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멜라 1 대산세계문학총서 79
새뮤얼 리처드슨 지음, 장은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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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인쇄업자 새뮤얼 리처드슨의 첫 소설이다. 1740년에 출간되었다. 영문학사에서는 이 소설을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가치매긴다. (서구 전체로 보면 돈키호테 아닌가?)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개성강한 근대적 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전 로망스 시대의 고귀한 신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녀가 주인공이란 점도 중요하다. 그런데 뭐 말이 하녀지, 파멜라는 귀족 부인의 시녀로 일한 평민이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모시던 귀족부인과 부모님께 교육을 잘 받은 여성이므로 굳이 하녀라는 신분을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냥, 귀족 아닌 평범한 소시민계급에 속하는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귀족의 구시대적 악행과 타락에 맞서는 윤리적 시민의 사고방식, 우월성을 반영하기에 근대 소설의 시초로 보기에 좋은 요소는 다 갖춘 셈이다.

 

이 소설의 존재를 안 것은 대학시절이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난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수업을 다 들었다. 학점은 개판이었지만 난 영문학사 불문학사 독문학사를 대강 귓동냥으로 주워 들었다. 그런데, 그게 깊이깊이 머릿속에 있다가 갑자기 생각날 때가 많다. 그런식으로 이 소설도, 춘향이의 정절을 지킬 권리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귀족인 B부인의 하녀인 파멜라는 부인 사후 그녀의 아들이자 작위 계승자인 B씨의 음욕에 희생당할 처지에 놓인다. 그는 완력으로 파멜라를 강간하려고도 하고, 금전적 보상을 명시한 계약서(그레이가 아나에게 내밀었던 계약서의 원조)를 내밀며 첩으로 삼으려고도 한다. 그러나 파멜라는 주인의 요구에 완강히 거절한다. 1권에서 B씨는 완전 변사또다. 곤경에 처한 파멜라가 고향 부모님께 편지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서간체 소설이기에, 1인칭 주인공인 서술자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중년 남자가 그것도 첫 소설로 이정도 소설을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영문학사적 의의보다 내게는 당시 하층계급 여성들이 생애 한번 즈음은 거쳐 갔던 하녀라는 신분과 정조를 지킬 의무와 권리에 대한 계급적 차이 부분에 관심이 간다.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겨우 15세의 나이에 꿀리지 않고 따박따박 귀족 주인에게 말대꾸하고 훈계하는 여주인공 캐릭터, 매우 맘에 든다. 아래에 인용했다. 왕이라도 날 모욕할 수 없다니,,,, 이건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 시민의 자부심을 반영한 것일까?

 

 

하지만 감히 이 말씀은 드릴래요. 나리께서 부유하시고 지위가 높고 제가 보잘것없고 비천하지 않다면 나리께서는 절 이렇게 모욕하시진 못할 거예요.(중략) 절 그냥 내버려 주세요. 나리께서 왕이라고 해도 나리께서 하셨던 것처럼 절 모욕했다면 전 나리께 신사가 아니라고 말씀드릴 거예요.

- 본문 120쪽에서 인용

 

18세기 중반 소설답게, 설교조 영탄조 대사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 읽기 지루했다는 평이 많은데, 나는 왜 이리 이런 점이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오! 가엾은 파멜라에게 신의 축복을!" 이런 신파조 대사가 왜 이리 멋지게 읽힐까? 내 취향, 나도 모르겠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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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5
토머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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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는 테스 더비필드가 알렉 더버빌에게 강간당하고 출산, 아이 사망 후 다른 지역 대농장에 가서 일하다가 에인젤을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삼중당 문고로 여러 번 읽은 이 소설을 문학동네 판으로 읽고, 그래도 정성이 뻗쳐서 이제 민음사 판까지 읽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테스, 이 소설에 이렇게 오랫동안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까? 테스, 그녀를 알게 된 지 어언 이십 오년 여,,,, 나는 이 소설이 잊히지 않는다. 가정 선생님의 순결 교육 운운에 궁금해하며 처음 읽던 여고생 시절부터, 역사책 조금 읽은 지금까지 이 책은 읽고 또 읽을수록 신비롭다. 어릴 적부터 품었던 나의 궁금증에 답하다 보면, 나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게 된다.

 

일단, 더버빌 가문 이야기에서는 정복왕 윌리엄 시절 성립한 영국의 봉건제부터  소설 배경인 19세기 중반까지 영국 계급 관한 역사 이야기를 다룰 수 있다. 이리저리 일하러 떠돌아다니는 테스를 통해 영국 농촌의 계절 노동자, 소작농의 몰락, 서유럽의 하인 계층에 대한 이야기도 쓸 수 있다. 스톤 헨지에서 체포되는 마지막 장면과 에인젤을 처음 만나는 오월제 장면에서는 고대 신앙 관련해서 쓸 수 있다. 죽어가는 아기에게 스스로 세례를 주는 테스의 모습을 보면 여사제를 인정했던 켈트 기독교의 흔적이 보인다. 태양을 숭배하는 스톤 헨지 제단에 누워 있다가 체포, 죽음을 앞둔 테스. 태양 에너지가 주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하는 그녀의 생명력,,, 이쪽은 선사시대 태양 숭배와 관련해서 태양신이 여신이던 시절 이야기가 생각난다. 학계 전공자들은 어떻게 볼 지 몰라도, 나는 테스에게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아니 절대 인간이 죽일 수 없는 순수한 태양처녀의 모습이 보인다. 저자의 의도였든 아니든, 내겐 참으로 많은 것이 보인다.

 

,,, 그런데 능력 밖이다.  아, 테스는 찌질한 에인젤에게 과분한 여자였고 이 소설은 무식한 내겐 너무 벅차다. 이 소설은  너무도 성스럽다.

 

(이런 멋진 소설을 순결 교육용으로 왜곡해서 가르치는 꼰대들은 천벌받을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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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4
찰스 디킨스 지음, 왕은철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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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하며 검지 손가락에 침 묻혀 빨리빨리 동화책을 읽어대던 어린 시절의 버릇을 못 버려서, 완역본 고전 읽을 때면 심신이 고되다. 한 번은 주인공의 행적과 관련한 줄거리 파악에 급급해서 미친듯 읽어댄다. 주인공의 운명을 확인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다시 느긋하게 세세한 심리 묘사와 공간적 시대적 배경을 체크해가며 저자의 논평까지 즐기며 처음부터 읽는다. 그러나 이미 대강 훑어본 책이라 긴장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은 같은 책 두번 읽는 방법 대신에 처음에 청소년용 축약본으로 한번 큰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 두꺼운 원전 완역본을 세세히 읽는 방법으로 읽는다.

 

이번 독서도 그랬다. 봉건시대 시녀 제도가 빅토리아 시기 '숙녀의 말벗'이란 직업으로 변한 부분을 생각하다 갑자기 에단 호크 나온 동명의 영화가 떠올랐다. 원작을 읽어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축약본을 검색했다. 고르다 보니 이 출판사의 '징검다리 클래식'에 마음이 갔다. 이 시리즈는 아무나 대강 편역한 책이 아니라 펭귄 출판사의 정본 축약본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책 뒤에 당시 시대배경 및 관련 배경 지식 설명한 부분도 맘에 든다. 영국 신사와 조선 양반을 비교한 내용까지 있다. 아, 난 이렇게 종횡무진 발랄한 생각을 펼치는 글이 참 좋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저자 디킨스는 에스텔라에게 반해 신사가 되기를 꿈꾸는 핍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묻는다. 미스 해비샴이 인간병기 독소녀로 키운 에스텔라가 받은 유산은 결국 에스텔라를 파멸하게 만든다. 핍이 탈옥수 프로비스에게 받은 유산 역시 그를 진정한 신사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핍은 나중에야 뉘우친다. 핍은 이미 누나의 남편인 조 가저리에게서 위대한 유산을 받았음에도 몰랐던 것이다. (조의 직업이 대장장이인 것, 의미 심장하다!) 여튼, 마지막 장면에서 핍과 에스텔라가 폐허가 된 새티스 저택을 손잡고 걸어 나오는 장면은 희망적이다.

 

신사-상층 계급의 허구성, 빅토리아 시대라는 배경, 빅토리아 시대의 사랑과 결혼, 미스 해비샴과 에스텔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봉건적 요소, 감옥선 등 이시대의 유형제도,,, 등등 내가 다뤄 보고 싶은 것들이 우글우글해서 가슴이 뛴다. 머릿 속에서 아이디어가 팡팡 터진다. 아아, 디킨스 선생은 늘 나를 흥분시키누나.

 

이제, 완역본으로 읽으며 내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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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1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 L 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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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6권 중 1권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나스타사 스틸은 학보사 기자인 친구 캐서린 대신 인터뷰 대타로 나가서 재벌남 크리스찬 그레이를 만난다. 둘은 서로 호감은 느낀다. 그레이는 만 사천 달러에 달하는 초판본 <테스>를 선물하면서 자신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나 아나는 그레이에게 빠져 들어 생애 첫 성관계를 한다. 그레이는 아나에게 비공개 합의서를 제안한다. 3달간 BDSM 섹스를 하는 계약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섹스만 하며, 같이 침대에서 아침을 맞지도 않고 아나는 그레이를 만질 수도 없다. 그레이는 아나에게 졸업선물로 아우디를 선물하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아나는 이 상황이 버겁다. 계약서에 사인은 안 했지만 육체적인 사랑을 한가지씩 그레이에게 배워 간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류에 주로 등장하는 순진한 처녀와 경험 많은 부자 남자의 연애담이다. 1권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토머스 하디의 고전 소설 <테스>가 베이스로 깔린다는 점.

 

어째서 제게 위험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어째서 경고를 하지 않으셨어요?

숙녀들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들은 이런 속임수가 나오는 소설을 읽으니까요,,,,,,

- 89쪽

 

위 부분은 초판본 테스를 선물할 때 그레이가 보낸 메모다. 부자 난봉꾼 알렉 더어버빌에게 유린당한 테스가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따지는 장면이다. 그레이는 이런 식으로 아나에게 경고를 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손을 잡고 바랜 흰색의 커다란 소파로 끌고 갔다. 소파에 앉으며 나는 악명 높은 알렉 더어버빌의 새 저택을 보는 테스 더비필드 같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중략)

"난 당신을 엔젤 클레어처럼 어이없이 높은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알렉 더어버빌처럼 타락시킬 수도 있으니."

- 151쪽

 

위 부분은 그레이의 대저택에 아나가 처음 간 장면. 그리고 그레이의 대사. 아마 그레이의 이름이 화이트도 껌정도 아니고 그레이인 것이, 그레이는 엔젤도 알렉도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름 이야기 말 나온 김에 더 이야기해보자. 그레이라는 성씨에 대해서는 위에 썼다. 그렇다면 이름인 크리스천은? 나는 존 번연의<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떠오른다. 아마 우리의 크리스천 그레이 역시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아나만을 추구해야 구원받으리. 아나의 절친 캐서린, 즉 케이트의 캐릭터는 부잣집 말괄량이 딸이다. 이는 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아나의 남자 사람 친구는 호세다. 문학에서 유명한 호세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에 등장하는 돈 호세. 그렇다면 그는 아나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혼자 구애하다가 배반감에 혼자 몸부림칠 운명이다. 미리 말하자면, 나중에 아나를 성추행했다가 해고당하는 아나의 직장 상사남은 잭 하이드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그 하이드! 그렇다면 여주인공 아나는 왜 아나스타샤인가? 그 이유는 맨 밑에 쓰겠다.

 

그렇다. '내 몸의 가장 깊고 어두운 부분의 근육이 무척 맛있게도 조였다.(178쪽)' 이런 표현이 곳곳에 있어서 후끈한 성애소설인줄 알았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은근 문학적이다. 변태 소설 아니다. (아님, 이 야한 소설을 읽으며 연필 들고 이런 것 메모하는 내가 변태인가? -_- ) 이 점에 여주인공 아나의 캐릭터가 보인다. 왜 이렇게 아나가 쉽게 그레이에게 빠져 드는지. 물론 그레이는 '사람이 이렇게 잘 생겨도 법에 걸리지 않는 걸까?(197쪽)'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생겼다. '그에게서는 갓 세탁한 리넨과 비싼 바디워시 냄새가 풍겼다. 아, 취할 것만 같았다.(79쪽)'일정도로 그는 돈냄새도 팍팍 풍긴다. 늘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정도로 낭만적이며, 근무시간에 닭살 메일을 열라 보낼 정도로 애정 표현에 부지런하다. (남성 여러분, 사실 외모나 돈 보다 닭살 애정 표현이 가장 중요해요. 여자들은 비싼 선물 안 사주는 것보다 연락 자주 안 하는 것, 사랑한다는 말 자주 안 하는 것에 더 상처입어요.) 문제는 그레이가 변태이고 여자를 아프게 한 다는 것. 그런데도 아나는 그레이에게 너무도 쉽게 빠져든다. 왜일까?

 

가끔은 내게 무슨 이상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소설 속에 나오는 낭만적 주인공들과 너무 오랫동안 함께 지낸 탓에 결과적으로 이상형이나 기대치가 넘 높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도 나를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지 못했다.

최근까진 그랬지.

- 40쪽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면 벌컥 화를 내겠지. 제인 에어라면 덜컥 겁을 내겠지. 테스라면 굴복할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 347쪽

 

그건 바로 아나가 '연애를 책으로만 배웠어요' 스타일이었던 것. 이건 뭐 이 리뷰를 읽고 계신 여성 글벗분이라면 십분 이해할 것이다. 아마 당신도 문학 소녀로 자라 소설 속 사랑에 익숙해 현실의 남자에게 매력을 못 느꼈을 테니까. 어찌어찌하여 연애하고 결혼했지만 지금 당신 옆에서 고장난 냉장고처럼 코 골고 자는 남자에게서 받는 허전함 때문에 책 읽고 블로그에 리뷰 쓰며 살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이 웃긴 리뷰까지 읽게 되었을테니까! ㅋㅋ)

 

게다가 아나의 엄마는 아나 말에 따르면 '대책없는 낭만주의자'이며 현재 4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아마도 아나 입장에서는 사랑과 결혼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열심히 책 읽고 공부만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바로 대학 다니던 시절의 저입니다. 믿으셔요.) 그러다, 그동안 호세 같은 학교 남자애들 만 보다가 처음으로 성인 남성을 만났다. 그레이. 게다가 졸업을 앞둔 시점이다. 졸업이라, 이제 성인이 되어 뭔가 색다른 모험을 하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만할 때 아닌가. 영화 <졸업>처럼.

 

하지만 아나의 첫 사랑이자 첫 섹스 상대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쉽게들 '백마 탄 왕자'라고 표현하는 재벌남. 백마 탄 왕자는 결혼할 공주를 찾기 위해 백마 타고 싸돌아다닌다. <겨울 왕국>의 한스 왕자처럼 형이 많아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없기에 이웃 나라의 여왕이 될 외동 공주나 맏공주를 꼬시려 하는 것이다. 이미 상속이 확정된 장남 왕자는 결혼할 공주를 구하러 모험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왕자처럼 자신의 성에서 공주들을 맞이한다. 그래도 장남 왕자가 백마 타고 싸돌아다닐 때가 있다. 그건 사냥하거나 왕국 시찰할 때. 그때 보고 찜한 평민 아가씨는,,, 왕자의 하룻밤 상대가 된다. 혹은 첩이 된다.

 

계약 규칙

개인 관리 :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 외 다른 어떤 사람과도 성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서브미시브는 항상 품위 있고 겸손한 태도로 행동한다. 자신의 행동이 도미넌트의 품격을 곧바로 반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167쪽

 

15.22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의 명령 없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서브미시브는 도미넌트 앞에서는 항상 눈을 내리깔고 조용하고도 존경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15. 23 서브미시브는 항상 도미넌트를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며 그를 주인님, 선생님, 그레이 씨, 혹은 도미넌트가 명령한 호칭으로만 부른다.

- 267쪽

 

위의 게약서를 보라. 이건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다. 주종관계다. 과거 서양의 첩, 여자 노예들의 태도에 대한 글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이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레이는 아나와 사랑할 생각이 없으며 자신의 빨간 방, 오락실에 묶어두고 섹스만 즐기려 한다.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주인님이라 불리기를 원한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가 보기에, 아나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프린세스가 되고 신분상승할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첩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 사람은 그냥 새 장난감을 찾는 거야. 침대에서 가지고 놀고 말로 할 수 없는 일을 시킬 편리한 새 장난감. 내 심장이 아프게 죄어왔다. 이게 현실이었다.

- 312 쪽

 

아나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첫 사랑과 첫 섹스가 자신에게 열어준 새로운 세상에 눈 멀어 이런 자신의 반응에 혼란스러워 점점 힘든 길로 제발로 걸어간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아나스타샤인 것이다. 아놔~! 스타샤! 왜 그러는 거니? (이건 농담이고, 맨 밑에 아나스타샤 이름 분석이 있음)

 

물론 우리는 1권밖에 안 읽었지만 뻔히 안다. 아나의 지극한 사랑이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아나는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임을. 소설은 해피엔딩일 것임을.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의 구조에서 나는 혁명성을 느낀다. 평민 여성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는 골빈 여자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꿈이 아니라, 힘없는 평민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노예로 이용당하지 않고 대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으려는 혁명적 요구! 나는 이 점에 착안해서 자그마치 6권이나 되는 그레이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다. (진짜, 학구적 이유였다니까요! )

 

* 역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아나스타샤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다.

그렇다면 아나스타샤는 공주이지만 공주 아닌 공주인듯,,, 그런 존재인가?

하지만 난 여기서 그녀의 이름을 어원분석하고 싶다.

아나스타샤, Anastasia는 그리스어 이름 아나스타시오의 여성형이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나타샤는 나탈리아이다. 아나스타샤의 애칭이 아니다)

위로, 다시라는 의미의 ana와 서다란 의미의 stasis가 합쳐져서 부활이란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아나스타샤 스틸은 엉망진창 50가지 빛깔로 망가진 그레이를 재생, 부활시키는 구원의 여성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이름 그대로 그레이를 끊임없이 다시 위로 세우는 여성이기도 하다. (애들은 몰라도 됨) 세어보니 최대가 하루에 4번.

이 소설의 작가가 이것까지 알고 작명을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여기 쓴 이름 관련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 순전히 나의 개인적 의견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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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4-0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스타샤!
기다릴게요. 학구적인 리뷰를요!

자유도비 2015-04-04 23:29   좋아요 0 | URL
이번에 <신데렐라>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같이 쓸 예정이어서, 그레이 6권을 다 읽고 있습니다. 원작을 다 읽고 써야 안전하니까요. ^^
 
50가지 그림자 : 해방 1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 L 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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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해방 1편이다. 전체로 보면 5권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왜 1권부터 읽지 않냐고 묻지 마시라. 도서관에 예약 대기 걸어놨는데 가장 먼저 알람 문자 온 것이 이번 책이었을뿐이다. 왜 요새 자꾸 그레이에 집착하냐고 묻지도 마시라. <성과 사랑이란 색안경을 쓰고 읽는 문학 속 역사> 혹은 <여성을 위한 19금 세계사>같은 앙큼분홍분홍한 책을 쓰고 싶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나는, 단지 대중적으로 성공한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을 뿐이다.(라고 믿어주세요)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든 춘향전이든,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랑 이야기에는 분명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모든 성공한 사랑 이야기는 약자의 저항을 담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레이, 이 소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성공한 것일까? 여성 독자들이 열광할만한 무언가가 이 책에 있기에? 그 이유로 내가 대강 생각한 것이 있다. 하지만 영화만 보고 짐작한 것이기에 아무래도 전체 소설을 내 눈으로 다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런 학구적 이유로 나는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다. (라고 부디 믿어주세요)

 

이번 책에서 아나스타샤와 크리스천 그레이는 결혼한다. 꿈같은 신혼 여행을 보내지만 화재, 미행 추적, 가택 칩입, 납치 기도 등 둘의 안전을 위혐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한다. 아나에게 집착하고 통제하려드는 크리스천 때문에 둘은 자주 다툰다. 다투면 서로 벌주며 몸으로 화해한다. 더 짜릿한 자극을 얻기 위해 일부러 싸우고 화내는 것 같기도 하다. 신변 안전을 위협하는 추격 차량을 피해 과속으로 달리다 주차장에 숨어 따돌리고 겨우 한숨 돌리는 장면인데 바로 차 안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둘 앞에 닥치는 모든 위기는 섹스를 거쳐 결국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아나의 사랑 덕분에 그레이는 점차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다.

 

"나도 사랑해요 크리스천."

눈을 떠 보았더니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그의 사랑이었다. 오락실의 부드러운 불빛 아래 대담하게 환히 빛나는 사랑. 그의 악몽은 이제 다 잊혀진 듯했다. 분출을 향하여 내 몸이 점차 고조된다고 느꼈을 때, 이게 내가 원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이 결합, 우리 사랑의 증명.

"나를 위해 느껴봐, 아나."

- 본문 389쪽에서 인용

 

'그는 다시 한번 키스하며 내 명품 속옷의 얇고 고운 레이스 위로 엄지 손가락을 부드럽게 돌렸다(158쪽)'는 식으로 그레이의 재력을 덩달아 누리는 아나의 모습이 너무 자주 웃길 정도로 묘사되기는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성공한 것은 단지 여성들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과 부에 대한 동경때문만은 아니다. 대놓고 여성의 성적 욕망을 표현한 것, 그건 조금 들어간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의 힘에대한 전통적이고 오래된 믿음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가 자신의 진심만으로 한 남자를 바꿀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의 확인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약자 중의 약자가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 강자들의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소망이다. 그런데, 뜻이야 좋다만 이런 소망은 한 여자의 일생에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이 소설이야 당연 해피엔딩이겠지만.

 

뭐, 진짜 궁금한 이야기가 리뷰에 없어서 서운하신가? 알려 드리겠다. 이 소설의 성관계 묘사는 본게임보다 장면과 분위기, 과정 묘사가 더 길다. 와인을 마시고, 머리 핀 풀어주고 단추 하나 하나 풀러서 옷을 벗기는 길고 긴 문장이 잔뜩이다. 침실 쿠션 색깔이나 인테리어 묘사 부분도 만만찮다. 아마 그래서 이 소설이 내용이 없고 지루하다는 평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런 점이 '먹힌다'. 여성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여 여성 독자의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켜 주므로. 얼핏 보기에 쓸데없어 보이는 그 기나긴 과정 묘사가 여성 독자에게는 일종의 전희이므로. 또 여성의 몸을 가진 작가가 쓴 소설이어서 여성 몸 아래쪽 근육의 움직임을 세세히 표현해주어 여성의 반응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점도 색다르다. 그러나 아나의 몸에 손가락을 넣기 전에 그레이가 손을 씻는 장면은 한번도 서술되지 않는다. 이점은 맘에 안든다. 그레이, 너 여자에 대한 기본 예의가 없어. 나에게 혼나야겠구나. 오늘 밤 아나가 잠들면 빨간 방 말고 껌정 방으로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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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4-0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역시 껌정님!

자유도비 2015-04-03 10:40   좋아요 0 | URL
그레이는 오지 않고, 그레이가 탄 헬리콥터가 제 머리위로 떨어지는 악몽만 꾸었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