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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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크게 감흥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하루키의명성이 워낙 높아서 기대감이 컸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하루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실제로 들은 적이 있어서 이 책을 읽을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잡다한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보니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통해 '작가' 하루키가 아닌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게 되었다. 즉 『1Q84』를 비롯한 수많은 장편소설의 대가가 아닌, 재즈를 좋아하고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카버를 사랑하며 나와 마찬가지로 잭 런던을 따르는 일본인을 만났다. 물론 글 속에서 자신이 인기가 많은 작가라는 사실을 간혹 언급하긴 하지만 수상 소감에서조차 그는 평범한 인간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계속 반복되어 서술되는 글보다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관심이었다. 지하철 사린 사건을 최근에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고 그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된 탓도 있다. 그러나 그 재앙에 대한 하루키의 특별한 접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건 자체보다는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인생을 기록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래서 이 책에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장편소설들보다 『언더그라운드』가 더 매혹적으로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고 인간 무라카미를 만났으니, 이제 작가로서의 그의 가르침을 들어야겠다. 시스템이라는 벽에 맞서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 작가는 알의 편에 서서 지친 영혼에 빛을 주어야 한다.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으며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해야 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독자는 작가의 방에 들어오면서 무언가를 공유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 그 이야기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고 그것이 작가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의 측면을 엿보인다. 이상은 내가 동감한 하루키의 사고방식이다. 내가 소설 쓰는 법에 대한 지침서를 찾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법이다. 나는 그로부터 배울 점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하루키. 당신의 일상적인 생각이 누군가에게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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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 세 번째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3
호아킴 데 포사다, 밥 앤들먼 지음, 공경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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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게 된 마시멜로 이야기의 후속편.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마시멜로 앞에 서게 된다. 이 책은 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가이드를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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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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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정이 돌아왔다. 나는 『7년의 밤』에서 느꼈던 폭발적인 에너지와 서사를 잊지 못했고 다시 그녀의 작품을 선택했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들은 것이라고는 '전염병이 발생한 도시의 28일간의 기록'이라는 전반적인 내용뿐이었다. 그래서 작품 초반에 개와 관련된 이야기만 서술되서 다른 작품을 읽고 있는 줄 알았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화양'을 뒤흔드는 전염병은 1부의 마지막 서술자인 '수진'의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때 나는 『28』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전염병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후에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야 정유정이 전염병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8』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개, 그리고 그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생명들은 전염병의 창궐을 계기로 무너지거나 성장한다. 하지만 그들을 파멸시키거나 강하게 해 주는 원동력은 과거의 기억이다. 기준은 가족에 대한 사랑의 화신이며 그에 따라 가족을 잃은 것에 대한 증오를 방출한다. 반대로 동해는 가족에 대한 원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출하다가 가족을 비롯한 타인과 강하게 충돌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수진은 상처와 피해의식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끝내 피해자로 남았다. 윤주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달리기에 몰두하는 삶을 살다가 한 숭고한 아이의 등장으로 사랑을 깨달았다. 링고라는 늑대개는 사랑과 본능에 충실한, 시한폭탄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인 서재형이 남았다. 그의 결말이 파멸인지 성장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의 행보는 사랑의 영역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사랑은 인간만의 가치인가? 서재형의 개를 향한 강렬한 사랑이 결국은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그리고 개를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는가? 전염병으로 인해 사랑이라는 가치가 완전히 무시되고 서로를 학살하는 시대에, 여섯의 생명은 자신의 사랑을 눈밭 위의 발자국처럼 세상에 남긴다(동해의 사랑은 다소 왜곡된 면이 있지만 말이다).


 『28』의 주제인 구원의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삶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따라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도처에 머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살아남는 일에 큰 미련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 때문에 수진과 재형이 죽는 장면은 매우 숭고하게 묘사된다. 그들은 피해자와 희생양의 상징이 되었고 살아남은 기준과 윤주에게 강한 깨달음을 준다.


 『28』은 냉정하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변 인물, 가상의 29만 화양 시민들을 거의 몰살시킨다. 그들의 죽음에는 어떠한 살아나리라는 희망도 없다. 죽음에 대한 묘사는 겨울만큼 적나라하고 차갑다. 재앙의 원인인 바이러스는 원인도, 치료제도 발견되지 않은 채 미궁 속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8』은 따뜻하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구하려는 불타는 의지 때문에. 삶을 향한 열렬한 욕망 때문에. 오랜만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소설을 읽었다. 정유정의 상상력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우선 가상의 도시와 드림랜드의 구조를 치밀하게 설계하는 능력에 놀랐고 의문의 바이러스와 늑대개의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창의력에 감탄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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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소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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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렸을 떄부터 치명적인 전염병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이 사람에 의해 감염되어 고통 속에 죽는 것이 마치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총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재앙 중 하나를 역병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문명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나아가 인간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눈여겨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재앙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시하고 있으니까.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금껏 겪지 못했던 대재앙을 맞았다. 흑사병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앗아갔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은 흑사병의 기원이나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흑사병이 왜 그렇게 치명적이었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사회적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유럽인들은 전염병 이전에 최악의 대기근을 맞았거나 쓰레기장 같은 위생 시설 속에서 지냈다. 마치 페스트는 그들의 추악한 생활에 따르는 신의 처벌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각 나라마다 페스트에 대한 대처가 달랐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도덕성과 건강 모두가 무너졌지만 프랑스는 연대했고 영국은 문명을 수호했다. 유럽은 유대인을 처형하고 그 중 독일은 채찍질 고행파의 성지가 되었다. 이 책은 재앙 앞에 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고 그것에 성공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계속되었고 각자마다 다른 결과가 나타난 사실은 여전히 역사의 신비함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 전설 속에서 과정이 섞여 있겠지만 재앙의 시대를 견뎌낸 이들은 분명 성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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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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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종종 아무도 없는 폐허 속을 홀로 걷는 상상을 한다. 모든 질서가 붕괴된 종말을 목격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말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아야 하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내가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어쩌면 종말 이후의 삶은 세상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로드』의 부자가 그토록 살기 위해 투쟁한 까닭을 살펴보기 전에 작품의 제목인 로드(Road), 즉 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름 모를 두 남자는 어떤 위협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닥칠 때마다 길에서 벗어나 몸을 피했다. 남자가 '나쁜 사람'들이라 부르는 낯선 무리들도 모두 길 위를 지나갔다. 이처럼 길은 파괴된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길을 통해 목적지로 나아가고 길 위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한다. 언제나 그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만남을 이어간다. 즉 길은 두 사람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시련의 공간인 동시에 희망의 지표인 것이다.

 

 익명의 부자가 살아남으려 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잿빛으로 가득한 땅, 부식된 건물들과 녹아버린 시체들로 채워진 도시, 희망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기대를 철저히 삼켜버린 검은 바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정적의 시대이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코맥 매카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적 묘사를 통해 태양의 폭발로 인한 재앙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멸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희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은 계속 걷는다. 그것은 아마 서로를 위한 투쟁일 것이다. 만약 남자 혼자 살아남았다면 그는 길 위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남자의 힘과 행운, 그리고 타인을 향한 소년의 자비가 그들을 또 다른 희망으로 이어주었다. 이미 불조차 죽은 세상이기 때문에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득 남아 있는 자들의 삶에 대해 떠올려 본다. 우리에겐 어떻게 죽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이다. 선택은 여러 가지다. 남자의 사랑, 소년의 순수함,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들이 추구하는 가치, 이들 중 어떤 것을 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답을 창고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길 위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은 코맥 매카시가 제시한 흑백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훨씬 많은 색깔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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