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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퀸의 노인과 바다 - [초특가판]
주드 테일러 감독, 안소니퀸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4월
평점 :
며칠 전 우연히 영화 <노인과 바다>를 보았다.
원래는 스펜서 트레이시라는 배우가 출연한 <노인과 바다>가 있지만, 내가 본 영화는 안소니 퀸이 주연을 맡은 영화다.
2년 전쯤에 책으로 읽었는데 기자출신 헤밍웨이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여러 형용사나 장황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고도 이런 명작을 쓸 수 있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좀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듣자하니 이런 헤밍웨이도 처음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라니 뭔가 위로를 받는 것도 씁쓸하기도 하고. 대중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헤밍웨이의 그런 건조한 문체가 나름 좋긴 하지만 웬지 모를 쓸쓸함과 고독이 베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보면 노인과 소년만 나온다는 점에선 꼭 연극에서 2인극을 보는 것도 같고. (2인극의 대표적 작품은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될 것이다). 소설의 끝도 조금은 모호하게 끝나지 않던가?
하지만 그에 비하면 영화 <노인과 바다>는 오히려 원작 보다 화려하다는 생각마져 들 정도다. 무엇보다 영화엔 실제로 헤밍웨이로 추정되는 작가와 그의 아내가 나온다. 다소 슬럼프에 빠져 있는 작가가 노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되고 유심히 관찰을 하게 된다는 건, 헤밍웨이가 실제 모델인 어부 노인을 취재하고 그것을 글로 썼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그리고 소년뿐만 아니라 어부 산티아고 노인의 딸이 나와 노인이 지난 삶을 어떻게 살아 왔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했고, 웨이터도 나오고 주변을 여행하는 사람들, 동료 어부 등을 출연시켜 스토리를 더 풍부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원작을 전혀 훼손하지 않았으니 대단하다 싶기도 하다. 특히 노인이 상어와 싸우는 장면을 어떤 방식으로 촬영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84일을 고기 한마리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산티아고 노인의 딸에 수긍할만도 하지 않을까? 이제 아버지는 늙어서 물고기들도 아버지를 안 따르는 거라구욧! 그러니 이제 저와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란 말예요.
그런데도 노인은 무슨 자존심인지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딸과도 같이 살 마음이 없다. 거기엔 도대체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것을 노욕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나는 누군가를 80일 넘게 기다려 본적이 있었나? 평생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두 달 이상 해 본적이 있는가를 반성하게 됐다. 특히 나 같이 포기가 빠른 인간은 84일을 기다리는 건 차라리 그 전에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야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포기할 테니까.
그렇다고 84일씩이나 기다렸음에도 노인에게 합당한 열매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처절한 사투와 고기 대신 훈장 같은 상처. 그리고 절대적인 피곤만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영화는 원작과 달라서 원작에서 노인은 피곤에 찌들어 잠에 골아 떨어졌지만, 영화는 마치 1등은 못했지만 달리기를 완주한 노약자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박수가 보냈다는 것이 좀 다르다는 정도랄까. 그것은 또 산티아고 노인에겐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씁쓸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또 웃기는 건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나의 사춘기 때 가졌던 어설픈 생각들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 시절 어설픈 염세주의가 있었다. 사람은 어차피 죽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들 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나의 엄마와 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왜 나를 낳아서 이토록 어렵고 힘들 게 만드는 것인가? 나는 그저 인간이 되기 전 하나의 아베마가 되어도 좋았을 것을. 죽을 땐 또 어떤 고통 속에서 죽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생각은 나이가 들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없어지긴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나의 부모님이 알면 그건 또 얼마나 서글픈 것이 되겠는가? 그리고 삶은 과정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나의 그런 생각은 경쟁속에 내몰려진 학교가 숨 막히게 싫어 나의 막히는 숨을 알아 달라는 일종의 몸부림 내지는 합리화였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린 모두 다 시지프스의 후예다. 이즈음 결과로만 얘기 되어지는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1등에게만 박수를 보낼 것이 아니라는 걸 어설피 아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또 천박한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그건 천박한 자본주의 보다 더 나쁜 것이 될 것이다.
언젠가 모 작가는 인간을 기만하는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경멸하고 고발하는 것이 작가가 하는 일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멋지고, 화려하고, 예쁘고, 보암직한 것만이 아름다움의 총칭이 아니며, 인간다움의 총칭은 더 더욱 아니다.
청새치라고 하는 결과물을 잡아 올리지 못하고, 상처뿐인 산티아고 노인을 패배자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걸 단순히 동정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말하리라. 언제부터 인간의 동정이란 감정을 싸구려 취급했냐고. 사실은 그 감정엔 동정 이상의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그냥 죽는 것과 도전하고, 싸우고, 상처 입고 죽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일까? 어차피 지나갈건데 사랑은 해서 뭐하냐라고 묻겠는가? 어차피 일어날 건데 잠은 자 뭐하겠냐고 묻겠는가?
그런데 귀환하는 산티아고 노인의 표정을 보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그것은 단순히 청새치를 잡지 못해 아쉬운 것마는 아닐 것이다.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간섭도 도움도 귀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도로 피곤한 몸 잠깐 누군가를 의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의 격려와 박수를 받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겠지. 청새치를 잡지 못해 속상한 건 사그러지지 않는다. 거기에 존재를 느끼는 것과 보는 것의 간극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인생이고, 자신이 해 왔던 일인데 새삼 박수 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봐야 자존심만 더 상하지.
인생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칭찬을 받던 비난을 받던 온전히 내 것으로 살아내는 것. 그러니 엄살 피우지 말아야 한다. 핑계대지 말아야 한다.
현재는 그럴지라도 후에 산티아고 노인은 소년과 함께 희희낙낙 한다. 어쩌면 그때 노인은 자신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늙었다는 걸. 그래서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노인의 존재론적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느끼는 삶의 여유로움이란 능선을 넘어 봐야 아는 일인가 보다.
나도 그렇다. 난 아직 노인은 아니지만 이젠 젊지도 않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또 얼마나 싫은 것인가? 그래서 한 번은 크게 앓고, 한 번은 바닥을 치고, 또 한 번은 크게 체념하면 뭔지모를 조바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러면서 넓어지고 여유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팝 가수 마돈나가 보그 지와의 인터뷰에서,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성공하게 만들었냐고 물었더니 두려움이라고 대답했단다.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누구는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볼지 모르겠는데, 난 왠지 그녀가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도 그녀가 선택한 삶이라면 그것으로 인정은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산타이고 노인이 행복했을까?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아 보인다. 비록 청새치를 잡아 올리지는 못해도 소년과 함께 나누는 웃음이 싫지 않았을 것이고, 죽을지도 모르는 고래와의 싸움에서 살아 돌아와 저녁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때 바라 본 하늘은 그 이전에 바라 본 저녁 하늘과 달랐을 것이라는 걸 우린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그 하늘을 보면서 평생 고기잡이로 가정을 일구었으니 그만하면 흉잡힐 삶은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요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잘 했다고 칭찬할 수 있는 것이 남에게서 받는 위로와 격려 보다 값질 것이다. 또 그래야 남이 해 주는 격려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헤밍웨이가 허무주의자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꼭 허무주의를 닮고 있지마는 않다. 오히려 실존이 더 많이 느껴지고, 영화는 소설 보다 더 밝은 느낌이다. 영화든 책으로든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