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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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

 『죽음의 중지』는 새해부터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기를 내걸며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원과 연금, 보험 문제 등이 떠오르면서 이 불멸의 삶은 국가의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 현상을 재앙으로 여길 때쯤, 다시 죽음이 찾아온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소설의 첫 부분이다. 첫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주제 사라마구가 다루었던 익숙한, 그러나 가혹한 주제들, 즉 삶과 죽음의 문제, 종교와 타락의 문제, 정부와 국민의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소설의 죽음이 멈춘 상황을 다방면으로 바라본다. 누군가에게는 기쁜 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슬픈 일이 될 수도 있는 죽음의 중지. 나는 이 부분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라마구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나는 죽음의 기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죽음이 몸이라는 감옥에 구속되어 있는 영혼의 해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혼은 영원히 몸의 족쇄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만약 몸이 폭탄이나 화학 물질에 산산조각이 난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일까? 즉, 죽음의 반댓말이 반드시 삶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라마구는 죽음의 중지라는 상황을 통해, 죽음의 중지와 삶의 중지를 구별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천국과 지옥

 신기한 것은 이 현상이 포르투갈 국가 내에서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는 정상적으로 죽을 사람은 죽는다. 국가 내에서도 짐승이나 식물은 죽고, 사람만 죽지 않는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은 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만약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신에게 나아갈 수 없게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천국 혹은 지옥이 될 터인데, 세상은 과연 천국일까, 지옥일까? 사라마구는 거리낌 없이 대답한다. 만약 아무도 죽지 않고 이 땅 위에 생존한다면, 그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분명 생지옥일 거라고.

 

 『죽음의 중지』에서 가장 불행하게 된 사람은 바로 성직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신을 섬길 이유가 사라졌다. 누구도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이 처절하게 종교적 논쟁을 하는 부분은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신이 사라진 세상, 그 곳은 과연 행복할까? 신이 사라지면, 역설적으로 자유가 사라진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 분명하니까. 신은 통제자가 아니라 자유의 근원임을 모르고........ 그들으 그저 현재의 상황에 기뻐할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신을 버린 그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어리석은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

 눈이 머는 전염병, 진실의 요구, 이름 없는 자에 대한 추적, 그리고 죽음의 파업. 세 번째 사례를 제외한 모든 일에 정부가 개입한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감염자들을 격리 수용하고, 두 번째 사례에서는 의사의 아내를 추적하고, 마지막 사례에서는 국경선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하다가 결국 마피아의 손을 빌리면서까지 사태를 막으려고 한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이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결국 그들의 조치와 정책 모두가 국민들을 슬픔과 절망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이것이 사라마구 소설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판 의식이다. 만약 이것을 볼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사라마구의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인 국민, 개인이라는 것을.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를 관통하는 주인공, 의사의 아내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의 추적자인 주제 씨, 그리고 『죽음의 중지』의 죽음. 이제부턴 두 번째 부분이다.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죽음'이라는 이름의 여인. 이제 소설의 흐름은 시간을 거스른다.

 

 죽음을 극복한 사랑

 죽음을 극복한 사랑, 이것이 이 소설의 진짜 주제이다. 그는 이 주제를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죽음을 아름다운 여자로 형상화시킨 이후, 마치 신처럼, 그녀에게 인격성을 부여한다. 그녀는 언제 죽을지를 알려주는 자주색 편지를 한 첼리스트에게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첼리스트를 사랑하여 결국 편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죽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그 다음 날부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라마구는 이 줄거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죽음이 어떻게 사랑에 굴복하게 되었는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사실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사랑이 이야기를 이끌지 않았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연민과 책임감의 사랑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는 이유 없는 사랑이, 『죽음의 중지』는 죽음을 뛰어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녀는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죽음을 멈추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사라마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삶에 관해 말하고 있다. 얼마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국경선을 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살았는지 세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 사람들 안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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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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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터 아일랜드>는 단연코 큰 충격이었다. 디카프리오의 마지막 대사, 그리고 절벽에 떨어진 듯 의문스럽게 끝난 결말은 나에게 여전히 생생한 당혹감으로 남아 있다. 영화의 충격이 가신지 수 개월이 지난 후, 나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셔터 아일랜드>의 원작인 『살인자들의 섬』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소설을 읽었다. 전개 및 결말은 영화에서 이미 확인한 터였으나 책장을 덮은 지금도 이 작품의 결말은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아마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는 비평가들은 이 소설의 내용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인자들의 섬』은 '셔터'라 불리는 섬을 배경으로 한다. 이 섬에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병동이 있으며 간부들이 이 병동을 관리하며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연방보완관인 테디 대니얼스는 우연히 만난 처크 노리스와 함께 행방불명된 환자 레이첼 솔란도를 찾기 위해 이 섬을 방문한다. 그러나 수사를 계속하던 도중 테디는 이 섬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뇌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롯한 비밀들이 있음을 눈치채고 위험을 무릅쓰며 섬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영화, <셔터

아일랜드>.

 

 그러나 소설 안에 몰입한 독자는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테디 대니얼스인가, 아니면 앤드루 레이디스인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의 단서도 아니고, 암호의 해독도 아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밝히지 않는다. 둘 다 진실이거나(이것은 불가능하다), 둘 다 거짓이거나. 병원의 속임수이거나, 아니면 테디의 망상에 불과하거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테디가 뇌실험을 받기로 결정한 뒤에도.

 

 어떤 훌륭한 소설은 언제나 그 전에 존재했던 위대한 명작이나 사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법이다. 아마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노린 듯 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불확실함의 가능성을 가진 모든 것들을 부정하였고,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은 결코 거짓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살인자들의 섬』을 보면, 테디의 생각은 철저한 조작과 약물에 의해 분해되고 만다. 치밀하게 짜여진 게임 때문에 독자조차 그 진실을 헤매고 만다. 과연 생각이 언제나 나의 진실을 입증해 주는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

한다"는 산산히 짓밟히고 만다.

 

 테디의 생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꿈'과 '기억'뿐이다. 그러나 약물과 조작에 의해 그의 꿈과 기억조차 왜곡되고 만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치료뿐이다. 그 치료가 끝나면 그의 정체성은 단 하나로 요약된다. 앤드루 레이디스, 2년 전에 세 아이를 죽인 레이첼 솔란도를 살해하고 자신이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위험성 범죄자. 이제 더 이상 그는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괴로워할 이유가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셉션>의 림보와도 같은 것이며, 그저 그의 바램일 뿐이다. 현실은 후자와 같다. "선량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괴물로 살 것인가?" (<셔터 아일랜드> 마지막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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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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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타나베, 그는 단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다. 상실의 시대에, 노르웨이의 숲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방황한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가 그것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거의 잊고 있었던, 와타나베의 '회상' 이야기는 단지 회상에 끝나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어떤 상호교류를 맺고 있는지 저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호기심과 불확실함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의 매력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대립적인 이미지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즐거움과 교훈들이다. 우선 와타나베는 과거 속으로 파고들며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과거의 조각들을 연상해 간다. 그 과정은 규칙이나 의미가 없는 나열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규칙성과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건과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가즈키, 나오코, '나',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허물없는 우정은 가즈키의 부재로 인해 어색하고 불안정한 만남으로 바뀌게 된다. 비록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가즈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그것이 발목을 잡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하루키는 '상실'의 아픔이 얼마나 무서운지(그것이 또 다른 상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숲 속에서 그가 아픔만 앓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도심 속에서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나오코와 완전히 다른 여자이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일종의 치유였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먼저 접근한 이후, 자신의 모든 감정과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며, 마찬가지로 와타나베의 삶과 감정 속에 파고들려고 한다. '나'의 입장에서 쓰여진 『노르웨이의 숲』은 그 과정을 유쾌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제 3자인 나로서는 와타나베의 바람기로 보인 감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서로의 순수함을 지켰고, 깊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관계도 미도리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은연 중에 두 여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 모두 아니었다. 두 여자는 거의 모든 것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관계였다. 나오코는 이미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미도리는 그것을 쾌활한 분위기에 감추어 언급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오코가 요양해 있던 병원에서 와타나베와 만난 레이코라는 여자는 이 소설의 가장 신선한 충격이 아닐까 싶다. 나가사와 선배가 항상 와타나베와 함께 하려 하지만 주인공의 근처를 맴돌기만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면, 레이코는 만난 그 순간부터 끝까지 그의 마음 속으로 바로 달려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레이코는 또 다른 와타나베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인데, 와타나베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를 바로 이해한다. 이 보이지 않는 능력이 『노르웨이의 숲』의 또 다른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사실일 것이다.

 

 그 유명한 대사,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은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하나의 비유일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하루키는 설파하고 있다. 어떤 이가 한 남자의 진정한 친구인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가즈키인가? 항상 그와 어울리려고 하는 나가사와인가? 사랑하지만 상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오코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와 공유하려고 하는 미도리인가? 아니면 공감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레이코인가?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각자의 인물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청춘인 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바로 나 자신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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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나종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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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같은 책들은 소장하고 싶어하고, 또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에서 유엔의 새천년선언까지 인류의 인권사를 선언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페이지는 1500쪽을 상회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영한대역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인권선언들을 한 편씩 읽어보면, 어느새 오늘날 우리가 보장받는 혜택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의 잘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대헌장 이전의 영국은 의회나 국민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사를 진행하는 국왕으로, 일부 특권층만 잘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평등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헌장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다음, 인권은 점점 발달해간다(그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대헌장의 시초가 된 영국을 예로 들면, 마그나 카르타로 의회와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은 이후,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는 인권선언이 등장했으며 이는 미국과 프랑스로 이어져 미국 독립 선언과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시초가 된다. 인권선언의 내용은 현대로 갈수록 중복된다. 이것은 한 번 선언한 것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사람들간의 합의이다. 즉, 이 선언들은 불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항도 삭제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추가로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것을 종합한 것이 바로 '빈 선언'과 '새천년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52가지의 인권선언들 중 낯익은 선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원래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거대하고 장엄한 책 안에서는 그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은 책의 거의 중간에 위치해서 약간 단절된 듯한 과거의 선언과 현대의 선언을 이어준다. 이 다리 덕분에 우리는 세계인권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을 시작으로 노예제 폐지, 노동자들을 위한 선언, 어린이의 권리선언,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선언, 여성의 평등에 관한 권리선언,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선언, 그리고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선언.......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한 나종일 선생님도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익숙한 내용이 등장하여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왜 그들이 이렇게까지 중복을 하며 강조하는가? 그것은 선언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언은 하나의 약속이자 다짐일 뿐이다. 선언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엔의 새천년선언을 우리가 지켰다면 지금쯤 지구촌은 전쟁없고 차별과 가난이 없는 지상낙원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13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52개의 선언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찾았다. 그것은 선언 이전에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행동이 없었다면 선언도 없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말할 권리가 없다. 프랑스 국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시민의 권리를 부르짖었는가? 미국이 영국과의 분열 없이 독립 선언을 했는가? 영국이 국왕과의 전쟁 없이 의회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했는가? 이제 움직일 차례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선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현재의 선언을 지켜야 한다. 이 인권사는 곧 선언의 역사이다. 우리의 행동은 곧 선언으로 기록된다. 앞으로 이 선언의 역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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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페르노 2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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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이 댄 브라운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동안 『천사와 악마』나 『디지털 포트리스』로 대표되는 댄 브라운의 작품들이 다양한 매체를 타고 나에게 다가왔지만, 그 때마다 나는 망설였다. 두 권으로 나뉘어진 까닭에 필연적으로 생긴 가격의 부담뿐만 아니라 이 저자 역시 대중적인 통속 작가의 일부일 뿐이라는 선입견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트 심벌』 때 많이 흔들렸지만, 그 때도 나는 나의 주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가는 어떻게 해야 내가 자신의 소설에 끌려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불멸의 서사시『신곡』을 쓴 단테를 매우 좋아했고, 그를 더 알기 원했다. 그런데 댄 브라운이 '단테'를 소재로 한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 『인페르노』를 쓴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고, 결국 댄 브라운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댄 브라운은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술자는 그저 서술자의 역할만 충실할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는다. 한 마디로, 나는 로버트 랭던을 따라가느라 서술자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몰입감 아니겠는가? 나처럼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거나 낯선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책 속에 빠져들게 하다니. 그의 능력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댄 브라운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그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댄 브라운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 로버트 랭던의 세계로.

 

 그러나 원초적으로『인페르노』에 접근한 것은 단테 때문이 아닌가? 저자는 마치 그의 흔적을 뒤따라가는 서술 방식을 사용한다. 단테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 남긴 유산, 그가 살았던 장소, 그에게 뜻깊었던 공간 등을 하나하나 훑는다. 『인페르노』는 단순히 랭던과 시에나의 도주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과 그의 삶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하는, 일종의 단테 안내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단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설 속에서의 독특한 시구 해석, 들어보지도 못한 단테 유적지 등을 보고 나니 사실 나는 그 시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론적으로, 『인페르노』는 단테의 세계와 댄 브라운의 세계가 공존한다. 단테의 '지옥'은 엄청난 상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생사를 위협하는 화학물질의 위치는 그 거대한 지옥 속에 숨겨져 있다. 추격, 도주, 사랑, 배신, 오해, 화해, 희망이 오고가며, 우리는 단테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사실 그는 지옥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연옥과 천국의 행복만을 노래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랭던은 마치 단테처럼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인도자 시에나, 즉 베르길리우스를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변화되었다. 아니, 시에나는 오히려 베아트리체를 연상시킨다.

 '이곳, 이날로부터 세상은 영원히 변했노라.' 랭던이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 후부터,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댄 브라운은 수많은 은유와 에피소드를 담아 나와 랭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인류에 대한 색다른 해석, 역사의 특별한 분석도 매우 인상깊었다.

 

 당분간 이 지옥 이야기, 아니 희망의 노래는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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