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Must say "No!"

   If U don't say it, U R Lucifer already! 

  나에게 누군가 이 책의 논지를 단 두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라고 말해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이미 루시퍼(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상황을 지지하는 공범자)이다."

  이 책에서는 스탠포드 대학 교도소의 모의 실험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하고 체제에 순응하는지에 대하여 끔찍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하여 얻은 생각들을 가지고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에 의해서 행해지는 온갖 수용소의 불의들에 대하여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접하면서 가장 처음에 놀란 것은 미국 사람이 자국의 이익을 위반하면서가지 당당하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용기에 놀랐다. 저자는 자신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지만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나는 그를 영웅이라 칭하고 싶다. 불의한 상황에 "No"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올해로 서른 하나인 나는 국민학교 세대이다. 요즘은 한글에서 국민학교라고 치면 빨간 줄이 그어질 정도로 틀린 말이 되었지만 일제 교육의 잔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국민학교를 지냈던 시대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교복을 다시 착용하는 세대가 되었다. 국민학교라는 말을 쓰면 너무 고리타분한 시대라 말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아니다. 불과 1~2년의 차이를 두고 초등학교라는 시스템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국민학교의 긑자락을 장식한 세대이다. 지금 20대 중후반들과 나이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아니 오히려 같은 세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나이지만 그래도 군부독재시절의 끝자락을 지나온 사람이기에 아직도 내 가치관 속에는 국가라는 강력한 이미지가 틀어박혀 있다. 왜냐? 국민학교 시절에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던 시절에, 노태우 정권의 기만적인 분열 정책에(물론 그 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력욕도 한 몫했지만)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좌절되었던 시기를 내 눈으로 보았던 세대의 사람이다. 국민학생인지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 판단을 하지 못하던 시기에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웠다. 아직도 기억 나는 것은 교과서의 가장 처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기록되어 있고, 대통령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교실 칠판 위에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도 북한의 김일성은 집에도 사진을 걸어놓게 시키는 독재자라는 명제를 배우며 자랐다. 가장 인기 있었던 만화는 "똘이 장군"이었으며, 일년에 한차례씩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다. 평화의 댐 공사를 위해 피같은 내 용돈을 모금했던 기억도 난다.

  이러한 시대를 거쳐오면서 내가 끊임없이 배워왔던 것은 국가는 신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암묵적인 동의가 넘쳐 흐르던 시대였다.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좌파요 빨갱이요, 살인자보다 더 무서운 범죄자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금에는 폐교가 될 정도로 시골 구석의 학교였다. 전교생이 백명이 안되는 학교였는데 그 학교 운동장에서도 최루탄 파편을 만져볼 정도로 시위가 빈번한 시기였다. 멋모르고 그 파편을 가지고 놀다가 눈을 만졌을 때의 그 쓰라림은 말로 할 수 없다. 그 후 "이래서 데모 하는 사람은 다 범죄자구나."라고 나만의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데모라는 말은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있어서 데몬이라는 말만큼 무서운 단어요, 언급조차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데모하는 모습, 그들을 진압하던 전경의 폭력을 보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우리 편이 나쁜 놈들을 때려 잡았다 말하던 창피한 기억까지 생생하다. 내 어린 기억에 "청년 이한열"은, "청년 전태일"은 빨갱이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나는 반공 글짓기에서 상도 받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생이라 불려졌다.

  그런데 내가 20살이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진리라 믿었던 것이 포장된 것들이요,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사실은 악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고3때 96년 한총련의 연대 사건을 보면서 욕을 하던 내가 어느새 한총련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으로 바른 생활에서 벗어나 데모에 참가하고 화염병을 들었고 쇠파이프를 들었다. 백골단을 조롱하면서 무서워 하기도 하였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것은 이것으로 정당화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선배들에 의한 의식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의식화라는 것 또한 주체만 바뀌었고 다를 뿐이지 지금까지 받아온 이데올로기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뒤로 맹목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판단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변했다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하다 그런다. 변했다 함은 폭력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한총련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의미요 여전하다 하는 말은 사회 개혁을 아직도 부르짖는다는 말이다.

  이런 나에게 참으로 흥미롭게 다가온 것이 이 책이다. 그 실험의 내용은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거금을 들여 700페이지짜리 책을 읽었다. 그리고 위의 두 문장을 결론으로 얻었다. 그리고 고민하던 부분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한열"은 왜 자신의 젊음을 바친 것일까? "전태일"은 왜 분신했을까? 왜 스없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면서 그리 투쟁했던 것일까?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가족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의가 보이는데, 악이 보이는데 참고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조까지는 아니더라고 침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행동한 것이다. 이들의 희생을 무릅쓰며 행동한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No"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이기에 말한 것이다. 나는 어떨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나는 어땠을까? 글쎄 뭐라 말하기 어렵다. 내가 그 시절에 안살아봐서 잘 모르겠다.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한 내 생각이다.

  얼마 안있으면 총선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말한다. 철저하게 느낀다. 연예인 이야기엔 거품을 물며 말하는 젊은이들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찌푸린다. 왜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냐 말한다. 그렇기에 "요즘 것들은"이라는 말로 질타 당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다. 정치 이야기하고 투쟁하면서 혹은 놀면서도 좋은 직장에 가던 시기가 아니다. 직장을 잡기 위해서는, 내일을 위해서는 한 눈 팔지 말고 오직 공부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상황이다. 그러나 분명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잘못이다. 그렇게 질타하는 시스템에 동조하며 침묵하는 것이다. 국민의 30%지지만 받고 대통령이 되는 현 시점은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뿐이다. 그러나 한번은 더 믿어보고 싶다. 젊은이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를 믿어본다.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방관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하는 공범자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일어서는 행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더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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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누가복음 10:37)

  예전에 학교를 다니면서 보았던 책이 있다. 신학영어 시간에 교재로 사용하였던 Paul Vallely의 "Bad Samaritans"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과 동일한 책인데 여기에도 비스산 이야기가 적혀 있다. 당시 나에겐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를 다녀온 나에게, 그래서 미국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우호국가요 기독교국가로였다. 미국을 이렇게 이해해왔던 나에게 있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제3세계 국가를 수탈하는지에 관하여 폭로하고 있는 책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내용들은 아직도 기억나지 않지만 Cocacola Company가 제3세계 국가를 수탈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코카콜라 정책이라는 것만은 기억난다. 장하준 교수의 책을 주문하고 펼쳐보는 순간 그 책이 생각났던 것은 왜일까? 그런데 책을 넘겨가면서 시종일관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내가 대학원에 들어가서 기독교윤리를 전공하게 된 것도 여기에 있다.)

  장한준 교수의 논지는 간단하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많은 가난과 절대빈곤은 IMF, WTO, 세계은행이라는 사악한 삼총사를 전면에 내세운 부자나라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나라들을 가난에서 건져주겠다는 명목하에 많은 것들을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부자나라들의 속셈은 미래 자신들의 경쟁자를 줄이기 위한 사다리 걷어차기요 착취할 대상을 남겨두기 위한 술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기만적인 행태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가장해서 가난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더 착취하기 위한 나븐 사마리아인들의 행동에 대하여 가감없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파워풀하고 역동적인 것이 아닐까?

  한국은 어느새 신음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다리 걷어차기를 행하고 있는 나라로 옮겨갔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말도 안되는 행위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은 부자나라들의 발뒤꿈치도 못다라가고 있다. 그런데도 부자나라처럼 행동하는 한국을 보면서 부자나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아직도 착취할 대상이 남아 있는 강도만난 사람일 뿐이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불과 10년전의 IMF차관과 이를 담보로한 정책 강요, 미국FTA, 6자 회담을 빌미로한 한국에게 부담 떠넘기기식의 강대국들의 행태. 이것이 한국의 모습이다. 여전히 한국은 강도만난 사람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강도만난 약자들이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다. 단지 집단 최면에 걸려서, 다른 국가들보다 조금 나은 상황이라고 나는 아니겠지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미국은 우리에게 통화정책을 강요하고 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장 경제, 작은 정부, 공기업의 민영화 등 많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중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 수법이요, 가난한 나라를 수탈하는 부자나라들의 방식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수긍할 수밖에 없고 소름돋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자유주의, 시장중심주의, 민영화, 관세철폐는 어려운 우리 경제를 되살릴 불씨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단순한 학자들의 이야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작금의 정치인들이요, 정책 입안자들이며, 우리나라 행정부의 수반들이기에 말로할 수없을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다.

  과연 우리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가? 이 책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되고 이 책을 보면서 무엇을 자각해야 하는가? 나의 이런 두려움과 걱정이 단순히 좌파라고 평가받는 세상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선거철이 다가오면 케케묵은 이념 논쟁과 색갈 논쟁이 불거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잃어버린 10년을 줄기차게 외치는 나라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라 생각하는 나를 보면 빨갱이요, 좌파적인 성향을 가진 놈이라 비판받고 무시당하는 한국에서 나는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야 하는가?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나는 과연 어던 행동을 해야 하는가? 현실에 침묵해야 하는가, 아니면 바꾸기 위해 행동해야 하는가?

  고민 많은 나에게 있어서 작은 도움이나마 주는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이 사회의 편중된 가치관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꼭 읽어보라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부자나라에게는 케인즈주의를 가난한 나라에게는 통화주의를" 강요하는 이 땅의 어설프고 지극히 이기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꼭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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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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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어"
 그러나 나의 어린 심판관의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걸 보고 나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이 양에게 풀을 많이 주어야 해?"
 "왜 그런걸 묻지?"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거든......"
 "거기 있는 걸로 아마 충분할거다. 네게 준 건 아주 작은 양이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그다지 작지도 않은걸. 어머! 잠들었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라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세 가지 이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여우와 장미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네모난 상자에 얽힌 이야기이다. 아무리 멋있게 양을 그리려고 할지라도 계속 맘에 들어하지 않자 결국에는 궁여지책 끝에 상자를 그려준 저자, 그리고 그 상자 그림을 받아들고 마음에 들어하는 어린 왕자. "스키너의 심리학 상자 열기"라는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불현듯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치 인간의 심리란 어린 왕자의 상자 그림과 마찬가지라는 듯이.

  내게 있어서 심리학이라는 것은 결코 반가운 것은 아니다. 조용한 숲 속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생활하는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반갑지 않은 불청객! 이것이 심리학에 대한 나의 평가이다. 심리학이란 결코 반갑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불청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별 통보를 받은 후에 복잡하고 다스리기 어려웠던 나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하는 누나가 미술 치료 기법으로 나를 달래줬으며, 어머니의 정신분열증 재발로 인한 약물 치료와 병원 입원을 옆에서 지켜 보았으며, 군목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나에게 심리검사 및 기초 상담에 관한 이론들을 배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이것들은 놀랍게도 나로 하여금 집단 상담 2급 자격증을 따게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들은 나에게 있어서 심리학이 반가운 것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을 불청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모른다는 것이다. 클리어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단을 내려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클리어한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검사를 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고 척도를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심리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공한 목사님들은 전공하면 전공할 수록 사람들의 심리를 마치 상자 열어보듯이 단언하고 평가를 하더란 말이다. 이것이 나에게 불편했고, 이것이 나에게 심리학은 결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되게 만들었다.

  이 책에 나오는 심리학적인 개념들 10가지는 나도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내면에 감추어진 이야기라든지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심리학은 불청객이다. 왜냐 여전히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몇 가지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들어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자신들의 기준이 최선인양, 진리인양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평가하며 그 사람에 대하여 상자 열듯이 속속들이 알고 있다 평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보상으로 인간의 심리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인간의 그 세세한 면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심리학에 관한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여전히 인간의 심리는 복잡하고 상자를 열면 열수록 더 모른다는 것이다. 상자를 보고 양의 크기와 먹이를 상상하는 어린 왕자처럼 한 꺼풀을 벗기고 나면 또 다른 거풀이 나오는 양파와도 같은 인간 심리의 특성 때문이다. 결국에는 내가 바르게 가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 심리라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는 장난감처럼 막 주무를수 있는 것이 아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무르고 싶어하던 심리학자들의 열망 사이의 간극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의 내용에 대하여, 중요 개념에 대하여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소개할 수 있는 책이다. 대학교 1학년 심리학개론 시간에 레포트로 내 줄만한 책이요, 난이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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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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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이 책은 왜로 시작하여 왜로 끝나는 책이다.  인가이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호기심이라는 것은 참 대단하다. 그 왕성한 호기심은 그 어던 종에서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특이한 것이다. 인간이 오늘날이 발전을 이룰 수 있고, 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호기심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판도라의 상자는 바로 이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여서 사람들은 금기를 넘어 왔다. 지금가지 인류의 역사란 호기심의 역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호기심은 그냥 호기심이 아니다. 호기심은 단순한 호기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호기심의 저변에는 희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마지막가지 뛰쳐나오지 못했던 상자안의 희망이라는 녀석은 아마도 이런 호기심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희망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갖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다가올 내일에 대하여 희망을 품기에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 수 있는 것이겠지?

  이 책은 여기에 충실하다. 희망을 바탕으로 한 호기심에 충실하다. 그러나 희망을 부질없는 것과 바람직한 것으로 양분한다. 그리고 그 양분하는 기준은 과학이나, 과학적인 검증방법인 실험이다. 실험이나 과학적인 검증방법을 통하여 증명 가능한 것은 바람직한 희망이요, 인류ㅏ 잡아야할 희망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포기해야할 이상한 믿음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희망을 붙잡는 가장 좋은 방법을 끊임업이 의심하는 방법, 회의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느기기에 "의심하라. 무엇하나 믿지마라."는 작가의 사유방식은 안티를 위한 안티로 느껴지는 것은 왠 일일까? 혹자들은 기독교인인 나이기에 이미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어느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조지 오웰식의 사고(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아 그것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일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생각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식의 삶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비관적으로 느껴지고, 작가가 그렇게도 피하려고 하는 컬트가 되어버린 느낌이기 때문이다.

  비판에 대하여 열려있다, 비판하려면 비판하라는 작가의 자신감이 하나의 교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책을 읽고난 이후의 나의 느김일가?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 계속 의심한다면? 아니면 반대로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고 구원하려는 무지몽매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자기들의 방법에 대한 회의마저 용납하면서 계속 회의를 한다면? 왠지의 그의 말이 회의를 위한 회의라고 받아들여진다. 안티를 위한 안티로 받아들여진다. 왠지 그의 이야기가 오메가 포인트 이론을 비판하면서 그 이론의 오류로 지적한 사유 방식과 비슷하게 느겨진다. "저것은 문제가 있다. 저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왜냐?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되니까?) 그래서 나는 저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미신이라 말할 것이다. 모든 자료를 동우너하여 반박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검증되지 않고 무식한 것들이 너무 많다. 어찌 사람들이 이런 것을 믿지? 이것은 사실이 아니야."라는 식의 결론에서부터 역으로 올라오는 검증방법이 사용되었다 느껴지는데...분명 작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과학이 종교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은 신이고, 인류를 더 좋은 단계로, 진화이 단계로 이글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선지자들이 될 것이다. 그 선지자들 가운데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있다. 이들을 제거하면서 우리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이성의 자리로 끌어 올려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성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완전한 요소라 말할 것인가? 기억이 재구성 되어 불완전하듯이, 이성이라는 것 도한 불완전한 것임에도 완전한 것이라 받아들여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이라면? 그 어던 전제 하나만 어그러져도 "회의"라는 결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성이란 종종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연구하는 오류를 범하는 모습을 자자 부여 왔기에.

  이성, 물질, 논리, 과학,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는 모습, 신앙은 필요없다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오만함뿐이다. 전형적인 과학자들의 오만함이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직업차별이요, 과학자를 정점으로 하는 진화론의 양태이다.

  저자는 말한다. Cogita tute(스스로 생각하라.) 의심하라. 무엇하나 믿지 마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라는 잘못된 삶에 빠져있는 사람인가? 한 때 거듭났던 기독교인이었다 주장하는 저자에게 묻는다. 무엇을 근거로 거듭났었다 말하는가?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가? 당신의 이성과 영혼과 육체가 거듭났는가?(아니다 영혼이란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니 논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성은? 뉴런 신경계의 화학작용에 불과할 뿐인 이성은 그리 신뢰할 수 있을까?) 작가는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인가보다.

  이 책을 읽고난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상한 책을 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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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리 2020-03-0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기나 하셨나요?

saint236 2020-03-02 14:17   좋아요 0 | URL
읽었으니까 썼지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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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의 전두환 전 대통령 시구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축구는 현대화의 상징이 되었고, 곧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란의 역사가 호창 체하비의 비판이다. 축구가 스포츠가 아닌 정치화 되어 권력자들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비단 이란만이 아니다. 축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이며 동시에 가장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스포츠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예들을 들어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인종주의, 영국의 신교과 구교의 대립, 유대문제, 브라질의 카르톨라스, 우크라이나의 인종차별, 이탈리아의 사회 전반적인 부패현상, FC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중동의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이란의 축구,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국의 축구 형오라는 몇 가지 틀에서 축구의 심상치 않은 포스를 지적하고 있다. 오랜 세월 기자로 살아온 저자의 백그라운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통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한다. 그러나 축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 아무도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축구로 인하여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다국적 기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가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축구에 열광할 뿐이다.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하여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국가대표 경기,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는 그렇게 열광하면서(실제로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해 보라. 그렇게 많은 여자 관중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 팬들이 축구의 룰을 알고 열광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라.) K-리그는 왜 그리 텅텅비는지 관심이 없다. 박지성의 선발 출장이,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의 EPL 진출을 연신 입에 올리고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가 왜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떠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작동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이것이 민족주의라는 이상 열기에서부터 비롯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요, 국위 선양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가? 오랜 세월 외세의 핍박을 받아온 우리 민족 특유의 혈연의 끈적함을 통하여 프리미어리거나, 국대들과 나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와 활약이 나의 성공이라 생각하는 대리만족 때문이다. 축구는 특히 이러한 대리만족과 공격성이, 그리고 동일시와 민족주의가 가장 강하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스포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축구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축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다. 1997년 박찬호라는 첫 메이저 리거의 역투는 IMF의 한파를 넘고 있는 우리에게 잠시의 쾌락을 선사하였다. 그의 역투는 몰핀이 되어 IMF의 한파에 신음하고 아파하던 우리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등판이 있는 날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국이라는 사회가 모든 일을 팽개치고 멈추어서서 그를 응원했던 일이 있었다.(물론 나도 대학 수업을 빠지고 응원을 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더 과거로 들어가보자. 우리 나라에 프로 리그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동대문 구장으로 대표되던 고교 야구가 죽고 프로리그가 도입된 시기가 언제인가? 5공시절이다. 불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권력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스포츠와 영화와 성을 이용했음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이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사실은 우리나라 프로리그의 첫 시구자는 연예인도, 국회 의원도 아닌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축구가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일제 시대 많은 한국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준 것은 고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이렇듯 정치와 스포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대로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국민들의 체력을 길러 국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용된다. 북한과 우리나라의 병사들의 체격차이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스포츠는 국민에게 단체적 생활의 질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다. 학교 체육이 추구하는 가장 큰 목적이 이것이다. 학교 체육이 입시 정책 때문에 약화되고 유명무실화 되면서 소위 말하는 싸가지 없는 학생들, 무법자를 동경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사실은 우리에게 심상치 않은 시각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는 선동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지금 스포츠의 가장 큰 역할은 이것이다. 정치적인 선동을 위하여 사용되는 스포츠는 역사상이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독일의 게르만 우월주의를 나타내기 위한 11회 올림픽인 베를린 올림픽(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여 히틀러와 악수한 올림픽)이 가장 큰 예이다. 이 올림픽을 통하여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더 선동하였고 이는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스포츠 정치학은 이러한 스포츠 이해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스포츠의 선동의 기능을 주목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미국인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다.)를 통하여 스포츠 정치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상술과 스포츠를 도구화 하는 사람들의 야합이 맞아 떨어져 지금 축구는 전 세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축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다. 미국이 축구를 거부하는 것은 미국 나름대로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야기는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세계화=미국=다국적 기업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였고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저자는 세계화=다국적 기업은 옳지만 이것들과 미국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 일견 옳은 말인듯 느껴지지만 왠지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진 자의 불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축구라는 운동이 어떻게 세계화를 이끌어 냈으며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는지 생각해보고 살펴보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세계화를 반대하고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축구를 행하거나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축구란 종목이 가진 기이함이 아닐까? 축구만이 가진 그 둥글둥글함, 그리고 광기, 에너지, 열정의 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이런 모순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맨유의 경기를 보며 열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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