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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소설 전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1. 포스트모던보이, 이상
이상(李箱)은 이상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수식어가 붙는다. '천재' 이상, 또는 '광인' 이상, 그리고 '모던보이' 이상. 모두 맞는 말이다. 이상은 천재이기도 하며, 광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모던보이이다. 그러나 나는 '모던보이'라는 수식어에서 몇 글자를 더 보태고 싶다. 바로 '포스트모던보이'이다. 모던보이란, 근대와 일제강점기 시기에 서양식 패션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상은 그런 '속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던'적인 것을 넘어선 '포스트모던'적인 인물인 것이다.
'포스트모던보이'로서의 이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그의 소설이다. 실험적 기법과 특유의 문체로도 모자라, 이상은 작품 곳곳에 외래어를 그대로 쓰거나 일본어를 사용한다.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고(여기까지는 모던보이다), 나아가 우리 문화까지 함께 수용하고 나니, 그의 단편과 장편은 맛깔나는 짬뽕이 되었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13편의 소설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그 소설들은 이상이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 소설 전집』은 이상이 게재한 시와 논문들을 제외하고, 여러 신문에 올렸던 소설들을 모아놓았다. 나는 권영민 편집자의 능력을 칭찬하고 싶다. 작품의 배치 순서를 단순하게 연도순이나 중요한 작품순이 아니라, '이상'이란 작가를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순서대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지도의 암실」부터 나와 만나게 한 것은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 단편은 이상 특유의 문체와 서술 기법,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관을 종합해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리뷰에서 이상의 13편의 소설을 일일이 검토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대신, 이상의 단편과 장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상 소설의 키워드'를 몇 개 찾아봤다. 나는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상의 작품들을 소개할 것이다. 글이 난잡해진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리라.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권, 『이상 소설 전집』의 표지다.
2. 이상 소설의 키워드 ①- '일과'
이상의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 없이, 평범한 하루에 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지도의 암실」의 경우, 리상(이상)이라는 남자의 24시간을 관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문장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그의 행동보다는 그의 의식을 추적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1936년에 발표한 「지주회시(거미와 돼지가 만난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이상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단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하루는 그것으로 마무리된다. 띄어쓰기가 거의 생략된 「지주회시」에서 중요한 것은 '거미'로 묘사되는 '나'의 아내와, '돼지'로 묘사되는 '오'다. 이상은 주인공의 일과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일과 사이에 일어난 것들에 대한 주인공의 심리를 낱낱이 밝힌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마유미를 위해 쓸 돈이 부족하자 다시 한 번 아내가 걷어차이기를 바라는 대목일 것이다.
또이십원이다. 십원은술값십원은팁. 그래도마유미가응하지않거든양돼지라고그래주고 그래도그만이면이십원은그냥뜨는것이다부탁이다. 아내야 또한번전무귀에다대이고 양돼지 그래라. 걷어차이거든두말말고층계에서내리굴러라.
'일과'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움직임이다. 만약 그것을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는다면, '일과'의 개념 역시 흐릿해지리라. 그런데 이상의 소설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고 위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그는 사건을 전개시키는가? 장편 「십이월 십이일」의 초반부는 '나'가 죽마고우 M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진행된다. 그러나 편지 소설도 아니고, 어떻게 장편소설을 편지만으로 전개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장편에는 사건이 필요하다. 이상은 그것을 깨닫고, 장편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그는 단편소설과 시로 완벽하게 전향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9년 뒤(그가 요절한지 2년 뒤), 「실화」라는 단편에서 다시 한 번 편지가 등장한다. 이 단편은 9개의 소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이상)'의 동경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편지는 친구 유정과 연이가 서울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편지다. 그러나 이상은 그로 인해 갈등을 할 뿐, 그로 인해 전개되는 새로운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상의 단편소설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보통 사람들은 "편지를 받으면 당연히 가겠다고 결정내리거나 안 가겠다고 결심하겠지"라고 생각한다(나도 보통사람이다). 하지만 '천재'이자 '광인'인 이 젊은 작가는 그 특별할 수 있는 사건마저 일과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시켜버린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계속 이렇게 부르짖는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3. 이상 소설의 키워드 ②- '의식의 흐름'
이상의 소설은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 또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주인공의 의식이 항상 등장한다. 물론, 「날개」처럼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는 독백,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도 존재하긴 하지만, 소설의 대부분은 사건이 들어갈 자리에, 주인공의 주관적인 서술이 들어선다. 이상은 3인칭 시점의 객관적 서술과 분명한 행위를 포기하고, 대신 개인의 생각과 평범한 하루로 소설을 채웠다. 그 유명한 「날개」의 내용도 별 거 없었다. 집에만 처박혀 있는 '박제' 같은 '나'가 바라보는 자신의 일상과 아내의 행위에 대한 관찰이 전부다. 후반에 작은 갈등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고 끝난다. 이쯤되면, 이상의 소설은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의 소설은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다.
'의식의 흐름'의 힘은 이미 올더스 헉슬리의 『연애대위법』과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로부터 확인한 바 있다. '하루'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와 연결시켜 하나의 '과정'으로 탈피시키는 힘이 그 속에 있다. 이 주관적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이상은 작품에 필요한 것만 골라내어 '정제된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난해한 조이스의 장편들에 비해, 더 함축적이고 깊은 의미가 이상의 단편에 들어있다. 나는 이상을 『소설 전집』으로 처음 만났는데, 벌써 그에게 반한 모양이다.
4. 이상 소설의 키워드 ③- '자기 성찰'
이상의 소설의 대부분의 주인공은 아내가 있는 젊은 남성이다. 그들은 나이가 젊고, '모던보이'인 만큼 아내와 많은 갈등을 벌인다. 그에 따라 항상 주인공은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한다. 그 방식은 말이 될 수도 있고, 행동이 될 수도 있고, '의식의 흐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자기 성찰 자체만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날개」의 주인공은 무능력하고, 「지주회시」의 주인공은 바람을 피고, 「환시기」의 주인공은 아내와 별거하고 있다. 다양한 남성상을 독자에게 보여주며, 젊은 남자들을 '자기 성찰'하게 해주고, 동시에 글쓴이 자신도 돌아보게 한다. 이상 역시 유부남이니까.
이상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들 중 하나가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 점이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단편과 장편 안에서 독자와 만난다. 「지도의 암실」의 리상, 「휴업과 사정」의 보산, 그리고 다른 소설에서 나오는 '이상'. 그는 독자 앞에서 망가지기도 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상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상은 익명의 독자 앞에서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용기 있는 태도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5. 이상과 김유정, 그리고 나의 이야기
끝으로, 이상과 친구 관계에 있는 소설가 김유정에 관한 단편, 「김유정」과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한다. 김유정과 이상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1937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했으며, 똑같이 <구인회>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상은 가족과도 같은 그를 위해 단편을 썼고, 이 작품 역시 사후에 출간되었다. 「김유정」에서 작가는 김기림, 박태원(구보), 정지용, 그리고 김유정을 소개하는데, 그는 후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벌 마구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구보' 박태원(왼쪽)과 이상의 절친인 김유정(오른쪽).
친구를 위해 작품까지 써 주고 '투사'라는 찬사를 보내는 작가, 이상. 만약 두 사람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친구 소설가로 남았을지도 모르리라. 그 점에서 나는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김유정은 이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건만........ 안타깝다.
나로서, 이상의 13편의 소설을 만났건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휴업과 사정」이다. 이상의 문체가 가장 두드러지고, SS라는 익명의 남자와 보산(작가 자신) 사이에 벌어지는 작은 신경전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상의 서술 기법과 이상의 문체도 중요했지만, 역시 모든 글에는 핵심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상은 극 중 인물을 모던보이로 설정했지만, 그 자신은 포스트모던보이였다. 모두가 죽은 사람들처럼, 원숭이 흉내만 내고 있을 때, 그 '낡은 모던'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던'으로 나아가길, 이상은 바랬던 것이 아닐까? 이상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20세기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가, 이상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