)

 

우리 선조들이 그린 다양한 민화를 통해 그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마지막 주제속에 유토피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토피아는 우리의 꿈이요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은 매우 현실적인 데서 출발한다는 말처럼 그림의 관념화로 현실을 묘사했지만 그 시작은 결국 현실인 것이다.

건강과 복, 돈 가정의 행복을 위한 꿈과 희망의 유토피아가 때로는 호랑이로, 그 호랑이를 조롱하며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까치처럼, 승천하는 용처럼, 용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잉어처럼, 그 잉어가 들어가고자 했던 그 등용문처럼 우리는 꿈꾸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수천 년 흘렀어도 삶의 본질은 결국 행복의 시작 앞에 있다. 그 시작을 위해 화선지에 번지는 먹처럼 천천히 담담하게 현실이라는 그림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 철학의 풍경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사진 철학의 풍경들

 

“똑같은 피사체를 찍었는데 ‘내 사진은 왜 다른 사람의 사진보다 감각이 떨어지나’ 고민하게 되고, 똑같은 곳을 갔는데 ‘왜 나는 저런 장면을 못 보고 찍었나.’를 고민하게 된다. 시선의 차이가 있음은 당연한 것인데도, 보는 눈이 없다고 한탄하고 감각이 없어도 자책하기도 한다. ”(P15)

 

언젠가 삼청동에 갔더니 깜짝 놀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놀랄 수 있는 경우를 보았다. 삼청동의 그 좁은 길을 사이에 누고 남녀 짝으로 있거나 그렇지 않은 동성들까지도 모두 비싼 DSLR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침 어느 쪽 동아리에서 출사를 온 것인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까지 찍는 것을 보니까 우리나라 카메라 보급률에 놀랄 수밖에 없더라.

개인 미니 홈피의 시대가 열리면서 트위터를 통해서도 이제 일상의 모든 모습은 작품이 되었고 기사가 되었다. 아무렇게나 찍는 사진도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의미를 간직 한 채 작품으로 남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사진 찍는 횟수는 늘어나고 있고 간혹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감각의 여부까지 깊이 있는 의미를 나누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사진을 찍는 감각은 필수지만 이 감각은 상당부분 학습을 통해 배양되고, 꾸준한 노력과 학습으로 감각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노력의 방법까지 책속에서 예시해주고 있다. 참 친절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사진 한 장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 속에서 철학을 꺼내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사진이 요구하는 감성미학 혹은 감각적 감성을 어떻게 계발되고 어떻게 배양되는지 많은 텍스트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철학은 사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철학이 사진에게 주는 분명한 선물은 사유를 통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멘토로서의 역할이다. 존재와 사간에 대한 사유의 개념에 대한 얘기가 사실 좀 어렵게 다가왔는데 이럴 때는 사진 한 장에 쉽게 이해되는 부분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왜 이토록 사진을 수없이 찍으며 열광하는 것일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삶고 마주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빠져 있고 열광한다. 모든 것이 사진을 위해 준비되고 사진 찍기를 기다린다.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P83)

사라진다는 것은 과거가 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미래가 사진으로 남겨 놓는다는 것은 시처럼 받아들여진다.

 

사진과 철학이 만나는 것을 인식의 풍경, 사유의 풍경, 표현의 풍경, 감상의 풍경, 마음의 풍경으로 챕터를 나눠 설명한 저자의 사진 철학을 살펴 읽는 동안 이토록 쉽고 이해가 쏙쏙 들어가게 만들어진 책은 참 오랜만에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수많은 강연을 통해서 이뤄진 결과물이겠지만 가끔 이론서라고 칭하는 것들은 얇아도 몇 페이지를 읽고 나면 지루해 더 이상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사진을 이해하는 초보자들을 위해서도 좋은 입문서와 같은 길 안내서라고 생각된다.

 

얼마 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는데 그 표지에 있는 변기 사진을 이곳에서도 보았다. 뒤샹의 <샘>이었다. 아는 사진 한 장 나오니 어찌나 반갑게 그 페이지를 맞이했는지. 역시 아는 만큼 받아들여지는 부분의 폭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브제라는 말과 함께 예시된 뒤샹의 사진과 작품 얘기는 대중예술책을 읽은 그동안의 가장 큰 나의 발견이었다. 몇 권 읽고 나니 나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면 사진을 찍고 싶어져야 하는 것일 텐데 이상하게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 공부를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뭘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은 어쩜 음악일 것 같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들으면서 뛰었던 심박수를 낮추며 평온을 찾아가는 것 중에 음악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 음악과 적절한 짝꿍을 이루는 것은 또 그림이 한 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 적절한 음악의 배경지식과 그림의 이해가 있다면 훌륭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겠지만 좀처럼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는 이해력을 가졌다면 이 책이 주는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다. 삼백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주일을 넘게 가지고 들쳐봤다 덮었다가를 몇 번이나 했다. 간혹 많이 보았던 작가나 그림이 나오는 부분은 심도 있게 읽고 살펴보았는데 그걸 보더라도 적당한 수준으로 알고 읽는 것은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부분의 한계가 얼마나 큰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페이지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화풍의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이 미학에 대한 미천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한 가장 큰 미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 편』에 이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으로 나온 책은 3편을 예고하고 있다. 전편에 고전예술에 대한 부분을 다뤘다면 두 번째 책에서는 모더니즘과 함께 아방가르드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담겨있다.

이미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 시리즈를 통해 서양미술과 미학의 부분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은 적이 있는 진중권의 미학 얘기에는 그의 깊은 철학에 부러움만 가득할 뿐이다. 전작 시리즈는 2편까지 밖에 못 읽었는데 이번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몇 편까지 나올지 모르겠지만 맞춰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살인사건의 소설처럼 점점 어려워지는 용어들과 해설들에 깊은 한숨이 쉬어진다.

 

이 책의 모티브와 뼈대가 되는 아방가르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운동이었다, 라는 시작 하에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을 풀어 놓는다. 음악이나 문학도 그렇지만 그림 또한 순수함으로 시작으로 예술 활동을 펼치지만 차츰 고전적인 미와 예술의 이상은 무너져 내리고 그것을 모더니즘이라 일컬으며 그 모더니즘은 동의어처럼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다.

 

사실 책 얘기에 시대적 예술가들의 예술의 지향성이나 방향에 대한 얘기에 크게 공감을 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비교 분석은 가장 큰 공감을 한 부분이었다. 예술은 순수성을 가지고 시작하고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변화들을 꾀했지만 결국 그 예술 또한 키치, 즉 대중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치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과 문학이다. 이윤 추구를 위해 모든 문화적 경험을 키치로 만들어 소비하는 산업사회에서 아방가르드는 문화의 진정성을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학)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P350)

하지만 아방가르드와 키치, 이 두 개의 동시적인 문화 현상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키치가 추구하는 참된 빛이 아방가르드와 함께 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에서 큰 오류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는 전통의 거부에 있지만 키치야 말로 새로움의 제스처를 갖고 있다. 같다고 생각되는 부분이지만 사실 이 둘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의 길에는 예술가들의 미래가 보인다고 했다.

“예술가는 대중의 앞서 미지의 땅에 들어간다. 거기에는 물론 희생이 따르나,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개척해놓은 그 길을 따라 사회는 안전하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348)

 

사실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 아방가르드 시대의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쩜 모두 어떤 암호를 풀어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혼란하고 모호한 의미란 결국 ‘암호’일 뿐이다. 암호에는 보통 해법이 있지만, 현대회화에는 객관적 해법이 없다. 결국 현대회화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리라.” P21

 

이 책을 다시 완독하고 나면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과 얘기할일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보는 드라마속의 한국의 모습은 부유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소설 삶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삶은 드라마속의 화려한 삶의 거울의 뒷면처럼 음습하고 어둡기만 하다. 마치 열두시가 되면 마법이 사라지는 신데렐라처럼 현실로 돌아와 나를 보는 것 같다. 소수의 일부만이 존재하는 직장속의 본부장님보다 일반 사원의 삶이 훨씬 많은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였는지 김이설의 <나쁜피>를 읽는 내내 드라마를 보면서 잊고 싶은 삶의 우울한 단면을 잘라내며 모른척하고 싶었던 지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속의 판타지만이 내 삶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김이설의 소설 속 하층 계급의 주인공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소시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소설의 트렌드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성인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성인이 등장하거나 성인이 아니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성인의 세월을 넘긴 미성년들이 나온다. <나쁜피> 또한 주인공 화숙은 노처녀이지만 상처로 인한 성숙도지 못한 청춘을 아직 보내지 못한 성인이다. 화숙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미는 밤이건 낮이건 딸 앞에서도 겁탈을 당하며 살았다.

뺨 한대만 맞아도 일어나지 못하는 손을 가지고 있는 외삼촌과 알코올 중독 할머니, 자신의 첫사랑마저 가져가버린 외삼촌의 딸 수연은 화숙에게 가족이 아니라 그녀의 더러운 피를 나눈 어쩔 수 없는 가족일 뿐이다. 그 가족은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선처럼 천변 어귀 저쪽과 이쪽으로 나눠진 이쪽의 고물상이 즐비한 퇴락한 도시의 후미진 곳에 살고 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화숙이라는 인물 때문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것을 마련해 본 오락실은 이제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생겼고, 결국 상가 주민들의 원망을 받으며 화숙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던 오락실을 잃고 말았다.

 

요즘은 늦은 나이의 결혼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화숙에게 결혼은 그녀의 삶에 더욱 평범하지 않을 일정 같은 것이 되었다. 정신지체의 엄마 밑에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게 자란 화숙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담임에게 말하며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화숙은 그런 담임에게 성추행을 당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자신의 서러운 삶을 사촌 수연에게 분풀이를 하며 세월을 지워냈다. 남들처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고 싶은 아주 평범한 서른 살 여자의 꿈을 수연이 이루며 사는 것을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다. 그저 남들처럼 그렇게, 자신의 옆에 있는 수연처럼 살고 싶지만 화숙에게는 그런 삶이 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지만, 시간은 그 주인에 따라 각각의 몫으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같은 10년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학부형이 되고, 빚쟁이가 되기도 하며, 생을 끝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과거에 매몰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앞만 보며 뛰어갔을 것이다.” (P122)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똑같이 소비하지 못한 화숙의 분풀이는 늘 수연에게로 돌아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화숙이 자신보다 십여 년이나 많은 아저씨와의 불륜이 애처롭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절대로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수연을 좋아하는 재현에게 향하는 연정의 마음을 접지 못하는 것을 보며 더욱 마음이 쓰렸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좋아지고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기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재현은 화숙이 아닌 수연에게 마음이 있고 끝까지 수연을 놓지 않았다. 사랑 따위도 화숙에게는 공평하지 않다.

 

화숙의 가정은 폭력적으로 그려졌다. 엄마의 성폭력, 외삼촌이 죽어가는 엄마에게 다했던 폭력, 걸핏하면 때려대는 외숙모에게 다했던 가정폭력, 딸이라고 예외가 없었던 폭력 속에 화숙은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었다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고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삼촌에게 밀고하거나 엄마가 당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수연에게는 화숙은 가해자가 되어 그녀의 지친 사람의 이면을 뒤집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주인공 화숙을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짧을 얘기를 들어주는 일을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화숙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녀의 지친 삶을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짧은 경장편의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것은 화숙과 수연의 딸 혜주, 그리고 아이를 잃고 아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오로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혜주의 엄마가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은 진숙과의 결합 때문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처럼 전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시간에 등을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던 영화처럼 <나쁜피>속의 세 사삼의 가족탄생은 지루했던 삶을 끝내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동화의 끝부분 같기도 했다. 수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있을 것 같지 않는 아버지의 분노로 떠났던 외삼촌은 의문의 죽음 맞이하며 지붕위에 올라가 호령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은 화숙의 몫이 되었다. 오락실을 잃고 다시 그녀의 소유가 되는 두 번째 그녀의 소유물이 되었다. 말을 잃었던 수연의 딸 혜주는 말을 찾아가고 아이를 잃었던 진숙은 어미를 잃은 혜주를 자신의 딸로 찾아갔다. 그들은 잃었던 것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리고 찾았던 것들을 자신의 자아에 넣으면서 새로운 가족이 된 것이다. 그들의 몸속에 어떤 피가 흐르건 그들은 그냥,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천변이 부옇고 흐려지고 있었다. 황사가 걷히면 더욱 따뜻해질 것이었다. 봄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p179)

 

천변에 봄이 오면서 그들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에 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엄마가 죽었던 분류장 앞에서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꺼내며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그 말처럼 이제 평등한 것들을 찾아 나갈 것이다.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것을 더 많이 찾아 나설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나는 화숙이 좀 더 편하게 하루를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어디쯤 머물고 있을 수연을 화숙이 조금 더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세상을 등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연을 많이 그리워하며 그녀의 삶을 같이 이어나갔으면 한다. 그래야 그녀의 피해의식이 그녀의 사람을 잠식시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화숙이 조금은 수연에게 미안해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 / 김기찬 (지은이) | 눈빛 | 2011-08-27 

오지 않을것 같은 가을이 왔다.   여름, 올해는 정말 많은 비가 내렸다. 모든것들이 떠내려 갈것 같았던 그 여름은 가을까지도 떠내려 보내는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정직하고 착실하다. 계절을 시간 앞에 가져가 놓았다.  그 계절앞에 마음이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  골목은 늘 두려움과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을 잘 걷지 못해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야만 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매번 그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서성였던 그 골목길도 떠오른다.  

2005년 향년 68세로 별세한 사진가 김기찬 선생이 남긴 6권의 ‘골목안 풍경’ 이라는 말만 들어도 작가가 스쳤을 많은 인연의 골목길이라는 그 풍경이 나의 오랜 기억과 함께 오버랩이 된다. 떨리는 가슴이다.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  

 외국 여행을 가도 그곳의 유명한 명소들을 찾가가는것보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고 있는 시장을 한번 갔다 오면 훨씬더 그 나라의 정서를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면 꼭 주변의 시장은 한번씩 갔다오곤 한다. 그만큼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이 주는 모습이 진짜 모습같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림도 그럴때가 있다. 이름없이 그려지고 사라지는 민화들속에 우리의 모습이 더 정겹게 남아 있는것 같다. 그런 기분때문일까, 책을 열기도 전에 참 소란스러울것 같다. 전통없이 자유롭게 그려졌을 그들의 그 자유가 펄떡인다.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때  

요즘 드라마에는 부자집 본부장님이나 사장님이 주인공이 아닌 드라마가 거의없다. 우리나라에 재벌이 뭐 얼마나 있다고 나오는 주인공마다 다 그렇단 말인가. 그들은 참 일도 안하시고 무슨 아픔이 그렇게 많단말인가. 그래서였을까 그런 생각때문에 이 책은 가슴아프게 다가 올것 같다. 김기덕 감독님이 그랬던가. 너무나 가학적인 영화라는 말에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가학적이고 무서운 곳이라고.  

영화 리스트올려진것 보았는데 나는 영화와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오르면 당연히 라스폰트리에의 <어둠속의 댄서>가 떠오르는데 그 영화가 빠져있어서 섭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