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무렵에는 소공녀 세라가, 15살 무렵에는 <작은 아씨들>의 조가 되고 싶었다. 여고생이 된 이후부터는 제인처럼 살리라
결심했다. 가난하고 못생긴 고아 제인. 가진 것은 자존심과 머릿 속 지식밖에 없는 제인. 그녀에게 매우 감정이입을 했다. (물론 나는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국외적 제국주의는 물론, 국내에서도 여성들에 대한 억압의 국내적 제국주의를 보이던 당시 빅토리아 시대, 지참금도 없는데다 못생긴 고아
처녀의 아래와 같은 말은 얼마나 급진적인가!
정치적 반란을 제외하고서도 얼마나 많은 반란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동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성은 대체로 평온한 존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오빠나 동생들과 똑같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터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도 가혹한 속박, 너무나 완전한 침체에 괴로워한다는 점에선 여성도 남성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여성들이란 집 안에 처박혀서 푸딩이나 만들고 양말이나 짜고 피아노나 치고 가방에 수나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남성들의 소견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 1권 198쪽에서 인용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 2권 32쪽에서 인용
고용주이자 거대 장원의 주인, 귀족인 로체스터의 구애에 영혼을 지닌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맞서다 받아들이는 제인. 그의
중혼 계획이 탄로나자 아래와 같이 독백하며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는 제인.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걱정한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지금과 같이 미치지 않고 바른 정신일 때 내가
받아들이는 원칙대로 살아나가리라. ’
- 2권 60쪽에서 인용
그렇다, 이 소설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의식을 담고 있으며,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할 정도로 심리나 정황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아마 이 정도로 내 글을 썼어야 했을까?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이 소설이 불편했다. 로체스터의 원래 부인인 광녀
버사, 버사 앙트와네트 메이슨은 그럼 뭐가 되는 건가? 소설을 읽어보면 로체스터의 선친과 형은 가문의 재산을 장자에게 보전하고 이남이인 에드워드
로체스터에게 수입원을 보장하기 위해 서인도제도의 대농장주 딸과 결혼시킨 것으로 나온다. (역시, <백마 탄~> 이 또 나오는군)
4년간의 결혼 생활 후 그녀가 모계로부터 유전된 광기를 점점 보이기 시작하자, 로체스터가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와 감금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우연일까? 로체스터의 형이 후계자와 유언없이 급사하고 그가 선친의 영지와 백작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정신병 진단서
받아 버사를 다락방에 감금한 것이? 당시 영국에서 기혼 여성의 재산을 법적으로 권리 보장한 것은 1870년이었다. 이전까지 결혼한 아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재산은 무조건 남편에 속했다. 서인도 제도 출생인 크레올 여성 상속녀 아내의 재산과 영지를 결혼으로 손에 넣은 후, 성격이 다른
아내를 광녀로 몰아 재산을 맘껏 쓰며 순종적 정부들과 싱글생활을 즐겼던 영국 귀족남들은 당시 흔했다.
게다가 <제인 에어> 전체를 읽어봐도, 버사가 광녀인 증거가 제대로 없다. 로체스터가 찌질하게 제인에게
일러바치는 부분은 걍 성장배경이 다른 데에서 오는 성격 차이 정도다. 눈에 띄는 부분은 "성벽(性癖)'정도. 다른 책에는 색정광이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현대 이전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성은 (멀티 아니고 한 번이라도) 광녀, 혹은 마녀로 여겨진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버사가 광녀가 되어 다락방에 갇힌 것은, 버사의 성격이나 언행, 그녀의 크레올 혈통을 혐오하는 백인 귀족 영국 남성의 횡포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이야기를 쓰면 그 멋진 고전 <제인 에어>를 망쳐 놨다고 또 나는 욕을 먹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제인보다 버사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화려한 승자보다 구석진 다락방의 패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내 천성이다. 영국 여성의 권리는 외치면서
식민지 서인도 제도 여성의 삶은 외면하는 것, 그녀들을 엑스트라 정도로 소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이 누리는 사랑놀음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이라는 것도 봐야만 한다. 내게는 보이고, 그래서 나는 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의 힘은 대단하다. 삼중당 문고로 읽던 25년전도 아니건만, 지금도 그 나쁜 새끼 로체스터의 이런
대사를 읽으면 나는 어느새 이 작품을 처음 읽던 10대 소녀가 되어 버린다.
“내게로 와요, 이젠 송두리째 내게로 와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의 뺨에 뺨을 맞대고서, 말할 수 없이 그윽한
목소리로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 2권 36 ~37쪽에서 인용
아, "송두리째 내게 오라"니! 아마 이런 말을 듣게되면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다른 편 귀까지 갖다 대면서 한 번 더
말해달라고 그에게 조르겠지. 그런 거였다. 광녀는 손필드 저택 다락방이 아니라 내 머릿 속에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제인과 사랑의 열정에 몸달아 있는 버사는 한 여자의 두 모습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똑똑이와 미친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