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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응변의 힘 - 어지러운 세상 동양고전 3000년의 지혜를 권하다
신동준 지음 / 아템포 / 2013년 10월
평점 :
나는, 싸움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 옛날부터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무슨 쌈닭쯤 되고싶은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살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싸움이 싫어서 가만 있으면 바본 줄 알고 더 시비를 걸고,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있어보면 참고 있으면 나만 죽을 X싸고, 변비에 걸리지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 올까 경계하고, 싸우는 것도 쉽지는 않다. 싸우면 잘 싸워야 하는데 나중에 보면 안 싸우느니만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울 때 너 죽고, 나 죽자고 그야말로 피터지게 싸운다. 그걸 결사항전이라고 한다지. 하지만 그 뒤에 남는 건 피만 낭자한 처절한 승리일뿐, 그런 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엊그제도 뉴스를 보니, 여자 하나를 두고 두 남자가 피터지게 싸우다 한쪽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놀라기도 했지만, 황당하기도 했다. 그 놈의 사랑이 뭐길래. 하지만 혀를 끌끌 차다 말 것도 아니다. 죽인 쪽은 죄인이니 그 가족들 조차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트라우마가 클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내가 이렇게 어이없이 죽다니, 어이가 없을 것이다. 또 어쩌면 죽는 순간 깨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 보다 내 생명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사랑하다, 사랑해서, 사랑 때문에 (장렬히)죽는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 하나만 놓고 보자면 그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낭만은 낭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 피 빛 현실에선 그런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낭만 따질 때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두 남자는 한 여자를 두고 어떻게 싸웠어야 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움을 참 잘 못하는 민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싸울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건 알고 보면 그냥 허세일뿐 진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싫으니까 쌍욕해 가면서 싸우다 등을 돌리면 그만이다. 또 그게 아니면 내가 당한만큼 복수해 준다고 서로 피를 보는 것이 전부다.
싸움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싸움을 아주 즐기는 건 아니지만 소위 말빨에서는 지지 않는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왜 싸우는 걸까를 생각하면 이유는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근데 역시 미련은 남는다. 꼭 뒤돌아서서 그때 이 말도 해 줄 걸하며 아쉬워했던 적이 열 번이면 열 번 다다.
하지만 싸움은 꼭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재적시에 표현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다. 거기엔 반드시 작전이 필요하다. 화가 난다고 자기 말만 퍼붓는다고 싸움의 다가 아니다. 나도 화가 나면 상대도 화를 내는 법이다. 그게 설령 잘못이 상대에게 있어도 내가 화로 상대의 화를 돋구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논리나 힘만 가지고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싸우기 전에 내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자기 욕망을 다룰 줄 안다는 게 또 그리 쉽지가 않다. 불을 다루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일게다.
그런데, 책을 읽는 중에 이런 말을 발견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결코 최상의 계책이 될 수 없다. 싸우지 않고도 굴복시키는 부전굴인이야말로 최상의 계책에 해당한다. 전쟁에서 최상의 계책은 지략으로 굴복시키는 '벌모'다. 차선책은 외교수단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교'다. 그 다음 차선책은 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벌병'이다. 최하 계책은 적의 성을 직접 공격하는 '공성'이다.(76p)
읽다보면 우리가 싸울 때 주로 어떤 방법을 쓰는지 알 것 같다. 책대로라면, 우리가 주로 잘 쓰는 방법은 역시 '공성'이었을 것이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도 있건만, 왜 우리는 꼭 직접 싸워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싸움은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것만이 싸움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생활 전반에 싸워야할 순간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꼭 나와 잘 지낼 수 없는 적하고만도 아니다. 잘 지낼 수 있는 친한 사이에도 있을 수 있다. 피를 보는 것만이 싸움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 하다못해 자신과의 싸움도 싸움은 싸움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최근 언제 싸웠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난 여름이었던 것 같다. 별로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말을 3시간 내내 떠들고, 결국 내가 먼저 손을 털고 나왔다. 그렇게 이성과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과 뭐하러 3시간이나 싸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상대에겐 그가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나에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간의 욕망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있냐고 씩씩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소리다. 다신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버리기도 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내가 좀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사실 나만 생각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인데, 조직과 얼켜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나 나나 조직에 적지않은 피해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직내에 있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물론 겉으론 그리 손해 볼 것도 없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의기투합만 잘했더라면 윈윈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와 나는 서로를 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손을 들고만 것이다.
보다 못한 내가 최근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성격상 별로 즐겨하지 않는 제스추어이긴 하지만, 조직내에 있는 사람들이 안타까웠고, 그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손해를 보고도 저렇게 뻣뻣한가 먼저 꺽고 나오면 상대로 그러지 않을까, 말하자면 협상을 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요령이 필요해 겸손히 설득하고, 상대를 코너로 몰아 얼마의 시한을 주고 선택을 하도록 했다. 물론 이것도 상대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을 때 그 방법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난 저자가 말한 저 계책 중 어떤 계책을 쓴 것일까? '벌교'쯤 되려나?
좀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르나, 건물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도 부족해 살인까지 일어나는 판국이니 세상이 무섭긴 하다. 그런데 꼭 무서운 일만 일어나는 것마는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친히 편지를 써서 피해를 준 또는 피해를 받은 이웃에게 편지를 써서 줬더니 갈등이 많이 해소됐다는 말도 들었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싸움의 승리가 아닐까? 그건 또 어떤 계책을 쓴 것일까?
책은 좀 읽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싸움이나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좀 더 현명하게 싸울 필요가 있다. 그것에 적지않은 통찰과 조언을 담고 있어 곁에 두고 두고 음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훗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