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아남은 자의 증언 - 위장된 3차 대전과 잃어버린 청춘의 녹슨 파편
김정옥 지음 / 늘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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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패러디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뭔가의 흥미를 유발한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가 연극 연출을 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겐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이 방면으론 거의 대통령급 되시겠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며 한때는 회장까지 역임하셨다니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 에세이인데 스스로를 회색분자라며 젊은 시절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떠나 얘기할 수 없구나 싶다. 더구나 저자는 자본주의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았다. 예술을 사랑해서 중앙대학을 거쳐 서울 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전쟁 중 프랑스 유학을 할 정도니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에 도착하자 비로소 자유를 만끽했고 그 나라의 높은 예술 수준에 푹 빠져 공부했다. 그 점은 독자인 나도 부럽긴 하다. 무엇보다 비슷한 또래의 프랑스인들이 자신은 파시스트니 공산주의니하며 서슴없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데 놀랐다고 한다. 저자는 좌우익 어디에도 설 수 없는데 말이다. 좌도 우도 선택할 수 없지만 설혹 선택했다 해도 그것을 드러내기엔 우리나라는 얼마나 위험하며 용기가 필요한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지금은 우리나라 교육 수준이 높아져 외국에서 유학을 오기도 하지만 역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교육 개방의 기회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또 학생 때 구맥회 멤버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구인회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하니 지적 허영과 호기로움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세대인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회의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로 인해 그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이 죽거나 사상 때문에 북으로 갔다. 그러면서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려고 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인데 거기에 어찌 명백하고 타당한 이유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찾지 못한 희생자의 뼈골이 얼만데. 그 숫자만큼이나 규명되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해 묻고 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특히 맥아더와 트루먼의 관계 그 사이에서 낀 우리나라의 운명을 조명한 부분은 개인의 에세이로만 다룰 건 아니라고 본다. 어찌 보면 이 책은 개인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조망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것 마는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증언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나의 역사 지식은 일천하다 못해 통탄할 정도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저자는 이 책을 내기 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이고 조언을 듣고자 했다. 그러자 지인들은 좀 산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는데 잘 쓰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책을 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연극계에 종사를 해서 그런지 글이 간결하고 이 자체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저자가 살아온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짧지 않나 싶다.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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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백설공주>를 봤다.

몇년 전, 줄리아 로버츠가 악한 계모역을 맡았다는 바로 그 버전이다. 90년대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놓았던(좀 식상한 표현이긴 하다) 우리의 줄리아가 일선에서 물러나 조연을 맡았다. 그것도 악역이라니. 그래도 조연이라고 하기엔 제법 비중이 있는 역할이라 그냥 쓰리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미국 영화는 비주얼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또 그런만큼 이 영화는 비주얼 갑이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이야기와 조금은 다르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래도 뭐 크게 바뀐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아쉽기도 한데, 백설공주를 일종의 전사로 만들어 놓은 건 나쁘지 않은데, 계모에 대한 이미지가 아쉽다. 계모가 남편을 죽게 만들고 세금을 자기 치장에 써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왜 여자는 그런 인물로만 그리는지 모르겠다. 남자를 악인으로 만들면 최소한 사치하는 인간으로는 안 그리던데...

 

그래도 볼만하다. 그런데 엔딩은 좀.. 감독의 취향인 것 같긴한데 무슨 인도풍의 노래를 부르고 끝난다. 차리리 발리우드 버전으로 영화를 만들어 그렇게 끝난다면 이해하겠는데 다와서 이건 뭐지 싶기도 하다.

 

백설공주 역의 릴리 콜린스는 처음 보는 배운데 진한 눈썹을 제외하면 진짜 예쁘긴 하다. 줄리아의 시대는 가고 릴리가 온 줄도 몰랐구나 싶다. 그나저나 줄리아 이 영화 이후 출연작이 있나 했더니 2018년까지 그래도 꾸준히 영화 출연을 했네. 내가 그동안 이 친구의 출세작 몇 작품 외엔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싶다. 그저 메릴 스트립만큼이나 오래 가는 배우가 됐으면 한다.

 

주일 날 아침에 tv에서 영화 채널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본다고 해도 끝까지 볼 수도 없고. 그런데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옛 시절을 생각하며 봤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영화속에 흘렀던 노래들은 지금도 흥얼거릴만큼 어렵지않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가끔은 좀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도 잘 나간다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도 음악은 좋지만 따라나 부를 수 있나. '도레미 송'이나 '에델베이스' 못 부르는 사람 있는가? 중학시절 영화가 너무 좋아 책도 사 봤다. 하지만 책은 좀 별로였다.     

 

그런데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서보니 새삼 영화가 현실성이 별로 없지 싶다. 스토리 배경이 2차 대전 전후였던 것 같은데 전혀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문득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이 났다. 마치 당대 유럽의 어느 유명한 호텔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다. 과연 유럽에 잘 사는 귀족들은 얼마만한 부를 가지고 있을까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뭐 그도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이 많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개 장교가 혼자 7명이나 되는 자녀 양육에, 입주 가정교사와 적지않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호텔 수준의 연회가 전시 상황에서 가능할까? 새삼 이런 것들이 보이더라. 역시 이런 영화는 한 번만 봐야한다.

 

내용은 잘 이해 못하겠는데 몇 편의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보여주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픽사 애니메이션도 좋긴한데 둘중 어느 것부터 보겠냐고 묻는다면 난 당연 프랑스 것부터다. 그만큼 프랑스 애니메이션은 독특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다. 더구나 이 애니메이션은 밤의 이미지를 극대화 했다. 그러면 난 환장한다. 더불어 아프리카와 이집트풍을 적절히 믹스한 느낌이다. 나중에 한 번 더 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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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7-2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설공주에서 백설공주는 전사가 되는군요 계모는 여전히 나쁘게 나오고... 계모하고 백설공주하고 힘을 합치는 걸로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왕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기도 하니... 어떤 데서는 왕이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저도 예전에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언젠가 들으니 줄리 앤드류스는 어떤 수술이 잘 안 돼서 노래를 잘 못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때 참 안 좋았을 듯한데 나이 먹고 그걸 재미있게 말하기도 했답니다 긍정스러운 사람인가 봅니다


희선

stella.K 2020-07-28 15:47   좋아요 1 | URL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캐릭터죠.
지금까지 백설공주 이야기가 여러 버전이 있더군요.
흥미롭긴 합니다.

줄리 앤드류스가 병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1935년생이더군요.
최근까지도 영화활동을 했더라구요.
대단하다 싶어요. 존경스럽고.
나이들어 활동 안하는 배우들도 많은데
죽을 병이 아니라면 자기하던 일은 계속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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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에세이가 이렇게 웃겨도 되나 스탠딩 코미디를 보는 줄 알았다. 에세이가 고급스러워진 것도 사실인데 꼭 그렇게 고급스러울 필요가있을까. 언제든 공감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글재주가 부럽다. 가끔 이렇게 에세이도 쓰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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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 출세욕 먼슬리에세이 2
이주윤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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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0쪽 내외. 보통의 다이어리만 한 크기. 이런 책을 읽고 뭐 할 말이 많을까 싶기도 한데 의외로 할 말이 많아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알아주는 작가의 글 쓰기 담론이 아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글쟁이 언니의 솔직 토크' 뭐 그런 느낌이다. 특이하게도 이건 기획물이다.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슬리 에세이'란 시리즈물의 2탄으로 나왔다. 그것도 앞으로 한 달에 한 권씩 펴낼 거란다. 와, 요즘 출판 기획과 작가의 활동이 여기까지 왔구나. 새삼 놀라기도 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인 협회는 있어도 작가 협동조합 같은 건 공식적으론 없는 것 같던데 뜻 맞는 사람끼리 모여 책을 내고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누고, 서로 으샤 으샤 하는 뭐 그런 활동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긴 그 코 묻은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눠봤자 얼마나 돌아가겠냐만. 어쨌든 말이 되거나 말거나 작가들의 활동은 진화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먼슬리가 됐건 뭔 소리가 됐건 작가는 자꾸 떠들고 판을 깔아줘야 한다.


책에서 이슬아 작가에 대해서 말해서 말인데, 알다시피 이슬아는 구독 작가로 유명하다. 저자는 자신은 필력이 없어 그런 활동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이건 누구든 일단 마음만 있다면 한 번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도 해 봤으려고. 누구에 비한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이슬아도 처음부터 구독자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구사하는 문장은 젊은 독자들이 좋아할 만 문장이다. 그들 가운덴 구독을 좋아하기도 하던데 먹힐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싫으면 말고.


지금 생각해도 내가 대담하긴 했지. 작년에 이슬아 삘 받고 나도 어설프게 구독 활동을 했으니. 처음 시작을 했을 땐 과연 구독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 그런 흔치 않은 독자가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독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고, 내 글을 구독해 준 독자들에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대신 난 그때부터 이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후유증이 생겼다.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래도 이슬아는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건 인정! 


2.

독자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무리 기고 뛰고 나는 작가가 글을 써도 꼭 글 못 쓴다고 구박하는 독자는 있게 마련이다. 나도 언젠가 책을 내고 모 사이트에서 이것도 글이냐고 구박하는 독자의 리뷰를 보고 기분 상한 적이 있다. 성격상 또 그런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뭐라고 반박하려다 결국 말아버렸다. 이제 난 독자가 아니라 작가다. 체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면 글은 언제 쓰고 이미지에 스크래치만 간다. 


생각해 보면 독자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저자가 애정 하는 작가 중 한 명이 김애란인가 본데 어떻게 김애란을...?! 할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모 소설을 내 특유의 필봉으로 가차 없이 사시미를 떴다. 그러자 어느 댓글러는 속이 후련하다고 했고, 좋아요도 그때 기준으로 최고점을 찍고, 심지어는 그달의 리뷰에 선정돼 적립금까지 받았다. 그래. 사시미를 뜨려면 이 정돈해 줘야지. 나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독자는 딱 거기까지다. 그 이전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올라오는 리뷰도 칭찬일색이었다. 뻘쭘했다. 잘 썼다는데 내가 더 이상 뭐라고 말하리. 거기까지가 독자의 일인 것이다. 거기에 저자는 악플에 대처하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아주 합리적인 대처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냥 반사라고 하란다. 그 이유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읽으면 되고, 과연 그러면 되겠다 싶다.


3.

저자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다. 계속 쓰는 작가가 되려면 둘 중 하나다. 저자처럼 치열하게 쓰던가 아니면 낮엔 일하고 밤에 쓰거나. 모르는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첫 책을 내고 계속 출판사 사장과 편집자와 케미가 좋아 일을 계속해 오고 있는가 본데 그러기가 쉬운가 싶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기는 개점휴업이라고 첫 책 내면 각자도생의 길을 가지 않을까. 물론 뜻이 맞아 연이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첫 책 내고 출판사 사장한테 엄청 깨졌다고도 했는데 과연 그게 작가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난 워낙에 첫 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출판사 쪽에서 책 내자고 했을 때 2년이나 튕기다 지난 2016년에야 겨우 냈다. 어느 출판 사건 자기네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면 서로 고마운 거지 깨고 깨지고 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출판사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초보 작가일수록 조금이라도 좋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이냐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그래서 내 책이 유명 출판사에선 그냥 하나의 배경 정도밖에 안 되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스펙이라면 스펙 아닐까. 자신의 책을 소개할 때 "거 유명 작가 000가 낸 출판사에서 냈어. 그러니까 끕이 같다고." 구라 치고 싶지 않을까. 이러고저러고 지간에 어느 출판 사건 내 책을 귀하게 여겨 줄 출판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료 따박따박 주고.


작가치고 원고료 날려 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알아봤더니 우리가 알만한 유명 작가도 무명 때 한 번씩은 다 원고료를 떼인 경험이 있더라. 그 말을 듣는데 어찌나 속이 쓰렸던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그런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출판사는 아니다. 어느 단체다.) 작년 말에, 내 책을 내 준 출판사 사람들이랑 오랜만에 만나 게거품 물고 원고료 떼었다고 성토하니까 사장이 듣더니 딱 한 마디 하는데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양아치라고. 그러자 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졌다. 그 말 한마디를 못해 그렇게 게거품을 물었던가 싶었던 것이다. 혹 시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원고료 준다고 해 놓고 안 준 의뢰인 있거든 지금이라도 더 이상 양아치 되지 말고 반드시 지급해 줬으면 한다. 그거 안 준다고 부자로 잘 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 양심은 지키고 살아야지.


4.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그 많은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란 쳅터였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급적 접속사 쓰지 말이라. 부사 쓰지 말아라. 단문으로 써야. 기타 등등의 잔소리 솔직히 좀 지긋지긋했다. 중요한 건 문장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다. 물론 가급적 그런 걸 쓰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면 당연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해서 꼭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강박적이 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신 저자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들어 글이라 생각하지 않고 노래 부르듯 글을 불러 본다고 했는데 그건 정말 참고할만하다. 중요한 건 글의 리듬이라고. 나도 영화 <변산>을 보면서 힙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말인데 노래도 아닌 것이 리듬은 있다. 우리의 글 쓰기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뮤지컬도 그렇지 않은가.


5.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계속 쓰는 삶을 위해 팔리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글은 무조건 써야 한다. 나도 한때는 블로그에 낙서 반, 일기 반 한 글만 쓰는데 무슨 책을 낼까 싶었는지만 결국 책을 냈다. 물론 그것으로 책을 내지는 않았다. 내가 쓴 책은 독서 에세이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난 뭔가를 끄적이긴 했지만 블로그질을 예전만큼 안 하게 되었다. 요는 누가 봐도 되는 글, 누구 보라고 하는 글을 확 줄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어쩌다 신문 연재 기회를 얻게 되었나'를 읽다 정말 찔렸다. 그 알량한 책을 내니 글 쓰기가 더 불편해졌다. 누가 이런 후진 글만 쓰면서 어떻게 책을 냈지? 흉보는 것 같아 스스로 위축되기도 했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것을 깨닫고 좋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1일이다. 했다. 예전에 난 블로그에 100일 동안 뭐라도 쓴다고 하고 그걸 실천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게 또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그런 내공이 모여 책을 내게 된 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저자 말마따나 무조건 써야 한다. 어설픈 글로 투고할 생각하지 말고 남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꾸준히 글을 써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 1일을 아직도 시작도 못하고 난 이렇게 리뷰만 쓰고 있다.ㅠ


6.

이 책은 정말 웃기고, 재밌고, 용기를 주는 책이다. 누구든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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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7 0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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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1 14: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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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7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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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8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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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문장
윤동주 지음, 임채성 엮음 / 홍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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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예술가중엔 고독하고, 아련하고, 애잔함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흐가 있고, 생텍쥐페리와 카뮈가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으론 배호나 김광석 등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더 찾아보면 더 많이 나오겠지. 그중에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윤동주일 것이다. 


모처럼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으면서 습작시를 포함한 동시와 산문까지 아마도 그의 모든 작품을 총망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는 모름지기 다작, 다독, 다상량이라고 했건만 윤동주만큼은 다독과 다상량은 했을지 모르지만 다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애송하는 시로 그의 시를 떠올리길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다작보다 중요한 건 사람 자체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말미에 벗들의 회고가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그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동기인 강처중은 그는 여간해서 누구에게도 시를 보이지 않으며 보여주는 때가 있다면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라고 했다. 그는 겸허하고 온순했지만 자신의 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학교 후배인 정병욱은, 그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히면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냥 써진 시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쉽게 씌여진 시'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딱 잡이 뗀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후략)라고 적고 있다. 


물론 이 시는 그가 천재적 영감을 갖고 있어 뚝딱해서 쓴 시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의 해설대로, '어둡고 암울한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뜻으로 쓴 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다시 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촌 송몽규를 비롯한 몇 명이 독립운동으로 뭔가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나설 때 윤동주도 함께 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송몽규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결국 홀로 방에 남아 저 시를 나레이션처럼 읊는다. 감수성과 자의식이 강했을 그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시를 지었을지 알 것도 같다. 송몸규를 비롯한 같은 또래의 학도병은 나라를 구해 보겠다고 할 때 자신은 육첩방에 홀로 남아 신세한탄처럼 이렇게 시나 읊어대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쓰렸을까.


흔히 윤동주의 시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미학'이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워낙에 수줍음을 잘 타고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니 그랬겠지만, 그의 부끄러움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의 <이런 날>이란 시를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 헷말간 권태로 깃들고 /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 부르고 싶다


이 시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런 날'은 곧 일본의 국경일을 말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일본의 국경일에 만주국 국기인 오색기를 함께 게양했는데 우리나라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아이들 역시 나라 잃은 설움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크게 웃고 신나게 뛰어놀 뿐인데 이를 보고 시인은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게 부끄러웠을까. 아니, 그건 안타까울지는 몰라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은 그래야 한다. 생업 외에는, 뛰어노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나라에 사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았을까. 우리나라는 조선조부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그 말기엔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의 나라다. 배우고, 똑똑하고,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국민이 왜 나라 잃은 현실을 아파하고 서러워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든, 왜놈이든 먹고사는데 걱정 없게만 해 준다면 나라를 팔아먹은들 무엇이 대수랴. 그런 자포자기 한 사람이 다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시인은 평생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을 만난다. 거기서 정지용은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지만 시를 쓰지 말라고 한다. 내 나라 말로 시를 쓸 수가 없는데 시는 써서 뭐하겠냐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며 깊은 한숨을 쉰다.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정지용의 부끄러움은 같은 것이었을까. 조국을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오직 시로만 고백했던 윤동주와 한낱 지식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책으로만 일관했던 정지용을 보면서 나라면 어찌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역사는 자꾸 독립투사를 내세워 또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독립투사들처럼 순국을 각오하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불행한 역사를 살아간다면 과연 나는 순국을 각오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이름을 고쳐서라도 내 한 목숨 부지하고 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그럴 것만 같다. 또한 끌려가는 투사들을 지켜보며 함께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초라한 참회록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참회록>

 ......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는 시로 참회록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문재(文才)였지만 친일을 했던 이광수는 끝내 문학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참회록을 썼기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보라. 이광수는 한때 문재였음을 기억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지금도 기억되고 애송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지는가. 그게 단순히 시대를 아파했던 회의주의자의 타령으로만 보이는가.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 한 권 갖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이 시인이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치자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주를 위해 사용하여 '시인 윤동주 지묘'라고 씀으로 이때 처음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그를 더욱 애잔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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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23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잔해서 예술가답지요.

순국... 참 어렵죠. 저라도 죽음 앞에선 제 자신의 생명이 제일 소중할 것 같아요. 그래서 순국자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stella.K 2020-06-23 18:44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제가 있는 건데
저는 아무래도 나라 보다 제 목숨이 더 귀한가 봅니다.ㅠ

윤동주 시인만 생각하면 왜 그리 짠한지...
영화 다시 봤는데 강하늘이 연기도 잘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도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편집도 그렇고, 시나리오 자체가 시 같아요.
누가 자기는 이상과 백석, 윤동주 평전 다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던데 옛 문인을 사랑한다면 이 세 사람은 정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더군요.
저는 이상만 가지고 있어요. 그것도 고운 걸로.ㅋ

transient-guest 2020-06-24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니 민족이니, 종교도, 무엇도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닌가 싶어요. 특히 하루살기에 급급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다만 남의 지배는 확률상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할 때보다 우리를 이롭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가치의 척도가 아닌가 싶어요. 아이들이 식민통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울 수는 있어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물론 독립운동과 선각자들의 희생으로 절대로 한국을 이롭게 할 수 없는 자들을 몰아낸 그 노력과 투쟁은 별도의 이야기입니다만. 윤동주시인은 일찍 죽어서 어쩌면 더 짠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그 만큼 더.

stella.K 2020-06-24 15:29   좋아요 1 | URL
중요한 척도죠. 리뷰에 다 쓰지 못했지만, 누가 그런 말을하더군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도 왕조를 회복하지 못한 건
왕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렇겠구나 싶더군요.
유럽도 그렇고, 하다못해 일본도 왕조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게
그냥 그런 게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비록 반쪽이지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도 울나라는 아직도 독재와
싸워야 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고 사는 걸 보면 새삼 희안한 국가란 생각도
듭니다.
짧게 살아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는 것도 크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