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 서로 다른 생각의 기원
EBS 동과서 제작팀 외 지음 / 지식채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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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차이는 낯선 소재가 아니다. 나는 EBS 다큐멘터리가 나오기 전에도, 또 나온 이후에도 이 두 세계의 세상을 보는 상반된 관점에 관한 글을 많이 보았다. 대표적인 예가, 고대 그리스인과 중국인의 사고관 차이이다. 고대 중국인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한 반면, 고대 그리스인은 사물 자체를 중시한다는 지문을 문제집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윤리 시간에 배우는 동양과 서양의 자연관에서도 차이는 뚜렷이 나타난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반면, 동양은 자연과 인간을 조화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이렇게 동서양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과 서』는 다양한 실험과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동서양의 비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익히 보았던 내용이고, 예상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 차이에 대한 태도이다. 이 차이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좁히려 노력할 것인가? 차이를 내버려 두면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고, 좁히려 노력하는 일은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 언어, 인종, 문화가 모두 다른데 어떻게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에 가깝다. 대표적인 예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지난 2007년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에서 발생한 총기 살인사건의 범인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 한국인들이 보여준 반응은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이 한국인들 모두의 책임이라 여기고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애도와 사과의 의미를 담은 촛불집회가 열렸다. 인터넷에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게시판이 만들어졌고 한국의 대통령은 세 차례에 걸쳐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의 잘못일뿐 한국인들이 나서서 사과할 문제가 아니니 더 이상 사과하지 말아달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p.226)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마크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한 개인의 범죄로 그 사건을 해석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공연을 하며 사과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동과 서』의 관점을 따르자면, 그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처지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가깝다(물론 피격 사건은 범죄지만).

 

  결국은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너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너도 나의 문화를 소중히 여겨달라. 이것이 동서양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너와 나는 달라. 하지만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열린 마음이 동서양이 상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까지가, 『동과 서』의 저자 김명진의 입장이었다. 물론 관용의 태도는 내가 다른 곳에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미 저자가 오해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우려했고, 또 책의 의도가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을 알지만, 나는 세상을 동 아니면 서로 나누는 이분법을 비판한다. 이분법은 위험하다.

 이분법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 동과 서, 너 아니면 나. 세상을 편리하게 볼 수 있겠지만, 결국 편협한 시선이다. 언제나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난 공간, 문턱 위에서 생각하라. 동과 서의 문턱은 위치적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문턱이란 관용을 말한다. 인종, 피부, 언어, 직업, 국적, 성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모아놓고 함께 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각자 생활하게 내버려둘까, 아니면 하나의 기준을 정해서 거기에 맞출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내 주장은, 선택에 맡기라는 것이다. 책임 역시 그들의 것이다. 문턱은 선택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과 서', '선과 악'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면, 분명 노력이 필요하다. 당신은 동쪽인가, 서쪽인가? 아니면 서쪽이면서 동쪽인가? 동쪽이면서 서쪽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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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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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 마침내 타인끼리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 수 있을까....... 모리는 자신의 죽음까지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 작은 진리들이 모여 감동이 탄생한다. 물론 나는 모리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묻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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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지만 재밌어서 밤새 읽는 과학 이야기 재밌어서 밤새 읽는 시리즈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김정환 옮김, 정성헌 감수 / 더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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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새롭게 얻은 과학 상식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과학 기술의 이면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과학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인간을 진보시키거나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과학이 주는 진정한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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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콘서트 KTV 한국정책방송 인문학 열전 1
고미숙 외 지음 / 이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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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은 좁은 길이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지만 가야 하는 길, 그 목적지가 행복임을 알면서도 과정의 고통이 두려워 꺼려하는 길, 인생에 쉽고 빠른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떈 이미 인문학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어 보인다. 그리고 후회한다. 왜 옛날에 사람에 대한 학문을 배우지 않았을까? 『인문학 콘서트』는 이러한 후회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넓은 길로 가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본래 이 도서는 KTV의 「인문학 열전」에서 글 13편을 뽑아 만들어진 책인데, 이 13편은 다양한 인물들의 주장으로 인해 제각기 존재하는 것 같지만, 마치 비빔밥처럼 한데 어우러지면서 그 자체에선 만들 수 없었던 놀라운 맛을 만들어 낸다. 이 중에 몇 가지 반찬을 골라내 본다.

 

 첫 번째는 '통섭의 길'을 제시한 최재천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통섭이란 개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본래 '통섭(consilience)'은 휴월의 저술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이것을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 지식의 재통합』이라는 책을 냄으로써 재조명되고, 국내에는 그의 제자이자 열전의 게스트인 최재천이 번역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통섭의 유래만 알 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 안 가, 생물학 박사인 그는 그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통섭은 그냥 거기 섞여 있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로 멈춘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어떤 합침입니다.

 그렇자면 삶에 어떻게 통섭을 적용해야 하는가? 그는 학교 교육을 예로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신이 배우는 과목만 공부하다 보니, 그것을 다른 분야에 조금만 응용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외국의 학생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스스로 탐구하지 않는다. 학문의 통섭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개인의 노력이 우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통섭해야 하는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길이 나온다.

 

 두 번째, '생명의 길'을 보여준 차윤정은 통섭의 방법을 보여준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는 성선설이 깔려 있어야 한다. 측은지심, '인(仁)'의 사랑이야말로 통섭으로 가는 열쇠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윤정이 말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의미가 크다.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그녀를 위한 시를 한 편 써 보았다.

 

 〈숲 속에서〉

 숲속을 걷는다.

 할머니와 함께.

 오솔길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

 아마

 나무일 거야

 

 저 나무가 무슨 나무

 은행나무

 저 나무가 은행 나무

 생명나무

 수많은 할머니들을 내려다보며

 그늘이 되어 준 할머니

 

 그녀는 죽었지만 오늘도 그곳에 서 있다

 또 다른 생명을 위하여

 이제 할머니는 없지만

 할머니가 있었던 땅에 서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저 멀리서 더글라스 전나무의 고독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하얼빈 숲에서 울었다

 높이 뻗은 나무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명을 위해 나의 양분을 공급하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내가 생명이 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인문학의 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도 가려 하지 않지만, 그 곳이 행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책읽는사회만들기' 대표 도정일 교수다. 세 번째, '인문학의 길'의 핵심 주장은 "고전을 읽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왜? 인문학은 쓸모 없어. 고전은 옛날 이야기 아니야? 도정일은 이렇게 대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평생 고민하는 문제(삶의 유한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고전은 제공한다. 그리고 당신이 고전을 읽는 순간, 과거의 기록이었던 그 책이 당신 앞에 실존하여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보여줄 것이다. 선택은 물론 당신의 몫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나는 대답해야 한다. 통섭의 길, 생명의 길, 인문학의 길. 어느 쪽으로 가든 고통이 따르게 됨을 알고 있다. 오늘날은 갈등의 세상이고, 낱생명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인문학이 점점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교의 화해와 온생명이 필요하다. 이 콘서트의 주제는 무엇인가? 콘서트를 감상한 사람이 그것을 감상만 한다면 그 사람은 콘서트를 보지 않은 것이다. 개그콘서트를 보고 유행어를 따라 하는 것도 참여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인문학 콘서트를 봤다면 인문학적 삶의 자세를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답이 나왔다.

 좁은 길로 가라. 타인을 위해 삶의 양분을 공급함으로써 오히려 생명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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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문
이윤기 지음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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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in(접두사): 한계, 문턱

 

 <참말 하느님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구나>

 

 이윤기는 윤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그의 의식에는 언제나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성찰한다. 에피소드처럼 나열된 의식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한 전제가 되고, 페이지가 더할수록, 문을 향한 달림은 빨라진다. 어디를 향한 문인가? 창세기에 묘사된, 야곱의 꿈에 나왔던 하늘의 문이다. 그 문이야말로 이윤기가 평생을 추구했던 길이요 삶이요 진리였다.

 

 도대체 이윤기, 라는 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소설가도, 번역가도, 시인도,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 나는 그를 '하늘의 문턱에 선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밖에 갇힌 자"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허물로 낙원을 잃고 밖에서 그 허물을 한하며 이를 가는 자. 열쇠가 들어 있는 낙원으로 열쇠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자. 따라서 문을 부수지 않고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는 자……." 이것이야말로 이윤기의 모습 그 자체이다.

 

 본래 『하늘의 문』은 1994년에 출간된 이윤기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담긴 소설이다. 

 

 『하늘의 문』에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다분히 투영되어 있다. 국토를 도보로 일주하려는 야망과 베트남 전 참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겪는 문화의 차이에 대한 깨달음,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 이러한 부분은 번역하듯 묘사되어 있어 자서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자전적인 면모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기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 하늘의 문으로 가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윤기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말은 늘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이 세상의 사물은 어차피 개인의 경험이라는 문맥 안에서 읽히기 마련이므로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모두 자전의 운명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때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것 역시 바른 방식이 아니다. 이윤기는 이 책 속에서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삶을, 하늘의 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바뀌어야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의 문』은 결국 고백록이다.

 

 한 마디로 이윤기는 그리스 인 조르바

이다.

 

 최근에 나는 이윤기의 딸, 이다혜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었다. 그리고 2013년에 사서 1년만에 『하늘의 문』을 완독했다. 그 동안 나는 정말로 즐거웠고, 이윤기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그를 소리꾼, 조르바, 똥폼의 사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를 '문턱의 남자'라고 부른다. 사실, 난 아직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문턱"이라는 말을 내 삶에 쓸 수 있다면, 그 때는 알게 되겠지.

 

 limin: 문턱, 경계.

 문턱: 1.문짝의 밑이 닿는 문지방의 윗부분.

 2. 어떤 일이 시작되거나 이루어지려는 무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limin으로서의 문턱: 두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문턱의 남자는, 이분법의 세상에서 벗어난 하늘의 남자, 야곱인 것이다. 헬라인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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