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그 불만 - 前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 세종연구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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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3년 멕시코의 칸쿤에서 농민 운동가 이경해씨가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 이경해씨는 세계화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세계화의 부조리에 대하여 경종을 울렸다. 미국 언론들은 고 이경해씨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삶에 대하여 조명했으며 반대에 부딪힌 세계화에 대하여 심도있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조중동을 비롯한 국내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북한의 지령을 빧아 빨갱이 사상에 물든 빨갱이가 조국을 국제적으로 망신시킨 사건으로 보도했었다. 내가 조중동을 비롯한 메이저 언론을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농민운동가 조지 보베가 한국에 들어왔다가 농민 운동이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깜작 놀랬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은 여전히 언론이 통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론이 통제되는 사회가 아니라 농민 운동에 대하여 관심조차 갖지 못하는 사회이다. 농업은 천하지대본이 아니라 그저 경제성 없는 천덕꾸러기 산업일 뿐이다. 자동차 한대를 더 팔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되어야 하는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은지 오래이다. 노동 운동에서도 심도 있게 농민 운동에 대하여 다루지는 않았다. 그저 인원 동원을 위한 기구 정도의 위상만을 가진 것이 오늘날 농민 운동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런 처자에 뜬금없이 고 이경해씨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화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비판과 불만을 읽으면서 고 이경해씨의 할복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그 악명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지만 철저하게 제도권 안의 사람이다.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도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우익인 사람이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고문 역할을 감당했으며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만한 사람이 작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그저 빨갱이 사상으로 치부해 버릴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제도권 안에서 일해 온 사람이고, 세계 은행 부총재의 직물르 감당하면서 계속적으로 IMF와 함께 일해왔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의 세계화는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유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세계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그는 세계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이 왜 세계화 비판의 선봉장이 되었는가?  

  그의 판단에 의하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는 소탐대실을 하고 있는 근시안적인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을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근시안적이고 권위적인 IMF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IMF가 상식선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IMF 스스로 실수 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실수로 판명난 사안들에 대하여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각 나라의 특성에 맞는 구제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체질이 다르고 정체가 다를텐데 세계화는 어느 나라에든지 들어맞는다고 굳건히 믿는 만병통치약을 제시한다. 울타리를 낮추고, 지출을 줄이며 내핍 경제를 통하여 빨리 빚을 청산할 것을 요구한다. 단순한 요구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IMF는 요구가 아닌 명령을 내리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채무국의 국민들이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빨리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기거이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희생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에게 강요되니 문제이다.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 미치광이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얼마전 종부세를 완화하면서 초과한 종부세를 환급해준다는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었다.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부는 IMF와 같은 방식을 취했다. 줄일 것은 줄인다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던 것이다. 그러나 줄인 곳이 문제였다. 종부세를 환급해 주기 위하여 아동복지와 사회복지 지출을 줄였던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지만 IMF는 이일을 밥먹듯이 한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운다. 그것들은 자기들 권한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빚을 빨리 받아내야 한다고 말하면 할말이 없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 것을 기어이 나서서 망쳐 놓기 일쑤이다. 소탐대실, IMF의 정책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IMF를 I am F라고 부르면서 반대하는 지도 모르겠다. 

  만약 세계화의 기수 IMF가 현재의 정책을 고수한다면, 비상식적인 행보를 계속한다면 전세계적으로 들끓는 반세계화의 물결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스키글리츠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식적인 세계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세계화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세계를 빈곤에 빠뜨려 지배하기 위해 IMF가 일부러 이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음모론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IMF의 독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런 IMF의 방식을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배워와서 자신들을 방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탐대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식자와 피포식자의 균형이 무너지면 생태계가 붕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소탐대실로 끝을 볼 것이냐, 아니면 상생의 길을 찾아갈 것이야 세계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부딪치는 딜레마일 것이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꼭 한번은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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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연습 - 경제빙하기의 새로운 생존 패러다임
유영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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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변방에 말을 잘 기르는 노인이 한 명있다. 이 노인에게는 애마가 한 마리 있는데 이 말이 어느날 집을 나갔다. 마을 사람들의 위로에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날도 있지요라고 응수했다. 얼마후 집을 나갔던 말은 다른 말들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노인의 아들이 이 말을 타가다 떨어져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 위로해 주러 온 사람들에게 노인은 역시 그런 날도 있지요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쯤 되니 마을 사람들도 노인이 감정도 없는 사람이라고 욕을 하기 시작했지만 노인은 이에 대하여 일절의 대꾸도 없었다. 머지않아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고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갔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 때문에 끌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길흉화복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삶을 가리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제 빙하기의 새로운 생존 패러다임"이라는 부제를 읽으면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시아의 떠오르는 4대용으로 불리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젠 IMF라는 위기를 겪었으며, 지금은 IMF보다 더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년 7%이상식 오르던 고성장의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3%의 성장률을 유지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아니 물가 상승률까지 반영한다면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 한나당과 보수층의 말처럼 지난 10년 동안 좌파 정권이 성장동력을 다깎아 버렸기 때문인가? 아니면 진보층의 말처럼 정권과 기업의 지저분한 결탁때문에 경제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부가 편중되에 분배되고 있기 때문인가? 일견 모두 옳은 말 같지만 이 책에서 오늘 우리가 경제 빙하기를 맞이한 이유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 특히 내려가야 하는 경제 빙하기를 고성장 시기에 미리 준비하지 못한데에서 오는 오만함의 결과라고 말한다. 상당부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국은 승자독식이라는 말이 정말 잘 지켜지는 나라이다. 이긴 사람이 다 갖는다. 점수는 무조건 100점을 맞아야 한다. 무조건 1등급을 해야하고, 1등을 해야한다. 엄친아가 되기 위해 기를 쓰는 대한민국을 어떤 사람은 개미지옥으로 표현했었다.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모두 죽는 개미지옥이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그 사람의 말에 십분 동의한다. 우리는 정말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올라가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겅쟁에서 빌려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올라가든지, 사라져버리든지 우리에게는 둘 사이의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올라가면 끝이라 생각하고 어떻게해서든 올라가려 애쓰는데 올라가면 올라간만큼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주문한다. 등산을 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올라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책이 내려가는 연습으로 책의 제목을 삼은 것은 경제위기나, 인생의 위기도 등산과 마찬가지로 올라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오게 되어 있음을, 즉 인간만새 새옹지마임을 기억하고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들이 흔히 그렇듯이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 계발서들을 잘 읽지 않는다. 긍정의 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같은 자기 계발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들을 돈주고 사봐야 하는가라는 우습지도 않은 자존심때문이여, 이렇게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황당무계함 때문이다. 이 책ㄷ 비슷하겠거니 생각해서 읽지 않으려 했지만 순전히 책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다. 기독교 서적 가운데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라는 생각때문이다. 책을 한장씩 넘겨가면서 재미읽게 있었고 곳곳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이 책은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철저하게 생존을 이야기한다. 살아남아야 성공을 굼꿀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일까 손해를 보더라도 철저하게 생존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로스 컷을 미련한 행동이 아니라 과감한 용기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철저하게 내려가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올라가기만 생각하는데 올라간다는 것은 곧 내려옴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내려오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밀려나면 내려옴이 아니라 추락이다. 자신의 의지로 내려와야 착륙이다. 한발 앞으로 내딛기 위하여 잔뜩 몸을 움츠리라고 주문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각광을 받는 곳에는 가지도 말라고 한다. 곧 거품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란다. 사랑이 남아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좋다.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니 다시 일어서도록 노력하라. 이런 주장들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돈을 주고 이런 책을 사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돈을 주고 이런 책을 사보는 이유는 이렇게 당연한 말들을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취업을 앞두었거나 미래에 대해 계획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내려가는 연습을 해라. 내려가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냥 밀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다. 우아하게 내려가는 연습을 해라.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은 생존과 재기, 그리고 성공이 철저하게 개인에 의해서 좌우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자기 계발서가 지닌 한계이겠지만 이미 대한민국은 저하나 잘났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맥과 가진 자본에 의하여 이미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곳이다. 자기 계발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베스트셀러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것이 자기계발서라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오랜만에 괜찮은 자기 계발서를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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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지음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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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가 국회의원들의 싸움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전 세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때문에 시끄럽다. 오랜 세월을 이끌어온 증오심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과 이스라엘군의 공습은 당사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대 아랍권이라는 대형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커져만 가고 있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아랍권의 행동을 보면서 전쟁이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옆에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30일 이스라엘이 가자 접경 지구로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가운데 한 병사가 기도하고 있다. 그의 기도하는 모습 가운데 절박함과 독실함이 뭍어 나는데 과연 그는 무얼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로켓포를 들고 공격하는 하마스에 대하여 공군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돌팔매에 탱크로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은 돠연 어떤 마음으로 그의 기도를 들으실까? 아니 듣기나 하실까? 오랜 세월 동안 박해를 받는 자신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고백했던 이스라엘이 박해자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과연 그들과 함께 계시기는 하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기갑부대의 맞은 편에서 돌팔매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면 미국은 물론 한국 교회에서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 로마서와 서신서를 설교하면서 그렇게도 이스라엘의 율법적인 모습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유대인과 아랍권의 대결이라는 구도에서는 이스라엘을 편드는 입장을 취한다. 내가 보기에 유태인이든, 아랍인이든 모두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교회 안에 성공주의가 들어오면서 일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석학들, 기업가들 가운데 유태계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교회가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축복해줘서라고 설교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는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조근조근 따져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예수에 대한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일진대 그 고백까지 포기하면서 유태인과 같이 축복을 받자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이스라엘을 편드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는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는 무언가 상당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덩치불리기에 어느 정도 성공해서 외형적인 모습은 거대하지만 그 기반은 아주 빈약한 이상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예수 대신 맘몬을 섬기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언한다.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을 공격했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죄인을 양산해 내고 있다. 나누고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더 높은 건물, 더 큰 건물을 바벨탑처럼 쌓아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 선전하면서 자신들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교회 가운데 중앙, 제일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살펴본다면 교회야 말로 가장 오만하고 독단적인 조직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어느 조직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중앙과 제일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증발해 버리고 교리적이고 교조적인 십자가만 남아 있는 한국 교회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때 십자가를 지고 가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면서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구설수에 올랐던 한국 교횡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는 할까? 자기 부인과 자기 비움이라는 십자가의 의미를 실천할 수나 있을까?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면 다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려고 하지 않으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답답하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예수님 앞에서 죄송하고, 세상 앞에서 죄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없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목처럼 예수님이 없어도 사는 한국 교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면 예수님마저 부정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없어지고 대신 십자군과 같은 승리 지상주의와 영광의 신학만 남아 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자신을 비우는 비천의 신학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 왕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셨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광의 관이 아닌 가시관이요, 상위 1%와 친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위 1%를 위하여 기꺼이 낮아지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다. 예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예수의 사랑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가 예수없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없어도 예수는 있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의 원래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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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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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괴물"이라는 영화가 있다. 천만이 넘는 인원을 동원한 영화 중의 하나인데 한 때 괴물을 보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었다. 내 나라 땅이 아니기에 내 알바 아니라는 미8군은 오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에 괴물이 단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돌연변이였던 이 생물은 몇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 Monster로 성장하였다. 어느날 한강 둔치를 습격한 괴물에 의하여 사랑하는 딸이자 손녀요, 조카인 현서를 빼앗긴 가족은 현서를 찾기 위하여 하나의 가족으로 뭉쳤다. 사랑하는 손녀를 찾기 위해 희생하는 할아버지, 온갖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아버지, 삼촌과 고모 이들의 사랑의 힘은 괴물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현서를 잃어버린 가족은 현서와 함께 붙잡혔던 남자 아이를 현서 대신 아들을 삼아 기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한강을 떠나지 못하고 매점을 하는 아버지는 항상 총을 가지고 있으며 괴물의 재등장에 긴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이 내리는 가운데에도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이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과 상당한 볼거리가 적절하게 뒤섞여 있는 영화는 한국에서 성공한 괴물 영화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화려한 볼거리에 마음을 빼았겼었는데 괴물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고 난 후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에 접근하게 되었다. 괴물의 탄생은 누구의 책임인가? 미 8군인가? 아니면 미 8군의 불법 행위를 제지하지 못한 행정당국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미 8군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눈치를 보기만 하는 정부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상사의 명령에 의해 오폐수를 무단방류하는 이름없는 군무원의 책임인가? 분명한 것은 괴물이라는 영화 그 어디에도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감독이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해 둔 것은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괴물의 탄생은 일부 사람들의 욕심과 대다수의 무관심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며 괴물에 의한 피해는 무관심했던 다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괴물이라는 영화가 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국에는 괴물이 탄생했다. 미군의 비호를 받아 반공을 부르짖는 이들,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넘어가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사람들, 정치와 교묘하게 야합한 경제인들, 언론인들, 상위 1%의 사람들,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한국이라는 괴물일 것이다. 이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한국이라는 괴물의 단물을 다 차지하고 있는 상위 1%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정치에 무관심하고 학연과 지연에 따라 표를 던지는 이해하지 못할 대다수의 사람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리붙었다 저리붙었다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위해 온갖 불법과 불의도 서슴치 않는 이들의 것인가? 괴물의 탄생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한국이라는 괴물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승자 독식이 극도로 발생한 모양일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서열화의 모습이 한국에 수입되었고, 그것이 극도로 발전하고 세련된 곳, 그리고 그러한 서열화를 부추기고 정책화 하는 것이 괴물의 척추일 것이다. 이 척추에 SKY라는 학연을 오른팔로, TK라는 지역 감정을 왼팔로 삼아 앞을 향해 전진한다. 여기에 반공이라는 굳건한 다리를 가지고 있고, 부동산이라는 먹이를 포식하는 것이 한국이라는 괴물이다. 언론은 이런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박정희라는 망령과 한나라당이라는 수구꼴통 세력들은 자기들이 괴물의 주인인양 행세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괴물의 주인 자리를 빼앗긴 민주당(열우당인지 무너지 도무지 모르겠다.), 주인이 되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칭 진보세력(그러나 전세계적인 모습으로 볼 때 중도 우파에 속하는) 민노당,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자유선진당, 한발 살짝 걸쳤다가 벼랑끝으로 몰린 창조한국당은 괴물의 주인 자리를 놓고 아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관전하고 있으며 내 알바 아니라는 듯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이라는 괴물의 현 상태이다. 게다가 이 괴물은 아주 잘 큰다. 북핵과 간첩, 미국을 계기로 매일매일 쑥쑥 크고 있다. 이 괴물이 이대로 자라면 세계의 돌연변이가 국민을 잡아 먹는 MONSTER로 성장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아니 이미 한국이라는 돌연변이는 IMF를 기점으로 국민을 잡아 먹는 MONSTER로 탈피하였다.  

  누구의 책임인가? 이것을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은 편가르기와 학연, 혈연, 지연에 집착했으며 정치에 실망하고 무관심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금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괴물을 다시 돌연변이로 돌려 보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성장을 제어하고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한가? 이게 한국이라는 괴물을 바라보는 나의 근본적인 질문이요, 이 책이 던지는 화두이다. 이 책은 하나의 방법으로 3부문을 이야기한다. 시민의 견제와 기업과 정부 사이의 민간부분을 괴물을 길들이는 하나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상당히 거칠기는 하지만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부와 기업이 키워 놓은 한국이라는 괴물은 정부와 기업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미 지난 역사에서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괴물을 길들이기보다는 괴물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괴물을 키워 괴물의 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결국 괴물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길들일 필요를 느끼는 것은 괴물에 의해 피해를 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야 한다. 만약 이대로 방치한다면 괴물은 더 커질 것이고 더이상 잡아 먹을 것이 없는 불가사리같은 존재가 되어 스스로 소멸하고 말 것이다. 자기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킨 다음에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남미와 아프리카를 관찰하면 대략적이나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2008년 책을 30권 읽겠노라는 결단으로 시작했다. 참 열심히 읽으려고 했지만 때때로 무너지는 결심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것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내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한건식 해주시는 바람에 독서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 때문에 시작한 일이 오늘 나를 50권이 넘는 책을 읽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이런 내가 마지막을 괴물의 탄생으로 장식했다는 것은 참 공교로운 일임과 동시에 의미심장한 일이다. 내 앞에는 SERI2009가 놓여 있다. 괴물이 2009년에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나는 다시 괴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내가 괴물의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변질될지,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의 힘 앞에 절망할지, 아니면 용기를 가지고 괴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덤벼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관심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믿기에 다시 새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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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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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항상 안대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엔 날선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의미하며, 날카로운 검은 법의 엄정한 집행을 의미한다고 한다.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의 형편이나 권력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양심에 따라 판결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양심과, 공평과 엄정성이 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이러한 외국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한국적인 모습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고, 안대를 하고 있지 않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온갖 법률 비리가 넘쳐나고 있다. 판사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였다는 말을, 적어도 재벌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에 한해서는 한국의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는 법관들조차 믿지 않고 있다. 그러니 한국에 이런 비리와 불법이 자행되는 것은 법원 앞의 디케상이 안대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전 연수원생들이 디케의 눈에 안대를 해 주는 퍼포먼스를 계획했던 일이 있다. 물론 선배들의 제지로 무산되었지만 이런 행위의 의미는 너무나 명확하다. 한국에서는 법원이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삼성의 특검을 통하여 이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법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법률은 일단 어렵다. 판결문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읽고 난 후에 결국은 몇 년 형이라는 말만 알아들을 뿐이다.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쓰는 법률과 판결문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법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시에 목숨을 건다. 일단 사시 합격이 되고 나면 인생 역전이 되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도 사시에 목숨을 걸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이 몇 있다. 그들을 보면서 이젠 법이 법이 아니고, 판사가 암행어사 박문수나 솔로몬이 아니라 고수입을 보장하는 하나의 직업이 되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 법조인은 고수입을 보장하는 전도유망한 일류직업이다. 그러니 안대를 하고 싶어하겠는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김앤장이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혹은 그냥 김앤장이라고 불리는 이름은 공적자금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나와 관련이 없는 전문용어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삼성, 현대, 한화, 론스타, 한미은행 등등 왠만한 재벌 기업들의 일에는 꼭 김앤장이 끼어 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들이 내려질 때마다 속으로 생각해본다. "법관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정신은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냐? 어떻게 저런 판결을 내릴 수 있지?"  이 책을 보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막연하게나마 누가 돈 먹인거 아냐, 로비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배후로 김앤장을 지목한다. 단순한 카더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집어가면서 배후를 지목한다. 여기에 이 책의 무서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데블스 어드보킷이라는 영화가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재판에서 반드시 이기는 승률 100%의 변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앤장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한국판 데블스 어드보킷이 바로 김앤장이 아닐까? 고객의 이익을 위하여 공정을 불공정으로 바꾸고, 수억의 돈을 쏟아부으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불법 로비를 벌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약자를 억압하고 철저하게 강한자의 편에 선다. 이게 법이고, 이런 사람들이 법조인인가? 제목도 기억이 안나는데 얼마전 종영된 드라마 가운데 법조인을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야, 현실은 안그래 하면서 즐겨 보지 않았는데 마지막 엔딩을 어떻게 보게 되었다. 그 대사의 대략 적인 내용이 그랬다. 법관은 형평성을 가지고 판결해야 하는데 사실 완전한 공평이라는 것은 불편등이다. 완전한 평등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의 편으로 저울 추가 기울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냉소주의다. 나만이 아니다. 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그렇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디케의 안대를 벗기고 눈을 뜨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디케의 눈에 안대를 다시 씌워줄 것인가? 이 책이 이 질문에 대한 아주 작은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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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허허 2011-12-31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블스 어드보킷이라는 영화를 보고 김앤장을 떠올린다라... 거기 가서 엑소시즘이라도 해보시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