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침묵 -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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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부제가 더 마음을 끌었다. 내가 릴케를 알면 얼마나 알고, 그에게 매료당했다면 얼마나 당했을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장미를 좋아해 장미가시에 찔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장미를 좋아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건 덫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침묵의 의미를 깨닫는 건 또 얼마나 덧없고, 무모한 도전이란 말인가? 이 세대가 과연 침묵을 허용하는 시대란 말인가? 저자는 책 가운데 외로움과 침묵의 정의에 관해 쓰긴 했지만, 이것을 깨닫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성싶다. 

 

오히려 내가 꽂혔던 건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였다. 더 정확히는 '불면의 글쓰기'였다. 저자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불면하는 밤의 매혹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나는 그런 매혹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어쩌면 불가능한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밤이 털어놓는 고백 자체가 불가능한 고백인 탓이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고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이 바로 불면의 글쓰기다.(101p)      

 

저자가 말하는 불면의 글쓰기는, 확실히 열어보지 못할 판도라의 상자를 독자에게 불쑥 들이미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책은 뭔가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는 것도 같고, 저자가 읽은 책, 더 정확히는 인문학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아직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지식은 그것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 순간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유혹일까?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글쓰기에 미쳤던 건. 발자크처럼 커피에 중독돼 가며 어느 순간 미치도록 쓴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두렵고 주저하게 만드는 일이었을까? 그러던 중 교회에서 대본 쓰는 일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그것도 하필 주일학교 교사하는 일이 너무 안 맞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를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대본 쓰는 일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지만(난 늘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나에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락을 했던 것이다. 한 1년 동안은 신나게 그 일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숨어 있었나? 나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 일이 마냥 신났던 것만은 아니다. 맨땅에 헤딩하듯, 한 주에 한 편의 연극 대본을 쓴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어떤 땐 너무 글이 안 써져 컴퓨터 모니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것도 살아 있음이라 생각하고 나는 매번 주어진 숙제를 성실하게 해 나갔다.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내가 꽤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된다. 단지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사람이 뭔가 한 가지 정도는 잘하는 것이 있다는데 나는 비교적 늦게 그걸 발견해낸 셈일 뿐이다. 

 

하지만 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나는 대본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교사라는 것이다. 그 일을 성실히 했다고해서 나의 교사의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나를 새롭게 발견해 주는 일이었을 뿐, 교사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어려운 일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내가 했던 일은 교사의 직무를 바꿔치기 할만큼 대단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즉 이 일을 하느라 교사의 직무를 유기했던 것이 고스란히 내 책임으로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알았던 제자 녀석이 하나가 있었다. 난 그 녀석을 거의 2년 동안 지켜와 봤지만 이 녀석에 대한 뭔가의 믿음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제자와 선생이란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때 보면 나에게 친근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한데 선생에 대한 예의나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 녀석과 멀어지길 바랐지만, 녀석에겐 뭔가 거부할 수 없는 특유의 페로몬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녀석의 페로몬은 선생인 나 사이에 하극상을 낳았고, 또한 그것은 녀석으로 하여금 어떻게 세력을 규합하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알게해 준 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그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게 됐다면 그의 영혼에 미칠 영향이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덕분에 나와 녀석은 조직내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조직에서 파직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나로선 조직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고, 따라야겠지만 이후 오래도록 과연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남았다. 

 

뭐 좀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하필 그때 거미줄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라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훗날을 위해 더 공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글 쓰는 내가 좋았던 것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곳은 어느 창작학원이었는데 거긴 정말 별천지였다. 80년 대 어느 민주화 투사가 경영하는 곳이기도 했고, 역시 민주화 투사 중 한 분이 나의 선생이 되었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건 나는 한때 글 쓰는 사람이길 원치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든 문학 소년이 아니고, 문학 소녀가 아닌 때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지 이 꿈을 나의 의식의 수면 저 밑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일찍 찾아 온 사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독 부모님이 서로 싸우는 걸 못견뎌 했다. 엄마는 늘 약자처럼 보였고, 아버지는 늘 강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참다 못해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께 드렸는데, 아버지는 뭐 때문이었는지 화를 내지 않고 나의 그런 용기를 칭찬해 주셨다. 덕분에 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무의식으로나마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그해 늦가을이었던가? 교지에 실을 글을 모집한다고 해서, 나는 시인지 낙서인지도 모를 글을 당시 몰래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 손에 직접 쥐어 드렸다(생각해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사랑의 연서를 쥐어 드린 건 아닌지?). 나는 당연히 내 글이 교지에 실릴 줄 알았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그런데 웬걸, 기대를 가지고 교지의 첫 페이지를 열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내가 쓴 글은 한 자도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때부터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몰아 닥쳤던 민주화 운동은 그나마 있었던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사그러트리는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의 문학은 온통 참여문학 일색이었으니까. 인간의 상상력을 말살하고, 참여문학만이 문학이라면 차라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무슨 허무주읜지, 한 번 읽고마는 소설의 일회성을 생각해 볼 때 문학은 더 이상 나에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문학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작가를 대하고 보니 얼마나 소견이 좁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류는 나름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존심 생각하고, 상처만 생각하면 다시 못 돌아 갈 곳이다. 이 책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상처에 대항하는 방식은 실로 여러 가지다. 그중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은 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다. 상처는 쉽사리 콤플렉스가 되고 우울증과 신경과민, 세상과 피해의식을 낳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적극적인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수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내면에 대한 각인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 끝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192~193p)

 

그리고 난 그 일을 겪은 후 훨씬 더 안정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일을 하고 나서 나에겐 적지않은 변화도 생겼다. 유치하고, 시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는 것이다. 행복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에 영광이 찾아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제자 녀석의 하극상을 통해 녀석안에 꿈틀대고 있는 뭔가의 악마성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훗날 나는 더 큰 것을 보기도 했다. 녀석의 악마성을 교묘히 이용하는 또 다른 더 큰 권력을 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녀석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하긴 하다.

 

나는 나대로 조직이 재편될 때 그 새로운 권력에 의해 축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볼 때 또 한 번의 좌절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나만이 당한 일도 아니거니와, 원래 새로운 사람이 수장이 되면 이전에 있었던 사람은 필요에 의해 그 조직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조직을 떠나기도 한다(자의든, 타의든). 그런 차원이었으니 속상해 할 것도 없다. 단지 그 새로운 수장이 이전과 다른 얼굴로, 없는 죄도 만들어 가며 더 이상 그 조직에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인격적이고, 추잡한 행동에 분개할 뿐었다. 

 

이를테면, 글쟁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글쓰기가 좋아 죽겠는데 어딘가 필요로 하는 곳에 속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서 내가 목격한 인간의 이면과 진실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지칭함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느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아라크네의 후예들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그 일도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그후 나는 그 보다 훨씬 좋은 곳에서 글을 썼지만, 나의 글 쓰기의 욕망은 어느 조직이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의 경험과 인연이 나로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다. 그것은 항상 좋은 경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쁜 경험이 자극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불만은 나의 힘이라고, 난 항상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마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또 말한다.

글쓰기를 하건 다른 창조적인 일을 하건, 진정으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거기에서 성취감을 얻을 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된다. 이것은 상처를 내면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면화시킴으로써 극복하는 방법이다.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사랑을 찾아 열정을 쏟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과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대신 오히려 마음 속에서 상처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193p)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지금까지 한 번도 글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면서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게을러서일까? 거기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하지만 뭔가 시간이라고 하는 필터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교롭게도 저자는 위의 글에 앞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얘기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예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행태를 고발하면서, 이 모두가 진실임을 거듭 천명했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말과 위배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협잡꾼이라고 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목졸라 죽이기까지 해야한다고 했다. 과연 무시무시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요는 루소도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객관성을 들어 진실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말했다('불가능한 고백',177p~).

 

그런 것처럼 나의 이야기는 자서전이란 형태로 글 쓰기가 가능할 것도 같지만 나의 얘기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나 자신 조차도 정말 진실을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그때 일을 들쑤셔서 마음이 우울에 빠질지도 모르고, 명예훼손이라고 고발당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엄밀한 의미에서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상처받을 가능성 속에서 모두 하나라고. 또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내면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는 열정의 에너지이기도 하다고. 신이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준 까닭은 인간이 얼마나 쉽사리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게 그 상처를 극복할 내적인 힘도 부여해주었다. '망각하는 능력'과 '노력하는 힘'은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두 가지 선물이다.(195p)    

  이것이 불가능한 고백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겠다는 것이거나, 시간과 망각의 필터링을 통해, 또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좀 더 고도화된 방법을 통해 좀 더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거나.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는 글쓰기를 글 감옥이라고도 표현했지만, 그렇게 흘러온 나의 글쓰기 유전은 이제 나의 십자가요, 족쇄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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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2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잖아 그 이야기 찬찬히 쓰실 날 있으리라 생각해요.
즐겁게 기다리셔요.

그나저나 한 주에 하나씩 연극 대본을 써야 했다면...
아이고야... @.@

stella.K 2013-12-23 11:08   좋아요 0 | URL
ㅎㅎ 짧은 연극이었어요. 그러니까 하지.
하긴, 그래도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그땐 무슨 기운이었는지 그렇게 안해도 되는 걸 스스로 닥달해서 했다니까요.
저는 그렇다쳐도 그당시 주일학교 아이들 선생 잘못 만나 고생 좀 했죠.
그래도 뭐 지네들 좋으니까 선생 쫓아 와 준 거지 지네들 싫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덕분에 연극영화과 간 아이들도 몇 있었어요.^^

페크pek0501 2013-12-2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 찾기는 어려운 일 같아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진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단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나의 진실을 모를 때도 있는데 남의 진실은 어찌 알겠습니까.

망각과 노력이라는 선물... 특히 망각이란 선물이 없다면 사는 게 꽤 고통스러울 듯싶어요.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니까요. 죽은 사람을 못 잊어서 따라 죽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망각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죠.

책 제목을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 가 생각나는군요. 열심히 읽었던 책이었죠. ^^

stella.K 2013-12-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누구에겐 잊고 싶은 기억을 누군가는 말하고 싶어하죠.
묻어둬서 좋은 사람이 있고, 누구는 말하므로 치유가 되는 사람도 있겠죠?
말테의 수기를 읽으셨군요. 전 아직도 못 읽었는데...ㅠ
 
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법 - 일본 최고의 명의가 알려주는
아쓰미 가즈히코 지음, 이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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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득 이 책을 읽고 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았다. 

병원 신세 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병원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거지, 의사에게 기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저자도 주치의 말고도 서드 오피니언을 두라고 권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을 원하는 것도 끌림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요에 의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게 된 세월이 거의 15년을 헤아리는데, 그동안 이상 없이 쓰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 먹통이 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와이파이가 안 돼서 애를 먹기도 한다. 그때마다 해결사는 나의 동생이었다. 그쪽 방면으론 좀 바싹하니까. 기계치인 나는 그때마다 이런 동생이 있음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만일 동생이 없었더라면 컴퓨터가 이상징후를 보일 때마다 어떻게 했을까? 인터넷을 거의 하루도 하지 않는 날이 없는 이 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동생을 끌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상한 거지. 거기에 의사가 있다면 금상첨화지 않을까? 

 

나이가 들으니 집안에 의사 한 명쯤 있는 사람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다 어찌될지 모르니 다급할 땐 손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게 좋긴 하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으니 기댈만한 의사가 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homohospital(병원에 다니는 인간)일까? 평생 병원에 다니지 않게 되길 바랬지만 그 바람은 내 인생 10살이 채 되기 전부터 깨지고 말았다. 그나마 장기 입원이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내 인생 최장 입원기록은 그 10살 되던 해, 한 달간 입원한 기록이다. 그것도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런 줄 알지, 병원에 있으면 시간이 세로로 가는지 거꾸로 가는지 모른다. 내 느낌엔 한 석 달 입원한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그때 난 병원에 안 갈려고 무척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병원에 가면 무조건 주사놓고 아플 거라는 생각에 그런 거였는데, 막상 있어보니 생각 보다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가 보다. 어렸을 적 입원 경험도 있으니 성인이 되면 좀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한데 그러지 못했다. 십몇 년 전 병원에 심한 두통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분명 응급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버티다 버티다 결국 구급차를 타고 갔던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두통이 일반적이지 않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면 가급적 지체하지 말고 병원에 빨리 가 보는 것이 좋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병원엘 가는 것을 지옥에 가는 것만큼이나 싫어한다. 살아오는 동안 병원 신세 한 번 안 졌다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계급장처럼 부럽다. 자꾸 마음은 병원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몸은 병원과 가까워져야 할 운명이 되어가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좀 더 솔직해지자. 내가 정말 무조건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물론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무조건은 아니다.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무조건 안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요즘 병원은 옛날 병원과 달라서 인테리어가 잘 돼 있고, 사람들도 친절해 딱딱하다는 인상도 없다. 문제는 적재적소란 말이 있듯이, 언제 가야하고, 언제 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란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꼭 병원에 갔어야만 했다. 두 경우 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말했으니까. 물론 긴 세월을 두고 있긴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두 번 들으니 그것도 의사들이 자신의 위신을 좋게하기 위해 의례껏 하는 소리 같아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지만, 두 번 다 응급상황이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것이, 작년 이맘 때 나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졌었다. 그래서 정말 또 다시 병원에 실려 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다못해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닌지 겁 먹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두통으로 병원 신세를 졌던 그때 의사는 앞으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런 증세가 더 빨리 자주 나타날 수 있을 거라고 경고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의 두통을 또 다시 겪게 되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나는 그때를 정점으로 다행히도 서서히 회복을 보이고 있었고, 지금은 생활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책은,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얘기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낫게되는 병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치유를 연구하고 믿는 의사들 하나 같이 하는 얘기다. 그 말이 맞다면 작년에 나는 그렇게 몸이 안 좋아졌을 때 무턱대고 병원에 갔으면 얼마나 억울할 뻔 했을까. 하다못해 지금까지 내 인생 두 번의 병원 신세도 자연치유력을 믿는다면 굳이 안 가도 되는 걸 갔던 것은 아닐까? 의문스러울 정도다. 

 

내가 의사였거나, 집안에 누가 의사였다면 몸의 갑작스런 반응에 그렇게 많이 당황했을 것 같지 않은데,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몸의 상태와 성급한 마음이 조건반사처럼 병원을 생각하게 된다. 하다못해 나는 웬만해서 안 갈 것을 남에겐 너무나 쉽게 병원에 가 보라고 권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젠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무조건 겁부터 먹을 나이는 아니라고 본다.  

 

책 역시 딱히 언제 병원에 가 보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굳이 가야한다면 '액년' 그러니까 운수가 나쁜 해에 가 보라고 충고한다. 남자의 경우 25세, 42세, 61세고, 여자는 19세, 33세, 37세 전후다. 물론 이 액년에 나쁜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통계는 없지만, 의학적으로 봤을 때 40세 전후한 액년에는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다(139p). 나의 경우도 저자가 제시한 해에 특별히 몸의 이상징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있다고 해도 그 나이를 비껴가고 있다. 하지만 40세 전후해서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말은 일리는 있어 보인다. 내 몸 40년이면, 자축하고 위로하는 의미에서라도 건강검진을 받아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올해 유난히도 이 책을 비롯해 건강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일본 의사의 저작물을 많이 읽게 됐는데,  그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병원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것이다. 약 또한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TV에 출연하는 의사마다 병원에 오라고 거의 홍보 수준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암을 다룰 때 항암제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고, 민간요법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병원에 오라고 하는 것이다. 글쎄, 내가 그런 책만 읽어서 그런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매스컴이 병원을 맹신하도록 조장하고 있어서일까? 아무튼 확실히 일본과 한국은 뭔가 많이 달라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이 겉표지에 실린 저자의 사진이 확실히 인생을 통달한 편안한 느낌의 할아버지다. 심장 전공의라기 보단 꼭 한의학을 전공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책도 거의 놀라우리만치 간결하고 깔끔하단 느낌마져 든다. 내용도 거의 특별할 것도 없어보인다. 그냥 건강 서적을 유의해서 읽어 온 사람이라면 한 번 요점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의사 생활을 오래 한 경험 때문일까? 매 글 말미에 의사의 사명 내지는 인간적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의사가 요즘엔 맞지 않으니 이런 말을 했겠지 싶다. 과연 이런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그렇게도 없는 것일까?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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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일본도 '병원 광고 홍수'였을 테지만, 이제는 일본 시민 의식이 높아지고, 일본에서 의사 되는 사람도 의식이 높아지니, 이런 책이 꾸준히 나오고, 한국사람도 조금씩 의식이 높아지니 이제 이런 책도 번역이 되리라 느껴요.

다만, 한국 의사는 아직 의식이 높아지지 못했기에, 한국 의사는 이런 책 못 쓰지요.

일본에는 '티벳에 가서 티벳 의사가 된 사람'도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도 하고요.

stella.K 2013-12-12 16:50   좋아요 0 | URL
오, 그런 사람이 있군요.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페크pek0501 2013-12-1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치유력에 대해서 의사로부터 직접 들었어요.
제가 몸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갔을 때인데 약을 주더라고요.
제가 물었죠. 만약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니냐고요.
그랬더니 자연치유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넘어져서 몸에 상처가 나는 경우에도 약 바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듯이
그런가 봐요. 자연치유란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 가요.

나이 들면서 자신 없어지는 것, 건강인 것 같아요.^^

stella.K 2013-12-12 16:52   좋아요 0 | URL
그럼 약 안 드셨겠네요.

맞아요. 예전엔 무조건 나이드는 거 싫었는데,
지금은 나이들어도 좋다. 아프지 않게만 살았으면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ㅋ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법칙 - 나를 천재로 만드는 비밀이야기
김병완 지음 / 아이넷북스(구 북스앤드)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있으니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 나는 시나리오 창작 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같이 수강했던 한 수강생이 나의 손금을 봐주겠다는 것이다. 한참을 보더니 다짜고짜, 끝까지 못 간다고 너무나 확신있게 외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중엔 자신도 그렇게 외치듯이 얘기한 게 쑥스러운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렇다고 손금을 너무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누구라면 알만한 최고 갑부중 한 사람은 누가 손금을 보더니 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일부러 손바닥을 찢어서 손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노력 여하에 달린 거지 손금이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듯 하는 것이었다. 

 

아니 누가 뭐랬나? 내가 가야한다면 어디까지 가야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그 갑부처럼 뭔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가기위해 손바닥이라도 찢어서 없는 손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차피 인간의 끝은 죽음 아니면 파멸인 것을 그걸 꼭 가 봐야 아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수강생은 그러더니 내 옆의 친구를 봐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나 보다 후한 손금을 봐주면서 대체로 좋긴 하지만 대신 몸을 사리고, 조심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는 나와 다르기긴 했다. 좀 대범하고, 뭐든 끝을 보는 스타일이 었으니 그렇게 후한 손금을 봐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또 대체로 그런 캐릭터는 열정이 많아서 뭘 해도 해 내지만, 고집이 세고,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조심하고 스스로를 낮출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나는 끝까지 못 가는 타입이긴 하지만(그 친구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적당히 몸을 사리고, 피해 갈수도 있으니 적어도 세상을 험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이 책엔 역사상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천재들'이란 꼬리표를 달았고, 그들은 어찌보면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앞서 말한 일부러 자신의 손금을 만들며까지 최고부자가 되려했던 그 갑부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생각하는 것처럼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것은 천재들의 천재성을 알고자 해서 읽었던 것은 아니다. 목차에서 보듯이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 특히 작가들의 뭔가 색다른 일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읽은 것이다. 난 그런 책을 좋아하니까.

 

읽다보니 이 책은 나에게 용기를 줬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작가만 해도 나와 동시대를 사는 작가들 중 천재 소리를 듣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작품을 생각하면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된다는 건 좀 어리석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렇게 천재 작가들도 원래부터 천재는 아니었으며, 그들 중엔 형편없는 실력의 작가들도 많았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예로들고 있는 브론테 자매인 경우, 우리는 그들이 천재여서 하루 아침에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을 써 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처음엔 미숙하기 짝이 없는 글을 썼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책을 표절하고, 플롯을 베꼈다고 폭로하듯이 말하고 있다(물론 이 책의 저자도 어느 책에선가 본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천재의 의외의 일면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천재들의 범재 같은 이면만을 파헤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많이 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아주는 천재들이 자기 분야에서 유명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쓰고, 그리며, 발표했는지를 확인 시켜 준다. 예를 들면 역사상 위대한 석학 중 한 사람인 프로이트도 '정신분석학 입문'이란 책을 내고 그 학파를 세우기까지 무려 300편 이상의 논문을 냈다고 전한다. 또한 우리가 고흐의 유명한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600편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작업량에서 단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드라마 작가 김수현 씨가 생각난다. 그녀는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이 항상 성공했던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보했으며, 성공하지는 않더라도 고정 팬들에 의에 기꺼이 TV 앞에 앉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도 천재는 아닐까? 

 

이것은 확실히 범재인 나에겐 조금 솔깃한 이야기이긴 하다. 우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주입 되어진 '천재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래서 천재는 타고난, 상위 1%만이 되는 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책이니 어찌 솔깃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혔으니 게으른 사람이야 핑계가 있어 좋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짓눌려 열등감 내지는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한 예로, 나는 어렸을 때 거의 부모님의 강압으로 피아노를 배웠어야 했는데, 당시 지금은 지휘자지만 당시엔 피아니스트로 유명했던 정명훈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정명훈씨 같이 되야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을 때 정말 싫었다. 내가 왜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인가? 차라리 피아노가 얼마나 멋진 악기인지를 얘기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래서 난 꽤 오래도록 정명훈씨와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특히 피아노는 성인이 된 최근까지도 그 악기가 정말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잘 몰랐다. 그렇다면 천재로 만들고 싶어하는 부모부터 읽어 봐야하는 책은 아닐까?      

 

이렇게 이 책은 나에게 희망도 주지만, 뜨끔하게도 만든다.

저자는 책에서 '임계점'이란 말을 쓰고 있다. 물은 99도씨에서도 끊지 않는다. 딱 100도씨가 되어야 끓는다. 그것을 '임계점'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100도씨까지 자기 열정을 끓게 하지 못한 사람이고, 천재들은 100도씨까지 끓어 발화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일을 어느 지점까지 열을 올렸다 식어버렸던 것일까?

 

난 그렇게 피아노엔 소질이 없다는 걸 안 부모님은 대신 무용을 시키시려 했었다. 물론 그건 결국 시작도 못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부모님은 나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비교적 늦게 발견되긴 했지만, 난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작가의 꿈은 사춘기가 되면서 막연하게 갖긴 했지만 오래도록 그꿈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랬던 내가 20대 말이 되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나 자신 스스로를 밀어 넣었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것에 관해서 저자는 피카소와 장승업을 비교한 글이 흥미를 끄는데, 천재란 수식어가 두 사람 다 아깝지 않은 예술가임에 틀림없지만, 피카소는 갈수록 유명해졌지만, 장승업은 불운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해 볼 수가 있는데,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을 발전시킬만한 여러 가지 상황이나 환경이 많았지만 장승업은 그 재능을 강화하고 발전시킬만한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그 길을 나름 찾은 셈이었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가장 그야말로 '피 튀기게' 열심히 썼던 것 같다. 비록 그때 나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경쟁하며 나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나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연극 대본 쓰는 일이 없는데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길이의 길고, 짧음을 상관없이 못해도 100편은 족히 썼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여러 이유를 들어 그 일을 임계점까지 끊어 오르게 하지 못하고 어느 지점에서 놔버렸다. 데이비드 베일즈가 그의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 '예술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완벽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에,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장르가 아니라는 것에, 매번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것과 여러 가지 힘든 인간관계과 환경이 주는 의 한계 등 한마디로 슬럼프에 빠져 99도에도 못 미치고 그냥 제물에 식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때 이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공학이나 자기계발류의 책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 읽어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구조는 뭔가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한 없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일하기 싫을 땐 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이 책을 읽었더라면 훨씬 빨리 훌훌 털어버리고 뭐든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까?  

 

앞서 말한 나와는 다른 캐릭터를 가진 친구 얘기를 잠시 더 하자면, 그 친구가 언젠가 나에게 "나는 간혹 내가 천재라고 생각해."란 말을 해서 약간 놀란 적이 있었다. 내가 왜 놀랐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물론 그 친구의 말을 되새겨보면, 그렇게 생각하리만치 그 친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란 말로도 들린다.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 확실히 천재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거라고 보는데 저자는 천재가 되는 여러 가지 요건 중 하나로 '담대함'과 '둔감력'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난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존감'을 포함시키고 싶다. 물론 이것은 둔감력에 포함시켜도 될 것도 같다. 책에서 말하는 둔감력은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사람들로부터 어떤 비난이나 칭찬을 받아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거인(천재)은 둔감하다"(38p)이다.  또한 자성예언이란 말도 썼는데, 한마디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던 그대로 된다는 것인데 그 친구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천재 맞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천재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들을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읽고 있노라면,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 말하자면 천재는 은근과 끈기, 부지런함,  방대한 양의 독서와 작업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책을 인용하며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여느 자기계발 강사의 강의를 듣는 것 같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천재를 성공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모든 사람이 천재가 되려 한다면 천재의 하양평가는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재가 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도 아니다. 천재가 되고도 박제가 되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비근한 예로,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고흐가 천재인 건 맞지만 그들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들이 위대한 것은 맞지만 만족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 책은 너무 성급하게 천재들의 어느 한 일면만을 보고 쉽게 뭔가로 몰고가는 느낌이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즉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쓴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사회의 폐해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절대 가치가 아닐텐데, 3년 동안 막대한 양의 독서를 했다면서 좀 더 새로운 가치에 관해서는 책을 써 볼 생각은 안 해 봤을까? 300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많은 지식을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이 분야에 잘 정리된 보고서를 보는 느낌이지 그 이상의 지성을 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많은 책을 읽었다고 독자들에게도 많은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도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각에선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도 생각해 봐야한다고도 말한다. 인간의 허다한 많은 지식이 지성을 깨우지 못한다면, 거시적인 안목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독서를 많이 하고 적게함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내용은 천재가 되라고 해 놓고, 책의 수준은 평범 수준 이상을 넘어가지 않아 보이니 어떤 면에선 좀 아이러니해 보인다. 그냥 유희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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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재가 되시려고 이 책을 읽지는 않으시겠지요 ^^;;;
어느덧 맞이한 섣달에
아름다운 책 즐거이 누리셔요~

stella.K 2013-12-02 13:59   좋아요 0 | URL
설마요...천재되기가 어디 그렇게 쉽나요?
전 그저 오늘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어요.ㅋㅋ

아이리시스 2013-12-0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벌써 12월 1일이에요, 달력이 어느새 넘어가서 깜짝 놀랐어요.
새삼 왜 이런 기분이 들까요. 이제야 서서히 뭔가가 아쉬운 기분.

stella.K 2013-12-02 14:03   좋아요 0 | URL
매년 그렇지 않나요?
매년 막달은 후딱 가지만 또 빨리 보내버리고 싶은 달이기도 해요.
그 다음 달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아요.
물론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싫긴 하지만,
나이보다 젊어요란 말로 위로 받고 사니까 그냥 나이 한 살 더 먹을래요.^^
 
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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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방식의 글쓰기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리뷰 방식의 글쓰기가 유행이다. 프로 작가건, 아마추어건 자신이 읽은 책이나, 본 영화에 대한 감상과 생각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글쓰기의 수준을 인정 받는 작가들이 쓴 책이니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 방식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좀 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남이 떠 먹여 주는, 또는 남이 해 놓은 음식이 편하기만 하고 맛있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 찾아 직접해 먹는 음식이 더 유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정제되지 못하고, 거칠고 뭔가 맛이 없을 듯하지만 말이다. 그런 것처럼 이런 리뷰 방식의 글은 일종의 비타민제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먹으면 건강에 도움은 되겠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영양과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비타민을 먹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먹는 것이 필요없다면 우린 비타민만 먹었을 것이다. 

 

분명 이런 글의 유익이 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 또는 뭔가 정리가 안 되는 것들을 잘 정리해 주고, 내가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게도 하며,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을 다소 완화해 주는 뭐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게다가 내가 보지 않은 작품에 대해 다이제스트로 섭렵하고, 마치 본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뭐 그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수도 있겠지만) 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점은 뭘까? 그렇게 다이제스트로만 섭렵을 하니 단타적 지식은 늘어놓을 수는 있어도 진짜 내 생각을 펼쳐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글을 쓰는 작가는 일정 수준의 글쓰기 능력을 갖췄으니 마냥 부러워만 할 수도 있겠다. "너무 글을 잘 써. 언제 나는 이렇게 쓰지...?"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부러워만 한다고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 꽤나 쓰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지 않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유익한 독서가 됐지만, 내내 드는 생각은 작가가 정말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리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테마를 '사랑'으로 정했다.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가 몇이나 될까? 새삼 놀라운 건(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요즘엔 그 어느 때 보다도 기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느 평범한 사람이라면, 책으로 봤다면 영화로 보지 않던가(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영화로 봤다면 책으로 읽지 않던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같은 작품에 대해 영화로도 보고, 소설로도 읽는 꼼꼼함을 보였다. 

 

우린 흔히 영화로 본 작품을 문학 작품으로는 보지 않는 우를 범한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총 10권짜리 장대한 서사시인데 이것을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읽고 독후감을 내라는 것을 어느 학생이 언제 다 읽나 싶어 영화로 보고 써 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뭐 그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영화는 2시간 안팎이지만 책은 언제 완독할지 모르는 유장한 작업이다. 할 일 많고, 볼 것 많은 세상에서 언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랴? 오히려 그런 숙제를 내 준 그 교수가 눈총을 받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서를 영화 보는 것에 어찌 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문학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에 관심을 갖기 보다, 작품의 내용 그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문체를 알려고 해야할 것이다. 문학은 작가의 문체로 말해질 수 있고, 영화는 감독의 생각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그게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즘엔 영화와 문학작품이 공생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면 문학 텍스트가 보고 싶어지고, 책을 보면 영화를 보고 싶은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맞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영혼은 아름답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주제로한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저자 정말 다룬 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는 정말 내가 본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독자들은 조족지혈로도 말할 수 없다면 뭐라 말해야 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나는 그저 책을 읽어대기에 바쁜데, 언제 저자는 자신이 본 작품을 정리해 이런 책을 낼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확실히 나는 비효율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독서가 될 수 있으까는 확실히 나의 고민됐다.

 

사랑이나, 연애, 이별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우린 왜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사랑 한 번 잘 해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서 패가망신에 영혼까지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다음에 사랑이 오면 또 그것에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DNA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랑을 겁내 시작도 못하는 신인류가 생겨났다. 그들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사이버 공간안에서.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 받는 것이 맞느냐고 저자는 어느 장에선가 묻고 있던데, 나는 사랑을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묻고 싶다.

젊을 땐 사랑에 대해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으면 사랑은 허상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건 사랑할 기회가 젊었을 때 보다 없으니 그렇게도 말하겠지만,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사랑에 이젠 수군거리지 말고 진정으로 박수쳐 줘야하지 않을까? 픽션이던, 논픽션이든 사랑하는 영혼은 다 아름답다. 

이 책은 사랑의 방식이나 방법에 관해 말해주는 책은 아니다. 읽다보면 세상에 사랑은 좋아하는 것 하나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신의 작용이며, 마음과 인격의 확장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또한 사랑의 방정식이 정말로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문학에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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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길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 이런 이야기는 들려줄 수 없으리라 느껴요.
즐거운 삶 즐겁게 노래하면서 고운 사랑 누리셔요~

stella.K 2013-11-22 14:0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요즘의 사랑은 얼마나 진지한가를 생각하게 되요.
시간에 쫓겨 대충 쓴 건데 내용에 관해선 거의 못 썼네요.
나름 괜찮은 책인데...
함께살기님도 예쁜 사랑하시길요.^^
 
임기응변의 힘 - 어지러운 세상 동양고전 3000년의 지혜를 권하다
신동준 지음 / 아템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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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싸움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 옛날부터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무슨 쌈닭쯤 되고싶은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살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싸움이 싫어서 가만 있으면 바본 줄 알고 더 시비를 걸고,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있어보면 참고 있으면 나만 죽을 X싸고, 변비에 걸리지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 올까 경계하고, 싸우는 것도 쉽지는 않다. 싸우면 잘 싸워야 하는데 나중에 보면 안 싸우느니만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울 때 너 죽고, 나 죽자고 그야말로 피터지게 싸운다. 그걸 결사항전이라고 한다지. 하지만 그 뒤에 남는 건 피만 낭자한 처절한 승리일뿐, 그런 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엊그제도 뉴스를 보니, 여자 하나를 두고 두 남자가 피터지게 싸우다 한쪽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놀라기도 했지만, 황당하기도 했다. 그 놈의 사랑이 뭐길래. 하지만 혀를 끌끌 차다 말 것도 아니다. 죽인 쪽은 죄인이니 그 가족들 조차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트라우마가 클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내가 이렇게 어이없이 죽다니, 어이가 없을 것이다. 또 어쩌면 죽는 순간 깨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 보다 내 생명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사랑하다, 사랑해서, 사랑 때문에 (장렬히)죽는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 하나만 놓고 보자면 그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낭만은 낭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 피 빛 현실에선 그런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낭만 따질 때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두 남자는 한 여자를 두고 어떻게 싸웠어야 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움을 참 잘 못하는 민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싸울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건 알고 보면 그냥 허세일뿐 진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싫으니까 쌍욕해 가면서 싸우다 등을 돌리면 그만이다. 또 그게 아니면 내가 당한만큼 복수해 준다고 서로 피를 보는 것이 전부다.

 

싸움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싸움을 아주 즐기는 건 아니지만 소위 말빨에서는 지지 않는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왜 싸우는 걸까를 생각하면 이유는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근데 역시 미련은 남는다. 꼭 뒤돌아서서 그때 이 말도 해 줄 걸하며 아쉬워했던 적이 열 번이면 열 번 다다.

 

하지만 싸움은 꼭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재적시에 표현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다. 거기엔 반드시 작전이 필요하다. 화가 난다고 자기 말만 퍼붓는다고 싸움의 다가 아니다. 나도 화가 나면 상대도 화를 내는 법이다. 그게 설령 잘못이 상대에게 있어도 내가 화로 상대의 화를 돋구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논리나 힘만 가지고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싸우기 전에 내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을 다룰 줄 안다는 게 또 그리 쉽지가 않다. 불을 다루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일게다. 

그런데, 책을 읽는 중에 이런 말을 발견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결코 최상의 계책이 될 수 없다. 싸우지 않고도 굴복시키는 부전굴인이야말로 최상의 계책에 해당한다. 전쟁에서 최상의 계책은 지략으로 굴복시키는 '벌모'다. 차선책은 외교수단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교'다. 그 다음 차선책은 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병'이다. 최하 계책은 적의 성을 직접 공격하는 '공성'이다.(76p)                    

읽다보면 우리가 싸울 때 주로 어떤 방법을 쓰는지 알 것 같다. 책대로라면, 우리가 주로 잘 쓰는 방법은 역시 '공성'이었을 것이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도 있건만, 왜 우리는 꼭 직접 싸워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싸움은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것만이 싸움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생활 전반에 싸워야할 순간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꼭 나와 잘 지낼 수 없는 적하고만도 아니다. 잘 지낼 수 있는 친한 사이에도 있을 수 있다. 피를 보는 것만이 싸움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 하다못해 자신과의 싸움도 싸움은 싸움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최근 언제 싸웠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난 여름이었던 것 같다. 별로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말을 3시간 내내 떠들고, 결국 내가 먼저 손을 털고 나왔다. 그렇게 이성과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과 뭐하러 3시간이나 싸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상대에겐 그가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나에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간의 욕망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있냐고 씩씩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소리다. 다신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버리기도 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내가 좀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사실 나만 생각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인데, 조직과 얼켜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나 나나 조직에 적지않은 피해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직내에 있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물론 겉으론 그리 손해 볼 것도 없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의기투합만 잘했더라면 윈윈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와 나는 서로를 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손을 들고만 것이다. 

보다 못한 내가 최근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성격상 별로 즐겨하지 않는 제스추어이긴 하지만, 조직내에 있는 사람들이 안타까웠고, 그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손해를 보고도 저렇게 뻣뻣한가 먼저 꺽고 나오면 상대로 그러지 않을까, 말하자면 협상을 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요령이 필요해 겸손히 설득하고, 상대를 코너로 몰아 얼마의 시한을 주고 선택을 하도록 했다. 물론 이것도 상대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을 때 그 방법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난 저자가 말한 저 계책 중 어떤 계책을 쓴 것일까? '벌교'쯤 되려나?

 

좀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르나, 건물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도 부족해 살인까지 일어나는 판국이니 세상이 무섭긴 하다. 그런데 꼭 무서운 일만 일어나는 것마는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친히 편지를 써서 피해를 준 또는 피해를 받은 이웃에게 편지를 써서 줬더니 갈등이 많이 해소됐다는 말도 들었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싸움의 승리가 아닐까? 그건 또 어떤 계책을 쓴 것일까?

 

책은 좀 읽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싸움이나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좀 더 현명하게 싸울 필요가 있다. 그것에 적지않은 통찰과 조언을 담고 있어 곁에 두고 두고 음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훗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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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1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글은 웬일로 댓글쓰기 지면을 열어 놓으셨나요?
앞의 글 두 개는 댓글을 쓸 수 없게 해 놓으셔서 그냥 추천만 누르고 갔답니다.

저는 싸움을 잘하고 싶다기보다 싸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말발(말빨)은 센 편인데 어디까지 가야 하나, 어디까지 내 바닥을 보여 줘야 하나, 하는 것으로 고민되는 게 싫더라고요. 저는 둘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아요. 아예 마찰이나 충돌을 피하게 되든지,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목숨 걸고 싸우든지... 그러니까 싸움을 안 하든지 하게 되면 끝까지 가는 거죠. 그 적당한 선을 가늠해서 멈추는 게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싸움을 피하게 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합리화하자면, 쪼잔한 승리자가 되기보다 넉넉한 패배자 되기로 하자, 하고 제 자신과 타협하는 것이죠.

stella.K 2013-11-10 14:40   좋아요 0 | URL
ㅎㅎ 미안해요, 언니! 제가 카테고리를 열어 놓은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어요. 나머지 것도 열어놓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안 열어 놓은 거예요.ㅠ

싸움에 관해선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이어요.
그런데 싸울 일이 생기면 어떻게 싸울까를 생각해야하 잖아요.
잘 싸우고 싶어요. 그런데 더 필요한 건 이 사회가 경쟁체제는 좀 지양하고,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 어떻게 윈윈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