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1 - 호세아강해설교 소선지서 강해설교 시리즈
김서택 지음 / 홍성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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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2편과 함께 읽고 리뷰를 작성했다. 하나님의 연애편지 호세아를 읽어가는 일은 기쁘고도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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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2 - 호세아강해설교
김서택 지음 / 홍성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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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청년들과 호세아를 함께 읽었다. 책을 읽고, 성경을 읽고, 그 의미에 대해 묵상했다. 송태근 목사의 "내겐 사랑만 남았다"라는 책을 통해서 호세아에 관한 책을 알게 되었고, 김서택 목사의 호세아 강해 설교 1권과 2권, 베일리 목사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선지자 호세아" 그리고 송태근 목사의 호세아 설교를 함께 읽었다. 책에 주는 감동의 정도를 적다면 김서택<송태근<베일리 순이며 자세한 정도는 김서택>송태근>베일리 순이다. 베일리의 책이야 성경 동화로 생각할 수 있으니 논외로 치고, 송태근과 김서택의 책은 모두 호세아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집이다. 그것도 둘다 강해에 충실한 강해 설교집이다. 두 책을 놓고 읽으면서 왜 김서택 목사를 이 시대 강해 설교의 대가로 꼽는지 알 수 있다. 비록 읽어 나가는데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호세아의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꼭 선택해서 읽을 것을 권한다. 혹 호세아를 본문으로 설교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서택 목사의 강해 설교집은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호세아의 주제는 범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이다. 범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이라는 주제는 비단 호세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선지서들이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그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선지서는 이러한 주제가 특징적으로, 그리고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거의 모든 장이 이스라엘의 범죄와 배은망덕함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포기하지 못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각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호세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이런 포맷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호세아서를 읽는다면 대략적인 내용은 파악이 되는 것이다. 물론 디테일을 더 파악해야 한다는 숙제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호세아를 읽어가면서 묘한 선지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선지자 활동은 결혼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 결혼이라는 것이 아주 기묘한 결혼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결혼인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하여 충분히 예상 가능한 파국을 맞이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호세아가 고멜을 다시 데려온다. 그것도 돈을 주고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면서 말이다. 왜 성경은 호세아 개인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가? 호세아의 개인의 가족사를 조금만 더 크게 확대해 놓으면 이스라엘 민족이 당면한 사회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호세아가 상상밖의 인물하고 결혼을 했듯이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고멜이 그런 호세아를 배신하고 불륜 상대를 따라 가출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물질의 풍요와 외교적인 안정을 의하여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들을 따라 갔다. 그러다가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 고멜을 호세아가 다시 데려오듯이 하나님께서 포로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호세아의 가정의 사건을 사용하신 것이다. 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 애틋한 사랑! 그래서 호세아 강해 설교집의 제목을 "하나님의 붙붙는 사랑"이라고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호세아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는다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세아를 읽는 시간이 개인적으로 참 즐거우면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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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애 2013-10-2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호세아서는 너무너무너무 좋은 책.
연약하게 우왕좌왕하는 사랑이, 연인에 의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삶의 근원이,
하루에도 수백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열정의 롤러코스터가
하나님을 빼어닮은 결과라는 걸 알고 얼마나 안도했던가.
"내가 너와 같다"고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맨얼굴이라고 생각해.
책 안 읽어봤지만 기억해두겠으

saint236 2013-10-24 14:30   좋아요 0 | URL
흠..어쩐 일로 여기까지....
 
내겐 사랑만 남았다 온전한 삶 시리즈 2
송태근 지음 / 포이에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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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호세아 강해 설교. 믿음은 이런 것이다를 보고 구매했다. 그러나 약간의 후회가 생긴다. 호세아에 대한 강해 설교를 참조하고 싶다면 김서택 목사의 호세아 강해를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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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한 선지자, 호세아
E.K. 베일리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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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중에 리플레이스먼트(Replacement)라는 영화가 있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이 영화가 정식으로 개봉되지 못했다. 매트릭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나온 영화임에도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수작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순전히 미식축구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미식축구를 다루는 영화가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런 의혹을 짙게 만든다.) 우연히 비디오 가게 아저씨의 추천을 통해서 접하게 된 영화인데 그 후로 난 이 영화를 수십번은 본 것 같다. 2000년에 만들어진 영화라 10년이 훌쩍 지난 영화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로운 힘을 얻곤 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슈거볼(미식축구의 대학 올스타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에서 쿼터백(축구의 센터포드격이랄까?)으로 출전했지만 철저하게 실패하고 그 이후 미식축구를 떠난 쉐인 팔코라는 남자가 한물간 맥킨지 감독의 설득으로 다시 미식축구로 복귀하게 된다. 그것도 프로선수들이 파업을 했기에 시즌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팀 전체를 대체한 선수들을 데리고 말이다. 그 중에는 실력은 있지만 특출나지 못해서 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 사람도 있고, 경찰로 전향했다가 부상을 입고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다. 황당하게 스모 선수 출신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팀웍을 맞춰가며 승리하게 되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된다. 그렇지만 단지 그뿐이다. 포스트 시즌에서 이들이 경기에 뛸 기회는 없었다. 선수들이 복귀하기 전에 임시로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도전은 무의미한 도전이 아니었다. 모든 영화가 끝난 후 잔잔하게 흐르는 맥킨지 감독의 독백이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센티넬즈 대체선수들이 스타디움을 떠날 때 축하퍼레이드나 운동화나 음료수, 시리얼 광고 계약은 없었고 남은 건 빈 라커룸과 집에 갈 버스뿐이었지만, 그들이 몰랐던 건 그들의 인생이 영원히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창조한 것이었다. 짧았긴 했어도 그 위대함은 영원히 남는다. 모든 운동선수들이 만회할 기회(Second Chance)를 꿈꾸는데 그들은 그 기회를 살린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집? 돈? 자동차? 애인?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잡으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온다. 철저하게 실패하고 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이다. 그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은 이 모든 잘못을 만회할 기회이다. 그렇지만 만회할 기회를 원하면 원할수록 세상이 그렇게 말캉말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결코 실패한 자들에게 만회할 기회(Second Chance)를 주지 않는다. 단지 루저라는 딱지를 주고 상처에 문댈 소금을 줄 뿐이다.

 

  호세아는 Second Chance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다. “내가 너희에게 Second Chance를 주겠다.”는 것이다. 호세아와 결혼했던 고멜이라는 여인이 선지자의 아내라는 현실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던 세상이 그녀에게 준 것은 쓰리디 쓰린 아픔뿐이다. 결국 그녀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대개 이런 경우는 “그 녀석은 원래 그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지만 호세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만회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그 기회를 잘 살렸을 것이다.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예수가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셨다는 의미이다. 이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베일리는 얇디 얇은 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준다.

 

  부끄럽지만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한때 깊은 방황을 했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지만 토할만큼 힘들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만 싶었고, 수면제를 여기저기 사모았다가 한 입에 털어넣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 어머니가 생각이 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다. 병원을 찾아갔다. 중화제를 맞고 다시 살아났지만 몸에 무리가 갔는지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물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 후로 10년이 흘렀고 당시의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은 나와 동일한 어려움 속에서 만회할 기회를 포기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나도 만회할 기회를 살린 것이다. 고멜처럼 방황하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리고 인생에서 만회할 기회를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호세아를 읽으면서, 그리고 호세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지 모른다. 그 상처를 안고 교회를 찾아오지만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그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상처를 들쑤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회할 기회를 마치 자신들만의 전유물이든 독점한다. 그래서 상처를 입고 만회할 기회를 찾아 교회로 왔던 이들이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발길을 돌린 사람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기회는 요원할 뿐이다. 그들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 만회할 기회를 찾지만 또 다른 일부는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도 세상과 똑같이 만회할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독선적인 모습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시대 우리가 호세아를 깊이 읽어야할 이유와 필요가 여기에 있다. 혹 지금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서 만회할 기회를 간절히 찾고 있다면 호세아를 읽기를 권한다. 혹 호세아를 그대로 읽는 것이 너무 어렵다면 베일리의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얇지만 감동은 깊고, 여운은 큰 책이다.

 

  여담이지만 키아누 리브스도 이 영화를 통하여 만회할 기회를 찾았단다. 그가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 묘하게도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많은 영화를 찍었다. 사람들은 다수의 작품에 참여하는 그를 깎아내리기에 열심이었지만 당시 그와 애인 사이에 생긴 아이가 유산되었고 머지않아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그 아픔을 잊기 위하여 그는 많은 작품에 참여했고, 이 영화의 곳곳에서 보이는 슬픈 눈빛은 만회할 기회를 간절히 찾고 있던 그의 본심이 그대로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아마 그도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만회할 기회를 발견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호세아가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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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5-3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가도 좋아합니다만 누가를 더 좋아합니다. 복음서 중에서는 마가복음을 더 좋아해요.

saint236 2012-05-31 23:29   좋아요 0 | URL
마가복음이라..가장 처음에 씌여진 복음서죠. 마가 또한 만회할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죠...
 
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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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신없는 사회가 유행이다. 과거에도 무신론에 대한 여러가지 서적들이 출간되었지만 요 몇년 새에 꽤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만들어진 신을 비롯한 도킨스의 책들, 필 주커먼의 신없는 사회,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등. 여기에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의 책과 불가지론자들의 책을 더한다면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무신론이 꽤 힘을 얻고 종교를 박멸하겠다(도킨스), 심지어는 신이 없는 사회가 더 도덕적(주커먼)이라는 말에 열광하는 사회는 미국 같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성이 강한 기독교 국가에서 무신론의 전투력이 업그레이드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종교에 대한 실망의 반사이익을 무신론이 얻고 있는 것이리라. 종교성이 강하다는 것은 대개 종교가 근본주의적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근본주의적 성향의 종교는 세상을 타협의 대상이나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정복의 방식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 자본같은 세속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정복 행위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그 어디에도 신의 자리는 없다. 있다면 오직 인간의 욕망을 적당하게 포장하는 포장지로서의 신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중세를 뒤흔든 십자군 전쟁은 참으로 묘한 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백년 전쟁이 장장 백년을 끈 것만 해도 대단한데 십자군 전쟁은 1차부터 시작하여 7차까지 수세기를 끌어 온 전쟁이다. 거기에다 앙숙과도 같은 영국과 프랑스가 한 깃발 아래에서 전쟁을 했으며, 향후 유럽의 권력의 재편을 이끌어 왔으며,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동서양이 전쟁을 벌였지만 동시에 활발하게 접촉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서양의 교류 면에서도, 향후 권력의 재편 과정에서도, 문학적인 면에서도 십자군 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쟁이요,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아픔을 겪는 혼돈의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의의는 이정도 선에서 평가를 마무리하고, 재미있는 사실은 1차에서부터 7차까지 십자군 전쟁이라는 동일한 이름이 붙여졌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십자군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마 그 분기점은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했듯이 2차 십자군과 3차 십자군의 어느 지점쯤일 것으로 추정된다. 1차는 두말할 필요없이 성지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행하여진 종교적인 전쟁이다. 비록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진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모순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중세 기사들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지 그저 명분을 빌려 온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진행된 십자군을 뽑자면 나는 단연코 1차 십자군을 뽑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의 이름은 어느덧 하나의 포장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3차 십자군에서부터는 그 어디에도 신에 대한 신앙심은 찾아볼 수 없고, 사자심오아 리처드와 살라딘 같은 양측의 걸출한 인물들만이 등장하고 있다.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교황조차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물론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방법도 피를 흘려 회복해야 한다는 무력 일변도로 좁혀졌다.

 

  십자군 전쟁의 변질의 원인은 무엇인가? 미련하긴 했지만 순수했던, 그리고 다소 동서양의 문명의 접촉이라는 제한적이나마 순기능을 감당했던 십자군이 상대방을 박멸시키겠다는 극단주의로, 혹은 정적 제거를 위한 하나의 구실로 변질된 이유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신이 사라져버린 십자군의 자리에 인간의 욕망만이 가득하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자기의 무용을 뽐내고 싶어하는 기사들,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에게 십자군 참전을 요구하는 프랑스 왕,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같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베네치아, 같은 이유로 십자군에 참여한 제노바, 피사! 십자군을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이용하는 살라딘 이하 술탄들! 이미 십자군 전쟁 속에는 기독교의 하나님도, 이스람의 알라도 없고 오직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의 욕망만이 가득할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결국 교회에 대한 도전을 가져왔다.(이슬람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겠지만 이족 역사는 잘 모르기에 생략한다.) 지금까지 중세를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급속히 몰락해 버렸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럴수록 교회의 권위는 더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반대급부로 인간의 이성과 철학이 재발견되었고 르네상스의 시대로 점점 나아가게 된다. 십자군 전쟁까지 불사했던 교회의 근본주의 포지션이 인간의 욕망과 만났고, 나아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왜곡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에 비례하여 무신론과 교회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높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몇 년전 시대착오적으로 십자군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일반인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과 이를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데 있다. 9.11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보복전을 십자군으로 묘사한 것이다. 미국 이슬람계의 비난으로 이틀만에 취소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라크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이란까지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 운운 취소 이후 부시 행정부는 정의로운 전쟁, 정당 전쟁으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나나미가 책의 마지막에 지적한 대로 이 또한 신의 이름으로 빌린 인간의 욕망의 향연일 뿐이다. 신의 이름이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부분으로 살짝 윤색만 되었을 뿐이지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핵심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 없는 사회를 꿈꾸는 세상 속에서 절대 악일수밖에 없는 전쟁에 정당성과 정의를 끌어다 붙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명분을 뒤집어 쓰는 일은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십자군 전쟁과 같은 소모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전쟁이 다시 발발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인류에게 대재앙이 될것이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나나미의 시각에 대한 태클을 걸자면 십자군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던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베네치아에는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자기들의 욕망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베네치아나 십자군이나 거기서 거기다. 오히려 십자군들의 어리석은 열정을 이용하여 자국에 반기를 든 도시국가를 정벌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것은 비열하다 못해 저열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미는 이런 베네치아의 행태에 대해 호의를 표하다 못해 칭송 직전까지 간다. 같은 이코노믹 애니멀이라고 명명되는 베네치아에 대한 일본인 나나미의 동질감 때문인지, 아니면 향후 일본이 나가야 할 방향이 베네치아처럼 거점을 중심으로 바다를 점령하는 해양대국, 곧 대일본 제국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만약 후자라면 나나미의 시각은 그녀가 그렇게도 조롱하던 십자군의 어리석음과 묘하게도 닮아 있다는 것은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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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2-05-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과학교과서에서는 진화론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저희 학교 생물 선생님 한분도 창조과학론자에요.

saint236 2012-05-25 23:51   좋아요 0 | URL
진화론도 하나의 론이기는 합니다. 물론 창조론보다는 합리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 또한 상대적인 것이고요. 창조과학을 어떤 분은 사이비 과학으로 말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창조를 과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는 것인데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주장이 진화론의 허점을 찌르는 데에서 멈추어 선다는 것이지요. 요즘 종교전쟁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이 책의 결론이 창조든 과학이든 유일의 잣대가 되어버리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이 없어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