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신령 - 김동식 작가와 함께 출판하기 2기 초단편소설집 상북중학교 편
김동식 외 10명 지음 / 북크루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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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크루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김동식 작가와 초단편소설 출판하기> 클라스 수강생들의 작품집이다. 1기 수강생들의 작품집 <하늘에서 하리보가 내려와>에 이어 이번 2기는 울산 상북중학교 학생들이 참여했다.

 

8주 동안 김동식 작가에게 작법을 배우고 각자 1편씩 짧은 분량의 소설을 완성하여 이 작품집에 실었다는데, 표제작인 ‘돼지신령’만 지도하는 김동식 작가와 수강생들이 함께 완성한 공동창작물이다.  그외는 수강생들의 작품들. 각각의 소설을 읽다보면, 10대 중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관심사에서 소재를 가져와서 구성을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드러나서 흥미롭다.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을 전에 읽었기에 이 수강생들의 작품도 비슷할 것같다고 예상했다. 내 편견이었다. 작품들은 다 다른 방향으로 개성적이었다. 단편 소설치고도 굉장히 짧은 분량이라 아무래도 구성과 반전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그런 방향으로 역량을 발휘한 작품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어떤 작품은 심리 묘사가 섬세하고 어떤 작품은 교훈적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초단편 스타일이 아니라도, 각 작가들은 이번 경험을 계기로 앞으로 자신에게 맞은 쟝르를 찾아서 능력을 펼칠 것 같다. 기대된다.  

 

책에는 작가별로 소설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말, 동료 작가의 추천글도 함께 실려 있다. 본인은 물론 다른 학생들도 서로를 작가로 인정하고 작가로서 평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학급 문집같은 성격이 아니다.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이름을 걸고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종 수식은 너무 많으나 정작 주어와 서술어 일치도 안 되는 비문을 쓴 부분이 보인다. 이런 문장이 그대로 실렸다는 것이 잠시 의아했다. 아마 이 부분은 출판사에서 작가를 존중해서 그냥 살려서 실은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책 전체에는 출판사와 글쓰기 클라스에 참여한 중학생 글쓴이들 모두 서로를 작가로 진지하게 대우하고 존중하고 있는 티가 많이 난다. 인상적이었다.  

 

'작가(作家)'는 한자로 '지을 작'에 '집 가'를 쓴다. 家는 이 쓰임에서 '집'이 아니라 '전문가'다. 앞으로 이 작가들이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길 기원한다. 이들은 '강민서 김다겸 김미성 김민주 양지은 양하진 진예빈 이주하 이찬형 한겨레'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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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간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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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자체의 힘을 보여 주어서 <요재지이>가 떠오를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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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간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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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자체보다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처음에는 읽기가 힘들었다. 완성된 단편이 아니라 소설 구성 단계에서 아우트라인을 잡아놓은 노트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의 거친 메모 부분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헛된 기대를 버렸다. 그 대신, 반기를 꿈꿨다. (9쪽)'라는 문장을 읽으면 '반기(反旗)'라니? 깃발을 꿈꾼다는 말인가? '반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가족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 앞에 놓인 서류가 그들 가족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에이즈 양성 팡정. (289쪽)' 대목에서는 식인으로 병에 걸린 것이니까 에이즈가 아니라 '쿠루쿠루 병' 아닌가? 하는 식으로 소설의 세세한 부분에서 신경이 긁혔다.

 

중간 중간 읽다가 책을 덮고 생각했다. 왜 내가 이 소설집에 거부감을 느끼는지를. 아마,,,, 창피한 일이지만 그건 내가 얼치기 먹물로 살아온 세월이 꽤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런 소설 쟝르에 대한 독서력이 전무한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 난 이 소설집에 대해 뭐라고 논할 만한 안목이 전혀 없다. 이 점을 인정하고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하기로 생각하고 다시 책을 펼쳐 보니, 

 

각각의 단편들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목에 힘 준 기교 없이 이야기 자체의 힘을 보여준다. 괴이하고 황당한 설정이 많다는 점에서, 이야기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청나라 때 포송령의 <요재지이>가 떠오를 정도다. 아아, 이렇게 멋진 소재들을 단편으로 탕진하다니! 한 편에 살 붙이고 묘사 넣고 시공간 배경 설명 넣으면 너끈히 장편 한 권은 될 수 있는데, 아까워라,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작가는 결말 직전에서 한번, 어떤 작품에서는 두번 뒤집는 반전을 맛보는 재미를 준다.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능을 가진 작가다.

 

꼭 살아남아서,우리들 중 누군가는 꼭 살아남아서 이곳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사람들은 회색이 아니었다.

- 본문 21쪽에서 인용

 

위의 인용 부분처럼, 암울한 현실을 우의적으로 돌려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희망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많은 것도 흥미롭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이야기가 있는 한, 이야기의 힘을 믿는 한 사람들은 회색이 아닌 것일까. 그러니 이야기의 힘을 믿고, 이 작가를 믿고, 그의 작품을 앞으로 더 읽고 더 기대해 볼 수밖에.

 

*** 이하는 작품집과 관련 없는 개인적 생각인데,

 

이곳에서는 누구도 서로를 돌봐주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자에게 빵을 나누지 않았다.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지상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든, 소설을 쓰던 사람이든, 이곳에서 예술은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인간들에게 있어 예술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이곳의 회색 인간들에겐 땅을 팔 수 있는 회색 몸뚱이만이 가진 전부였고, 남들도 다 그래야만 했다.
한데, 그 여인은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굶어 죽어가던 그 여인이, 또다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 본문 15쪽에서 인용

 

소녀의 노래, 피부 돌기들의 노래는 끝이 날 줄을 모르고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예정대로 다음 날 대공습은 진행되었다.

다만 한 가지, 대공습의 작전명이 바뀌었을 뿐이다.

작전명 '숭고한 희생'으로,,,

- 본문 224쪽에서 인용

 

작가가 희망과 인간다움의 상징으로 노래하는 인간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이 나는 흥미롭다. 작가는 성수동 공장의 주물 노동자였다고 한다.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대장장이다. 대장장이가 노래에 대해 쓴다니,,,,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마치 문학의 시원에 대한 이론서 속에서 작가가 걸어나온 것 같다.

 

알다시피 문학의 기원은 노래다. 고대 서사시에서 나중에 소설이 되는 서사 쟝르가 유래한다. 부족의 서사시는 샤먼이 부르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샤먼은 대장장이였다. 아놔, 도대체 이 인공지능의 시대에 어디서 이런 고대의 대장장이 작가가 나타났는지 소름 끼치게 신기할 지경이다만,,,(쓰다보니 나는 정말 얼치기 먹물같구료) 지금은 그저 그의 대장간에서 끊이지 않고 노래가 울려퍼지기를 기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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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
마이클 모퍼고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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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를 하고 글을 쓸 때, 의식적으로 서구 백인 기독교도 남성의 입장에서만 보고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거기다 더 나아가 요새는 인간이란 종의 입장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에 대해 고민 중이다. 예를 들어 전쟁사를 읽고 쓸 때, 남성 영웅 지배자 입장이 아니라 희생당하는 민중이나 여성의 입장,,, 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나는 그뿐만 아니라 전쟁에 희생된 동물들의 입장도 쓰고 싶다. 특히 전쟁에 끌려간 말들, 적군에게 죽고 아군에게 죽고(식량으로), 전쟁 끝나면 버려지는 말들의 시점에서 말이다. 

 

그렇게 보고 고르다 보니 1차 대전 배경으로 생각나는 작품이 <돌리틀 선생 이야기>와 <워 호스>다. 이하는 줄거리 요약이다. 책 읽으실 분들은 건너뛰시길.

 

아기말 조이는 6개월 때 엄마말에서 떨어져 팔려간다. 13세 소년 앨버트의 친구가 되어 농장 일을 돕는다. 앨버트 나이 15세때 1차 대전이 발발한다. 돈이 궁한 앨버트 아빠가 조이를 판다. 조이는 훈련을 받고 군마가 되어 유럽 대륙 전선에 투입된다. 적군의 기관총 부대는 한 번 전투로 영국 기병대의 1/4을 괴멸시킨다. 이제 말은 기병대보다 기마 보병의 운송 수단 역할에 머무는 시대가 되었다. 니컬슨이 사망하고 어린 워런 기병의 말이 된 조이는 탑손이라는 검정말에 의지한다. 탑손을 탄 스튜어트는 적진 돌파를 시도하다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전쟁 포로가 된다. 탑손과 조이 역시 포로가 되어 독일군 부상병을 호송하는 짐마차를 끌게 된다.  독일군은 프랑스 영토 농장의 에미릴 할아버지에게 말들을 돌봐주라고 맡겼다가 주고 가버린다. 농장 소녀 에밀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조이는 행복해하나 다시 독일군에 징발되어 이번에는 대포를 끌게 된다.

 

갑자기 전쟁이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선 것만 같았다. 탑손과 나는 전투의 무시무시한 소음과 악취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왔다. 대포를 끌고 진창길을 가기도 했다. 군인들은 우리 몸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곳까지 대포를 끌고가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우리를 재촉하며 채찍질까지 했다. 잔인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무서운 충동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 같았다. 군인들은 다른 사람이나 말들에게 애정이나 관심을 가질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다.

- 118쪽에서 인용

 

포탄 공격을 받은 조이는 철조망 사이 완충 지대를 헤매다 영국군 가축 위생병이된 앨버트와 재회한다. 앨버트는 입대 나이가 되자마자 조이를 찾으려고 자원입대한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 앨버트는 조이와 농장에 돌아갈 꿈에 부푼다. 그러나 병사들만 귀국선을 타라는 명령이 내린다. 말들은 현지 프랑스 농민들에게 경매로 넘긴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앨버트와 조이를 위해 부대원들은 모금을 한다. 그러나 경매에 이겨 조이를 산 사람은 다른 프랑스 농민이었다. 알고보니 에밀리의 할아버지. 조이와 앨버트의 사연을 들은 에밀리의 할아버지는 조이를 양보한다. 조건은 이미 사망한 에밀리를 기억해 주는 것.

 

"나는 에밀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기를 바란다네. 몇 년 안 있어 나도 이 세상을 떠날 걸세. 그렇게 되면 에밀리를 기억할 가족이 남아 있지 않아. 에밀리는 비석에만 이름이 남을 거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겠지. 그래서 자네가 고향집으로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에밀리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에밀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 부탁 들어주겠나? 그러면 에밀리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거라네. 어때, 거래가 성사된 건가?"

- 214쪽에서 인용

 

당연 거래는 성사되고, 앨버트와 조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해피엔딩.  

 

흥미로운 소설이다. 흔히들 대포의 등장으로 중세 기사들의 시대가 저물고 말의 군사적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고들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대포를 끌어야 하니까 말이 여전히 참전하게 된다. 산업 혁명 이후 기차 덕분에 보급 문제가 해결되었고 트럭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탄약이나 보급품 운반 용도로 말이 전장을 누비게 된다. 그리고 비참하게 전사하게 된다. 이런 배경 상황이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다 읽고 나니,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독일군 늙은 포병 프리드리히가 조이와 탑손에게 전쟁에 대해 말하는 아래 대사가 인상깊다.

 

“너희는 친구니까 말해 줄게. 나는 연대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야. 미친 건 다른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들은 모르고 있지. 전쟁에 참가해 싸우면서도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몰라. 그게 미친 거 아니니?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를 수 있지? 상대편이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고,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그들은 나더러 미쳤다고 하지. 너희 둘은 내가 이 어리석은 전쟁에서 만난 생명체 가운데 유일하게 이성적인 동물이야. 너희가 이곳에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도 나처럼 끌러왔기 때문이겠지. 용기만 있다면 이 길로 도망가 다시는 안 돌아올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군인들이 나를 잡아 총으로 쏴 죽일 테고,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은 평생 수치스럽게 살아야 할 거야. 난 미치광이 노병 프리드리히로 행세하며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거야. 그래야 다시 슐라이덴으로 돌아가 이 혼란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존경했던 정육점 주인 프리드리히로 돌아갈 수 있어.”

- 130 ~ 131쪽에서 인용

 

전쟁 고발 용도로도, 소년과 동물의 우정을 그린 순수한 용도로도 감동적인 소설이다. 그런데 난 조이가 인간의 말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다 알아듣는데 탑손같은 동료 말과 대화하지는 못하는 점이 이상해서 감동이 덜 온다. 이제 제대로 나이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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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운명의 캉캉
박정윤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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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까지는 그래도 우리 사회가 경제 쪽으로든 성평등 쪽으로든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살아갈 사회는 내가 태어나 자란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대, 1970~ 80년대보다 좋아지리라고 믿었다. 어른이 된  나는 세상이 더 좋아지는 데에 뭔가 기여할 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조금씩 뒷걸음질치던 세상은 다시 박대통령의 시대가 되었고, 여성들의 인권은 100여년전으로 돌아가버렸다. 영화<서프러제트>의 주인공인 모드의 시대와 나혜석의 시대로 말이다. 이렇게도 사는 게 피곤하고 절망적일 수 있을까!

 

 

백 년이 지나도 나 여사의 생각을 인정 못하는 것이 이 나라 남자들이에요. ”

- 본문 176쪽에서 인용

 

 

여튼, 이제 다시 나혜석의 삶과 시대를 읽고 고민해볼 시점이다. 그래서 골라 든 소설. 소설은  독자와 동시대 인물인 절은 여성 독고진이 은행에서 뜻밖의 연락을 받으며 시작한다. 화련이라는 인물이 독고완의 직계손에게 전해달라며 60년전 은행에 위탁한 물건을 찾아가라는 연락이었다. 물건은 나혜석의 그림,  나혜석에 대해 독고진이라는 인물이 쓴 소설, 기타 기록들이었다. 이 내용이 겉이야기이고 독고진과 윤초이가 나혜석의 삶을 재구성해가는 내용이 속 이야기이다. 소설은 액자소설식 구성으로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나혜석과 엘리제 양장점이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난 나혜석 인생 최대의 스캔들을 중점적으로 쓸 예정이오. 나혜석, 운명의 캉캉. 캉캉은 불란서어로 스캔들이라 하더군. ”

- 123쪽에서 인용 

 

개화기의 독보적 신여성으로서, 서양화가로서, 작가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나혜석의 여러 모습 중, 소설은 그녀를 몰락시킨 스캔들 위주로 나혜석의 삶을 조명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당대 남성들의 모습과 여성에게 혹독했던 시대에 대해 작가는 충실한 묘사를 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을 거의 안  읽다보니, 이 작품 자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혜석이 활약하던 시대의 문화계 인물들, 주인공이 일본 유학과 유럽 여행시 접하는 문물들, 등등 시대배경 묘사가 치밀하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일본 여성운동잡지며 영국 서프러제트 할머니 등등 깨알같은 역사 포인트가 곳곳에 있다. 저자분께서 공부를 많이 하고 성실하게 쓴 티가 나서 읽으면서 매우 재미있었다. 나혜석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본 정보가 있는 사람들도 책을 손에서 놓지못하고 한달음에  읽을만큼 흥미진진하다.

 

뜻밖에, 국문과 학부 출신들도 나혜석이나 김명순, 김일엽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여대 아닌 경우는 근대여성문학사 수업이 아예 없는 국문과도 많은가 보다. 여튼 다들 좀 이광수나 김동인 등 그 시절 유명 문인들이며 지식인들이 얼마나 동료 여성들을 이용해먹은 비겁한 자들이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또, 제발 그런 내용을 중고교 국어 문학사 시간에 학교에서 좀 가르쳤으면 좋겠다. 요새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몰라서 죄 짓는 인간들이 '초많다'( '초ㅡ다'는 작중 인물 중 윤초이의 말버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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