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이슬람 전쟁사 - 패권을 두고 격돌한 1400년의 대립
레이먼드 이브라힘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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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교도가 벌인 학살과 만행이 이렇게 공공연히 기록될 거라고, 신도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무하마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계시를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경전을 제작했고, 인간 본연의 탐욕을 감춘 지하드(성전)의 뜻에 따라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정복하고, 약탈하며, 노예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벌인 잔혹한 처형과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여기에 낱낱이 고하기도 어렵다. 책장 어디를 펼쳐도 그들이 벌인 실태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수백 년을 관통하는 전쟁사에서 한결같은 태도로 패자들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슬람의 진실을 엿본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은 말로 차마 담아낼 수 없다. 수많은 전쟁과 공격 속에서 교리의 근본은 잊히고, 폭력과 복수의 굴레만 남았다. 책이 간행될 즈음 개시된 이란-미국 전쟁도 넓게 보면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의 대립이니, 이들의 잔혹한 전쟁사는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이 전쟁의 끝은 어디인가? 기독교도인 나는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히 죽어 나간 영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으로 쓰리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총칼을 겨누어야 하는 현실이, 사랑의 가치가 전쟁 앞에서 참혹하게 짓밟히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 나는 편의 속에서 성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데, 이것조차 온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기독교-이슬람 전쟁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슬림의 잔혹함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는 했으나, 그 원정을 완벽히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기독교도들을 사람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무슬림 전사들에 대한 원망이 들기도 하지만, 그 감정을 현재의 이슬람교도에게 이입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분명히 다른 존재이고, 구원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다. 선조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든, 심판은 그들의 몫이고, 지금이라도 회심하고 평화를 외치면 좋겠다. 물론 반대편에 서 있는 기독교 국가들도 무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먼저겠지만.


 나에게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임을 다시 한 번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민족 역시 내전을 겪었고, 그 때의 참상을 익히 들어 왔지만, 이념과 종교는 때로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도 허락해 버리고 만다. 다르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고, 타협하지 않았기에 고문 당해야 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겠는가? 전쟁에 승자가 없다는 말이 납득이 간다. 패자는 주검이 되고, 승자는 인간성을 상실한다. 처음에는 지하드에 참여한 전사들도 의심 반, 신념 반으로 시작했겠지만, 전투가 반복될수록 그들의 마음은 왜곡된 두려움으로 물들었으리라. 이교도로 낙인 찍히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는 그 태도가 타인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음을 잊어 버린다. 인간성을 잃은 자들은 폭력과 범죄를 반복할 뿐이다. 그것이 죄에 묶인 인간의 종말이다.


 한편으로, 거대한 희망이 되는 것은 이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개종을 하지 않으면 숱한 차별을 견뎌야 했으나, 같은 지역에서 1300년 동안 믿음을 지킨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에 앞장 선 이들은 잃을 것이 없어서, 복수심에 불타서 떠난 자들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과 전혀 연식도 없던 영주들이었다.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자들이 신과 자신에 대한 이웃의 사랑에 이끌려 사지로 향했다. 또한, 수 세기 동안 기독교도들에게 온갖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준 이슬람교도에 대해, 그들의 복수는 자비롭다. 원수와 똑같은 방식의 만행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분량의 대부분을 이슬람교도가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해 기독교도인들을 탄압하는 데에 할애된 이 책을 읽는 내내, 끝내 그리스도가 승리하심을 더욱 확신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을 짓누른다 한들, 폭력과 만행으로 그들의 인간성을 앗아간다 한들, 예수님의 사랑은 끝내 이어진다. 그리고 앞으로도 용서의 물결은 계속될 것이다. 그제야 이 읽고 싶지 않았던 역사가 일어났던 이유를 조금은 납득한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그분의 거룩함과 신실함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역사가의 시선에 따라 각도가 달라질언정,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남은 자의 몫은 기억할 수 있는 만큼 기억하는 것이다. 패배가 확실하게 되던 순간까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믿음의 용사들을 기억한다. 성경에서처럼 기적적인 승리는 없었지만, 그 처절한 학살의 뒤에서 참된 생명의 꽃이 피어났다.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현대 세계의 약소한 균형을 이끌어 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사를 끝낼 방법은 후손에게 달려 있다. 비극적인 역사를 반복할 텐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텐가? 정답은 정해져 있고, 거기까지의 길은 멀어 보인다. 아예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이 옳은 길이고, 유일한 정답이기에 나는 내 몸이 갈라질언정 용서를 택하리라. 내 삶이 부서지더라도 사랑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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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밝은 쪽으로 걷자
윤두열 지음 / 일레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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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무작정 간다. 내가 세우는 계획은 최소한의 방편일 뿐, 뜻대로 되는 일은 손에 꼽는다. 재미 있는 점은 상대도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의 뜻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곧 사랑이 아닐까? 그렇기에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으로 국한시키기에는 너무 방대한 것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보이는 사랑, 스승이 제자에게, 가족 구성원 간에, 신념을 공유하는 공동체(그것이 동아리, 동호회, 학회, 계모임, 교회, 부대, 혹은 그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각자 다른 사랑의 형태가 있다. 사랑은 강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중으로 결정된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어떤 이는 가족에게, 누군가는 연인에게, 작가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또 소수는 만난 적도 없는 타국의 영혼들을 향해, 정치인은 주민, 시민, 국민을 위해 많은 사랑을 투영한다. 그러므로 드러나는 것은 폭력, 증오, 다툼처럼 보여도 그것의 근본적인 원동력에는 사랑이 있다. 그 형태가 왜곡되었을 뿐이다.


 윤두열 작가는 책 서두에서 잘 모르는 이와 다짜고짜 여행을 가게 된다. 자신이 지닌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 말이다. 때로는 지나고 나서야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것저것 재단하다가는 후회라는 막대한 기회 비용이 자신의 인생을 갉아먹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일까? 다소 무모해 보이는 그 결정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존재를 형성했다. 이 에세이 속에서 그는 경험담을 늘어놓다가도 편지를 쓰고, 일기를 끄적이다가도 치열한 성찰을 보인다.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을 타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발견한다. 


 때로는 직접 밝히기도, 때로는 은밀히 고백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윤두열 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총체적인 '사랑'이다. 글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 밝은 쪽으로 걷자'는 결국 사랑을 택하라는 암시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너는 반드시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아직도 막연하다면, 고개를 돌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라. 도시에 있다면 그 치열한 움직임을, 자연에 있다면 평화로운 소리에 집중하라. 내가 누리는 여유는 사실 치열히 살아가는 누군가의 땀과 헌신의 결과이고, 그 전쟁 같은 삶의 원동력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고, 나도 조금씩 용기를 내보겠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공감했던 대표인 챕터는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가 아닌가 싶었다. 소설을 창작할 때, 검토를 하지 않고 쭉 완성하는 편이다. 처음에는 자기 작품에 취해 있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독자들을 참 곤혹스럽게 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어떤 글이든 독자들에게 편의와 유익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스스로의 만족과 위로를 위한 글쓰기도 존재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역할이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면서 모두가 고통과 행복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이라는 작가의 바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돌아본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누리면서 상대방의 고민과 감정을 헤아리는 연습, 그것만으로 인생은 참 배울 것이 많이 남았다. 그만큼, 나아질 여지도 충분하다. 우리의 행복은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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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사색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위한 40가지 묵상과 고백
노진준 지음 / 죠이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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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남기는 예배에 대한 단상. 예배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기에, 목회자 입장에서는 늘 도전이 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최전방에서 예배를 누릴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시선을 그분에게 돌릴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 동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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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다시 읽고 싶은 명작 1
A. J. 크로닌 지음, 이승우 옮김 / 바오로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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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와 사랑을 내세우는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갈등과 분열을 거쳐왔다. 다른 종교와의 싸움은 물론이요, 교단과 교파로의 쪼개짐은 필연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똑같아 보일 정도이다. 개신교도인 나는 신부(가톨릭)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소설에 이입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의 행동 원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신념도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통 가톨릭과는 거리가 멀어서, 본회로부터 도리어 이단으로 취급 받기도 한다. 편하지 않은 길을 택한 자의 삶은 늘 그런가 싶었다.


 작가는 프랜시스 치점의 삶을 죽 훑지만, 마음의 심연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독자는 그가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이미 '되어 있다'. 또한, 천국의 열쇠가 어디서 등장하는지, 천국에 가까이 도달한 적이 있는지 종잡으려고 하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특히나 선교를 떠난 중국에서 보낸 시간들은 붕괴와 재건의 반복이었다. 치점 신부가 열쇠를 찾게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드러나는 것은 시련이지만, 나는 그속에서 어렴풋이 단서를 발견한다. 천국의 열쇠란, 얽매임 없는 삶, 즉 자유에 있지는 않을까?


 자유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든 맞출 수 있는 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목표한 바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그 다짐을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종합되어야 자유는 실현된다. 프랜시스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엄격한 가톨릭의 규정에 반발한다. 남녀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순수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자연의 힘을 억누를 수 없다고 반박하는 그의 모습은 가톨릭의 근간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성(性)이라는 것을 썩어가는 시체처럼 더러운 홑이불 밑에 숨겨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수상한 짓이나 음탕한 행위를 하는 겁니다. 잘 지도해서 좀 더 건강하게 성을 인식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독사나 해충처럼 목을 졸라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실패만 따를 뿐입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만들 뿐이지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p.209)


 그는 종교가 세운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지 고민한다. 그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한다. 교단에서는 그를 파문하듯이 중국에 보내지만,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생명을 피운다. 참혹한 전쟁의 물결에 익사할 뻔했지만, 그들은 기어코 살아남는다.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가 지옥이라고 증언하며 말이다. 프랜시스 치점은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죽임 당하는 순간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바로 그 자리에 천국의 열쇠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세상의 가치에 짓눌리지 않았다. 어떠한 어려움 뒤에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확신했고, 그리하여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망가진 어린 시절의 인연들을 뒤로 한 채 생명을 구하는 일에 힘쓴다.


 프랜시스는 평생을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같은 교단에게도 말이다. 선교사로 보내졌을 때, 그는 사기 당했고, 가난했으며, 수모를 면치 못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실패한 자의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놓여져 있고, 그의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복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못할 인생을 기꺼이 자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끝에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누구도 내 삶을 질투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예수님만 내 삶에서 드러나게 하소서." 내가 부서지고 연약해 보일수록, 그러한 죄인을 이끄시는 주님의 능력은 드러난다. 이것이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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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센터처치 - 팀 켈러 목사의 30년 목회 지혜의 집대성
팀 켈러 지음, 오종향 옮김 / 두란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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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상 깊게 읽었다. 고대 철학자는 중용의 개념에 대해 매우 상세히 설명했다. 수학적으로 정확히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의 중간에 있는, 소위 말해 '적당히'를 강조했다. 사회 생활도 중용이 중요하다. 너무 튀지도, 무익해서도 안 되고, 너무 무심해서도, 지나치게 친절해서도 안 된다. 저마다의 다른 기준을 맞추어 가며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유능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팀 켈러의 『센터 처치』는 그 중용을 '교회'라는, 상당히 거대하고 어찌 보면 막연한 개념에 적용하는 대담한 책이다. "좋은 교회는 어떠한 모습인가?"에 대해 많은 목회자나 설교자가 다른 대답을 할 것이고, 그에 따라 다른 교파, 다른 형태의 교회로 나타나 왔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이것에 대한 역효과(이단과 사이비의 융성)나 교인들의 피로(대체 교단마다 무슨 차이란 말인가?)가 잇따라 온 것도 사실이다. 건물로서의 교회든, 공동체로서의 교회든, 교회를 이루어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제목에 해당하는 '센터', 즉 '중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사역의 중심에 신학적 비전을 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줄타기식 중용과는 조금 다르다. 사역이 보여지는 것,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 이면과 동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그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하여지고,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한 창조 세계 전반이 회복된다는 선언이다. 그러니 복음은 믿는 자뿐만 아니라, 아직 믿지 않은 자에게도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다. 죽음에서 피할 도리가 없던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에 대해 비종교(믿지 않음)과 종교(나를 위한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 대상을 도시에 사는 자들에 집중한다.

 

 전도와 선교는 보통 미개척 영역, 제3세계로 향해 있던 때가 있었다. 기술의 발달로 이미 많은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아직 문명이 닿지 못한 곳에 말씀이 전해지면, 사명이 완수된다고 믿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나 열심을 다하다 보니, 복음이 전파되기만 할 뿐 공중에 흩뿌려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도시에 대한 사명이 축소되고, 오해되었다. 사실 부흥이 가장 필요한 곳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인데 말이다. 이것을 깨달아도 정작 도시마다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해 팀 켈러 목사는 상황화, 즉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번역되고 적응되는 것을 주장한다. 실제로 복음은 각 문화권과 시대에 맞게 적응해왔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나, 각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상황화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을 지키는 일이다. 문화를 너무 받아들이면 자유주의 신학이 된다. 성경의 최종 권위를 문화에 기대면 안 된다. 그러나 일반 은총을 이해해야 하고, 세상 문화와 일방적으로 단절되면 곤란하다. 은혜의 복음이 참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나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세상의 문화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대항 문화를 만들고, 기꺼이 헌신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네 가지 모델을 제시하여 균형 잡힌 개선법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교회마다 다르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어느 하나의 사역에 치우치지 말 것,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를 드릴 것, 복음과 구제를 함께 할 것,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에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나아가 교파가 다르더라도 같은 신학적 비전을 공유하는 복음의 생태계를 도시에 구축하자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설교는 없으며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교회도 없다. "복음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라는 보편적 정의가 있지만, 애초에 이것을 충족하지 못하면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설교를 찾아듣거나,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교인에게 일침이 된다. 완벽한 목회자도, 완전히 성숙한 공동체도 없다. 성도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구하며, 자기 부인을 거쳐야 한다. 타인에게 의존하여 나의 죄를 씻으려는 욕망만큼 무섭고 허망한 것도 없다. 또한, 잘 알지 못하는 열방과 국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이 속한 도시 내지는 지역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성경적 명령을 올바르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현 주소는 어떨까? 어느 때보다 사역이 활성화되고, 사역의 방법론이 다양해진 시대이다. 그러나 그만큼 마음속에 신학적 비전을 새기고 살아가는 자들이 비례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내 지식으로 함부로 모든 것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뜨겁게 기도하는 것에 비해, 십자가의 무게 앞에서 도망치고 주저하는 이들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투덜대지는 않으리라. 우선 기도로써 회복을 바라리라. 그리고 나의 작은 믿음보다 다른 모든 신자들의 믿음이 더 큼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한 자세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차분히 진행하겠다.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져도 주님이 보시기에 선하시고 합당한 것이니, 그것을 믿음으로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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