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진화의 역사는 대부분 남성의 관점으로만 파악했기 때문에, 여성과 관련된 사회관계는 거의 무시되었다. 초창기의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직접적인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할 수 없으면서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행동을 상투적으로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의 접근 방식은 자신들이 놓여 있던 환경에서 형성되었으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유대교 -기독교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계승한 서구사회라는 틀 안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고대부터 '인간'을 다루는 많은 책이 사실은 '남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여성이 등장 하더라도, 단지 남성과 관계가 있을 때뿐이다. 39
이 책은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선사학은 선사시대 여성을 수동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을 주도적이며 강인하고 폭력적으로 그렸는데 여기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었다고 한다. '살인자 원숭이 이론'등 남성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은 의도적이었으며 이는 효과적이기도 해서 '전쟁의 문화'라는 형식이 인류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에게) 부과되었다. 실제로 인류 화석에 남은 흔적들을 통해 관찰한 결과는 침략, 폭력, 경쟁만큼이나 협력이 생존에 유리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떠올려보면 폭력과 전쟁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서구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은 여성이 욕정의 대상이며, 남성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이런 종류의 고대 문헌에 큰 영향을 받았다. 33
여성은 욕정의 대상인 동시에 혐오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21세기에도 선사 시대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선사시대 문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큰 문제의식 없이 만들어진 불의한 구도가 시지프스 형벌처럼 과업으로 주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에도 글을 남겼지만 개인적으로 남녀의 분리가 불평등의 원인이자 강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한 찬반을 떠나 남자만 군대를 의무적으로 가는 것도 여성차별과 전쟁의 폭력성을 강화한다. 군대에서 남성들은 훈련을 통해 체력 강화와 함께 전투능력을 습득한다. 뿐만 아니라 남성 집단의식을 강화하고 여성을 성애화하는 의식을 공유하며 연대한다. 이런 경험은 군을 제대한 이후에 사회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제 '이스라엘과 하마스 분쟁'을 검색하다가 연관된 영상에서 노르웨이의 경우 2016년부터 여성도 군 징집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막사에서도 함께 생활한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오히려 성추행,성희롱 비율이 줄어들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관련 인터뷰를 찾아보니 실제 전쟁이 닥치면 남녀 분리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징집 대상자들도 막사를 남녀가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 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국방부 장관이 여성이었는데 이것도 이 나라에서는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당장 우리나라 군대에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례는 그동안의 폐쇄적이고 남성 위주인 군 문화와 관습에 많은 의문을 낳게 한다.
최근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20대 남성에게 구타당한 여성의 기사를 읽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이후로 여성들에 대한 혐오 범죄가 더 늘어나는 것만 같다. 사회 불평등의 책임을 여성에게 덮어 씌우는 각종 여혐 커뮤니티의 확산. 폭력적인 군대 문화, 법과 제도의 취약함이 여성에 대한 타자화와 혐오를 '그래도 되는 일'로 만들고 증식시키고 있다. 이제까지의 방식이 너무 많은 사회 문제를 만들고 있다면 바꿔야 한다. 눈살을 찌푸리고 외면하기를 반복한다면 이 상황은 지금처럼 오래도록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 피해는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들뿐만 아니라 이 시기를 살아가는 모두가 짊어져야만 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나름의 지옥이다. 이 지옥은 타인들과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준다. 각자가 이 지옥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그 지옥은 다른 결과를 만들고 나와 너를 이해하는 과정은 다른 결론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여태까지의 방식은 너무나 왜곡되어 있었다. 문제가 반복된다면 우리는 익숙한 방식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려 해야한다. 관점을 바꾼다면 천국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즉, 지옥을 재구성한 곳일 수도 있다.
매노스피어 커뮤니티와 백인우월주의의 뿌리에는 남성에게 있어 핵심적이고 신성한 목적이 섹스하고 번식하고 지배하는 것이라는 공통된 믿음이 있다. 그러므로 양쪽 모두의 이데올로기에서는 권력과 통제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틀에 박힌 남성성을 구현한,완전히 전능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관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애당초 남성들이 이런 커뮤니티에 가입하게 만든 절망적으로 억압적인 사회적 기준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추구해야 한다고 세뇌당하는 해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실마리다. 41
Call it heaven or hell, it was mine.
그걸 천국이라 부르든 지옥이라 부르든 그것은 내것이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오래간만에 사치를 부렸다. 이번 달은 이 책들이면 충분하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