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 나영석에서 김태호까지 예능PD 6인에게 배우는 창의적으로 일하는 법
정덕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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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프로듀서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자.

프로듀서(producer)

[명사] <연영> 연극, 영화, 방송 따위에서 제작의 모든 관리를 책임지는 사람.

유의어: 연출자. 제작자 

                                                <네이버 사전에서>

 그것을 줄여서 우린 흔히 PD라고 부른다. 

이 책은 특별히 지상파는 물론이고, 케이블이나 종편에서 활약하는 예능 PD 6인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예능PD일까?   

 

사실 난 예능 프로를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보더라도 그냥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그 중 한토막을 조금 보다가 말뿐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예능 프로의 PD들의 이야기란 말에 관심있어 덜컥 손에 들고 읽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그 프로에 관심이 없다고 그 프로를 만든 사람까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일에 대한 노하우를 알 수 있는 기횐데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한때는 연극 현장에 있었고, 연극이든 예능이든 사람을 상대하고, (작품이나)프로그램을 위한다는 건 똑같다. 그래서 혹시 앞으로 내 생애 이런 노하우가 필요할지 모를 일이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프로듀서란 무엇인지 저 6인을 통해 아는 것도 내 인생 사는데 도움이 안 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생애에 프로듀서가 아닌가?

 

오프로드의 삶에서 배운다

 

나는 길치다. 항상 자주 가는 길은 그렇지 않은데 처음 가는 길이나 드문드문 가는 길은 영낙없이 헤멘다. 처음 가는 길이야 길치니 그런다고 해도 지난 번에 가 본 곳을 한 번에 찾아내지 못하고 여전히 헤메는 나를 보면 얼마나 한심하고 짜증이 나던지. 그래서 낯선 길은겁부터 난다. 잃어버리면 어느 길로 갈까 막막해지니까. 어디서부터 다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나? 너무 안정적인 것만을 추구한다. 확실히 아는 길 남이 가는 길을 나도 가려고 한다. 그래야 뭔가 헤메지 않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땐가 그 길에서 낙오한다.  그 길은 포화상태니까 언제가 누군가는 반드시 밀려나게 되있다. 단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밀려나는 대상이 내가 안 되기를 바랄 뿐이지.

 

그런데 문제는 밀려 난다고 다 낙오가 되는 것일까? 왜 낙오라고 하는 것일까? 나오의 기준이 뭘까? 남들이 가는 대오에서 벗어나면 낙오하는 것일까? 이 낙오의 기준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낙오는 내가 받아들여을 때나 낙오가 되는 것이지 받아 들이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겠구나를 나는 나영석 PD편에서 읽는다. 그는 <1박2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그는 촬영지를 갈 때는 일부러 내비게이션을 끄고 간단다. 이는 출연자들이 빤히 아는 길로 가면 재미없을 테니 모르는 길로 가게 해 그들 가운데서 벌어지는 고생담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그렇게 모르는 길로 갔을 때가 전인미답의 신천지를 발견할 공산이 더 큰 것이다. 헤메게 될 불안은 발견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영석 PD는 바로 이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완전하지 않은 큰 그림만 그려놓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간의 복불복을 즐기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PD로 성공하려면 인간관계, 리더십, 카리스마 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오히려 좋은 기획과 좋은 프로그램으로 평가 받는 직업(40쪽)이라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용을 해 보자. 내가 내 인생의 PD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좋은 인간관계, 리더십, 카리스마를 갖는 것 다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가치있게 만들 것이냐가 더 관건이라는 말일 것이다. 

 

 

일 보다는 조직, 조직 보다는 사람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했던 건 바로 서수민 PD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개그 콘서트> PD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 놀라운 건 <개그 콘서트> 출연진만해도 100명이 넘는단다.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솔할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것은 책을 읽으면 나오는 얘기고, 더 읽어 나가면서 공감도 되고 감동도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쌈닭이라는 것이다. 공중파 첫 여자 PD가 돼서 처음엔 안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연극판에 작가로 있으면서 안 싸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는 쌈닭이 됐다. 그것도 신성한 교회에서. 글쎄, 연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교회 평화에 이바지 하며, 교회가 그저 평화롭고 거룩한 곳으로만 인식하고 다녔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찌보면 평화는 투쟁없이는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니, 적어도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싸우게 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싸우다 얼떨결에 <개그 콘서트>를 맞게 됐고, 조직관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게되었으며, 나아가 개그(우먼을  포함한 통칭)맨들이 보다 합리적인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연예계 스타 시스템에 희생양이 됐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또  이것이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그들의 노예 계약이 이슈가 된 적도 있지 않았던가? 개그맨들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연예 기획사들의 횡포의 고리를 끊어보고자 서수민 PD는 개그맨 김준호와 함께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애 기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보면 그녀는 예능계의 잔 다르크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 생각하지 말고 사람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던데, PD가 할 수 있는 일엔 사람의 권익 보호도 포함이 되는 거라는 걸 이 사람을 보며 깨달았다.

 

사실 내가 부럽다고 했던 건, 작년에 내가 쓴 뮤지컬을 대학로 무대에 올리면서(나는 이것으로 한동안 떠나 있던 이 바닥을 다시 기어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배우들이 아르바이트 보다 못한 출연료를 받으면서도 좋아라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좀 찡했다.

 

서수민 PD가 애초에 가졌던 꿈이 개그맨들이 개그만 해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73쪽)는 거였다고 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나는 물론 연출자도 아니고, 제작자도 아니지만 연극인들이 연극 하나만 해서 밥 먹고 살 수는 없는 걸까를 생각해 본다. 연극 현실은 연예 현실 보다 더 어렵다.     

 

좋은 작품을 쓰면 우리나라 공연계가 좋아질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없이 그 분야의 발전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되기 전에 내가 내 인생에 기획자가 되어야 하고 프로듀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든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정해진대로 일하지 않는다

 

옛날의 예능과 오늘 날의 예능이 다른 것은 옛날의 예능은 드라마 제작과 비슷해서 정해진 포멧과 대사, 마무리 등이 대본에 나온대로 해야만 했다. 물론 약간의 애드리브가 약간의 자유로움을 보장해 주는 게 르다면 다를까?

 

하지만 요즘의 예능의 제작은 그렇지가 않다. 그냥 기본적인 틀 내지는 아주 소극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도록만 해 줄 뿐 출연진들이 자유롭게 뭔가를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방법을 과감하게 드라마에 접목시킨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응답하라> 1994와 1997 두 시리즈를 성공시킨 신원호 PD다. 

 

그러니까 이건 정해진대로의 드마가 아니라 형식을 파괴한 드라마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로부터 요즘 예능 PD들이 드라마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신원호 PD일 줄을 몰랐다(솔직히 난 <응답하라>를 보지 못 했다). 예능 PD들이 드라마를 만든다니. 순간 예능 PD가 드라마를 점령하기 시작했다면 드라마 PD들은 뭘 해 먹고 살지? 그런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신원호 PD 편을 읽으니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놀랍기도 했다. 사실 내가 연극 대본을 쓰고 있었을 때 난 언젠가 꼭 한 번은 이런 연극을 해 보고 싶었다. 즉 상황만 주고 나머지 대사는 배우가 하는 뭐 그런 거 말이다. 내가 암기력이 제로에 가까워서 그런지 배우에게 내 대사를 암기하도록 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우들에게 그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른 채 떠밀리듯 다음 작품을 생각하고, 나의 일은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로 귀결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한 것엔 사람들이 작가로서의 본분을 유기시켰다 내지는 요령 피운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런데 이걸 실제로 과감하게 시도한 사람이 있었다니 살짝 배가 아프려고 한다. 나 역시 아웃사이더고, 중심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언제부턴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손가락질 받고, 이상한 눈으로 볼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나영석 부분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여기 신원호의 부분을 읽었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 책의 저자도 신원호를 가리켜, 그는 누군가 그어놓은 구별 짓기의 선들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이리 넘고 저리 넘는다고 했다. 그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건 경계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일 뿐 절대적인 구분은 아니다(99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앞서 말한 낙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그것과 일맥상통 해 보인다.        

 

     

프로듀서가 되는 건 마니아가 되는 것

 

신형관 PD편을 읽으면 조금은 섬짓해진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했을 때 이런 이벤트가 있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가장 많이 모아 온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도대체 얼마를 모으면 가장 많은 것이 되는 것일까? 몇백 장 또는 천 장 가까이거나 그 보다 좀 많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1982년의 신형관은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그때 그가 모은 것만 해도 6천 장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뭐든 몇 백은 성에 차지도 않는다. 몇 천은 돼야 마니아란 소릴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 음악 방송의 PD인 그는 LP와 CD가 7천 장 이상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70년 대 중반 TV에서 방영한 <마징가Z>에 홀딱 빠져 30여 년간이나 피규어를 모았는데 그의 마장가에 대한 해석이 남다르다. 그것은 마귀 '마(魔)', 귀신 '신(神)', 나 '아(我)'가 결합됐다며, 결국 내 안에 악마와 신이 함께 있다는 얘기다(155쪽). 즉 마니아는 바로 이런 사람이며, 그런 근성이 프로듀서가 되는 덕목 중 하나라는 말이다.

 

어찌보면 마니아는 전문가와는 또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는 어떤 한 분야에 올인해서 자격증도 따고 그 분야에서 자기 영역을 개척하는 뭐 다소 의도적인 의미가 있다면 마니아는 자연발생적으로 미쳐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 몰입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태. 그러면서 그는 뭔가를 해내려면 자기 자신에게 특히 독해지라고 조언한다(161쪽) 그래서일까? 그는 이례적으로 프로듀서로서 상무의 자리까지 올랐다.

 

결국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독한 것과 독하지 않을 것. 미친 것과 미치지 않은 것. 몰입할 줄 아는 것과 몰입하지 않는 것 등 말이다.     

 

     

프로듀서란 무엇인가?

 

사실 이 책은 프로듀서란 일을 소개하기 위해서만 쓴 책은 아닌 것 같다. 좀 더 거시적이고, 철학적인 안목에서 일이란 무엇인가를 짚어보기 위해 쓴 책인 것 같다.

 

사실 여기에 소개 된 6명의 PD들을 보면 어느 누구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뭔가 아웃사이더적이면서, 성향도 독특하지만 그것을 일부러 자학하며 맞추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의 길,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특히 나는 프로듀서란 직업이 그 어렵다던 기자와 겹쳐 보여서 나 같은 사람은 감히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이 직업도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자신 안에 야성과 창조성만 있다면 도전할만한 직업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6명의 PD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켜 그런 생각을 더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책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대중문화 평론가라면서 벤야민이나 맥루한 같은 철학자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문장이 가볍지 않고, 나름 생각해 볼만한 여지를 많이 준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우린 어쩌면 이미 프로듀서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은 개척하지 않으면, 내가 내 인생을 제작하고, 책임져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해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 개인적으로 좀 남다르게 다가 온 책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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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2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 - 독방에 갇힌 무기수와 영문학 교수의 10년간의 셰익스피어 수업
로라 베이츠 지음, 박진재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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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웬지 약간 흥분이 됐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거리의 노숙인을 상대로 했다던 <희망의 인문학>의 연장선상을 보는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우린 흔히 인문학은 상아탑에 갇혀 귀족만 공부하는 것처럼 인식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낮은 곳에 임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보게되니 놀랍지 않은가?  

 

이 책은 인문학 그것도 특별히 문학에 있어서 절대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교도소 수감자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는 보고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쉽지 않은데 보통 사람도 공부하기 힘든 것을 교도소 죄수들이 한다는 건 무모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렇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 조차도 죄수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를 전수하는 저자가 새삼 놀랍고, 고맙기도 하다. 

 

사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기꺼이 스스로가 이 일을 자처한다. 무엇보다 초두에 미국 교도소 내부환경에 관한 기술이 좀 충격적이다. 한간엔 호텔급 교도소도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죄수를 이렇게 대접해 뭐하나 코웃음을 지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일일테고 나는 새삼 미국의 교도소가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라고 특별히 나을까 싶기도 하다. 

 

책에 기술된 것을 보면 적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기본은 되야하는데 열악하다 못해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대접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최악의 환경에서 종신 내지는 무기징역을 산다면 과연 죄수에 대한 교도가 재대로 이루어질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반드시 빈민가 출신이나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책은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특별히 래리의 불행한 인생을 비교적 소상히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주목해서 본 건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의 영혼까지 사악하다거나 달라질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변화될 수 있는 사람을 미리부터 단정지어 구제불능의 인간으로 매도한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셰익스피어가 문학적으로도 위대하지만 교정에도 유익하다 뭐 이런  섣부른 낙관론을 펼치는 것도 바람직 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학문은 다양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지 어느 특별한 사람들만이 연마되어지고 향유되는 건 바람직 않다고 본다. 

 

또한 인문학이 교양적인 면에선 중요하긴 하지만 사회적인 면에선 아직도 외면 받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알될 것 같다.  여전히 대기업에선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문계열 전공자는 많이 뽑히지 못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나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책을 읽고 있노라면 묘하게도 오래 전 내가 10대 때 읽은 <딥스>라는 책을 생각나게 만든다. 물론 그 책은 자폐아의 치료 과정을 상세하게 다뤄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인데, 뭔가에 갇혀 있는 영혼을 세상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은 그 책과 뭔가 맥락을 같이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특히 서로 나누는 대화가 그렇다. 그것을 보더라도 규정지어지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으며 복구가 가능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단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에겐 다소 조금은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점은 감안하고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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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10-2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한 파트를 담당했더군요. 그 친구 덕에 책을 얻었는데 뭐랄까요?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판이라고 했었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더군요.

stella.K 2014-10-29 12:29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나 봅니다.
클레멘트 코스란 게 있군요.
자기 탈란트 가지고 좋은 일 많이 하면 좋죠.
한켠 부럽더라구요.^^

페크pek0501 2014-11-03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도소 사람들에게 독서를 시키는 게 꼭 필요하겠단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하나, 그 시간들을 견디기가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요.

오 헨리가 감방에서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는 얘기가 생각나네요.
몸은 현실의 땅을 밟되, 정신이 작품 안에서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겠죠.
교도소 사람들의 정신도 책 안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군요.

stella.K 2014-11-03 13:28   좋아요 0 | URL
저는 교도소안의 환경을 보고 놀랐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놀랍더군요.
환경이 너무 좋아도 문제지만 그래가지고 진정한 교도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더군요.
오 헨리가 감방에도 있었군요. 몰랐어요.ㅋ
 
모두들 하고 있습니까 - 연애, 결혼, 섹스에 관한 독설과 유머의 촌철살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독설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때론 내가 하고 싶은 말 또는 나의 가려운 데를 긁어줘서 시원할 때가 있다.  하긴,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고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것이 남을 비방하거나 모독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도 들어 줄만은 하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 없이 말하고 그것에 동의를 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 또한 독설이라 할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의 영화배우겸 감독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영화가 독특하고 엉뚱하기도 해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은 간다. 그런 그가 책을 냈다고 해서 마음이 동했다. 보다시피 책 띠지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작정하고 얘기한 기타노 다케시의 19금 토크'라고 되어 있다.  앞서도 밝혔지만, 내가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한 건 19금 토크 때문이  아니라 기타노 다케시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솔직히 19금 토크라는 것도 말 그대로 19세 미만의 아이들 때문에 붙여진 거지 그다지 야하다고 할 것도 없다.  윤리나 도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로 따질 것도 없다. 그냥 그 생각의 독특함이 나쁘지 않고, 어느 부분에선 내가 생각하는 것과도 맞는 것 같아 흡족하기도 했다. 

 

예를들면,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끼리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 반기를 든다.

부모와 자식 사이나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안 된다니...... 미인과 마찬가지로 비밀이 있어야 그 사람이 더 대담해 보일 때가 있다. (148p)

 

나도 그것엔 동의를 한다. 아니 어떻게 비밀이 없기를 바라겠는가? 그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같이 방 한 칸에서 복닦거리며 살면 그럴수도 있겠지. 하지만 요즘 같이 각방을 쓰는 세대에서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건 또  가족 화목의 신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언젠가 이것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그건 매스컴의 조장이 농후한데, 자꾸 매스컴에서 가족 화목, 가족 화목 떠드니까 그렇지 못한 가족은 더 비참해지고 소외되고, 고독해지는 것이다.  물론 가족이 화목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다수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결코 기죽지 않고 자살하지 말고 꿋꿋하게 잘 살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것은 또 나라의 경제적 현실과 비례하기도 한다.  가족들 모두가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잘 살면 화목하게 지낼 여지가 많아진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라의 경제가 좋아진다고 해도 가족 모두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소득 불균형, 불평등을 논해야 하는 상황인데 내 가족 모두가 이런 것을 겪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당장 돈을 잘 버는 형제가 있고, 못 버는 형제가 있는데 서로 비교될 건 뻔하고 그것 때문에 의가 상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다고 불행해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누군들 화목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잘 살아 남아야 한다. 그것이 남는 거다. 그러다 보면 화목하게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쓰다보니 나도 본의 아니게 독설 좀 했다. 이렇게 우리 삶에 독설이 필요한 건 옳은 것과 그르다를 떠나 이렇게 너무 경도된 인식에 조금의 숨통을 트기위한 일종의 조미료 같은 것은 아닐까?

 

 

이 책은 띠지가 말해주는 것처럼 연애, 결혼 다시 말해서 남녀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읽으면서 맞다고 끄덕거리는 것이 대부분이긴 하다. 그런데 남자의 밝힘에 대해 너무 많이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뭐 남자가 썼으니까 그럴만도 하겠지. 그런데 난 남자가 안 되 봐서 잘 모르겠지만 남자의 성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 선인지를 잘 모르겠다. 남자들 중엔 생각 보다 아닌 사람도 의외로 많고, 여자들이 성에 소극적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적극적인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를 연구함에 있어서 예전엔 서로 다른 것에 집중을 했다면, 요즘은 남자와 여자가 같은 것이 무엇이냐를 연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가치들을 극대화시켜 좀 더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고 하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기타노 다케시도 다소 구세대적이란 그것에서 아주 많이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책 후반에 이 남자의 돌직구 상담이 마음에 든다. 

예전에 나도 상담학을 공부한 적이 있지만 그때 내가 배운 상담의 정의는, 내담자는 자기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담자가 답을 찾을 때까지 상담자는 기다려주고, 인내해주고, 내담자가 무슨 말을하든 들어주라는 것이다. 그때는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맞는 것도 같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러다 속터져 죽는다. 그렇다고 나중에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한다.  이런 걸 꼭 해야하나? 기껏 들어 주고, 인내해 주고 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 받고. 그런데 한 술 더 떠 그게 또 정상이고, 상담을 잘 하는 것이란다. 환장할 일이지. 


내담자도 처음엔 상담자에게 뭐 좀 도움 좀 받을까 해서 찾아 가지만, 알듯 모를 듯한 반응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 결국 찾는 게 점집이다.  내담자는 듣고 싶은 말이 딱 한 가진데 그걸 상담자에게서 듣지 못하고 웬 사이비 점장이한테서 듣는다서야 상담이 어찌 밥먹고 살겠는가? 


그런데 다케시에게 누가 자식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을 안 듣는다고 상담을 해 온다. 그러면 그는 그냥 그 자식 버리라고 말한다. 자식은 버려야 자기네들이 알아서 살 길을 개척하고 강하게 살아 남고 그 부모도 산다고 한다. 솔직히 들으면 속이 시원한 말 같지만 정말 그렇게 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에 달렸다. 다케시의 말을 듣다 자식으로부터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숨통 트고 살고 싶고 그 순간만큼은 좋았어 하면 잘 살았던 것이고, 내가 난 내 자식이니 끝까지 돌봐야지 하고 참는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을 다 읽던 지난 토요일 아는 지인과 통화를 했다. 작은 아이가 고3인데 바로 어제 계단에서 굴렀다는 것이다. 뼈가 부러졌는데 일주일 동안 그 아이의 등하교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푸념이다. 그녀는 자신도 몸이 안 좋아 힘든 판국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언제까지 자식들 뒷치닥거리나 하며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짓는다. 그때 난 바로 이 책 이야기를 해 줬다. 그녀가 과연 이 책에 나와 있는대로 하겠는가에 물음표를 달 수 밖에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자식에게 어느 정도 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조그만 단초 하나는 던져 주지 않았을까?

 

특히 다케시는 자기 아이가 도색 잡지를 보고 있으면 마구 패주겠다고 했다. 그건 단순히 아이가 도색 잡지를 봐서가 아니다. 그것을 모르게 봐야하는데 드러내놓고 봤기 때문이다. 난 거기서 빵 터졌다. 역시 다케시 했다. 

 

그렇다고 돌직구 상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기는 하다. 예를 들면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여자가 자기 보다 15살 어린 남자고 사귀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할까요란 질문에 나 같으면 어떻게 상담했을까? 참, 능력도 좋습니다. 뭐 그랬을까? 그리고 할 말이 없다. 평생 그렇게 어린 사람을 사귀어 봤어야 뭔 말을 해 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남자 다케시는 헤어지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참 타당해 보인다. 그건 책을 읽고 확인해 보도록.

 

요는 돌직구 상담은 인생 경험이 풍부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15살 어린 사람과 사귀어 보고 상담을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 사람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벼라별 일을 다 보고, 듣고, 경험한지라 그만큼 들려줄 말이 있다는 소리다.  참고 삼아 들을만 하다는 말이다. 거리낌 없이 얘기해 시원하기도 하고. 웃음도 난다. 

 

그냥 낙서처럼 혼자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말이 대부분인데 제법 곱씹을 요소가 있다. 난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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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10-2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뚜렷하게 선 아저씨이니
영화도 `굵고 짙게` 찍는구나 싶어요.
참으로 씩씩한 분이라고 느껴요,
기타노 다케시라고 하는 분~

stella.K 2014-10-22 19:2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십니다.
그렇죠?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개성이 있어
나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자유로운 것 같아 부럽기도 하구요.ㅋ
 
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폴 오스터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사실 아주 없지는 않다. 20년 전쯤이었던가? 그의 책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땐 우리나라에 그의 명성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때라 호기심에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읽다가 포기했다. 글쎄, 왜 그랬을까? 오스터가 싫어서라기 보단 그 시절 나는 현대 미국문학을 읽는 안목이 거의 없었다. 즉 작가의 문체를 즐기기 보다 스토리에만 치중해서 이 작가가 좋은 작간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는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때 나를 가르쳤던 싸부는 소설로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대니 무조건 소설을 쓰려고 하기 보다 우선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분야에 정통하라고 했다. 그것이 어줍잖게 소설을 쓰려고 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했다. 나의 싸부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도 20년이 되어오는 것 같다. 그때 싸부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뭐에 정통하고 싶냐고. 그때 난 엉뚱하게도 로마사에 정통해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로마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그때 그 말은 땜빵용 말이었던 셈이다. 대신 본의(?) 아니게 나름정통해 있는 분야는 연극과 글 쓰기라고나 할까?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읽는 건 거의 중독이 되다시피 한 것 같다. 내가 왜 그러는가를 생각해 보면 나는 글 쓰기에 아직도 자신이 없으며, 그런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 용기가 생긴다. 그것에 대해 나의 싸부는 언젠가 날카롭게 꼬집은 적이 있다. 쓰라는 자신의 글은 안 쓰고 그런 책만 들이 파서 전문가가 되고 책을 내는 사람이 있다고. 좀 찔리긴 했지만 그것도 어찌보면 자기 분야에 정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요즘엔 글 쓰기에 관한 책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졌다. 더 정확히는 유명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삶이 어떤가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이건 나만의 욕구는 아닌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온 독자들이 있어왔고, 그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제 글 쓰기는 창작 이론가 보다는 현장 실무자, 이를테면 소설가들의 몫이 되어 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어도 이 책을 읽을 자격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내가 이 분야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읽어 온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책은 아닐까 한다. 솔직히 작가들이 자신의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써 달라고 하면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글을 쓸 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인터뷰 모음집이다.

 

인터뷰집의  장점은 인터뷰이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것 같아 좋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자기네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같아 독자가 조금은 소외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일게다. 그것은 모든 인터뷰가 갖는 한계고, 이 책 역시 그 한계를 비껴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떤 건 폴 오스터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는데 오히려 인터뷰어가 말을 더 많이 해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폴 오스터에게서 나의 싸부가 오버랩이 된다. 폴 오스터도 한때 잠시 영화에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도 했다고. 그의 대표작은 우리가 잘 아는 <스모크>나 <블루 인 더 페이스>등이 있다. 나의 싸부도  소설을 썼다 영화 <비트>와 <태양은 없다>의 시나리오를 썼다. 단지 폴 오스터와 나의 싸부가 다른 건, 폴 오스터는 잠시 영화에 몸을 담갔다 나왔지만, 나의 싸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지금도 여전히 영화의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는 거다. 좀 재밌는건, 폴 오스터가 썼다던 영화 <스모크>는 나의 싸부를 생각나게 만드는 영화다. 

 

무엇보다 폴 오스터는 영화계에 있어 봤기 때문에 영화와 책이 어떤 점에서 서로 보완되며 어떤 점에서 다를 수 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는 작가 중 하나다.(물론 우리나라에도 나의 싸부 말고도이런 작가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작가 김영하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미지라는 문제가 남지요. 영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듭니다. 아무 생각없이 화면을 보고 있다가 끝날 무렵이 되면 영화는 우리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우리가 눈에 담아 두었던 것들은 증발해 날아가 버리죠. 소설은 영화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활자가 말해주는 것들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노력을 해야죠. 그리고 상상력이 활성화가 되면 그때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마치 나 자신의 인생인 듯 느껴져 책 세상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123p)

 

 이 부분을 읽으니 한참 오래 전의 일이긴 하지만, 어느 대학 교수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과제에 어느 학생이 책 대신 영화를 보고 써 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요즘처럼 소설의 영화화 작업이 빈번할까? 그러다보니 소설을 읽는 사람이 오히려 미련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이 말과 함께 영화는 2시간 내에 볼 수 있는 글 (시나리오)을 써야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소설은 30 페이지를 쓰던 300 페이지를 쓰던 길이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한다. 폴 오스터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가 주는 나름의 유익이 있겠지만 책이 주는 유익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을 믿고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무엇보다 글 쓰기엔 왕도가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것이다. 재차 확인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겠지만,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선 뭔가의 메뉴얼이 있다고 은연 중 강요하고 그것을 실제로 믿는 것 같다. 예를들면, 일기를 써라. 메모하는 기술을 익혀라. 기타 등등의 방법을 강요하는데  폴 오스터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왕도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실제로 일기도 쓰지 않으며, 메모도 아주 필요한 간단한 것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 같이 메모를 하지 않을까? 이것도 글 못 쓰는 사람에겐 은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더 놀라운 건, 그는 초고를 쓰면서 고쳐 쓰기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글 쓰기 강사들은 고쳐 쓰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초고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조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쓰라고 조언한다. 왜 그렇게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렇게 고쳐 쓰기의 유혹을 받다보면 지치고 자괴감이 들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도 초고를 쓰는데도 어느 만큼의 고쳐 쓰기는 불가피 한 것 같다. (글 쓰기의 또 하나의 통념은 베껴 쓰기 습관을 들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최근엔 꼭 해야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물론 폴 오스터는 아니다. 하지만 그걸 묻는다면 그는 분명 할 필요없다고 말할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폴 오스터는 왕도를 말하지 않는 진정한 작가는 아닐까? 왕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 조차 왕도라면 할 말은 없지만, 요는 왕도는 없지만 진정한 자기만의 방법을 찾으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단기간 내에 찾아 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자꾸 왕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짧은 시간내 효율을 기대하기 때문은 아닐까? 또는 우리는 뭔가 남들이 동의하는 것을 나 또한 같이 동의하고 싶어한다. 안 그러면 외톨이가 될 테니까.  

 

어찌보면 폴 오스터는 모름지기 작가는 글 쓰기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통념에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방법과 길을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래놓고 어느 새 그것만이 왕도인 양 하는 건 또 얼마나 오만이고 모순이겠는가?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입니다. 약간은 배우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지금까지 내가 쓴 책에는 모두 핵심인물이 한명씩 있습니다. 일인칭 화자나 심인칭 주인공이었죠.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릅니다. 그 책을 쓰기 위해서는 내가 그 인물 속에 깃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 인물이 '나'는 아닙니다. 그 인물이 어쩌다 나를 닮거나 내가 지닌 어떤 특성을 공유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아니죠. 그래서 소설가가 되는 건 배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소설가는 다른 인간성, 다른 배역을 소화해내야 합니다(186p~)

 

나는 폴 오스터의 이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동감한다. 희곡을 쓰고 소설을 쓰다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그래서 작가는 자기 작품안에선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나는 한 때 <불후의 명곡>을 열심히 본적이 있는데, 처음엔 가수들의 잊혀진 우리 가요를 복원해 완벽하고도 새로운 해석이 놀라워 거의 빠져서 보았다. 그런데 보다 보니 소설가의 글 쓰기 작업이란 이런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즉 가수들이 부르는 각 곡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노래 이상을 보여준다. 가수는 때로 원곡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서 자신만의 분위기를 살리기도 하고, 아예 전혀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거기에 가창, 포퍼먼스까지 그야말로 볼 때마다 새롭고 놀랍다.

 

이를테면 소설가가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종이(또는 컴퓨터 워드)위에서작가는 원맨 밴드는 아닐까? 그래서 고독할 수도 있지만 혼자 모든 것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누구는 말하지 않는가? 세상에 아무리 이야기가 많아도 분석해 보면 20가지로 밖에 분류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고래로 소설가들은 세상의 있을 법한 20가지 이야기를 변주해 왔다는 것이다.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음산하게. 때로는 추리적으로 때로는 로맨틱하게 등등. 그러니까 소설가는 어느 한 분야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면 할수록 훌룽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소설가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좋다. 폴 오스터처럼 배우라고 생각해도 좋고, 나처럼 종이위의 원맨 밴드 내지는 원고 기획자 또는 이야기 프로듀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젠 좀 소설가도 자기 정체성을 좀 그럴 듯하게 세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 곰팡내 나는 방에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며 안 써지는 글 때문에 머리를 쥐어 뜯어내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러면서 폴 오스터는 언제부턴가 작가가 독자와의 만남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고 경계의 반응을 보였다. 나는 폴 오스터가 왜 그렇게 말 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작가지 연예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자신의 새 책이 나오면 출판사나 서점이 마련해 주는 자리마다 쫓아 다니면  사인해 주고 독자와의 만남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하지만 폴 오스터 같은 대형작가에겐 그 일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아직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에게는 꿈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또한 독자의 입장에선 폴 오스터 같은 작가와 눈 한 번 마주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할 사람도 많다. 나는 예전에 르 클레지오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 사인 한 번 받고 눈을 마주치면서 내 이름을 읽어주는데 얼마나 설레었던지.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더욱 독자들과의 만남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과 적당히 즐길 줄 알고,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 자신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건 기뻐해야 할 일이고,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독자 없는 작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난 박범신 작가가 독자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독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또한 폴 오스터는 역시 손으로 원고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도 꼭 손으로만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세 번의 타이핑을 한다고 한다. 처음엔 한 번 타이핑을 하고, 두 번째는 수정한 것들을 취합하느라 하며, 그것을 다시 한 번 또 하고. 물론 그 보다 더 많이 퇴고를 하는 작가도 많지만 그건 정말 지난한 작업이다. 그는 매번 이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컴퓨터를 사겠다고 마음 먹지만 아직도 못 사고 있는가 보다. 그렇게 해서 쌓인 그의 원고는 버그 컬렉션에 등재되기도 한단다.

 

미국엔 작가의 원고를 사고 파는 딜러가 있다는데 버그 컬렉션이 등재되는 건 확실히 그 작가에겐 굉장한 자부심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난 아무리 유명한 작가가 되도(그럴 리는 없겠지만) 버그 컬렉션에 등재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컴퓨터로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써 갈 것이 때문이다. 궁금한 건 우리나라에도 이런 딜러가 있는지 모르겠다.

 

폴 오스터는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글을 쓰지 않고서는 못 사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음, 그러지 않고도 살아가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했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지금 상태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빨리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그리고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글을 써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글재주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안 해봤어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아는 만큼 더욱 힘들어집니다. 동시에, 아주 젊었을 때처럼 낙담에 빠지거나 하는 일도 없죠. 책을 쓰다가 난국에 빠져도 지금은 스스로 견뎌내는 일이 좀 더 쉬워졌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겟죠. '음, 그래. 넌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생각은 그렇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거의 아홉 달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쓰지 않으니까요.

                                                                          

                                                                       미셀 콩타와의 대화에서(209p)

 그의 이런 대화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에 누구도 자신이 걸어 가는 길을 의심없이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하물며 작가는 더 할 것이다. 폴 오스터나 하니까 그나마 미국에서 대우 받고 사는 거겠지만 그도 처음부터 주목 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작가가 되기 전 번역을 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또한 글이란 화수분 같이 항상 써야할 것으로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설혹 그렇다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글이란 쓰면 쓸수록 어렵다는 걸 실감한다. 그럼에도 그의 말처럼 낙담에 빠지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희안한 일이다. 그 옛날 나의 싸부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안에 분노가 있는가로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과 함께 폴 오스터가 답한 저 두 가지의 질문이 작가가 되는 것일까?

 

누구는 영원히 늙지 않을 예술가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틀즈, 앤디 워홀 그리고 폴 오스터를 뽑았다. 나는 비록 아직 그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명성과 그가 내놓는 책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실제 나이가 이제 곧 70을 바라본다면 말이다.

 

예술가는 꼭 젊어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사는 건 분명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독자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폴 오스터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분명 행복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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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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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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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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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5: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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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말하다 - 세계의 문학가들이 말하는 남자란 무엇인가?
칼럼 매캔 엮음, 윤민경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나는 여자는 하이힐을 싣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자가 되고, 남자는 술과 담배를 피울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자가 되는 줄 알았다. 

 
6, 7살 무렵 가끔 집에 놀러온 이모들의 굽높은 신발을 보며, 예쁘다 못해 이모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 어른이 되서 이런 신발을 신어볼까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다 7살 땐가 엄마가 샌들을 사 줬는데 제법 굽이 있었다. 난 그때 나도 어른이 된 것은 아닐까  마음을 설레곤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성장에 따라 발도 크기 시작했고, 나는 더 이상 그 샌들을 신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난 본격적으로 어린이 취급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춘기 때 한때 나는 미국 유학을 가게되길 바랬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미국 아이들은 복장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걔네들은 중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나라의 대학생처럼 하고 다니니 얼마나 부럽던지. 더구나 학교에서 지정해주는 학생화 외엔 다른 신발은 신을 수 없으니 신발에 대한 욕망은 의외로 강했다. 지금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결코 이해 못할 일 일것이다. 
   
남자도 술과 담배가 남자를 만들어 주는 것인지, 남자니까 술과 담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 어렸을 때 그것은 남자의 상징물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술과 담배를 했던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이 없고 TV 역시 아저씨들이 대포집에서 거나하게 막걸리 따라 마시는 장면이 보였으니까. 어찌보면 난 남자와 아버지를 동격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남자는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자츰 나이 먹으면서 변화되긴 했지만. 

몇년 전, 여자의 월경을 가지고 책이 나온 적이 있다.  <마이 리틀 레드북>이란 책이었는데, 그 책은 엮은이가 여성이 월경을 어떻게 하는지 무작위로 이메일을 보내고 그 중 괜찮은 글을 골라 엮은 책이다. 월경이 무엇인가? 여성의 상징 같은 것이고, 아마도 그 책의 대칭적인 책이 이 책 '남자를 말하다'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엮은이가 남자 작가를 대상으로 글을 받아 엮었다는 것이 다르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책이 썩 재밌게 읽혀지는 것은 아닌데 그럭저럭 읽을만은 하다. 
왜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만 국한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엮은이가 직업이 직업인만큼 책이 멋있길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이 리틀 레드북>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이렇게 가볍게 다룬 책은 없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너무 학술적으로 다룬 것들이 많지 않나 싶다.
그렇게 말하자면 TV 예능 프로 중 <나는 남자다>란 프로가 단연 재밌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수컷들의 이야기를 그토록이나 까발려댈 수 있는지. 그런데 엄청 웃긴다. 또 웃긴 것만큼 남자를 너무 속물화시켜 버리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지만, 새삼 언제 한 번 수컷이 이렇게 조명 받은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그냥 읽기 무난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을 필요도 없이 아무대나 펼쳐 읽어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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