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폴 오스터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사실 아주 없지는 않다. 20년 전쯤이었던가? 그의 책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땐 우리나라에 그의 명성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때라 호기심에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읽다가 포기했다. 글쎄, 왜 그랬을까? 오스터가 싫어서라기 보단 그 시절 나는 현대 미국문학을 읽는 안목이 거의 없었다. 즉 작가의 문체를 즐기기 보다 스토리에만 치중해서 이 작가가 좋은 작간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는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때 나를 가르쳤던 싸부는 소설로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대니 무조건 소설을 쓰려고 하기 보다 우선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분야에 정통하라고 했다. 그것이 어줍잖게 소설을 쓰려고 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했다. 나의 싸부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도 20년이 되어오는 것 같다. 그때 싸부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뭐에 정통하고 싶냐고. 그때 난 엉뚱하게도 로마사에 정통해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로마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그때 그 말은 땜빵용 말이었던 셈이다. 대신 본의(?) 아니게 나름정통해 있는 분야는 연극과 글 쓰기라고나 할까?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읽는 건 거의 중독이 되다시피 한 것 같다. 내가 왜 그러는가를 생각해 보면 나는 글 쓰기에 아직도 자신이 없으며, 그런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 용기가 생긴다. 그것에 대해 나의 싸부는 언젠가 날카롭게 꼬집은 적이 있다. 쓰라는 자신의 글은 안 쓰고 그런 책만 들이 파서 전문가가 되고 책을 내는 사람이 있다고. 좀 찔리긴 했지만 그것도 어찌보면 자기 분야에 정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요즘엔 글 쓰기에 관한 책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졌다. 더 정확히는 유명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삶이 어떤가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이건 나만의 욕구는 아닌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온 독자들이 있어왔고, 그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제 글 쓰기는 창작 이론가 보다는 현장 실무자, 이를테면 소설가들의 몫이 되어 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어도 이 책을 읽을 자격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내가 이 분야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읽어 온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책은 아닐까 한다. 솔직히 작가들이 자신의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써 달라고 하면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글을 쓸 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폴 오스터의 인터뷰 모음집이다.

 

인터뷰집의  장점은 인터뷰이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것 같아 좋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자기네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같아 독자가 조금은 소외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일게다. 그것은 모든 인터뷰가 갖는 한계고, 이 책 역시 그 한계를 비껴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떤 건 폴 오스터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는데 오히려 인터뷰어가 말을 더 많이 해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폴 오스터에게서 나의 싸부가 오버랩이 된다. 폴 오스터도 한때 잠시 영화에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도 했다고. 그의 대표작은 우리가 잘 아는 <스모크>나 <블루 인 더 페이스>등이 있다. 나의 싸부도  소설을 썼다 영화 <비트>와 <태양은 없다>의 시나리오를 썼다. 단지 폴 오스터와 나의 싸부가 다른 건, 폴 오스터는 잠시 영화에 몸을 담갔다 나왔지만, 나의 싸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지금도 여전히 영화의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는 거다. 좀 재밌는건, 폴 오스터가 썼다던 영화 <스모크>는 나의 싸부를 생각나게 만드는 영화다. 

 

무엇보다 폴 오스터는 영화계에 있어 봤기 때문에 영화와 책이 어떤 점에서 서로 보완되며 어떤 점에서 다를 수 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는 작가 중 하나다.(물론 우리나라에도 나의 싸부 말고도이런 작가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작가 김영하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미지라는 문제가 남지요. 영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듭니다. 아무 생각없이 화면을 보고 있다가 끝날 무렵이 되면 영화는 우리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우리가 눈에 담아 두었던 것들은 증발해 날아가 버리죠. 소설은 영화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활자가 말해주는 것들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노력을 해야죠. 그리고 상상력이 활성화가 되면 그때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마치 나 자신의 인생인 듯 느껴져 책 세상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123p)

 

 이 부분을 읽으니 한참 오래 전의 일이긴 하지만, 어느 대학 교수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과제에 어느 학생이 책 대신 영화를 보고 써 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요즘처럼 소설의 영화화 작업이 빈번할까? 그러다보니 소설을 읽는 사람이 오히려 미련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이 말과 함께 영화는 2시간 내에 볼 수 있는 글 (시나리오)을 써야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소설은 30 페이지를 쓰던 300 페이지를 쓰던 길이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한다. 폴 오스터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가 주는 나름의 유익이 있겠지만 책이 주는 유익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을 믿고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무엇보다 글 쓰기엔 왕도가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것이다. 재차 확인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겠지만,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선 뭔가의 메뉴얼이 있다고 은연 중 강요하고 그것을 실제로 믿는 것 같다. 예를들면, 일기를 써라. 메모하는 기술을 익혀라. 기타 등등의 방법을 강요하는데  폴 오스터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왕도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실제로 일기도 쓰지 않으며, 메모도 아주 필요한 간단한 것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 같이 메모를 하지 않을까? 이것도 글 못 쓰는 사람에겐 은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더 놀라운 건, 그는 초고를 쓰면서 고쳐 쓰기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글 쓰기 강사들은 고쳐 쓰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초고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조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쓰라고 조언한다. 왜 그렇게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렇게 고쳐 쓰기의 유혹을 받다보면 지치고 자괴감이 들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도 초고를 쓰는데도 어느 만큼의 고쳐 쓰기는 불가피 한 것 같다. (글 쓰기의 또 하나의 통념은 베껴 쓰기 습관을 들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최근엔 꼭 해야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물론 폴 오스터는 아니다. 하지만 그걸 묻는다면 그는 분명 할 필요없다고 말할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폴 오스터는 왕도를 말하지 않는 진정한 작가는 아닐까? 왕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 조차 왕도라면 할 말은 없지만, 요는 왕도는 없지만 진정한 자기만의 방법을 찾으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단기간 내에 찾아 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자꾸 왕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짧은 시간내 효율을 기대하기 때문은 아닐까? 또는 우리는 뭔가 남들이 동의하는 것을 나 또한 같이 동의하고 싶어한다. 안 그러면 외톨이가 될 테니까.  

 

어찌보면 폴 오스터는 모름지기 작가는 글 쓰기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통념에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방법과 길을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래놓고 어느 새 그것만이 왕도인 양 하는 건 또 얼마나 오만이고 모순이겠는가?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입니다. 약간은 배우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지금까지 내가 쓴 책에는 모두 핵심인물이 한명씩 있습니다. 일인칭 화자나 심인칭 주인공이었죠.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릅니다. 그 책을 쓰기 위해서는 내가 그 인물 속에 깃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 인물이 '나'는 아닙니다. 그 인물이 어쩌다 나를 닮거나 내가 지닌 어떤 특성을 공유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아니죠. 그래서 소설가가 되는 건 배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소설가는 다른 인간성, 다른 배역을 소화해내야 합니다(186p~)

 

나는 폴 오스터의 이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동감한다. 희곡을 쓰고 소설을 쓰다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그래서 작가는 자기 작품안에선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나는 한 때 <불후의 명곡>을 열심히 본적이 있는데, 처음엔 가수들의 잊혀진 우리 가요를 복원해 완벽하고도 새로운 해석이 놀라워 거의 빠져서 보았다. 그런데 보다 보니 소설가의 글 쓰기 작업이란 이런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즉 가수들이 부르는 각 곡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노래 이상을 보여준다. 가수는 때로 원곡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서 자신만의 분위기를 살리기도 하고, 아예 전혀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거기에 가창, 포퍼먼스까지 그야말로 볼 때마다 새롭고 놀랍다.

 

이를테면 소설가가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종이(또는 컴퓨터 워드)위에서작가는 원맨 밴드는 아닐까? 그래서 고독할 수도 있지만 혼자 모든 것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누구는 말하지 않는가? 세상에 아무리 이야기가 많아도 분석해 보면 20가지로 밖에 분류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고래로 소설가들은 세상의 있을 법한 20가지 이야기를 변주해 왔다는 것이다.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음산하게. 때로는 추리적으로 때로는 로맨틱하게 등등. 그러니까 소설가는 어느 한 분야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면 할수록 훌룽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소설가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좋다. 폴 오스터처럼 배우라고 생각해도 좋고, 나처럼 종이위의 원맨 밴드 내지는 원고 기획자 또는 이야기 프로듀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젠 좀 소설가도 자기 정체성을 좀 그럴 듯하게 세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 곰팡내 나는 방에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며 안 써지는 글 때문에 머리를 쥐어 뜯어내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러면서 폴 오스터는 언제부턴가 작가가 독자와의 만남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고 경계의 반응을 보였다. 나는 폴 오스터가 왜 그렇게 말 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작가지 연예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자신의 새 책이 나오면 출판사나 서점이 마련해 주는 자리마다 쫓아 다니면  사인해 주고 독자와의 만남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하지만 폴 오스터 같은 대형작가에겐 그 일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아직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에게는 꿈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또한 독자의 입장에선 폴 오스터 같은 작가와 눈 한 번 마주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할 사람도 많다. 나는 예전에 르 클레지오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 사인 한 번 받고 눈을 마주치면서 내 이름을 읽어주는데 얼마나 설레었던지.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더욱 독자들과의 만남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과 적당히 즐길 줄 알고,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 자신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건 기뻐해야 할 일이고,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독자 없는 작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난 박범신 작가가 독자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독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또한 폴 오스터는 역시 손으로 원고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도 꼭 손으로만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세 번의 타이핑을 한다고 한다. 처음엔 한 번 타이핑을 하고, 두 번째는 수정한 것들을 취합하느라 하며, 그것을 다시 한 번 또 하고. 물론 그 보다 더 많이 퇴고를 하는 작가도 많지만 그건 정말 지난한 작업이다. 그는 매번 이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컴퓨터를 사겠다고 마음 먹지만 아직도 못 사고 있는가 보다. 그렇게 해서 쌓인 그의 원고는 버그 컬렉션에 등재되기도 한단다.

 

미국엔 작가의 원고를 사고 파는 딜러가 있다는데 버그 컬렉션이 등재되는 건 확실히 그 작가에겐 굉장한 자부심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난 아무리 유명한 작가가 되도(그럴 리는 없겠지만) 버그 컬렉션에 등재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컴퓨터로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써 갈 것이 때문이다. 궁금한 건 우리나라에도 이런 딜러가 있는지 모르겠다.

 

폴 오스터는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글을 쓰지 않고서는 못 사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음, 그러지 않고도 살아가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했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지금 상태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빨리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그리고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글을 써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글재주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안 해봤어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아는 만큼 더욱 힘들어집니다. 동시에, 아주 젊었을 때처럼 낙담에 빠지거나 하는 일도 없죠. 책을 쓰다가 난국에 빠져도 지금은 스스로 견뎌내는 일이 좀 더 쉬워졌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겟죠. '음, 그래. 넌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생각은 그렇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거의 아홉 달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쓰지 않으니까요.

                                                                          

                                                                       미셀 콩타와의 대화에서(209p)

 그의 이런 대화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에 누구도 자신이 걸어 가는 길을 의심없이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하물며 작가는 더 할 것이다. 폴 오스터나 하니까 그나마 미국에서 대우 받고 사는 거겠지만 그도 처음부터 주목 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작가가 되기 전 번역을 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또한 글이란 화수분 같이 항상 써야할 것으로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설혹 그렇다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글이란 쓰면 쓸수록 어렵다는 걸 실감한다. 그럼에도 그의 말처럼 낙담에 빠지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희안한 일이다. 그 옛날 나의 싸부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안에 분노가 있는가로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과 함께 폴 오스터가 답한 저 두 가지의 질문이 작가가 되는 것일까?

 

누구는 영원히 늙지 않을 예술가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틀즈, 앤디 워홀 그리고 폴 오스터를 뽑았다. 나는 비록 아직 그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명성과 그가 내놓는 책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실제 나이가 이제 곧 70을 바라본다면 말이다.

 

예술가는 꼭 젊어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사는 건 분명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독자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폴 오스터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분명 행복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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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1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1 1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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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5: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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