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우리 영화 <기생충>이 세계 주요 영화제를 석권하고 마침내 미국의 아카데미까지 넘보고 있을 때, 미국의 한 원로 배우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름 아닌 커크 더글라스다. 향년 나이 103세. 고인에겐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난 그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 활동을 같이했던 영화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타계했기 때문에 그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커크 더글라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글쎄,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외국 영화를 안방에서도 보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대략 1970년대에) 우리에겐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이라 일컫는 세대가 있었다. 바로 그때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던 1 세대 배우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무튼 그의 부고 소식을 들으니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간 배우들이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를테면 앤서니 퀸이나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오드리 헵번 등등의 배우가. 그들은 정말 화면 안에서 빛났다. 


가 빈센트 반 고흐로 분하고 나왔던 1956년작 <열정의 랩소디>란 영화는 정말 볼만하다. 사실 이 영화 이후에도 고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보다 많이 만들어졌다. 드라마도 있는 것으로 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러빙 빈센트>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론 실사에 고흐의 필치를 살렸다는 측면에서 기술의 승리를 보여준 건 맞지만 때문에 오히려 감동은 좀 반감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보단 모든 고흐 전기 영화의 아버지 격인 이 <열정의 랩소디>가 오히려 인물에 충실해 보인다. 특히 커크 더글라스가 연기한 고흐는 정말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게 몰입도가 상당히 좋다. 


우리는 흔히 고흐를 두고 고독의 화가라고 말한다. 왜 그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잘 알다시피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친구와의(화가 세잔) 우정을 지켜나가는 것도 서툴렀고, 사랑은 더더욱 그랬다. 고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 아쉽게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잃어야 했다. 누가 보면 사랑은 밀당인데 그런 테크닉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비웃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이 어디 테크닉만 가지고 되는 것일까. 사랑을 고백했다 거절당한 그를 보면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못해도 한 번 정도는 더 노력해 봐야 하는 건 아니냐고 한다면 그건 어쩌면 그는 물론이고 상대에게도 모독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문득  <봄. 봄>과 <소낙비>의 작가 김유정을 떠올렸다. 그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죽고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집안이 급격히 기울었다. 그는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난봉꾼인 형과 고집불통에 수전노의 아버지가 서로 불화하는 것을 보며 우울한 소년이 되어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만다. 어머니를 여읜 지 2년 만의 일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나이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그는 소년 시절부터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했던 것 같다.


형은 아버지와 불화했지만 유정에게만큼은 잘해 주었다고 한다. 형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을 때도 그만큼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형이 재산을 거덜내고, 고향인 강원도 실레 마을 이혼한 둘째 누이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을 때 사랑이 찾아왔으니 상대는 박녹주였다. 박녹주는 김유정 보다 나이 많은(그래 봐야 두 살 연상이다) 화류계 판소리 명창이다. 하지만 둘은 어울리지 않은 짝이었고,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인회남은 악몽에서 깨어나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유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박녹주에서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담배 연기 가득 찬 방에서 밤낮없이 연애편지에만 매달렸고, 나중엔 자신을 안 만나 준다고 그녀에게 협박과 공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박녹주를 사랑한다'라고 혈서까지 써서 일기장에 간직하기도 했단다. 이쯤 되면 집착을 넘어 광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훗날 그의 집착적 짝사랑은 끝나긴 했지만 몇 년 후, 박봉자라는 여인을 사진만 보고 반하여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는 실패다.


이런 김유정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그가 일찍 어머니를 여읜 데서 온 외로움 때문일 거라며, 실제로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뿔뿔이 출가해버린 누이들에게서는 예전과 같은 애정을 기대할 수 없기도 했으니 한편 이해할 것도 같다. 그렇다면 사진으로만 본 박봉자란 여인에게 사랑을 퍼부었던 것도 그녀가 그의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정도라면 고흐는 김유정에 댈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김유정의 집착이나, 고흐가 훗날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기까지 둘의 공통점은 우리가 미쳐 다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갔다는 점일 것이다. 고독이 예술에 절대적인지 그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둘은 우리가 인정해 줄 만한 예술가임엔 틀림없다. 하나는 미술에서, 하나는 문학에서. 그리고 이들의 생애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만 접할 수 있는 우리는 그저 쓸쓸함으로 그들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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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기 마을 - 전태일 50주기 기념 안재성 소설집
안재성 지음 / 목선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경성 트로이카>로 유명한 안재성 작가의 작품집이다. 9편의 작품이 실려있고,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해 최근의 노동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읽다 보면 작가가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구나 싶다. 일정 정도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으면서 서사의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노동 문학에 천착을 해서 그런지 다소 진보적 성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평소 일제 강점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라 1부에 해당하는, <이천의 모스크바>나 <두 발 자전거>, 표제작인 <달뜨기 마을> 같은 작품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정치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시절 그저 막연히 억압받는 백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노동자란 좀 더 진보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인상 깊었다. 과연 작가는 어디서 자료를 얻어 이런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 좀 놀랍기도 했다. 하긴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지 찾고, 발굴하고, 연구하다 보면 이런 자료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 세 편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새삼 내가 우리나라 노동사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스스로 좀 민망해졌다. 어쩌다 가물에 콩 나기로 노동 문학을 읽기도 하지만 그 역사에 관해서는 딱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과연 그런 자료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자도 어느 글에선가 그런 얘기를 했지만, 우리나라는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좌익이니 빨갱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과연 우리나라가 그렇게 봐도 좋을 만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잘 대우해 왔던가를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직도 자본가들의 갑질 논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 역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전태일 열사가 죽은 지 올해로 50년이란다. 또한 그것을 우리나라에선 현대 노동운동의 효시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엔 상놈이 양반에게 이리 밟히고, 저리 밟혔고, 일제 시대엔 일본인에게, 일본이 물러가고부터는 러시아와 미군이, 후엔 몇몇의 독재자들에게 짓밟혔다.


나는 뒷부분에 갈수록 특히 3부 같은 경우 읽을수록 흥미가 반감되는 걸 느꼈는데, 원래 책이라는 게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다. 앞부분에선 긴장감이 느껴지다가도 뒤로 갈수록 맥이 좀 풀린다.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봤더니, 독자인 내가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작가에게도 일정 부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노동 문제가 근본적으로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아서는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각, 노동 쟁의의 대처 방법이 딱히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이는 노동 현실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뉴스는 연일 코로나 사태로 힘들어하는 노동자와 소상공인의 보였고, 어느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고공 농성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이를 심각하게 보고, 누구는 피해자 코스프레한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다양성과 유연한 자세로 사회 문제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노동 문학도 조금 더 진화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수록 작품들은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다. 문학이란 언제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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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드디어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걸까? 우리나라 영화상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겠지만 세계가, 그것도 저 콧대 놓은 미국의 아카데미를 굴복시켰다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긴 어느 예술가가 남자의 소변기 하나 전시장에 갔다 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우기면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세상인데 세계적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극찬해서 뽑은 상이니 거기에 굳이 뭐라 할 필요는 없다. 주는 떡인데 왜 안 받겠는가.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좋다고 따라서 나도 좋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가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영화로 봉준호 영화의 실체를 본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은 봉준호 영화를 좋아했다. 재밌지 않은가. 유머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진지한 박찬욱 영화보다 훨 났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균열을 느꼈던 건 저 유명한 <설국 열차>에서였다. 유머를 아스라이 다 걷어내고 대책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것을 보고 한 없이 떨떠름했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 후로 봉 감독의 영화를 굳이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영화 마니아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운이 좋아 얻어걸리면 그때 보지 뭐 했던 게 오늘날에 이르렀다.   


영화는 좀 충격적이긴 하다.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의문이 남기도 한다. 물론 기존의 영화가 하층민을 어떻게 보여 주었나를 생각할 때 어찌 보면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하층민의 삶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주로 착하고, 어리숙하며, 자주 위험에 빠지는 설정으로 그려 왔다. 그럴 때 자본주의자들은 악역을 맡고, 가난한 자를 착취 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노동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가난한 하층민들에게서 기생충 같은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기생충이 하층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인간은 계층과 상관없이 도처에 깔렸다. 그것을 왜 하필 감독은 계층 간의 문제로 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생충은 선량한 사람에게 빨대 꽂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 빨대를 꽂았다는 초반 설정은 흥미롭기는 했다. 적어도 박소담이 탐스러운 복숭아를 들고 부잣집 동네 골목을 싱그럽게 걸을 때까지만 해도. 게다가 기택의 가족들은 없이 살면서 영악하고, 연교네 사람들은 자기네들 세계 안에 갇혀 다소 어리숙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못 믿어하며,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한다. 그게 21세기 신흥 부자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누구는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 현대 사회를 비판하려는 하나의 우화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기생하는 인간에 대해 잘못 설정하거나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생하는 인간은 그렇게 하층민 대 상층민이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라, 어떤 계층이던지 간에 상대를 끊임없이 갉아먹고 이용하는 인물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택네 가족의 그런 설정이 꼭 나쁜 것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마음 먹기에 따라선 결말을 그렇게 가져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매번 봉 감독의 영화는 어떠한 결말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난다. 그게 봉 감독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 같기도 하다. 하층민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어떻게든 괴물에게서 빠져나와 살아 보려고 허우적대지만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괴물>에서 <마더>까지) 이젠 물에 가라앉기까지 한다. 하층민에게 일체의 희망 같은 건 없다는 식이다.    


누구는 그가 소위, 있는 집 자식이라 영화를 그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확한 건 알 수는 없고,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니었을까. 그게 틀리지 않다면 가난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뭔가 모를 트라우마로 계속 계층 간의 문제를 파고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해 그토록이나 통렬한 것일까. 


영화에서 계층을 통렬하게 가르는 대사는 의외로 연교네 꼬마 도령의 입에서 나온다. 신분을 세탁하고 부자 집에 입성하게 된 기택네 가족. 각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역할을 하는데 꼬마 도령의 후각은 그것을 속이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똑같은 냄새가 난다고 흘리듯 얘기를 한다. 그 대사가 제법 예리하다. 후각은 예민하지만 동시에 우매하기도 하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는 그것을 기막히게 가려내지만 같은 사람끼리는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사회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김치와 마늘 냄새에 둔하고, 서양 사람이 버터 냄새에 둔한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후각은 인종까지도 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그 부잣집 도령의 대사는 구별 짓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을 본능에 가깝게 포착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 구별 짓기는 향수를 쳐 바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결말은 상당히 비극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구나 싶기도 하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결코 만만히 보거나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던가,  오히려 계층 간의 문제를 더 조장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화가 이제까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 역사에 대해 그렸다면,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부자를 어떻게  이용하고 역습하는가를 기생충이란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하층민끼리의 대결을 부잣집이란 그라운드에서 보여준다는 설정도 재미있긴 하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통쾌한 결말 그런 건 없다. 영화가 굳이 교훈적이거나 통쾌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봉 감독의 영화가 매번 이런 식이라면 식상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봉 감독의 영화적 디테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봉테일이란 수식어를 달아주기도 하지만 앞으로 디테일은 좋은데 스토리가 약하다는 말을 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는 또 그렇다고 쳐도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왜 미국이 아카데미의 영광을 이 영화에 허락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이것도 오리엔탈리즘일까? 미국의 백인주의가 결코 유색인종에게 호의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엔 뭔가의 숨겨진 의도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기네들이 주저하는 뭔가의 주제를 대신해 줬다면? 즉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있는 자를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비해 가난한 자들은 지극히 소극적으로 다뤘다. 그건 당연하다. 윤리적인 문제를 피하고 싶고, 무엇보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꽃이라지 않는가. 가난한 자들의 냄새나는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까발려 주다니. 손 안 대고 코를 푼 기분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게으르고, 능력도 없으며, 얍삽하고, 우매하다는 것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보여줬다. 심지어 그들은 연대할 줄 모르고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영화는 가난한 자가 부자를 넘보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와 가난한 자를 만만히 대해줬다 오히려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걸 자본주의자들을 위한 교훈으로 이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닌지.   


그걸 인종의 문제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동안 아카데미가 자국에게만 돌아간다는 비판이 있어왔으니 생색내기에도 좋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추측일 뿐이다. 상은 좋은 것이다. 상은 더 넓고 웅장한 영화 제작의 세계로 가는데 확실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난 그저 봉 감독이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길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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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27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딩 부분에서 지적해 주신 대로
아카데미의 전술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비난을 피하고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
고나 할까요.

그나저나...
트황상 말대로 아카데미가 세계 영화
상이 아닌 자국을 위한 영화상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죠.

stella.K 2020-04-27 18:08   좋아요 1 | URL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한쪽에선 아카데미의 그런 결정에
비난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미국이란 다 그렇지 뭐 그랬는데
그게 이해가 가겠더라구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대종상이나 청룡영화상도
우리나라 영화 일색이잖아요.
그런 영화상을 만일 일본이나 중국 또는 제3국이 가져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화나죠.
암튼 이번에 아카데미가 통 크게 쓰긴 했어요.
작품상이나 감독상 둘 중 하나는 자국 영화로 해도
뭐라고 안 그랬을 텐데.
그 두 개 다 주고 땅을 치고 후회하진 않았는지 감히 상상이...ㅋㅋ

수이 2020-04-3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아직도 안 본 1인...... 봐야겠다 봐야겠다 하면서도 저는 아직까지 못 봤어요. 안 본건가;; 스텔라님 리뷰 읽으니까 얼른 봐야겠다 싶어요.

stella.K 2020-04-30 19:31   좋아요 0 | URL
ㅎㅎ 수연님도 안 보셨군요.
크게 기대는 마시구요. 뒤가 약간 충격적이어요.
그것만 감안하시면 보는데 크게 무리는 없을 거예요.
이거 그래도 소위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작품인데
꼭 남 얘기하는 것 같죠?ㅋㅋ

페크pek0501 2020-05-0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상영할 때 극장에서 봤어요. 역시 봉감독이구나 싶었죠.
하지만 큰 상을 수상할 영화로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깜놀, 이었어요.

비가 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죠. 상류층에선 어린 아들이 마당에 텐트를 치며 노는 반면,
하류층에선 변기에서 물이 넘치고 길거리에 물이 넘쳐 개고생을 하잖아요. 극명한 대비가
인상적이었어요. 한쪽에선 비가 낭만적 분위기를 풍기는데, 다른 한쪽에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죠.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스텔라 님이 쓰신 글 유익했습니다.

stella.K 2020-05-07 15:19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 말이어요. 큰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전 트럼프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그가 오스카를 이 작품에 준 것에
투덜거렸잖아요. 일견 이해는 가더라구요.
트럼프로선 절대 이해 못하죠.
암튼 주는 상 일부러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의외이긴 해요.ㅋ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 모든 언어가 멈췄을 때- 음악 한 줄기가 남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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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은 잘 만들어지긴 했다. 무엇보다 책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또 디자인이 좋은 만큼 내용도 나름 튼실하다. 저자가 공들여 썼다는 느낌이 든다. 클래식 입문자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기존에 클래식 입문서들이 많이 나온지라 과연 이 책이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래식 입문서들이야말로 그 주기가 그렇게 길지는 않고 자꾸 새로운 책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미 클래식 입문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하기엔 조금은 망설여진다.


클래식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을 이 책에서도 빠짐없이 다루었다. 그래서 조금은 식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젠 전문적인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이 미덕이 없는 건 아니다. 학창 시절 외엔 음악 이론을 공부한 적이 없고, 또 배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머릿속에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음악 용어들이 낯설게 느껴질 정돈데 그것을 우리말로 친절하게 풀어준 점은 고마울 정도다. 


나 같은 경우 카라얀의 시대 때 클래식을 접한 세대라 이후 어떤 지휘자가 있는지 거의 깜깜하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게오르크 숄티는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지휘자들인데 그들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으니 새삼 클래식에 대한 나의 게으름과 무지함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그것을 이 책에서 단편적으로 남아 알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윤이상을 다뤄준 것이 고마웠다. 물론 저자는 방송국 PD로서 한창때 윤이상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거의 잊힌 거나 다름없이 되었는데 이렇게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돼서 반가웠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아쉽게 느낀 건, 저자가 큰 장이 끝날 때마다 '소년, 클래식을 만나다'란 코너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음악과 관련한 자전적 이야기를 써 놓고 있는데, 이럴 것 같으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 그런 클래식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 제목과도 얼추 맞는 거 아닌가? 아니면 클래식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던가. 뭔가 엇박자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 코너에 소년 때 어떻게 클래식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키워 왔으며 그것과 관련된 직업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단편적으로 다뤘다. 음악을 처음 알게 해 줬던 누나와 중학생 시절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볼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 방송국 음악 PD가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흥미롭게 써 놓았다. 


난 저자만큼의 음악에 열정은 없지만 확실히 음악은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뭔가의 힘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도 있는데 오직 나만을 위해 피아노를 사 주셨다. 내 몸의 족히 3배는 넘었을 피아노가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난 기쁘고 좋기보단 오히려 그것에 압도 당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나는 거의 3년 간을 피아노의 압제 속에 살아야 했고, 마침내 음악에 소질도 관심도 없다는 걸 안 부모님은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주셨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내가 속한 반이 합주반으로 지정되었다는 걸 알았다. 우린 꼼짝없이 방과 후 두 시간 여를 합주 연습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됐다. 지금 생각하면 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전혀 학생의 사정을 고려치 않은 것으로, 원래는 학생을 모집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어떻게 어느 한 반을 지정해서 반강제적으로 연습을 시키고 대회에 나가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우리의 출전곡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었다. 인생이란 게 다 그렇듯 현재는 고생이고 지나면 추억이다. 놀라운 건 그다음부터였다. 피아노를 배울 때에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던 클래식을 그때 이후로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 종일 듣고 있었다. 귀가 트인다는 게 이런 걸까. 음악은 그냥 귀에 들려오면 듣고 안 들리면 마는 물 같고, 공기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집착할 수 있는 거구나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런데 난 확실히 주위력이 떨어지긴 하는가 보다. 그 옛날 <라데츠키 행진곡>을 수도 없이 연습하고, 지금도 가끔씩 라디오에서 듣기도 하는데, 그 음악을 들으면 금방 어린 시절도 빠져들 줄만 알았지 정말 왜 요한 슈트라우스가 왜 이 곡에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에 관해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 책을 보니 새롭게 알았다. <라데츠키 행진곡>의 '라데츠키'는 오스트리아의 존경받는 노장군이었단다. 1848년 쿠스토자 전투에서 이탈리아 무장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개선한. 그래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것이라고. 글쎄, 알았는데 잊어 먹은 건 아닐까. 내가 그렇게 기본 상식도 모르고 그 음악은 연주하고 듣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책은 나름 의욕적으로 쓰긴 했던 것 같은데 약간은 산만하고,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다소 아쉬운 느낌이 있다. 저자의 다른 책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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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1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가 트인다는 건 좋은 거죠. 그것도 학창시절에요.
저는 요즘 음식 만들 때 베에토벤 곡을 듣곤 합니다. 폰으로 유튜브에서 퍼온 거죠.
힘차서 좋더라고요.

stella.K 2020-04-22 14:13   좋아요 1 | URL
그 시절 연습하기 싫어서 죽을 것 같더라구요.
무엇보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게
그렇게 억울하더라구요.
하지만 그게 나중엔 정말 좋은 약이 되었지요.
클래식은 처음엔 듣기가 지루하지만 자꾸 들으면 좋아지잖아요.
그래도 아직 전인미답의 음악가가 있어요. 말러.
작심하고 들으면 모를까 참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베토벤을 들으신다니 말러도 들으시겠어요.
아시죠? 말러가 제2의 베토벤인 거.^^
 
이낙연의 언어 - 형용사는 명사의 적이다
유종민 지음 / 타래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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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막말 싸움이 하도 꼴불견이라 도무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인종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정치인들도 반성을 해야겠지만 방송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원래 방송이란 게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니 정계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원래 저 동네는 그런가 보다 하게 만든다. 정계에 어디 꼭 그런 사람만 있겠는가. 묵묵히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왜 그리도 묻혀만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언제부턴가 이낙연 전 총리의 말이 회자가 되었다. 막말이나 독설 하지 않고 점잖게 상대를 제압하다니. 그가 과연 어떤 언어를 구사하기에 그럴까 싶어 이 책을 읽었다.  


세상에 가장 볼만한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하는데 그건 적어도 반은 맞고 반을 틀린 소리다.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이 구경들이 매번 볼만하단 말인가. 전자는 안타깝고, 후자는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진다. 이걸 좋아한다면 그건 사디즘이다. 사실 싸움 구경이 볼만해지려면 받아치는 사람이 뭔가 달라야 흥미가 있는 법이다. 당한 만큼 갚아 준다는 태도면 결국 똑같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다. 정계엔 나을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있네. 그것이 내가 이낙연 전 총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사실 막말 싸움도 할 수 없으니까 하는 것이고, 누구는 그것도 전략의 하나라고 할지 모르겠다. 뭐 세력을 결집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여론이 나누어졌을 때 상대를 향하여 대신 짖어 주는 개라고 합리화할지 모르겠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어떻게 정치인이 대신 짖어주는 개란 말인가. 국민은 개싸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정치인은 사람이다. 그 정치인의 정책을 보고 싶은 거다. 솔직히 싸움은 국민이 하는 것 아닌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고 하나의 정책으로 입안시켜 법과 제도로 만들어 주는 게 정치인의 할 일 아닌가. 그것을 얼마나 잘해 나갈 것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이 검증되는 것이다. 


정당한 말로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독설과 악다구니부터 쓴다면 그건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설혹 독설과 악다구니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또 실제로 그렇게 해서 이겨왔다면 그건 이긴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국민은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언제나 국민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말이 되는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가 통하는 정치.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분명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다. 말은 그 사람의 사고 수준을 측정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분명 이낙연의 언어가 군계일학이 될 만큼 훌륭할지 모르나 어찌 보면 이런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국회에 더 많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정치인들이 얼마나 언어 구사력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그가 주목을 받는 걸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낙연의 언어를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저자는 이순신과 한비자, 볼테르를 빗대어 이낙연 총리가 언어를 어떻게 구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의욕은 높이 사 줄만 하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선거의 계절이라 그런가 왠지 읽을수록 낚였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이낙연 총리가 이순신과 한비자, 볼테르에 비할만한 건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지 좀 의문스럽다. 그나마 저자는 이순신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김훈 작가가 소설 <칼의 노래>를 썼을 때의 생각들을 기록하기도 한 <연필로 쓰기>란 에세이를 인용했다는 점에서 도대체 정말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인용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김훈 작가의 생각을 인용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참고로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의 삶을 일부 차용한 것은 맞지만 역사 소설도 전기 소설도 아니라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실존 소설이다.)  


게다가 저자가 정말로 이낙연의 언어를 좋아한다면 현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별로 그런 느낌도 없다. 그냥 어디선가 주워 모은 것을 짜깁기한 느낌이고, 그 빈 곳을 그렇게 이순신과 한비자와 볼테르로 채운 건 아닌지.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3분의 2(어떤 책은 2분의 1) 정도 되는 지점을 지나면 나머지 뒷부분은 동어반복적이고 좀 엉성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책도 그것을 비껴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난 이 책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인들이 아니더라고 워낙에 우리 일상 언어가 비속어에 오염 정도가 심각해 오히려 이런 책은 좀 더 다양하게 많이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 길 가다 우연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중 유독 한 아이가 한마디 건너 욕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 그 아이를 떠올려 보면 말이다. 물론 그 나이는 반항심에 일부러 더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감안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쯤 선거 가능한 연령이 되어 있을 것이다. 또 더불어 생각나는 건 국회에서 싸우면 벌금 좀 먹였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법은 정치인들에겐 왜 그리도 관대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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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1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리티션 : 나는 누구보다 나에게 관대하다.

stella.K 2020-04-01 13:4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북프리쿠키 2020-04-01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세개에 텔라님의 느낌이 다가옵니다. 정치는 역시 3류인가 봅니다. 최악과 차악중에 선택할 뿐인데 최선과 최악으로 서로가 선전하고 헐뜯죠.
좋은 점이 있다고 나쁜 것을 덮을 순 없듯이 좋은 점이 있다고 막연히 모든 것이 선이려니 찬양하는 것도 배격합니다. 암튼 텔라님의 균형있는 생각이 참 흐뭇하네요♡

stella.K 2020-04-01 18:14   좋아요 1 | URL
ㅎㅎ 이런 코로나 블루의 나날에 쿠키님의 칭찬을 받으니
유쾌해지네요. 고맙습니다.^^

수이 2020-04-0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법은 정치인들에게도 관대하고 범죄자들에게는 특히 더 관대한 거 같아요. 저 어제 차 타고 지나갈 때 이낙연 봤는데 ㅎㅎ

stella.K 2020-04-04 19: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반가웠겠습니다.ㅋㅋㅋㅋ

후애(厚愛) 2020-04-10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면 정치인의 막말 싸움에 질려 버려서 채널을 돌리고 맙니다.ㅋㅋ
거기다 모두 말말말... 말뿐이에요.
일교차에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20-04-10 20:2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후애님도 좋은 주말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