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3 창비아동문고 134
김정호 엮음, 김환영 그림 / 창비 / 199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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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서유기>에 꽂혔다. 어릴적에 어린이용 동화책이 아니라 꽤 두꺼운 책으로 여러 번 읽었지만 집에 있던 그 책은 완역본 정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려운 한자어가 많았고 목판화같은 삽화가 있었다. 손오공의 모험 위주 만화와 달리 알쏭달쏭 심오한 내용이 많았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꽂힌 김에, 완역본으로 제대로 읽으려고 검색해보니 만만찮은 분량이다. 문학과 지성사, 솔 출판사 본이 있다. 일단 어릴적 기억과 대조도 해 볼 겸 가볍게 워밍업 해 보려고 축약본을 다시 검색했다. 그러다 만난 책이 이 책이다.  지난번 <사랑의 학교> 완역본을 좋게 읽었기에 창비의 이 시리즈로 믿고 골랐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다.

 

줄거리야 누구나 다 아는 그 이야기이다.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수행하여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천축국에 불경을 구해오며 방해하는 요괴들과 싸우는 이야기. 이 책은 너무 손오공의 모험 위주로 축약하지 않고 알고보면 구도 과정인 완역본의 느낌을 비교적 살렸다. <서유기>를 처음 읽지만 10권짜리 완역본은 부담스러운 어른 독자에게 적합하다. 단,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을 '누런뿔 대왕'과 '흰뿔 대왕' 하는 식으로 너무 풀어 번역한 점은 어른 독자로서는 아쉽다.


읽다보니, 어린 시절에 <서유기>를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들이 착착 살아 비늘처럼 우수수 일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의문들, 또다른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아, 이렇게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내 나름 새로운 구도의 길로 또 들어서나보다. 하하.

 

* 어릴 때부터 품었던 의문

손오공은 왜 취경길에 근두운 타고 가지 않고 14년동안 걸어갔을까

손오공은 왜 돌에서 태어났을까. 그 의미는 뭘까

여자 요괴들은 왜 이리 일행들을 붙들고 결혼하려 할까

저팔계는 왜 걸어다닐까

삼장법사는 왜 이리 띨띨할까

 

* 새로 생긴 의문

고대인들이 보는 돌의 생명력?

손오공과 가보옥의 유사성

손오공과 피노키오의 유사성

화엄경, 서유기, 천로역정,,,

부처 옆에서 경전을 배우다가 왜 어떤 동물은 요괴가 되는가?

관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다니는 이유, 버들여신과 연관성?

불교를 내세웠지만 도교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위장?

서유기에서 느껴지는 연금술적 상징

취경인들이 유혹에 빠지는 상업 도시, 명대 도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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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1-27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큰애는 문학과 지성사 청소년용(?) 3권 짜리로 재밌게 봤어요. ^^

자유도비 2015-01-31 19:56   좋아요 0 | URL
그 나이때 3권짜리 서유기라니! 만두 언니댁 큰도령, 고전적 취향이 있군요!
저는 문지사 임홍빈 선생님 번역으로 10권 완역본 읽기 시작했어요.
 
호란하 이야기
샤오홍 지음, 원종례 엮음 / 글누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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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이 대지를 뒤덮으면 대지는 여지없이 얼어터졌다. 남북으로 또는 동서로 몇 자씩 또는 몇 길씩이나 얼어터지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만 되면 아무런 방향성도 없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이나 얼어터졌다. 엄동이 대지를 얼어터지게 하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수염에 얼어붙은 얼음을 털면서

"오늘은 몹시도 추운데! 땅이 다 얼어터졌더군!"

하고 말하곤 하였다.

- 본문 13쪽에서 인용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를 밑도는 지난 며칠간, 나는 이랭치랭(以冷治冷), 이 책을 찾아 읽었다. 세상에, 손등이나 볼이 아니라 대지까지 얼어터지는 추위라니! 책은, 작가 샤오홍의 고향인 흑룡강성 호란현의 겨울 강추위 묘사로 시작하여 호란하의 풍경, 풍습 묘사로 이어진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반할만한 정조의 문체이다. 이국적이면서도 고전적이다. 한시 외우기를 즐겨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인지 작가는 댓구를 사용하여 읽는 맛을 살려 준다. 3장부터는 영화 <황금시대> 앞 부분에 잠깐 나왔던 할아버지의 후원 이야기를 거쳐 호란하 사람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집안, 사합원 울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마차 모는 집의 민며느리의 죽음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냉정히 묘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구습 비판 정신을 담고 있는 루쉰의 글을 읽는 느낌이다.

 

뭐 이랭치랭 개념이라고 한겨울에 냉면 먹듯 쓰긴 했지만, 이 책이 생각난 것은 사실 강추위가 아니라 샤오홍의 생애를 담은 영화 <황금시대>덕분이다. 영화 보다가 어릴적에 해적판 중국동화집에서 호란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내가 가진 계몽사 전집 구성에는 이 이야기가 없었으니 아마 학원에서 읽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는 이런저런 전집들이 대기실 책장에 꽂혀 있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일본에서 기획해 낸 전집을 무단으로 번역해 낸 해적판 전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구성이 참 좋았다. 일본이나 중국 현대 소설도 있었다. 덕분에 내 아랫 세대들은 저작권 시효 없는 서구 명작동화만 읽게 된 반면, 나는 정말 세계명작을 읽을 수 있었으니 거참 이런 아이러니를 뭐라 말해야 하나. 불법 무단 복제 전집으로 성장한 나의 어린 시절이라니!

 

*** 사족 ***

 

나는 2006년에 나온 구판으로 읽었다. 구판 표지가 책 내용에 더 어울린다. 작가가 성인이 되어 겪은 삶을 반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 고향 호란하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어린 관찰자의 당돌함이 느껴지는 구판 표지가 책 내용에 훨씬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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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반양장)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7
로알드 달 글, 지혜연 옮김, 퀸틴 블레이크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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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윙카의 초콜릿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황금빛 초대장을 찾은 다섯 어린이. 가난한 찰리, 먹보 아우구스투스 굴룹, 버릇없는 갑부 딸 버루카 솔트, 껌 좀 씹는 바이올렛 뷰리가드, 티비 중독 마이크 티비. 이들은 굳게 문닫힌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을 견학한다. 속속 그 아이가 지닌 못된 버릇 때문에 아이는 자초한 불행에 빠지고,,,, 찰리만이 남아 공장의 상속자가 된다. 말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 더하기 소공자. 괴팍한 부자 윌리 웡카도 있으니 인물 구성은 완벽하다.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껌과 사탕과 초컬릿 서술 부분은 환상적이다. 거의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와 맞먹는다. 초컬릿이 흐르는 강이라니!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걍 수영복 갈아입고 뛰어들고 싶다.

 

그런데, 두둥!

 

나는  이 소설이 마냥 환상적이고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이 공장의 노동자들인 움파룸파족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열대에 살던 검은 피부의 난쟁이라는 설정에서, 카카오 플랜테이션 농장의 어린이 노동자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리와인드, 움파룸파족이 카카오를 급료로 준다는 말에 혹해서 공장으로 이주한 것을 보면 그 옛날 중남미를 침략한 에스파냐 침략자들도 생각난다. 서구 침략자들은 미대륙 원주민들의 문화를 다 파괴했지만 카카오 재배는 오히려 권장했다. 카카오가 현지에서 화폐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침략자들은 식민지인을 시켜 식민지를 지배할 화폐로 사용할 작물을 재배하게 한 것이다. 물론 대륙에 사치품으로 수출, 막대한 이익도 거두었지만. 설탕이나 커피보다 덜 알려져있지만 서구 제국주의 역사에서 카카오 플랜테이션이 차지하는 비중도 꽤 높다. 비서구권에서 최초로 철도가 부설된 곳은 쿠바, 카카오를 운반하기 위한 용도였다. 참 나, 애들 동화 읽으면서 이런 거 고민하다니.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데, 불편한데 어쩌란 말인가. 

 

이 동화를 놓고 한번, 성인용으로 소설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를 놓고 또 한번, 카카오의 역사를 써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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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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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를 읽을 때마다, 로체스터의 첫부인인 버사를 광녀로 처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버사의 고향 서인도제도 자메이카가 궁금했다. 그곳 여성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나같은 사람이 이미 있었다. 1890년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진 리스는 <제인 에어>의 광녀 버사의 목소리를 찾아 주는 작품을 이미 60년 전에 썼다. 작가는 웨일즈 태생 의사인 아버지와 백인 크리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크레올 문화와 역사를 몸으로 느끼고 알고 있었다.

 

소설은 버사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앙트와네트로 불리던 버사는 1830년대 서인도제도의 역사적 격랑을 겪고, 의붓아버지의 재산 덕분에 영국 귀족의 차남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결혼하게 된다. 로체스터와는 자라온 성장 환경과 성격 차이로 계속 삐걱거린다. 그녀는 이혼을 원하지만 이미 영국법에 따라 그녀의 재산은 남편에게 속해 있고, 로체스터는 이혼 대신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 영국에 데려가 다락방에 가둬 버린다는 내용.

 

제인이 아니라 버사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이기에 아래처럼 같은 사건을 묘사한 대목을 비교해 보면 소설은 더욱 흥미롭다. 버사가 손필드 저택에 방화 후 추락사하는 대목.버사 입장에서 이 사건은 방화가 아니라 해방이다.

 

나를 증오하는 사나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버사! 버사! 바람이 내 머리에 닿으니 머리칼은 마치 날개처럼 물결치며 펄럭였다. 내가 만일 저 아래 단단한 돌바닥으로 뛰어내리면 내 머리칼이 날개가 되어 나를 둥둥 뜨게 하겠지. 나는 생각했다. (중략) 버사! 버사! 이 모든 것을 나는 순간이라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듣고 보았던 것이다.

-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본문 238쪽에서 인용

 

 

정말로 덩치가 큰 여자로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여자가 거기 서 있을 때, 그 머리채가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죠. 나하고 그 밖의 몇 사람이 로체스터 님이 천창으로 빠져나가 지붕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버사!“하고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그 여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뛰더니, 다음 순간에는 포석 위에 으깨어져 있었습니다.”

- <제인 에어> 민음사, 2권 본문 379-380쪽에서 인용

 

하지만 원래 <제인 에어>에서는 그냥 광녀의 죽음이고 제인과 로체스터 결합의 방해물이 알아서 사라져 주는 정도이다.

 

나는 <제인 에어>를 비롯, 19세기의 명작 소설들이 얼마나 제국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때마다 놀란다.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작품에서조차, 영국 본토나 백인 여성이 아닌 경우에는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도. 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로체스터와의 사이에 거리감을, 대양을 본다. 하지만 실상, 제인과 버사 사이, 버사와 로체스터 사이, 그리고 저자와 독자 사이에도 넓고 넓은 거리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아닐까.

 

소설은,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지만 그다지 읽기 재미있지는 않다. 문제의식을 빼고 보면 엄청 위대한 명작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이것도, 19세기 영국식 문화에 익숙해 생긴 나의 사르가소 바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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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0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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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무렵에는 소공녀 세라가, 15살 무렵에는 <작은 아씨들>의 조가 되고 싶었다. 여고생이 된 이후부터는 제인처럼 살리라 결심했다. 가난하고 못생긴 고아 제인. 가진 것은 자존심과 머릿 속 지식밖에 없는 제인. 그녀에게 매우 감정이입을 했다. (물론 나는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국외적 제국주의는 물론, 국내에서도 여성들에 대한 억압의 국내적 제국주의를 보이던 당시 빅토리아 시대, 지참금도 없는데다 못생긴 고아 처녀의 아래와 같은 말은 얼마나 급진적인가!

 

정치적 반란을 제외하고서도 얼마나 많은 반란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동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성은 대체로 평온한 존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오빠나 동생들과 똑같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터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도 가혹한 속박, 너무나 완전한 침체에 괴로워한다는 점에선 여성도 남성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여성들이란 집 안에 처박혀서 푸딩이나 만들고 양말이나 짜고 피아노나 치고 가방에 수나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남성들의 소견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 1권 198쪽에서 인용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 2권 32쪽에서 인용

 

고용주이자 거대 장원의 주인, 귀족인 로체스터의 구애에 영혼을 지닌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맞서다 받아들이는 제인. 그의 중혼 계획이 탄로나자 아래와 같이 독백하며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는 제인.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걱정한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지금과 같이 미치지 않고 바른 정신일 때 내가 받아들이는 원칙대로 살아나가리라. ’

- 2권 60쪽에서 인용

 

그렇다, 이 소설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의식을 담고 있으며,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할 정도로 심리나 정황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아마 이 정도로 내 글을 썼어야 했을까?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이 소설이 불편했다. 로체스터의 원래 부인인 광녀 버사, 버사 앙트와네트 메이슨은 그럼 뭐가 되는 건가? 소설을 읽어보면 로체스터의 선친과 형은 가문의 재산을 장자에게 보전하고 이남이인 에드워드 로체스터에게 수입원을 보장하기 위해 서인도제도의 대농장주 딸과 결혼시킨 것으로 나온다. (역시, <백마 탄~> 이 또 나오는군) 4년간의 결혼 생활 후 그녀가 모계로부터 유전된 광기를 점점 보이기 시작하자, 로체스터가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와 감금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우연일까? 로체스터의 형이 후계자와 유언없이 급사하고 그가 선친의 영지와 백작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정신병 진단서 받아 버사를 다락방에 감금한 것이? 당시 영국에서 기혼 여성의 재산을 법적으로 권리 보장한 것은 1870년이었다. 이전까지 결혼한 아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재산은 무조건 남편에 속했다. 서인도 제도 출생인 크레올 여성 상속녀 아내의 재산과 영지를 결혼으로 손에 넣은 후, 성격이 다른 아내를 광녀로 몰아 재산을 맘껏 쓰며 순종적 정부들과 싱글생활을 즐겼던 영국 귀족남들은 당시 흔했다.

 

게다가 <제인 에어> 전체를 읽어봐도, 버사가 광녀인 증거가 제대로 없다. 로체스터가 찌질하게 제인에게 일러바치는 부분은 걍 성장배경이 다른 데에서 오는 성격 차이 정도다. 눈에 띄는 부분은 "성벽(性癖)'정도. 다른 책에는 색정광이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현대 이전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성은 (멀티 아니고 한 번이라도) 광녀, 혹은 마녀로 여겨진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버사가 광녀가 되어 다락방에 갇힌 것은, 버사의 성격이나 언행, 그녀의 크레올 혈통을 혐오하는 백인 귀족 영국 남성의 횡포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이야기를 쓰면 그 멋진 고전 <제인 에어>를 망쳐 놨다고 또 나는 욕을 먹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제인보다 버사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화려한 승자보다 구석진 다락방의 패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내 천성이다. 영국 여성의 권리는 외치면서 식민지 서인도 제도 여성의 삶은 외면하는 것, 그녀들을 엑스트라 정도로 소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이 누리는 사랑놀음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이라는 것도 봐야만 한다. 내게는 보이고, 그래서 나는 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의 힘은 대단하다. 삼중당 문고로 읽던 25년전도 아니건만, 지금도  그 나쁜 새끼 로체스터의 이런 대사를 읽으면 나는 어느새 이 작품을 처음 읽던 10대 소녀가 되어 버린다.

 

“내게로 와요, 이젠 송두리째 내게로 와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의 뺨에 뺨을 맞대고서, 말할 수 없이 그윽한 목소리로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 2권 36 ~37쪽에서 인용

 

아, "송두리째 내게 오라"니! 아마 이런 말을 듣게되면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다른 편 귀까지 갖다 대면서 한 번 더 말해달라고 그에게 조르겠지. 그런 거였다. 광녀는 손필드 저택 다락방이 아니라 내 머릿 속에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제인과 사랑의 열정에 몸달아 있는 버사는 한 여자의 두 모습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똑똑이와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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