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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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

 『죽음의 중지』는 새해부터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기를 내걸며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원과 연금, 보험 문제 등이 떠오르면서 이 불멸의 삶은 국가의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 현상을 재앙으로 여길 때쯤, 다시 죽음이 찾아온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소설의 첫 부분이다. 첫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주제 사라마구가 다루었던 익숙한, 그러나 가혹한 주제들, 즉 삶과 죽음의 문제, 종교와 타락의 문제, 정부와 국민의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소설의 죽음이 멈춘 상황을 다방면으로 바라본다. 누군가에게는 기쁜 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슬픈 일이 될 수도 있는 죽음의 중지. 나는 이 부분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라마구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나는 죽음의 기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죽음이 몸이라는 감옥에 구속되어 있는 영혼의 해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혼은 영원히 몸의 족쇄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만약 몸이 폭탄이나 화학 물질에 산산조각이 난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일까? 즉, 죽음의 반댓말이 반드시 삶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라마구는 죽음의 중지라는 상황을 통해, 죽음의 중지와 삶의 중지를 구별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천국과 지옥

 신기한 것은 이 현상이 포르투갈 국가 내에서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는 정상적으로 죽을 사람은 죽는다. 국가 내에서도 짐승이나 식물은 죽고, 사람만 죽지 않는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은 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만약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신에게 나아갈 수 없게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천국 혹은 지옥이 될 터인데, 세상은 과연 천국일까, 지옥일까? 사라마구는 거리낌 없이 대답한다. 만약 아무도 죽지 않고 이 땅 위에 생존한다면, 그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분명 생지옥일 거라고.

 

 『죽음의 중지』에서 가장 불행하게 된 사람은 바로 성직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신을 섬길 이유가 사라졌다. 누구도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이 처절하게 종교적 논쟁을 하는 부분은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신이 사라진 세상, 그 곳은 과연 행복할까? 신이 사라지면, 역설적으로 자유가 사라진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 분명하니까. 신은 통제자가 아니라 자유의 근원임을 모르고........ 그들으 그저 현재의 상황에 기뻐할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신을 버린 그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어리석은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

 눈이 머는 전염병, 진실의 요구, 이름 없는 자에 대한 추적, 그리고 죽음의 파업. 세 번째 사례를 제외한 모든 일에 정부가 개입한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감염자들을 격리 수용하고, 두 번째 사례에서는 의사의 아내를 추적하고, 마지막 사례에서는 국경선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하다가 결국 마피아의 손을 빌리면서까지 사태를 막으려고 한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이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결국 그들의 조치와 정책 모두가 국민들을 슬픔과 절망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이것이 사라마구 소설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판 의식이다. 만약 이것을 볼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사라마구의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인 국민, 개인이라는 것을.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를 관통하는 주인공, 의사의 아내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의 추적자인 주제 씨, 그리고 『죽음의 중지』의 죽음. 이제부턴 두 번째 부분이다.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죽음'이라는 이름의 여인. 이제 소설의 흐름은 시간을 거스른다.

 

 죽음을 극복한 사랑

 죽음을 극복한 사랑, 이것이 이 소설의 진짜 주제이다. 그는 이 주제를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죽음을 아름다운 여자로 형상화시킨 이후, 마치 신처럼, 그녀에게 인격성을 부여한다. 그녀는 언제 죽을지를 알려주는 자주색 편지를 한 첼리스트에게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첼리스트를 사랑하여 결국 편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죽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그 다음 날부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라마구는 이 줄거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죽음이 어떻게 사랑에 굴복하게 되었는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사실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사랑이 이야기를 이끌지 않았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연민과 책임감의 사랑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는 이유 없는 사랑이, 『죽음의 중지』는 죽음을 뛰어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녀는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죽음을 멈추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사라마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삶에 관해 말하고 있다. 얼마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국경선을 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살았는지 세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 사람들 안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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