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밤, 영화 전문 채널에서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솔직히 예전에 이 영화를 보려다 엎은 적이 있다. 나는 대체로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유독 이 <전우치>만큼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보다가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을 듣고 영화를 다시 본다면 좋지 않을까 했다.

아, 그런데 이 영화는 나와는 아직 인연이 없던 걸까? 하필 같은 시간에 다른 방송에서<중경삼림>을 하는 거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해는 1994년. 그런데 우리나라에 상영된 건 1995년이다.

그것을 내가 기억하는 건, 그해 나는 창작을 배우러 학원을 다녔었다. 나는 그때 창작을 가르치는 사설 학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전까지 그런 건 대학교에서나 가르치는 줄 알았다. 덕분에 난 거기서 나의 꼰대 선생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에겐 창작 전반에 관한 강의를 하셨지만 (아마도)같은 날 저녁 때는 H 문화센터에서 시나리오를 가르치셨을 거다. 

그때만해도 우리나라에 왕가위 감독은 그다지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이 선생님이 최초로 알린 장본인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은 어디서 또 이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 우리나라에 상륙할 거란 정보를 입수하셨을까? 하긴, 선생님은 시나리오 강사로도 활동을 하셨으니까 그 바닥의 소식을 빠싹하셨겠지. 선생님이 왕가위 감독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우리나라 극장에 곧 걸릴 것이니 그때 꼭 보라고 거의 침을 튀기며 강요하다시피 했다. 

우리야 뭐 모르는 영화를 접하는 것이 나쁠 건 없다만 어찌보면 취향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한편 마음이 묘하게 편치는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정말 이 영화를 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 같은 수강생이었던 선과 함께 이 영화를 언제 볼까를 정하고 있었다. 다음 주 무슨 날 몇시에 만나서 보자 거의 날짜와 시간까지 정했는데 왠걸, 꼰대 선생님이 중간에 끼어들어 급하게 점심을 먹고 바로 그날 영화를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의 약속은 무엇이고, 이 영화가 상륙하거든 꼭 보라는 선생님의 침 튀김은 뭐란 말인가? 결국 이렇게 같이 볼 거면서. 이 선생님 좋게 말하면 강단있고, 나쁘게 말하면 무대뽀다. 그저 단지 수강생과 이물없이 영화를 볼 생각을 했다는 선생님의 태도가 좀 신선해 보였다고나 할까? 

물론 그럴 경우 보통은 과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표를 대신 사곤 하던데 그건 역시 코흘리게 시절 이야기고, 그때 우린 이미 다 큰 성인이었으니 오히려 선생님의 표까지 사 드려야 할 입장이다. 그때 누가 선생님의 표를 대신 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선생님은 대머리도 안 되고 지금까지 잘만 사신다. 아무튼 그렇게 보기 시작한 이 영화는 글쎄.. 영화를 참 독특하게 찍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를테면 임청하가 노란머리 마약밀매자로 나오지 않던가? 자신을 배반한 떨거지들을 총으로 죽일 때 영상이 특이했다. 그때까지 그렇게 영화를 찍은 감독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거를 빼면 뭐가 좋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유명한 흘러간 팝송 마마스 앤 파파스의 노래를 영화에서 멋지게 복원해 냈다는 것 외에는.

확실히 선생님은 취향을 강요하고 계셨다. 영화가 끝나고 뭘 봤는지 얼떨떨해 하는 사람이 모르긴 해도 나 말고도 적어도 한 명은 더 있지 않았을까? 단지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고, 선생님 덕분에 좋은 영화 봤다고 기분 좋게 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난 혼자 조용히 이 영화를 보며 그때를 반추해 본다. 그때 예정대로 같은 수강생이었던 선과 함께 봤더라면 분명 뭐 생각 보다는 별 로다라고 입맛을 다셨을지도 모른다. 그건 지금 봐도 그랬을 것 같다. 영화 내용 자체가 딱히 사랑을 이룬 것도 이루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금성무와 임청하가 나오는 첫번째 에피소드는 확실히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30개나 되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는 금성무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호텔인지 여관방에서 임청하의 신발을 벗겨주려면 좀 일찍 벗겨줄 일이지 새벽 동이 터올 무렵 방을 나가면서 벗겨줄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자기 엄마가 여자는 신발을 신고 자면 발이 붓는다고 했다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경찰관이 마약밀수에 살인까지 하는 여자를 사랑하다니? 말이되는가? 하긴 별로 사랑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저 사랑할 줄 모르는 고독한 영혼을  그렸다고나 할까? 아, 그리고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느냐는 이 선전문구 같으면서도 드라마틱한 대사는 금성무의 대사였구나 싶다.

그래도 두번째 에피소드는 첫번째에 비해 다소 밝고 깜찍한 느낌마져 들긴 한다. 하지만 영화 중간중간에 보이는 양조위의 하얀 난닝구에 빤스 바람은 어딘가 처량맞아 보이긴 한다. 이렇게 멋진 배우를 이토록이나 처량맞게 만들어 놓다니. 왕가위 감독은 확실히 나빴다.      

하지만 왕페이는 확실히 사랑스럽다. 사랑을 이룰지도 모르는 그 순간 용기가 없어 한발 물러서고 도망가는 그 마음을 일견 이해할 것도 같다. 그래서 하얀 난닝구에 빤스 바람인 양조위가 더 처량맞아 보이는 거겠지. 노래 가사말마따나 한 발 다가서면 두 발 물러서는 고독한 사랑을 전혀 우울하지 않게 다룬 것을 보면 확실히 왕가위 감독은 난 사람이긴 한가 보다. 왜 나의 꼰대 선생이 침 튀겨 가면서 이 사람 영화는 무조건 봐야 한다고 했는지도 알 것 같고. 그래서 또 이후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심심찮게 봐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영화 별로였던 것 같다고 말할 선은 이제 없다. 언제부턴가 회자정리가 되서 종무소식된지 오래다. 가끔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면 옛 생각이 떠오른다. 이맛에 영화를 보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엔 유통기한이 있어도 역시 추억엔 유통기한이 없다.

그나저나 <전우치>는 언제 또 보려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5-03-3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캘리포니아 드리밍 생각나요~~

stella.K 2015-04-01 13:3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팝송도 그냥 듣는 것과 영화의 한 장면에 삽입되어 듣는 것과
참 맛이 달라요. 그죠?
그때만해도 미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뭐 그닥 동경은 안 되더군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4-0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에 하얀 삼각 빤스와 난닝구에 대한 패티시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비정전을 보십시오. 거기서도 장국영이.... 하튼, 저도 중경살림 좋은 건 모르겠더군요.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말하기도 그런 어정쩡한... 전 아비정전, 화양연화, 동사서독... 이렇게 세 편이 좋군요...

stella.K 2015-04-01 15:48   좋아요 0 | URL
오, 그런가요? 그렇지 않아도 저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게
많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장국영도 그랬군요. 근데 오늘이 또 장국영 12주기라네요.
장국영이 여기저기 유명한 영화는 다 나왔더군요.
어제도 장국영 추모라고 해서 IP TV 메뉴에 몰아 있던데
금옥만당은 좀 재미가 없더군요. 졸려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이번 주까지 무료로 하는 거 몇편 볼까 해요.^^

페크pek0501 2015-04-0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영화가 좋다, 에 대해서 의견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아요.
사람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테니까요.
책도 그렇잖아요. 저는 책이든 영화든 인간의 마음을 꿰뚫은 게 좋더군요. ^^
반전이 일어났는데 그 반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설득력이 있는 작품일 때 위대해 보여요. 재미가 느껴지고요...^^

stella.K 2015-04-01 14:04   좋아요 0 | URL
중경삼림은 언니가 좋아하는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닐 듯해요.
하지만 흘러간 옛 영화가 좋은 건 옛 추억에 잠겨 볼 수 있다는 거죠.
이 영화에서 임청하는 정말 매력적으로 나왔는데
지금의 그녀는 아줌마죠. 그러니 저는 어떻겠습니까?ㅠ
책도 다시 읽게되는 책이 있긴 한데 영화처럼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읽게 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새롭게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지.

오전까지 날씨가 흐리더니 지금은 맑게 개었어요.
점심 전 집 앞에 작은 공원을 산책하고 들어왔는데
꽃들이 제법 봉오리를 터트리고 있더군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미세먼지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안소니 퀸의 노인과 바다 - [초특가판]
주드 테일러 감독, 안소니퀸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 우연히 영화 <노인과 바다>를 보았다. 

원래는 스펜서 트레이시라는 배우가 출연한 <노인과 바다>가 있지만, 내가 본 영화는 안소니 퀸이 주연을 맡은 영화다.   

 

2년 전쯤에 책으로 읽었는데  기자출신 헤밍웨이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여러 형용사나 장황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고도 이런 명작을 쓸 수 있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좀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듣자하니 이런 헤밍웨이도 처음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라니 뭔가 위로를 받는 것도 씁쓸하기도 하고. 대중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헤밍웨이의 그런 건조한 문체가 나름 좋긴 하지만 웬지 모를 쓸쓸함과 고독이 베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보면 노인과 소년만 나온다는 점에선 꼭 연극에서 2인극을 보는 것도 같고. (2인극의 대표적 작품은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될 것이다). 소설의 끝도 조금은 모호하게 끝나지 않던가?

 

하지만 그에 비하면 영화 <노인과 바다>는 오히려 원작 보다 화려하다는 생각마져 들 정도다. 무엇보다 영화엔 실제로 헤밍웨이로 추정되는 작가와 그의 아내가 나온다. 다소 슬럼프에 빠져 있는 작가가 노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되고 유심히 관찰을 하게 된다는 건, 헤밍웨이가  실제 모델인 어부 노인을 취재하고 그것을 글로 썼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그리고 소년뿐만 아니라 어부 산티아고 노인의 딸이 나와 노인이 지난 삶을 어떻게 살아 왔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했고, 웨이터도 나오고 주변을 여행하는 사람들, 동료 어부 등을 출연시켜 스토리를 더 풍부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원작을 전혀 훼손하지 않았으니 대단하다 싶기도 하다. 특히 노인이 상어와 싸우는 장면을 어떤 방식으로 촬영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84일을 고기 한마리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산티아고 노인의 딸에 수긍할만도 하지 않을까? 이제 아버지는 늙어서 물고기들도 아버지를 안 따르는 거라구욧! 그러니 이제 저와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란 말예요. 

 

그런데도 노인은 무슨 자존심인지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딸과도 같이 살 마음이 없다. 거기엔 도대체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것을 노욕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나는 누군가를 80일 넘게 기다려 본적이 있었나? 평생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두 달 이상 해 본적이 있는가를 반성하게 됐다. 특히 나 같이 포기가 빠른 인간은 84일을 기다리는 건 차라리 그 전에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야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포기할 테니까. 

 

그렇다고 84일씩이나 기다렸음에도 노인에게 합당한 열매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처절한 사투와 고기 대신 훈장 같은 상처. 그리고 절대적인 피곤만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영화는 원작과 달라서 원작에서 노인은 피곤에 찌들어 잠에 골아 떨어졌지만, 영화는 마치 1등은 못했지만 달리기를 완주한 노약자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박수가 보냈다는 것이 좀 다르다는 정도랄까. 그것은 또 산티아고 노인에겐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씁쓸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또 웃기는 건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나의 사춘기 때 가졌던 어설픈 생각들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 시절 어설픈 염세주의가 있었다. 사람은 어차피 죽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들 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나의 엄마와 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왜 나를 낳아서 이토록 어렵고 힘들 게 만드는 것인가?  나는 그저 인간이 되기 전 하나의 아베마가 되어도 좋았을 것을. 죽을 땐 또 어떤 고통 속에서 죽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생각은 나이가 들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없어지긴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나의 부모님이 알면 그건 또 얼마나 서글픈 것이 되겠는가? 그리고 삶은 과정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나의 그런 생각은 경쟁속에 내몰려진 학교가 숨 막히게 싫어 나의 막히는 숨을 알아 달라는 일종의 몸부림 내지는 합리화였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린 모두 다 시지프스의 후예다. 이즈음 결과로만 얘기 되어지는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1등에게만 박수를 보낼 것이 아니라는 걸 어설피 아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또 천박한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그건 천박한 자본주의 보다 더 나쁜 것이 될 것이다.

 

언젠가 모 작가는 인간을 기만하는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경멸하고 고발하는 것이 작가가 하는 일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멋지고, 화려하고, 예쁘고, 보암직한 것만이 아름다움의 총칭이 아니며, 인간다움의 총칭은 더 더욱 아니다.

 

청새치라고 하는 결과물을 잡아 올리지 못하고, 상처뿐인 산티아고 노인을 패배자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걸 단순히 동정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말하리라. 언제부터 인간의 동정이란 감정을 싸구려 취급했냐고. 사실은 그 감정엔 동정 이상의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그냥 죽는 것과 도전하고, 싸우고, 상처 입고 죽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일까?  어차피 지나갈건데 사랑은 해서 뭐하냐라고 묻겠는가? 어차피 일어날 건데 잠은 자 뭐하겠냐고 묻겠는가?             

 

그런데 귀환하는 산티아고 노인의 표정을 보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그것은 단순히 청새치를 잡지 못해 아쉬운 것마는 아닐 것이다.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간섭도 도움도 귀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도로 피곤한 몸 잠깐 누군가를 의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의 격려와 박수를 받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겠지. 청새치를 잡지 못해 속상한 건 사그러지지 않는다. 거기에 존재를 느끼는 것과 보는 것의 간극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인생이고, 자신이 해 왔던 일인데 새삼 박수 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봐야 자존심만 더 상하지. 

 

인생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칭찬을 받던 비난을 받던 온전히 내 것으로 살아내는 것. 그러니 엄살 피우지 말아야 한다. 핑계대지 말아야 한다.

 

현재는 그럴지라도 후에 산티아고 노인은 소년과 함께 희희낙낙 한다. 어쩌면 그때 노인은 자신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늙었다는 걸. 그래서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노인의 존재론적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느끼는 삶의 여유로움이란 능선을 넘어 봐야 아는 일인가 보다.

 

나도 그렇다. 난 아직 노인은 아니지만 이젠 젊지도 않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또 얼마나 싫은 것인가? 그래서 한 번은 크게 앓고, 한 번은 바닥을 치고, 또 한 번은 크게 체념하면 뭔지모를 조바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러면서 넓어지고 여유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팝 가수 마돈나가 보그 지와의 인터뷰에서,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성공하게 만들었냐고 물었더니 두려움이라고 대답했단다.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누구는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볼지 모르겠는데, 난 왠지 그녀가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도 그녀가 선택한 삶이라면 그것으로 인정은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산타이고 노인이 행복했을까?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아 보인다. 비록 청새치를 잡아 올리지는 못해도 소년과 함께 나누는 웃음이 싫지 않았을 것이고, 죽을지도 모르는 고래와의 싸움에서 살아 돌아와 저녁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때 바라 본 하늘은 그 이전에 바라 본 저녁 하늘과 달랐을 것이라는 걸 우린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그 하늘을 보면서 평생 고기잡이로 가정을 일구었으니 그만하면 흉잡힐 삶은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요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잘 했다고 칭찬할 수 있는 것이 남에게서 받는 위로와 격려 보다  값질 것이다. 또 그래야 남이 해 주는 격려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헤밍웨이가 허무주의자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꼭 허무주의를 닮고 있지마는 않다. 오히려 실존이 더 많이 느껴지고, 영화는 소설 보다 더 밝은 느낌이다. 영화든 책으로든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봤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4-12-0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인과 바다>를 오래전에 읽었어요.
이 작품으로 떠오르는 건 노인의 투지, 승부욕.
이 작품에서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자신은 자살을 함으로써 패배했으니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인생인 듯...

그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고 감탄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구나, 감탄했어요.

이 소설을 오늘 읽으면 좋을 것 같군요. 오늘 첫 눈 오신 걸 아시는지요?

stella.K 2014-12-01 11:4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어요. 이렇게 좋은 소설을 쓰고 본인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노인과 바다>가 너무 좋아 전작 읽기를 해야지 해 놓고
여전히 못하고 있네요.ㅠ

오늘이 저에겐 첫눈이네요. 며칠 전 첫눈이 내렸다는데
저는 본적이 없으니 시침 뚝 떼고.ㅋㅋ
벌써 12월이어요.
이런 생각 안하고 그냥 살려구요. 그래봤자 내 남은 살지 않은 첫날이잖아요.^^
 
그림자 살인 (1disc)
박대민 감독, 황정민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이야기의 구조가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함이 있긴하다. 어디서 봤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나름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탐정 영화를 후기 조선 시대로 설정했다고 보면 되는데, 내가 영화나 책이나 그 시대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정말 꽤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추격씬에서 보여지는 핸드 헬드 촬영 기법은 확실히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이 뛰는 것처럼 만드는 효과가 있어 영화에 공을 참 많이 들였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또한 양반가 아낙들이 궁수를 하는 장면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선 잘 보기 어려운 장면인 것 같은데 그런 장면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림자 살인'일까 제목이 궁금했는데, 영화는 이것의 궁금증을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잘 풀어갔다고 생각한다. 시대물이라 고증이 쉽지 않았을 텐데 영화에서 보여지는 미장센도 좋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배우의 고충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 거의 없는데, 특별히 이 영화에선 아역으로 나왔던 별이 역을 맡았던 김향기의 연기가 짧지만 못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 배우의 존재감을 올 여름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소녀역을 싱그럽게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이 배우는 그 전에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도 나왔던 것이다. 이 영화가 2009년도 작이니 영화에선 10살도 안 됐다고 황정민이 대사에서 그랬더만, 실제로 내가 볼 때 6,7살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유아성도착자의 상대역으로, 피 바가지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나왔으니 연기를 해야하는 본인으로선 좀 힘들지 않았을까? 물론 아무리 잠깐 나오는 장면이긴 하지만 성인도 아닌 것이 나름 오랫동안 그 잔상이 남았을 것이라 짐작이 간다. 

 

황정민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류덕환과의 연기 호흡이 좋아 보인다. 엄지원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고. 하지만 마지막 엔딩은 굳이 없어도 되는 장면은 아닐까? 물론 본의 아니게 탐정이 된 홍진호(황정민)와 광수(류덕환)가 다음에도 여전히 탐정질을 하게 된다는 암시를 보여주는 대목이긴 하지만, 그래서도 이 영화는 더욱 어디선가 본듯한 영화의 냄새를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느낌이다. 이런 영화는 일부러라도 좀 챙겨봐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헨젤과 그레텔 (1disc)
임필성 감독, 천정명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감독의 이름이 낮설지가 않았다. 누구였더라...? 그래서 일부러 그의 필모그래필을 검색해 봤다. 그랬더니 역시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렇게 이름이 낮설지가 않으니. 그나마 이 영화도 얼마 전, 모 인터넷 TV에서 천정명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원래 호러나 그로테스크한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이 영화도 개봉 당시에도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어 모르고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의 눈을 끌었던 건, 천정명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은원재나 심은경 특히 진지희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아이들 역시 귀엽다. 그리고 연기를 꽤나 잘한다. 특히 진지희는 정말...! 난 이 배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은 이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제 너무 많이(?) 커 버렸다. 얼마 전, M 본부의 사극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문근영의 아역으로 나왔는데 이젠 아역이란 말이 안 어울릴만큼 성숙해 있었다. 몇 년 전, 같은 방송국의 모 시트콤에서 빵구똥구를 외쳐댔던 그 진지희가 맞나 싶을 정도다. 

 

영화는 대체로 볼만하다.

그로테스크하더라도 '헨젤과 그레텔'이란 동화적 이미지와 잔혹의 이미지를 나름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저 세 명의 아이들의 연기도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이 영화가 개봉 당시 주목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영화의 메시지도 뭐 그만하면 전달력이 아주 나쁜 것도 아니다. 글쎄,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뭐 얼핏 보면 아동학대를 다룬 듯도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어른아이'를 다루고 있지 않나 싶다.

몸은 어른인데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아는 어린 아이를 벗지 않은 것이다. 특히 어렸을 때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쉽게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른아이'는 그렇게 학대를 당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향은 아닌 것 같다. 누구든 자라면서 어떤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러한 면들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간의 내면을 영화는 우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아쉽다. 시간여행이란 익숙한 또는 한번쯤 보았을 방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토리의 완성도가 높지 않아서일까? 연출이나 무대 셋트 디자인은 나름 만족스러운데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그게 뭘까?

그래도 뭐 봐서 나쁠 것은 없다. 난 저 세 아역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으니까. 이렇게 넓디 넓은 영화의 바다에서 괜찮은 영화를 건져 올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울링
유하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하의 작품을 대체로 좋아한다.

그가 다루는 주제의식이 꼭 나와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보여져서 영화의 선택을 망설이지 않게 한다.

영화 '하울링'을 비교적 늦게 챙겨 봤다(그래봐야 1년 늦은 것이다. 게으른 나로선 뭐 그 정도면 아주 늦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목이 왜 하울링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영화에서 뭔가를 놓치고 본 것이 있었을까? 분명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도 있었을 텐데 다 보도록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영화에 나오는 살인개의 이름일까 생각했지만, 그 개의 이름은 '질풍이'다. 

나름 용맹스럽고 잘 생긴 늑대개에게 '질풍'이란 이름이 어울리기는 하다. 하지만 난 역시 동물애호가로서, 동물 고생시키는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단 시간 내에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좋은 조건의 영화가 몇 있을 텐데, 그 중 하나가 동물을 등장시켜 인간과 교감시키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영화는 대체로 실패하지 않고, 적어도 본전은 뽑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고나면 꼭 이렇게 해야하는 건가? 뭔가 속 시원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대체로, 동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해피엔딩은 거의 없다. 인간과 더 없는 사랑과 우정을 나누다가 장렬하게 죽어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마음의 짠함을 증폭시킨다. 이 영화도 그런 공식의 영화가 아니길 내심 바랬는데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다.

하긴, 그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아 아무나 죽이지 않고 꼭 죽여야 할 사람만(이 죽여야 할 사람이라는 것도 주관적인 기준이지, 절대 선과 악의 기준은 아니다) 죽인다고 해도, 살인견은 살인견이다. 사람을 죽인 개를 인간이 그냥 보고 넘길 리 없다. 누군가에 의해서 사살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송강호에 의해 죽지이지 않는가. 

 

충무로에서 중년의 배우치고 가장 '핫'한 배우하면 역시 김윤석과 함께 송강호일 것이다. 나 역시 그가 나오는 영화는 언제나 유쾌하게 볼 수 있어서 좋다(비록 그 영화가 꼭 유쾌한 것은 아니어도 배우 자체는 유쾌하지 않은가?). 감독이 송강호를 점찍었다는 건 역시 최선의 선택은 아닐까 싶다. 거기에 함께 나오는 이나영.

 

 

 

 

 

초짜 형사로 나오는 그녀로서는 나름 작지 않은 도전은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나영은 청순의 아이콘 아니던가. 거기에 형사라고 하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 들었다.  하긴, 내가 봐도 형사의 세계에 여자들이 뛰어 든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누구인가? 뭐든 남녀를 구별하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족속들 아닌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형사계에 정말 여자가 없는 걸까? 왜 형사라는 직업에 남자들은 여자와 함께 일하는 걸 꺼림하게 여기는 걸까?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한참 오래 전에, 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의 은사님은 남자들이 산을 오를 때 여자들과 함께 오르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함께 오르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긴다고. 다행히도 내가 그 말을 들은 건 20세기가 막 지고있을 무렵이었으니 들어 둘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어디선가 공공연히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그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다면 그저 속설 정도로 알아는 두겠지. 요즘엔 여자가 중장비도 모는 마당인데 뭔들 못하겠는가.

 

몇 년 전, 시나리오를 공부한답시고 한동안 스터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첫 모임에 나가는데 여자는 나 혼자고 남자들만 댓 명이 모여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들을 처음 대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때 따라 남자의 거칠면서도 시커먼 기운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껴 그 기에 한동안 좀 눌렸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 이나영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그때 생각이 확 났다.

 

확실히 남자의 기와 여자의 기가 다른 거겠지. 그래서 음양오행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섞여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범인을 쫓느라 늘 긴장해야 할 거친 형사들의 세상에서 이나영 같이 여리여리한 신참 형사가 들어오면 심란스럽기도 하고, 산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남자들의 세계를 감히 여자가 넘 보나 하다가도, 바짝 날이 선 남자의 기를 이 신참 형사가 흐려놓을 것만 같아 묘한 긴장을 해야한다는 것도 묘하게 신경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형사의 세계가 거칠고, 남자들을 대표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잘한다고 누가 말하던가? 어느 분야에서든 남자의 우직함, 동물 같은 직감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성의 섬세함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이것은 형사의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은연 중 이나영을 내세워 이것을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영화가 종반을 향해 갈수록 증명이라도 하듯 이나영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난 여기서, 감독 유하가 여성을 보는 관점이 나름 긍정적이고, 존중하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느낌을 살짝 갖게 만들었다. 진짜 그런지는 내가 그 사람을 못 만났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교감'이란 말이 나오는데 상당히 의미있게 와 닿았다. 영화에선 개를 훈련시킬 때 훈련자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나오던데, 감독은 그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통해 진정한 영혼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함을 말하려 했던 건 아닐까? 초짜인데다 여자였기 때문에 무시 당해야 했던 이나영을 통해 그 때마다그녀가 느껴야 했던 모멸감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느낌이다. 그래서도 감독이 일부러 여리여리한 이나영이를 캐스팅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멸감과 분노를 더 느껴보라고. 하지만 그러기만 했다면 영화는 영화가 아닐 것이다. 끝까지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한 나름의 강인함을 보여줘서 배우는 영화에서 빛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다가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어느 날 투견장을 기웃거리다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나는 보는 사람으로서 감독의 의도가 뭐였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처럼 그의 삐딱한 시선이 마음에 든다. 그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니까.

사실 영화 곳곳에서도 생각해 볼만한 요소들을 감독이 여기저기 많이 심어놓았다. 예를들며, 속을 썩히는 송강호의 아들을 보면서, 왜 요즘 사람들이 자식을 안 낳고 개를 키우려 하는 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개는 인간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또 그 뒤에 보면, 그 개가 어떤 엄마 없는 아이에겐 위로와 행복을 주기도 한다. 개와 함께 행복해 하는 아이를 보며 흐뭇해 하는 아버지. 그렇다면 낳지도 않은 아이에게 미리 실망해서 개를 키운다는 것은 뭔가 빠져 보인다. 물론 개를 어떤 목적으로 키우던  이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모습인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복수의 칼날을 위해 동물을 또는 제3의 존재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확실히 비윤리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을 위해 동물을 쓰는 것도 왠지 도덕적여 보이지는 않는다(이 영화는 양날의 칼이었을까?) 하긴, 언제나 영화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것을 비판하는 건 의미가 없어보인다. 단지 그 영화에 출연하는 동물들이 측은하다는 거지. 하지만 그건 또 모를 일이다. 출연한 동물은 좋아라 할지. 인간처럼 말을 못하니 알리가 없는 것이다.   

  

 

 

 

 

영화의 백미는 아무래도 엔딩 부분에서 질풍이와 이나영의 오토바이 추격신은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도 상대적으로 저평가 된 작품인데, 왜 그렇게 평점이 짠지 모르겠다. 내가 볼 땐 아주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꽤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