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걷는사람 희곡집 3
오세혁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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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여러 장르가 있지만 희곡은 내놓은 자식 같아 왠지 짠한 느낌이 든다. 일반 독자들도 소설이나 에세이, 시는 읽어도 희곡은 잘 안 읽지 않는가. 나도 한때는 연극  대본을 썼고 지금도 간간히 기회 있을 때마다 쓰고 있긴 하지만 희곡은 잘 읽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아무리 TV 드라마와 영화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도 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희곡은 공연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희곡은 시와 소설의 특성을 다 갖춘 변증법적 형식이라며 가장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유럽의 이렇다 할 작가들도 희곡을 쓰기도 하고, 독자들 역시 일상적으로 희곡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과연 그런 풍토가 우리나라엔 언제쯤이면 정착이 될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희곡집을 읽었다. 이 책은 저자의 두 번째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연극 연출도 겸하고 있는데 첫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고, 두 번째 책은 그로부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작가로서는 엄청 게으른 작가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연을 해야 하는 연출가의 입장이라면 꼭 게으르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공연이 되든 안 되든 꾸준히 쓰는 노력을 한다면 독자들도 언젠간 희곡을 공연용이 아닌 문학의 한 장르로 인식하고 읽게 되지 않을까? 아님 우리나라의 지명도 있는 작가들도 영역을 넓힌다는 의미에서 가끔 희곡도 써 주시던가. 시와 소설의 특성을 함께 두루 갖춘 분야가 희곡이라지 않는가. 보통 우리나라에 알려진 소설가들 그들의 시작은 시였다가 소설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젠 그러지 말고 희곡을 경유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저자가 필력이 있어 보인다. 수록작 모두 수준 있어 보이는데 그중 나는 '괴벨스 극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괴벨스는 알다시피 히틀러가 총애하던 인물이었고, 극은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히틀러의 눈에 띄어 나치 시대를 열어 나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선동가로서 문학 및 예술을 사랑했고 그것을 교묘히 나치 선동에 이용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애자였고 삐뚤어진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고 보면 그 자신 스스로가 그랬다기 보단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괴벨스란 인물을 작품 속에서 살려내면서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하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 엮는 솜씨가 제법 근사하다. 작가의 이런 풍자와 비판은 다른 여타의 작품에서도 보이고 있는데 희곡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특별히 이런 파편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기도 한데 과연 예술가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제 한 번 작가의 작품을 귀로 들어봤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맨 마지막 수록작 '분장실 청소'는 연극의 마지막 공연과 함께 철거될 분장실에서의 철거반원과 배우, 가수의 처남 등이 펼치는 일종의 콩트 같은 느낌이기도 한데, 재치도 있으면서 웃픈 연극이기도 하다.      

      

앞서 희곡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요즘은 희곡집들이 꽤 괜찮은 판형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일반 독자들도 시야를 넓혀 희곡도 즐겨 읽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추천할만하다.  

 

햄릿이 연극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잊지 말게. 연극은 인간의 영혼을 빛추는 거울이어야 하네.‘ 뭔 뜻인지 알아? 연극을 하기 전에 인간이 되란 소리야.너희들은 연극 하려면 멀었어. 왜냐? 인간이 덜 되었거든. 내가 너희를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다. - P20

생각하면서 살지 마라. 살면서 생각해라. 시대는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뀐다. 그때마다 시대의 부끄러움도 달라진다. 그때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그럼 너는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이 온갖 가능성이 열려 있는 파릇파릇한 놈아. - P23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이여. 환난의 파도를 이 손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죽는다는 것은 잠든다는 것 잠든다는 것은 꿈꾼다는 것. 내게 꿈꿀 권리가 없다면 세상의 비난과 조소를 어찌 견뎌낼 수 있을까. 폭군의 횡포, 세도가의 모욕, 사랑의 고통, 무성의한 재판, 관리들의 오만, 세상 곳곳 악취를 풍기며 썩어들어가는 부패, 이 더러운 똥통 같은 세상을 어찌 참아낼 수 있을 쏘냐. 한 자루의 단도면 깨끗이 청산할 수 있을 것을.

주혁들, 박수

이게 바로 독백이야. 마음의 말이지. 일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지. 마음속에 흐르는 생각을 혼자만의 시공간에서 말하는 것이 독백이다. 연극이 위대한 이유는 독백이 있기 때문이야. 일상에서는 한 사람이 긴 시간 동안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말을 하지. - P29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과 살아가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과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굴 싫어하거나 경멸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냉담하게 만들었으며, 우리의 영리함은 우리를 차갑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은 많이 하면서, 느끼는 건 정말 짧습니다. 우리는 기계보다는 인간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리함 보다는 친절함과 상냥함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없다면, 인생은 폭력이 될 것이며, 우리 모두 헛되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미워하지 마십시오. 사랑받지 못한 미움일뿐이고, 자연스럽지 못한 증오일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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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2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11-13 14:4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셰익스피어 정도는 읽으시지 않으셨을까요?
기회되시면 함 읽어 보세요. 시나 소설과는 또다른 맛이 있어요.^^

페크pek0501 2019-11-1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 읽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예전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다 읽었지만 소설에 비해 스피드를 내어 읽을 수 없었죠.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름까지 기억해 가며 읽는 게 부담스러워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희곡 <관객 모독>을 사지 않고 그의 소설로만 두 권을 샀어요.

좋은 희곡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읽어 보겠습니다.

stella.K 2019-11-14 14:27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솔직히 셰익스피어 좀 어려워요. 그런데 왜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고는 희곡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래서도 희곡을 가까이 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희곡은 많이 못 읽어서 감히 추천할 수 있는 수준은 못되구요,
얼마전에 읽은 범우사에서 나온 희곡 안중근도 괜찮고, <현대 명작 단만극 선집>이란 책도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나혜석의 생애를 다룬 희곡집으로 나온 게 있어 찜해 둔 적이 있는데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북성로의 밤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지리에 관해서는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대구에 북성로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대구의 4성으로 그러니까,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있고 그것은 100여 년 전만 해도 대구 성의 성벽이었다고 한다. 이 대구 성은 조선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흙으로 처음 축조되었고, 1736년에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그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0년에 거의 재축성에 가까울 정도로 대대적인 보수를 하지만 30여 년 뒤엔 일본 상인들이 이를 허물고 4성로를 건설해 그 도로를 따라 점포를 세웠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기업이 나카에 도미주로 형제가 북성로에 설립한 미나카이 백화점이고, 소설은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1940년 대,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기 바로 몇 년 전을 그리고 있다. 그때 미나카이 백화점은 대구의 랜드마크였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요즘의 백화점과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돈데 1940년 대에 정말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또는 스카이라운지가 있었을까, 이건 작가의 상상에 의한 은 아닌지 좀 의아스러웠다. 그런 것을 제외하면 소설은 일제 강점기 말을 상당히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만큼 소설은 미나카이 백화점은 화려함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에 사는 일본 사람들, 친일파 조선인들, 하다못해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조차 어떻게 허물어져 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의 압제와 독립을 향한 의지 이 두 관점에만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친일과 반일, 매국과 독립 뭐 이런 프레임으로만 보려고 하는 시각이 있었다. 나 개인적으론 이런 관점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해 줬던 건 <경계에 선 여인들>이란 책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제 강점기를 주제로 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20세기 초중반의 동아시아 여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연구한 책이다. 거기에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의 여성에 대한 보고서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온 일본 여성들이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던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나에게 새로운 시야에 눈을 뜨게 만든다. 왜 나는 지배국의 국민들은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적어도 난 그들이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 소설도 보면 미나카이 백화점의 사장 나카에의 딸 아나코 역시 외형적으론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다. 그녀는 오히려 같은 일본인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노태영이 친일 경찰이 되는데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가 나름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또한 미나카이 백화점 설립자 나카에 역시 조선인에 대한 지극히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밑바닥엔 자신의 나라 역시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겐 오로지 백화점밖엔 없다. 결국 그는 백화점을 구하기 위해 조선인 정주에게 넘기기도 한다. 태영의 동생 치영은 어떤가. 독립운동을 하니 등장인물 중 가장 멋있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인 태영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흔들림이 없이 가장 안정적이고 성실한 인물은 노정주다. 그는 백화점도 인수받았겠다 아나코와의 사랑을 이룰 수도 있었지만 끝내 포기하고 만다.


그뿐인가, 작가는 해방 이후 당시의 조선인들이 어떤 식으로 일본인들에게 보복을 했는가도 가감 없이 기술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읽는 이에 따라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이란 비록 허구라고는 하나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역사가 진실을 말하는 학문 같아도 그렇지 않고 오히려 편파적일 때가 있다. 그래서 사관이란 말을 써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본다. 역사는 사관일 뿐이다. 그러나 소설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 실존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작가가 충실했다고 본다. 무엇보다 글이 안정적이고 나름 사유적이기도 하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독자를 그 시대에 대해 애정과 통찰을 갖고 보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린 등장인물을 이해할 수 있다. 읽다 보면 결국 남는 건 국가란 무엇이냐란 생각에 머문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힘없는 나라의 국민은 당연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나라면 아무리 조선을 만만히 보더라도 제 나라 백성을 조선으로 이주시키는 일은 안 할 것 같다. 물론 그때는 조선이 일본의 속국으로 영원히 그렇게 살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란 나라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나 그렇게 만만히 볼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설혹 만만히 보더라도 자신의 나라가 패망을 했다면 조선에 사는 자기네 나라 국민들을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물론 그것까지는 소설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나카에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를 볼 때 있는 나라가 부러울 때가 많다. 국민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국가 존립의 이유다. 그래야 문화와 역사가 이어질 수가 있고 세계 어디를 가도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 과연 그 참혹했던 시절을 생각할 때 국가 지도자들은 과연 그 일을 충실히 해 나가고 있는 것일까 묻고 또 묻고 싶다.

 

구한말 또는 개화기에 관심이 많다면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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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7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11-08 14:21   좋아요 0 | URL
앜, 그러시군요. 저도 서울 살아도 가 본데 보단 안 가 본데가
더 많으니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ㅠ
저도 궁금하긴 하더라구요. 대구 어디에 그 백화점이 있을까?
지금도 있나 아니면 다른 뭐가 들어섰나?
혹시 언제고 북성로 가실 일 있으시면 사진 한 번 올려 주시죠.^^

수이 2019-11-07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화기때 꽤 임팩트 강한 인생을 살았던 거 같아요, 추천해주신 책 읽어볼게요 :)

stella.K 2019-11-08 14:32   좋아요 0 | URL
앗, 수연님의 개화기...? 궁금한데요?^^
이 책 꽤 오래 얻어와 놓고 이제야 읽었습니다.
작가의 책이 몇 권 더 있더군요.
차분하게 글을 잘 썼더라구요. 기회되면 두어권 더 읽고 싶어요.
최근엔 책을 안 내는 것 같은데 아쉽더군요.
꾸준히 내면 좋을 것 같은데...

카알벨루치 2019-11-0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학창시절에 대구의 중심은 동성로였더랬는데 지금은 많이 변한듯 합니다 내가 살았던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을 느끼는 느낌입니다 북성로를 중심으로 소설이 있군요...

stella.K 2019-11-08 14:32   좋아요 1 | URL
앗, 카알님 대구였던가요? 이런...
그동안 알라딘 마을의 대구출신 3 스타 하면 유레카님과 스요님, 시루스로만
기억했는데 이제 그러면 안 되겠는데요? 4 스타로 카알님을 등극시켜
드려야겠어요.ㅎㅎㅎ
옛날에 자신이 자란 동네를 잊지 못하죠. 그래서 그런지 떠나 온 동네를
선뜻 다시 못 가겠더라구요. 너무 많이 변해있을까 봐.ㅠ

카알벨루치 2019-11-09 14:32   좋아요 1 | URL
저 빼고 북프리쿠키님 넣어서 4스타입미다 ㅎㅎㅎㅎ

북프리쿠키 2019-11-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 오시면 북성로 우동에 연탄불고기 사드리께요 ㅋ

stella.K 2019-11-09 15:2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쿠키님,카일님 스타 아니시라고 하는데
그러고보니 쿠키님까지 5星이어요.ㅋㅋㅋㅋ

그런데 쿠키님은 북성로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거기에 정말 미나카이 백화점이 있었나요?
지금은 다른 게 들어섰을 것 같은데 자리가 어땠는지 궁금해요.
아, 우동에 연탄 불고기라. 5星이 함께 모이는 날 있으면
그날 한 번 뵙죠. 제 닉넴도 별과 아주 상관이 없지는 않으니.ㅋㅋ
 
하루키의 언어 - 더없이 꼼꼼하고 너무나 사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어 500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도젠 히로코 엮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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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것을 보고 솔직히 좀 식겁했다. 어느 정도 도톰한 책을 선호하긴 하지만 6백 페이지는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하루키의 많은 저작물을 생각할 때 6백 페이지는 결코 두꺼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발췌독을 하게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받고 보니 풋 웃음이 나왔다. 책 모양이 좀 특이한데, 손바닥만 한 단어 카드 묶음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정말 "야레야레, 하루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여기서 야레야레란 "이런, 이런" 뜻이라고 한다. 


사실 난 하루키의 작품을 그리 많이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 번씩 하루키에 관한 책이 나오면 관심이 간다. 세상엔 저명한 작가들도 많고 그 작가의 저작물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책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하루키만큼 많이 나오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키 한 사람에 대한 부가가치는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오죽하면 이젠 하루키스트 또는 무라카미 주의자란 말이 있을까. 이만하면 (전에도 느끼긴 했지만) 그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도대체 하루키가 누구라고 글 깨나 쓰는 먹물들은 그에 관한 책을 쓰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이 책도 보라. 사전식으로 정리하긴 쉬운 일인가.


그런데 반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막상 하루키 자신은 자신이 이룬 문학적 업적에 대해 덤덤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특별한 표정이 없다. 웃는 얼굴도 없지만 찡그리는 것도 없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많은 책을 쓰고 번역을 했음에도 글쓰기가 천명인 양 흔들림이 없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면 앓는 소리나 잰 척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을 텐데 그는 항상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 난 그저 내가 할 일을 할 뿐인데 뭐가 문젠 가요 하는 식이다. 글쎄, (너무도 유명한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젊었던 어느 날 야구장에서 튀어 오르는 야구공을 보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날부터 글을 썼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마음을 매일 골 천 번을 먹어도 끝내 어느 지점에서 절필하고 문단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작가도 수두룩 빽빽한데, 어떻게 하루키는 나이 70이 넘도록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야구공이 튀어 오르는 순간 우리가 모르는 번개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 번개 말이다.


아무튼, 그런 하루키의 한결같음을 재수 없어하는 사람도 있는가 보다. 하지만 하루키가 그와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도 똑같이 싫어하지 않을까? 또 누구는 하루키가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배어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작품을 별로 즐겨하진 않지만 하루키 자체는 존경하는 쪽이다.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가? 책을 정말 안 읽는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일본도 책을 안 읽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그것에 크게 상관하지 않고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꾸준히 글을 썼고 책을 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건 그것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 때문도 아니고, 그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기 때문도 아니다. 꾸준히 책을 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어떤 신인 작가 또는 작기 지망생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어도 그의 시작은 데뷔작 한 권에서 시작이 되었을 테니까.   


그는 이제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하나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야말로 하루키 월드다. 거기에 하루키스트도, 무라카미 주의자도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우리는 일본의 모든 것을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하루키만큼은 싫아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하루키만 추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역시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갖기까지 실상 미국 문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니까. 특히 스콧 피츠제럴드.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스트, 하루키언을 자처할 때 그는 피츠제럴드언이었다. 그는 미국 문학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미국 작가들의 작품만 번역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루키를 따라서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책을 보면 하루키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번역을 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번역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키스트가 되려면 정말 바쁘겠구나 싶기도 하다. 영어도 잘하고, 번역의 기술도 배워야 할 테니. 뭐 그게 아니어도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미국 문학은 꿰뚫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에 관한 책들이 많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전식으로 일목요연하게 나오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론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저마다 온도차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에 대해 웬만큼 아는 사람은 이 책이 뭐 대단한가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취약한 점도 없지 않다. 즉 내가 알고 이해한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장편 같은 경우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맞나 작가의 서사를 따라간다는 게 가끔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독자의 자유 중 오독의 자유도 있다지만 딴 데 가서 남의 다리 긁고 있는 것도 작가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어느 정도 알면 오독률을 줄여 볼 수도 있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은 척할 수도 있을 테니 이런 책 한 권쯤 옆에 끼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매 페이지마다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도 꽤 즐길만하다.

 

참, 우리가 언제부턴가 자주 쓰는 '소확행'은 알고 봤더니 하루키가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글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 뜻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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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10-10 19:4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정말 작죠?
소설 싫어하는 사람은 하루키 정말 최악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오래 전 저 아는 사람은 읽다가 머리에 쥐났다고 하더군요.
근데 전 이 책 정말 괜찮았어요.아무 생각없이 읽기만 하면 되니깐요.ㅋ
 

요즘 영화를 드문드문 보고 있어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의외로 몰입도가 좋다.

나 역시 IMF를 거쳐 왔지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것을 영화는 상당히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 극영화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그 시절 매스컴은 IMF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편집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문득 그것을 보도한 당시의 공중파 앵커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영화는 국가 부도의 날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한시현(김혜수 분)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국가의 부도를 막아 보려고 노력하는 부류다. 또 하나는 부도가 날 것을 예상하고 한몫 단단히 챙기는 즉 위기는 기회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윤정학(유아인 분).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다 희망에 배신당하는 갑수(허준호 분). 그런 국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과 그에 편승하는 일파들. 그들은 그 시대가 그랬던 것만큼 한시현을 향해서도 여성 비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갑수를 보면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IMF가 있기 훨씬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중학교 땐가,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오셔서 다음 날 술병이 나서 출근을 못하셨다. 뭔가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난 모양인데 어리다는 핑계로 차마 여쭤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 조그만 사업체지만 대표로서의 무게가 얼마만 한 건지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갑수를 보면서 IMF 그 시절에도 살아계셨다면 똑같이 힘들어하셨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착하고 성실함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또한 서글펐다. 국민의 대다수가 갑수 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갑수 같은 부류가 잘 살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네들이 목표한 것이 그것인 양 산다. 즉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가장으로 가정을 건사 잘하고,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아프지 않고 잘 살아주는 것. 경제에 관해선 그다지 아는 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시현이 보여주는 캐릭터도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번번이 관료적인 재정국 차관과 그 일파들과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똑똑하고 지혜로운 부류는 단연 아무도 믿지 않겠다던 윤정학이다. 경제라는 것, 자본이라는 건 언제나 그냥 있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여러 모양으로 그 모습을 바꾸는 도깨비 같은 것이다. 그것의 흐름을 알고 그것 위에 군림했을 때 엄청난 국가적 재앙에서 살아남았다.


국가 부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IMF 구제 금융은 신청하지 않을 거라고 언론을 하나 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 같이 실천되었다. 언론과 정치를 믿으면 안 된다. 그래 놓고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국민의 저력이라며 한껏 띄워 주기도 한다. 물론 그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겠지만, 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과 백성은 호구가 되어야 하는가. 뭐 그것까지도 좋다고 치자. 정치지도자들 눈에 우리는 개 돼지로 비치기까지 하지 않는가?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좀 화가 났다. 영화는 영화로 보는 게 좋은데 그때를 너무 리얼하게 다루고 있으니 그냥은 봐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관료주의자들에 대하여 분노만 하면 안 된다. 


나아가 어떻게 애국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금이나 털컥 내주는 것만으로 애국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애국은 좀 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네 부류의 사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수가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된다면 관료주의자들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세상엔 갑수 같은 사람이 훨씬 많고, 갑수의 삶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게 뭐가 잘못인가. 하지만 그들 역시도 등 따습고 배 부르면 나태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관료주의자들은 비로 이런 점을 들어 개 돼지라고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 네 부류의 사람은 역사적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항상 있어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관료들도 정신만 차리면 나라에 큰 일을 할 사람들 아닌가? 


분명한 건 국가 운영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분명 지나간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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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기를 좋아하지만 가끔 우연히 본 영화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한국전쟁이 있던 그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다. 그동안 들어보긴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영화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우리나라에 이런 역사적 사건을 왜 난 여태 몰랐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다. 한 시간 반이 채 안 되는데 구성도 좋고 잘 만들었는데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6.25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고향을 버리고 다 피난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특히 남쪽 지방일수록 피난의 필요성은 별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설혹 피난을 염두했더라도 그전에 전쟁이 빨리 끝나 주길 바랐을 것이다. 또 그런 만큼 피난엔 시간차가 있었다.


전쟁이 나던 그해 7월만 해도 충청도의 노근리 마을은 정말 전쟁이 일어났나 싶게 평화로웠다. 어느 날 마을에 인민군이 쳐들어 올 것이니 주민들은 빨리 피난을 하라는 통고를 받는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을 도와주겠다던 미군은 노근리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그때의 마을 사람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했는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정말 피난을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다 결국 다수의 뜻에 따라 너도 나도 피난을 떠나는 형국을 실감 나게 그린다. 언제나 그렇듯 그 가운데 반드시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과연 그 가족들은 학살을 피해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대열에서 이탈했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복불복의 상황은 마찬가지 아닐까.


그것을 보니 문득 영화 <타이타닉>이 생각나기도 했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우왕좌왕 살려고 바둥거리는 가운데서도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느니 우아하게 죽겠다고 선실 자신의 방에서 평안히 두 손을 맞잡은 노부부 말이다. 물론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렇게 사람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런 것처럼 그 피난 대열에서 이탈한 그 가족도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살면 다행이고 이탈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러라지 하는 마음. 그 장면은 아주 짧게 보여주고 지나가지만 저런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본다. 그때그때 달라요가 되지 않을까? 순간 살고자 원하면 나도 이리저리 뛰고 구를 테고, 사람이 살고 주는 건 전적인 하늘의 뜻이라면 끝까지 우아하려 하지 않을까.   


영화가 인상적인 건 양민학살도 학살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평온했는지를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를 듣는 청각적 효과와 함께 어느 국민(초등) 학교 어린이 합창에서 극대화시켰다는 것이다. 또 그와 대비되게 이들이 얼마나 살고자 했는지는 철길에서의 아수라장과 굴다리에서 스스로 미쳐가는 상황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해 가을 그렇게 한바탕 폭풍을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하나둘씩 마을로 돌아오지만 역시 옛날의 그 풍경은 아니라는 것.


(내가 영화를 잘못 봐서일까) 영화는 이 양민학살이 왜 일어났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좀 얼떨떨했는데 찾아봤더니 미군이 북괴군이 잠입한 줄 오인하고 학살했다는 것이란다. 그럴 수도 있을까 싶다가도 좀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양민을 북괴군으로 오인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군이 북괴군인지 양민인지 식별도 없이 작전을 펼쳤단 말인가? 이 영화가 아쉬운 건 마을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서 끝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나름 노근리 사건에 관심 끌기에 성공한 듯도 하지만, 그 후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진상 규명과 재판 과정이 있었는지 자막으로만 간단히 보여주고 말아 궁금하다. 예상하긴 했지만 미군은 그 사건에 대해 함구했고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과연 아직도 역사 속에 묻힌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가 얼마나 많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특별히 누가 주연이랄 것도 없이 출연 배우들 모두가 주연이라면 주연이고 조연이라면 다 조연이다. 그 밖에도 알만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특별히 박광정 배우가 눈에 띄어 좀 놀랐다. 이미 고인이 된 줄로 아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했다. 그만큼 필름 상태가 좋았다. 알고 봤더니 상영 연도가 2010년이다. 그가 죽은 건 2009년이고.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었다. 아까운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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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9-3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근리, 아주 오래 전 진보 언론들이 집중 조명했던 주제지요. 그게 영화로 나왔군요. 가슴아픈 비극이긴 한데, 그 어느 매체에서도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네요. 무슨 이유를 대긴 댔지만 납득하지 못헀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인종차별이 없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stella.K 2019-10-01 20:2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래도 오래 전 방송에서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관심있게 보지 못한 게 후회되더군요.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암울한 게 많잖아요. 보면 막 화나고 그래서...
근데 제가 아주 잘못 보지는 않았네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미군은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왔다면서
왜 저렇게 무차별로 죽였을까 그랬거든요.
이 페이퍼에 넣진 못했지만 노근리를 다룬 책이 몇권있긴 하더군요.

그나저나 지난 주일 tv에서 뵙고 반가웠습니다.ㅎㅎ

2019-10-02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9-10-0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돼지열병의 바이러스 매개체를 박멸하기 위해 그 지역의 돼지 전체를 도살하듯이, 암의 환부를 정상세포까지 폭넓게 잘라내듯이..
그 당시엔 누구나 노근리 주민이 될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반대로 압록강까지 연합군이 밀고 올라갔다가 38선까지 후퇴했을 때 북한지역에서도 엄청난 양민학살이 있었다합니다. 슬픈 일이네요.

stella.K 2019-10-04 16:10   좋아요 1 | URL
헉,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네요.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한국전쟁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린 또 얼마나 피상적으로 한국전쟁을 알고 있으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