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법칙 - 나를 천재로 만드는 비밀이야기
김병완 지음 / 아이넷북스(구 북스앤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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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고 있으니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 나는 시나리오 창작 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같이 수강했던 한 수강생이 나의 손금을 봐주겠다는 것이다. 한참을 보더니 다짜고짜, 끝까지 못 간다고 너무나 확신있게 외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중엔 자신도 그렇게 외치듯이 얘기한 게 쑥스러운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렇다고 손금을 너무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누구라면 알만한 최고 갑부중 한 사람은 누가 손금을 보더니 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일부러 손바닥을 찢어서 손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노력 여하에 달린 거지 손금이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듯 하는 것이었다. 

 

아니 누가 뭐랬나? 내가 가야한다면 어디까지 가야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그 갑부처럼 뭔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가기위해 손바닥이라도 찢어서 없는 손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차피 인간의 끝은 죽음 아니면 파멸인 것을 그걸 꼭 가 봐야 아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수강생은 그러더니 내 옆의 친구를 봐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나 보다 후한 손금을 봐주면서 대체로 좋긴 하지만 대신 몸을 사리고, 조심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는 나와 다르기긴 했다. 좀 대범하고, 뭐든 끝을 보는 스타일이 었으니 그렇게 후한 손금을 봐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또 대체로 그런 캐릭터는 열정이 많아서 뭘 해도 해 내지만, 고집이 세고,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조심하고 스스로를 낮출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나는 끝까지 못 가는 타입이긴 하지만(그 친구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적당히 몸을 사리고, 피해 갈수도 있으니 적어도 세상을 험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이 책엔 역사상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천재들'이란 꼬리표를 달았고, 그들은 어찌보면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앞서 말한 일부러 자신의 손금을 만들며까지 최고부자가 되려했던 그 갑부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생각하는 것처럼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것은 천재들의 천재성을 알고자 해서 읽었던 것은 아니다. 목차에서 보듯이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 특히 작가들의 뭔가 색다른 일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읽은 것이다. 난 그런 책을 좋아하니까.

 

읽다보니 이 책은 나에게 용기를 줬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작가만 해도 나와 동시대를 사는 작가들 중 천재 소리를 듣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작품을 생각하면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된다는 건 좀 어리석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렇게 천재 작가들도 원래부터 천재는 아니었으며, 그들 중엔 형편없는 실력의 작가들도 많았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예로들고 있는 브론테 자매인 경우, 우리는 그들이 천재여서 하루 아침에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을 써 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처음엔 미숙하기 짝이 없는 글을 썼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책을 표절하고, 플롯을 베꼈다고 폭로하듯이 말하고 있다(물론 이 책의 저자도 어느 책에선가 본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천재의 의외의 일면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천재들의 범재 같은 이면만을 파헤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많이 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아주는 천재들이 자기 분야에서 유명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쓰고, 그리며, 발표했는지를 확인 시켜 준다. 예를 들면 역사상 위대한 석학 중 한 사람인 프로이트도 '정신분석학 입문'이란 책을 내고 그 학파를 세우기까지 무려 300편 이상의 논문을 냈다고 전한다. 또한 우리가 고흐의 유명한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600편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작업량에서 단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드라마 작가 김수현 씨가 생각난다. 그녀는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이 항상 성공했던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보했으며, 성공하지는 않더라도 고정 팬들에 의에 기꺼이 TV 앞에 앉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도 천재는 아닐까? 

 

이것은 확실히 범재인 나에겐 조금 솔깃한 이야기이긴 하다. 우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주입 되어진 '천재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래서 천재는 타고난, 상위 1%만이 되는 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책이니 어찌 솔깃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혔으니 게으른 사람이야 핑계가 있어 좋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짓눌려 열등감 내지는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한 예로, 나는 어렸을 때 거의 부모님의 강압으로 피아노를 배웠어야 했는데, 당시 지금은 지휘자지만 당시엔 피아니스트로 유명했던 정명훈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정명훈씨 같이 되야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을 때 정말 싫었다. 내가 왜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인가? 차라리 피아노가 얼마나 멋진 악기인지를 얘기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래서 난 꽤 오래도록 정명훈씨와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특히 피아노는 성인이 된 최근까지도 그 악기가 정말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잘 몰랐다. 그렇다면 천재로 만들고 싶어하는 부모부터 읽어 봐야하는 책은 아닐까?      

 

이렇게 이 책은 나에게 희망도 주지만, 뜨끔하게도 만든다.

저자는 책에서 '임계점'이란 말을 쓰고 있다. 물은 99도씨에서도 끊지 않는다. 딱 100도씨가 되어야 끓는다. 그것을 '임계점'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100도씨까지 자기 열정을 끓게 하지 못한 사람이고, 천재들은 100도씨까지 끓어 발화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일을 어느 지점까지 열을 올렸다 식어버렸던 것일까?

 

난 그렇게 피아노엔 소질이 없다는 걸 안 부모님은 대신 무용을 시키시려 했었다. 물론 그건 결국 시작도 못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부모님은 나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비교적 늦게 발견되긴 했지만, 난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작가의 꿈은 사춘기가 되면서 막연하게 갖긴 했지만 오래도록 그꿈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랬던 내가 20대 말이 되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나 자신 스스로를 밀어 넣었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것에 관해서 저자는 피카소와 장승업을 비교한 글이 흥미를 끄는데, 천재란 수식어가 두 사람 다 아깝지 않은 예술가임에 틀림없지만, 피카소는 갈수록 유명해졌지만, 장승업은 불운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해 볼 수가 있는데,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을 발전시킬만한 여러 가지 상황이나 환경이 많았지만 장승업은 그 재능을 강화하고 발전시킬만한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그 길을 나름 찾은 셈이었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가장 그야말로 '피 튀기게' 열심히 썼던 것 같다. 비록 그때 나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경쟁하며 나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나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연극 대본 쓰는 일이 없는데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길이의 길고, 짧음을 상관없이 못해도 100편은 족히 썼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여러 이유를 들어 그 일을 임계점까지 끊어 오르게 하지 못하고 어느 지점에서 놔버렸다. 데이비드 베일즈가 그의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 '예술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완벽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에,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장르가 아니라는 것에, 매번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것과 여러 가지 힘든 인간관계과 환경이 주는 의 한계 등 한마디로 슬럼프에 빠져 99도에도 못 미치고 그냥 제물에 식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때 이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공학이나 자기계발류의 책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 읽어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구조는 뭔가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한 없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일하기 싫을 땐 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이 책을 읽었더라면 훨씬 빨리 훌훌 털어버리고 뭐든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까?  

 

앞서 말한 나와는 다른 캐릭터를 가진 친구 얘기를 잠시 더 하자면, 그 친구가 언젠가 나에게 "나는 간혹 내가 천재라고 생각해."란 말을 해서 약간 놀란 적이 있었다. 내가 왜 놀랐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물론 그 친구의 말을 되새겨보면, 그렇게 생각하리만치 그 친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란 말로도 들린다.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 확실히 천재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거라고 보는데 저자는 천재가 되는 여러 가지 요건 중 하나로 '담대함'과 '둔감력'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난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존감'을 포함시키고 싶다. 물론 이것은 둔감력에 포함시켜도 될 것도 같다. 책에서 말하는 둔감력은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사람들로부터 어떤 비난이나 칭찬을 받아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거인(천재)은 둔감하다"(38p)이다.  또한 자성예언이란 말도 썼는데, 한마디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던 그대로 된다는 것인데 그 친구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천재 맞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천재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들을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읽고 있노라면,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 말하자면 천재는 은근과 끈기, 부지런함,  방대한 양의 독서와 작업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책을 인용하며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여느 자기계발 강사의 강의를 듣는 것 같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천재를 성공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모든 사람이 천재가 되려 한다면 천재의 하양평가는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재가 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도 아니다. 천재가 되고도 박제가 되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비근한 예로,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고흐가 천재인 건 맞지만 그들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들이 위대한 것은 맞지만 만족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 책은 너무 성급하게 천재들의 어느 한 일면만을 보고 쉽게 뭔가로 몰고가는 느낌이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즉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쓴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사회의 폐해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절대 가치가 아닐텐데, 3년 동안 막대한 양의 독서를 했다면서 좀 더 새로운 가치에 관해서는 책을 써 볼 생각은 안 해 봤을까? 300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많은 지식을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이 분야에 잘 정리된 보고서를 보는 느낌이지 그 이상의 지성을 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많은 책을 읽었다고 독자들에게도 많은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도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각에선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도 생각해 봐야한다고도 말한다. 인간의 허다한 많은 지식이 지성을 깨우지 못한다면, 거시적인 안목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독서를 많이 하고 적게함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내용은 천재가 되라고 해 놓고, 책의 수준은 평범 수준 이상을 넘어가지 않아 보이니 어떤 면에선 좀 아이러니해 보인다. 그냥 유희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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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재가 되시려고 이 책을 읽지는 않으시겠지요 ^^;;;
어느덧 맞이한 섣달에
아름다운 책 즐거이 누리셔요~

stella.K 2013-12-02 13:59   좋아요 0 | URL
설마요...천재되기가 어디 그렇게 쉽나요?
전 그저 오늘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어요.ㅋㅋ

아이리시스 2013-12-0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벌써 12월 1일이에요, 달력이 어느새 넘어가서 깜짝 놀랐어요.
새삼 왜 이런 기분이 들까요. 이제야 서서히 뭔가가 아쉬운 기분.

stella.K 2013-12-02 14:03   좋아요 0 | URL
매년 그렇지 않나요?
매년 막달은 후딱 가지만 또 빨리 보내버리고 싶은 달이기도 해요.
그 다음 달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아요.
물론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싫긴 하지만,
나이보다 젊어요란 말로 위로 받고 사니까 그냥 나이 한 살 더 먹을래요.^^
 
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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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방식의 글쓰기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리뷰 방식의 글쓰기가 유행이다. 프로 작가건, 아마추어건 자신이 읽은 책이나, 본 영화에 대한 감상과 생각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글쓰기의 수준을 인정 받는 작가들이 쓴 책이니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 방식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좀 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남이 떠 먹여 주는, 또는 남이 해 놓은 음식이 편하기만 하고 맛있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 찾아 직접해 먹는 음식이 더 유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정제되지 못하고, 거칠고 뭔가 맛이 없을 듯하지만 말이다. 그런 것처럼 이런 리뷰 방식의 글은 일종의 비타민제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먹으면 건강에 도움은 되겠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영양과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비타민을 먹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먹는 것이 필요없다면 우린 비타민만 먹었을 것이다. 

 

분명 이런 글의 유익이 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 또는 뭔가 정리가 안 되는 것들을 잘 정리해 주고, 내가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게도 하며,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을 다소 완화해 주는 뭐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게다가 내가 보지 않은 작품에 대해 다이제스트로 섭렵하고, 마치 본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뭐 그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수도 있겠지만) 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점은 뭘까? 그렇게 다이제스트로만 섭렵을 하니 단타적 지식은 늘어놓을 수는 있어도 진짜 내 생각을 펼쳐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글을 쓰는 작가는 일정 수준의 글쓰기 능력을 갖췄으니 마냥 부러워만 할 수도 있겠다. "너무 글을 잘 써. 언제 나는 이렇게 쓰지...?"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부러워만 한다고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 꽤나 쓰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지 않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유익한 독서가 됐지만, 내내 드는 생각은 작가가 정말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리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테마를 '사랑'으로 정했다.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가 몇이나 될까? 새삼 놀라운 건(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요즘엔 그 어느 때 보다도 기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느 평범한 사람이라면, 책으로 봤다면 영화로 보지 않던가(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영화로 봤다면 책으로 읽지 않던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같은 작품에 대해 영화로도 보고, 소설로도 읽는 꼼꼼함을 보였다. 

 

우린 흔히 영화로 본 작품을 문학 작품으로는 보지 않는 우를 범한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총 10권짜리 장대한 서사시인데 이것을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읽고 독후감을 내라는 것을 어느 학생이 언제 다 읽나 싶어 영화로 보고 써 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뭐 그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영화는 2시간 안팎이지만 책은 언제 완독할지 모르는 유장한 작업이다. 할 일 많고, 볼 것 많은 세상에서 언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랴? 오히려 그런 숙제를 내 준 그 교수가 눈총을 받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서를 영화 보는 것에 어찌 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문학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에 관심을 갖기 보다, 작품의 내용 그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문체를 알려고 해야할 것이다. 문학은 작가의 문체로 말해질 수 있고, 영화는 감독의 생각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그게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즘엔 영화와 문학작품이 공생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면 문학 텍스트가 보고 싶어지고, 책을 보면 영화를 보고 싶은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맞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영혼은 아름답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주제로한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저자 정말 다룬 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는 정말 내가 본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독자들은 조족지혈로도 말할 수 없다면 뭐라 말해야 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나는 그저 책을 읽어대기에 바쁜데, 언제 저자는 자신이 본 작품을 정리해 이런 책을 낼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확실히 나는 비효율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독서가 될 수 있으까는 확실히 나의 고민됐다.

 

사랑이나, 연애, 이별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우린 왜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사랑 한 번 잘 해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서 패가망신에 영혼까지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다음에 사랑이 오면 또 그것에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DNA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랑을 겁내 시작도 못하는 신인류가 생겨났다. 그들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사이버 공간안에서.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 받는 것이 맞느냐고 저자는 어느 장에선가 묻고 있던데, 나는 사랑을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묻고 싶다.

젊을 땐 사랑에 대해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으면 사랑은 허상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건 사랑할 기회가 젊었을 때 보다 없으니 그렇게도 말하겠지만,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사랑에 이젠 수군거리지 말고 진정으로 박수쳐 줘야하지 않을까? 픽션이던, 논픽션이든 사랑하는 영혼은 다 아름답다. 

이 책은 사랑의 방식이나 방법에 관해 말해주는 책은 아니다. 읽다보면 세상에 사랑은 좋아하는 것 하나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신의 작용이며, 마음과 인격의 확장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또한 사랑의 방정식이 정말로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문학에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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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길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 이런 이야기는 들려줄 수 없으리라 느껴요.
즐거운 삶 즐겁게 노래하면서 고운 사랑 누리셔요~

stella.K 2013-11-22 14:0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요즘의 사랑은 얼마나 진지한가를 생각하게 되요.
시간에 쫓겨 대충 쓴 건데 내용에 관해선 거의 못 썼네요.
나름 괜찮은 책인데...
함께살기님도 예쁜 사랑하시길요.^^
 
임기응변의 힘 - 어지러운 세상 동양고전 3000년의 지혜를 권하다
신동준 지음 / 아템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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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싸움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 옛날부터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무슨 쌈닭쯤 되고싶은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살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싸움이 싫어서 가만 있으면 바본 줄 알고 더 시비를 걸고,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있어보면 참고 있으면 나만 죽을 X싸고, 변비에 걸리지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 올까 경계하고, 싸우는 것도 쉽지는 않다. 싸우면 잘 싸워야 하는데 나중에 보면 안 싸우느니만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울 때 너 죽고, 나 죽자고 그야말로 피터지게 싸운다. 그걸 결사항전이라고 한다지. 하지만 그 뒤에 남는 건 피만 낭자한 처절한 승리일뿐, 그런 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엊그제도 뉴스를 보니, 여자 하나를 두고 두 남자가 피터지게 싸우다 한쪽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놀라기도 했지만, 황당하기도 했다. 그 놈의 사랑이 뭐길래. 하지만 혀를 끌끌 차다 말 것도 아니다. 죽인 쪽은 죄인이니 그 가족들 조차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트라우마가 클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내가 이렇게 어이없이 죽다니, 어이가 없을 것이다. 또 어쩌면 죽는 순간 깨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 보다 내 생명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사랑하다, 사랑해서, 사랑 때문에 (장렬히)죽는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 하나만 놓고 보자면 그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낭만은 낭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 피 빛 현실에선 그런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낭만 따질 때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두 남자는 한 여자를 두고 어떻게 싸웠어야 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움을 참 잘 못하는 민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싸울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건 알고 보면 그냥 허세일뿐 진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싫으니까 쌍욕해 가면서 싸우다 등을 돌리면 그만이다. 또 그게 아니면 내가 당한만큼 복수해 준다고 서로 피를 보는 것이 전부다.

 

싸움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싸움을 아주 즐기는 건 아니지만 소위 말빨에서는 지지 않는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왜 싸우는 걸까를 생각하면 이유는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근데 역시 미련은 남는다. 꼭 뒤돌아서서 그때 이 말도 해 줄 걸하며 아쉬워했던 적이 열 번이면 열 번 다다.

 

하지만 싸움은 꼭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재적시에 표현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다. 거기엔 반드시 작전이 필요하다. 화가 난다고 자기 말만 퍼붓는다고 싸움의 다가 아니다. 나도 화가 나면 상대도 화를 내는 법이다. 그게 설령 잘못이 상대에게 있어도 내가 화로 상대의 화를 돋구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논리나 힘만 가지고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싸우기 전에 내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을 다룰 줄 안다는 게 또 그리 쉽지가 않다. 불을 다루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일게다. 

그런데, 책을 읽는 중에 이런 말을 발견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결코 최상의 계책이 될 수 없다. 싸우지 않고도 굴복시키는 부전굴인이야말로 최상의 계책에 해당한다. 전쟁에서 최상의 계책은 지략으로 굴복시키는 '벌모'다. 차선책은 외교수단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교'다. 그 다음 차선책은 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병'이다. 최하 계책은 적의 성을 직접 공격하는 '공성'이다.(76p)                    

읽다보면 우리가 싸울 때 주로 어떤 방법을 쓰는지 알 것 같다. 책대로라면, 우리가 주로 잘 쓰는 방법은 역시 '공성'이었을 것이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도 있건만, 왜 우리는 꼭 직접 싸워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싸움은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것만이 싸움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생활 전반에 싸워야할 순간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꼭 나와 잘 지낼 수 없는 적하고만도 아니다. 잘 지낼 수 있는 친한 사이에도 있을 수 있다. 피를 보는 것만이 싸움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 하다못해 자신과의 싸움도 싸움은 싸움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최근 언제 싸웠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난 여름이었던 것 같다. 별로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말을 3시간 내내 떠들고, 결국 내가 먼저 손을 털고 나왔다. 그렇게 이성과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과 뭐하러 3시간이나 싸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상대에겐 그가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나에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간의 욕망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있냐고 씩씩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소리다. 다신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버리기도 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내가 좀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사실 나만 생각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인데, 조직과 얼켜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나 나나 조직에 적지않은 피해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직내에 있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물론 겉으론 그리 손해 볼 것도 없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의기투합만 잘했더라면 윈윈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와 나는 서로를 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손을 들고만 것이다. 

보다 못한 내가 최근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성격상 별로 즐겨하지 않는 제스추어이긴 하지만, 조직내에 있는 사람들이 안타까웠고, 그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손해를 보고도 저렇게 뻣뻣한가 먼저 꺽고 나오면 상대로 그러지 않을까, 말하자면 협상을 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요령이 필요해 겸손히 설득하고, 상대를 코너로 몰아 얼마의 시한을 주고 선택을 하도록 했다. 물론 이것도 상대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을 때 그 방법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난 저자가 말한 저 계책 중 어떤 계책을 쓴 것일까? '벌교'쯤 되려나?

 

좀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르나, 건물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도 부족해 살인까지 일어나는 판국이니 세상이 무섭긴 하다. 그런데 꼭 무서운 일만 일어나는 것마는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친히 편지를 써서 피해를 준 또는 피해를 받은 이웃에게 편지를 써서 줬더니 갈등이 많이 해소됐다는 말도 들었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싸움의 승리가 아닐까? 그건 또 어떤 계책을 쓴 것일까?

 

책은 좀 읽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싸움이나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좀 더 현명하게 싸울 필요가 있다. 그것에 적지않은 통찰과 조언을 담고 있어 곁에 두고 두고 음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훗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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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1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글은 웬일로 댓글쓰기 지면을 열어 놓으셨나요?
앞의 글 두 개는 댓글을 쓸 수 없게 해 놓으셔서 그냥 추천만 누르고 갔답니다.

저는 싸움을 잘하고 싶다기보다 싸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말발(말빨)은 센 편인데 어디까지 가야 하나, 어디까지 내 바닥을 보여 줘야 하나, 하는 것으로 고민되는 게 싫더라고요. 저는 둘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아요. 아예 마찰이나 충돌을 피하게 되든지,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목숨 걸고 싸우든지... 그러니까 싸움을 안 하든지 하게 되면 끝까지 가는 거죠. 그 적당한 선을 가늠해서 멈추는 게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싸움을 피하게 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합리화하자면, 쪼잔한 승리자가 되기보다 넉넉한 패배자 되기로 하자, 하고 제 자신과 타협하는 것이죠.

stella.K 2013-11-10 14:40   좋아요 0 | URL
ㅎㅎ 미안해요, 언니! 제가 카테고리를 열어 놓은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어요. 나머지 것도 열어놓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안 열어 놓은 거예요.ㅠ

싸움에 관해선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이어요.
그런데 싸울 일이 생기면 어떻게 싸울까를 생각해야하 잖아요.
잘 싸우고 싶어요. 그런데 더 필요한 건 이 사회가 경쟁체제는 좀 지양하고,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 어떻게 윈윈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라고 봐요.^^
 
인생의 품격 - 북경대 인문 수업에서 배우는 인생 수양법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2
장샤오헝.한쿤 지음, 김락준 옮김 / 글담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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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이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품격이라! 뭔가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정말 삶의 품격이 느껴질 것만 같다. 그런데 아뿔싸! 얼핏 보면 우리나라나 서양 외국 작가의 책 같지만 저자가 중국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중국 저자들의 책은 그렇게 많이 접할 기회가 없어 뭔가 크게 쉼호흡을 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중국 저작물들은 나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저력이 있어서 말이지.  

 

그래도 저자들이 북경대에서 강의한 루쉰이나 차이위안페이, 지셰린, 펑유란, 후스, 딩링 같은 중국의 지성인들이 북경대에서 강의한 말과 글을 현대인의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도록 섬세하면서도 쉽게 풀어 썼다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까? 약간의 기대도 같게도 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를 하자면 역시 만만치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중국이 다르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히 많은 예화를 다루고 있는데 중국의 역사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로선 좀 벅찬감도 없지 않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자국의 예문만으로 책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책이 그전에도 없지 않을텐데 때로는 다른 나라 사람의 말이나 남의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예문으로 쓸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더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어찌보면 에세이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자기계발류 같기도 한데, 그동안은 서양적 사고에 길들여져서 일까?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읽어왔던 책들은 다소 분석적이면서도 (상대적이긴 하지만)가볍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이 책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통찰적이면서도 사고가 깊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참 읽다보면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 있다 싶다. 새삼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줄까 싶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첫 부분에 나오는 '나 자신에 대한 예의'중에 2강에 나오는 '평생 동안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란 글에서, 공자는 평생 신봉해야 하는 원칙으로 恕(용서할 서)'를 말했다. '恕'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며, 자아를 맘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표현이다나, 사상가 한유의 <답류수재론사서>라는 책에, "난 비록 어리석지만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란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곤경에 처했더라도 자신을 믿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28p)란 말을 읽으면 가슴이 약간은 뭉클해질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들면들수록 번뇌가 많아지는데 주로 쓸데없는 걱정이나, 자신이나 남을 용서하지 못한 것들 아니던가?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미성숙함 때문에 우린 얼마나 많이 좌충우돌하며 자학하고, 남을 미워하며 사는가?

 

이 책은 이것말고도 삶 전반에 관한 예의와 품격을 갖추도록 격려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이고 깊이가 느껴져서 새삼 참 좋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신 처음에서도 말했지만 결코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며, 두 저자 중 어떤 글은 누가 썼는지도 함께 알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조금 아쉽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추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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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0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표현이다."
멋진 말이군요. 자기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듯해요.
저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검색해 봤더니 좋은 책 같아요. ^^

2013-11-01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1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키 스타일 - 평범을 비범으로 바꾼 인생철학과 철칙들
진희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고백컨대, 나는...

 

내가 처음 하루키를 접했던 건, 그 유명한 '노르웨이 숲(상실의 시대)이 아니었다. 그 작품은 한참 뒤에 읽어 봤었고, 내가 읽었던 그의 첫 작품은 단편집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무렵 나는 일본 소설 몇 작품을 읽었던 것 같은데 읽으면서 느꼈던 한마디는 '백치미'였다. 뭔가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랄까? 물론 그 느낌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는데(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사춘기 이후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 소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할 때인데 무엇을 제대로 알았겠는가?) 아무튼 그런 느낌일 때 하루키의 소설은 확실히 일본 소설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아메리칸 스타일이 다분했었다고나 할까? 특히 내가 읽었던 그의 단편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은 단편 중 가히 백미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렇게 자국의 소설 같지 않은 그의 작품에서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아니나 다를까? 오늘 날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작가가 되었다(올해도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과연 좋아해야 하는 지 안타까워 해야 하는 것인지?). 그의 작품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 다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하루키 매니아는 아니다(하지만 그가 해마다 어떤 작품을 내는지 관심을 갖지 않기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대신 나는 언제부턴가 작품 보다는 그 작품을 쓴 작가를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겼는데, 하루키 역시 내가 알고 싶어하는 작가이기에 이 책은 일찌기 나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루키의 독서

 

어쨌거나 나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다. 하루키의 여느 일본 소설 같지 않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는 매일 자신이 정한 시간에 정확히 일어나 정한 분량의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대, 사실 이런 하루키의 습관적 글쓰기는 반드시 그만이 지니는 습성은 아니다. 거의 모든 작가가 하루키와 비슷한 습관적 글쓰기를 한다. 나는 이런 설명만을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명문대 수석 합격자가, 과외는 일체 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수업 잘 듣고, 잠은 6시간 내지 7시간 충분히 자면서 공부했다고 하거나,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그 얄미운 소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글이라는 것도 무조건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습관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밑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나 폴 오스터 또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니 그의 작품이 아메리칸 스타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그러니까 좋아서 닮아가기 보다 자국의 작가들이 구사하는 작풍을 뛰어넘고 싶어했던 전략으로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소설이 지역성을 벗고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0대 시절 탐독한 미국 현대작가들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항구도시 고배에서 나고 자란 하루키는 고교시절부터 외국 선원들이 헌책방에 팔고 간 영문 페이퍼백을 사다 읽은 게 취미였다. 이때 레이먼드 카버나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며 재미삼아 이들의 작품을 노트에다 번역하곤 했는데, 이 자발적인 취미는 훗날 하루키가 수많은 영미소설의 번역가로 활동하는 데 튼튼한 기초가 돼주기도 했다(40p)           

그렇다. 그의 작품의 원천이 그냥 나올 리 없었다. 이렇게 난 뭔가 그의 약점 하나를 잡은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올리곤 했는데, 이내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확실히 크게 될 사람은 노는 폼이 다르다 싶었다. 읽는 것은 그렇다손치더라도 재미삼아 그들 작품을 노트에 번역했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모국어 밖에 잘 하는 언어가 없어서인지 모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하루키를 일컬어 '미국 작가가 일본어로 쓴 영어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미국에 자신의 소설을 알리는데 별 무리없이 알릴 수 있는 개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세상에 어떤 작가도 완벽한 작가될 수는 없는가 보다. 그런 그에게도 호불호가 있어 '헤밍웨이의 아류'니 '버터 냄새 나는 작품'이란 말도 듣는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하는데, 전자든 후자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루키 스타일일 것이다.  

 

 

하루키의 하루  

 

그렇다면 하루키가 하루를 사는 스타일은 어떨까?

 

그는 우선 오전 4시 전후로 일어나 신선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미신 후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쓴다. 오전 10까지 일한 후 10킬로미터를 달린다(그가 마라톤 마니아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 번역 작업을 취미 삼아 하고, 중고음반 가게를 돌아다니며 ... 장을 봐서 요리를 하고, 저녁을 먹은 뒤 책을 읽다 밤 10시경 잠자리에 든다.

하루키는 문체가 곧 삶의 방식과 직결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활의 단순화를 통해 일상의 잡다한 요소들을 지웠고 대신 소설가로서 해야 할 일들에 집중했다. (19~20p)

 

작가로 등단하거나 주목받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은 '작가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를 보면 창의력과 상상력은 자유와 일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규칙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반복하는 힘과 그 일을 진정으로 즐기는 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은 '꾸준함'이다. (22p) 

한때 하루키가 우리나라를 강타할 때 일부 작가들은 하루키의 문체를 흉내내곤 했다고 한다. 물론 문체가 워낙 독특했으니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하루키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처럼 쓰지 않으면 독자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쓸데없는 열등감에 그의 문체를 따라 했을지는 그 작가만이 알 것이다. 그건 하루키가 '헤밍웨이 아류'란 평을 듣는 것 보다 더 못한 것 아닌가?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나 초년생들은 하루키를 흉내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실함, 꾸준함을 배웠어야 했다. 그리고 하루키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 반복성에는 확실히 주술적인 것이 있어요. 정글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의 울림 같은 것이지요.(23p)"

 

 

하루키의 원칙

 

하루키의 그런 매일 매일의 꾸준함이 그만의 원칙을 낳았을 것이다.

그런 원칙은 그가 글을 쓸 때나 소설가로서의 자세에서, 심지어는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그가 글을 쓸 때 그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방식(34p 참조)'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았다.

 

첫째, 당신의 일에 집중할 시간을 정한다. ...... 자기가 제대로 미쳐보고 싶은 그 무언가를 하루 중 언제, 몇 시간 동안 할 것인지를 정한다.

둘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들을 갖춘다. ...

세째, 정해진 시간에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는 것을 매일매일 지킨다. ......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요소들은 차단한 채 신변잡기적 생각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운다. (35~36p)

 이렇게 하루키는 그만의 방식으로 30년을 지속적으로 집중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번역의 방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번역을 할 때 단어의 사용, 문장의 리듬을 타는 법 등 자기 스타일을 끊임없이 점검했고, 외국 작가들의 문장은 어떤 원리로 표현되는지를 공부했다고 한다. 또한 이것을 통해 "소설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웠다.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줄거리도, 문장도 아닌, 소설에 배어나오는 소설가의 '자세'라는 사실을 ...... 그렇게 하루키는 작가로서 기초적인 힘을 길렀고, 서구문학의 아류가 아닌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냈다. 

오리지널이라는 건 다른 누구도 쓸 수 없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뒤로부터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방향성을 모색해왔다. 소설가의 '자세'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그 앞에 아무도 없었다.(42p)  

그렇다. 어느 시점부터 그 앞에 아무도 없을 때! 바로 이것을 오리지널이라 할만하며, 그만의 '스타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관계 역시 하루키는 중요하게 여기는데, 예를들어, 회사 직원을 대할 때도 직원이 아닌 인간으로 대한다고 한다. 또 그러니만큼 자신을 진정성 있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신뢰를 느낀다고 한다(이거 너무 완벽남 아닌가? 빈틈이 없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의 그만의 원칙이다. 그의 책을 번역해 주는 사람은, 제이 루빈 교수와 필립 가브리엘, 알프레드 번바움 교수 등 세 명이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매번 자신의 작품을  이들 세 명에게 원고를 읽게 하고 그 중 가장 열정을 보이는 사람을 이번 번역자로 최종 결정을 한다고 한다(189p). 그것은 확실히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재치있는 방식인 것 같다. 

 

 

하루키가 말하는 작가 또는 작가로서의 삶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하루키가 확실히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서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야구 경기를 구경하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소설을 써본 적도, 소설 작법 같은 것을 배운 적도 없지만 어쨌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또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용기와 도전을 주는가?

솔직히 글을 써 보겠다고 하면 왜 그렇게 자질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많은 것인지? 창작 수업 한 시간만 들으면 지레 겁부터 먹게 된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해서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 되겠지만 그래서 미리부터 해 보지도 않고 기를 죽이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하루키는 학교란 제도권 교육을 싫어했다고 한다. 청소년기 때도 그는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1년 재수 끝에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다. 사실 오늘 날 그 대학은 일본 내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지만 그가 다녔던 때만해도 그렇게 유명한 대학이 아니라며 자신이 그리 똑똑한 인간이 아님을 그런 식으로 겸손하게 말하곤 한다. 자신이 그 대학에 들어간 것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라나?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이라던데 하루키는 확실히 그래 보인다. 그래도 하루키의 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는 확실히 아웃사이더의 승리요, 조상쯤 되어 보인다.

또한 그는 신문이나 잡지,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우리는 '모름지기 작가라면...'이래야 한다며 스스로 덧씌운 족쇄가 얼마나 많은가? 그중 하나가 신문, 집지 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솔직히 좋아서 광이 되는 거라면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되지 못해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루키를 봐서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신문이나 잡지, TV를 보지 않는대신 뭔가에는 미쳐있겠지. 예를들면 재즈 같은 것에. 그가 재즈 광이란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래서 오래 전 하루키를 좋아해서 하루키를 닮은 나의 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든 한 가지에 정통해 있으라고. 그 말이 세월이 흐르면 그를수록 뼈에 사무치도록 와 닿는다. 그래서일까? 하루키의 글은 재즈와 닮아있는 것도 같다.  

사실 난 그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섹스에 관한 표현이 너무 많거나 적나라해서 보지 않은 이유도 있다. 보기에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생겼다. 오죽하면 그의 표정을 가리켜, 긴장하면 얼굴이 금방이라도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하게 굳고 만다고 표현했을까. 그런 그가 섹스 표현 잘하기로 유명한 작가라는 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역시 섹스에 관한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꿈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 섹스는 자신의 본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제어할 수 있는 아이템과도 같다고 보았단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는 섹스 표현 조차도 소설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재료였다면 그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말하는 작가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말한다. '소설가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관찰은 하루키 문학 인생의 출발점과 같다고 했다. 어둠과 지하, 그리고 통로는 하루키 작품의 주요 모티프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진짜 모습,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진정 구원받기 위해서는 홀로 어둠의 깊숙한 부분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각자가 느끼는 공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직시하면서 상실, 상처, 고독, 혼란 등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이라(206P)고 했다.   

 

 

하루키 자서전이나 평전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하루키는 자신을 자주 고양이에 비유하곤 했다. 그건 실제로 그가 고양이를 좋아하고, 도도하고 관찰하기 좋아하며, 낮가림이 있는 습성 등을 들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가 소설가가 된 것도, 처음엔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고 했단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는 팀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고 혼자 작업하기 좋은 소설을 택했다고 하니 그가 고양이의 습성을 가졌다는 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한 것 같다. 그래 가지고 한때 재즈 카페를 운영했다는 건 역시 미스테리고. 확실히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번 독서는 나름 하루키를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좋기는 했다. 그리고 하루키와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순전히 그에 대한 자료만을 가지고 이만큼 썼다는 것이 대단하다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의 아쉬움이다. 물론 하루키의 성격상 아무에게나 곁을 내줄리는 만무할테니 인터뷰는 접고 시작한 작업이었겠지. 그에 관한 모든 책을 다 읽고 각 키워드에 따라 책을 쓴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하루키 스타일이라고 해놓고 뭔가 촛점이 조금은 안 맞은 것도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얼핏 보면 무슨 하루키를 재조명하면서 자기계발류의 책처럼도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작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기도 하겠지만 왜 순수하게 하루키를 조명을 하지 못했을까? 하루키 스타일이라면서 스타일에 대해 좀 더 파고들었어야지 그 키워드란 또 뭐란 말인가? 조금은 산만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뭐 워낙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저자에겐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루키도 이제 60이 넘었다. 그가 과연 자서전을 쓸까? 그의 독특한 성격으로 봐선 안 쓸 것도 같다.  또한 워낙에 많은 책에서 자신의 삶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았으니 겸손한 의미에서 자서전이라고 따로 쓸 게 없다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의 평전을 써야하지 않을까? 뭐 평전은 꼭 그 사람이 죽었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움베르코 에코의 평전이 나와있지 않은가?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정작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왠지 살았을 때 평전이 나오면 이제 글은 그만 쓰라는 건가? 오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아직도 쓸 이야기가 많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그에 대해 알고 싶으면 문학론에 관한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아, 지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조금 못된 시각이다. 이 시각이면 하루킨 뭘하고 있을까? 책에 나와 있는대로라면, 번역을 하고 있거나, 어느 중고 음반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으려나? 그가 더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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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3-10-24 10:18   좋아요 0 | URL
ㅎㅎ미안해요!^^

페크pek0501 2013-10-2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는 거예요?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관심 끌만한 책이네요.
저는 하루키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에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어 볼 만한 것 같아요.

님의 책 소개 글로 많이 팔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까 저도 사고 싶어지니까 말이죠.^^





stella.K 2013-10-24 10:13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키를 그렇게 많이 좋아라 하지는 않는데
분명 끌리는 작가인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아요.
저자가 나름 글을 잘 쓰긴 했는데 하루키 스타일을 말하고자
했다면 하루키의 라이프 스타일을 썼어야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촛점이 좀 아쉬웠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하루키의 작품 보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라
뭐 갖고 있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cyrus 2013-10-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는 하루키 에세이에 열광할 정도로 읽는 지인이 있는데, 저는 아직도 하루키 스타일에 그렇게 끌리지 않더라고요. 이 글 읽으면서 느낀건데요, 아마도 빠르면 5년 안으로 하루키 평전이나 자서전이 출간될꺼 같은 예감이 드네요

stella.K 2013-10-24 10:1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야. 하루키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야.
근데 이 사람은 워낙 독특해서 자서전을 쓸까 싶기도 해.
나중에 평전은 나오겠지.
요즘 부지런히 글을 올리고 있더라. 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