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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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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원자폭탄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삶은 위대한 업적에 대한 과시나 찬란한 미래를 향한 기대보다는 과거에서 밀려오는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을 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회담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다"는 말 역시 그렇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순간,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는 이 물리학자의 업적보다는 비운에 더욱 주목한다. 핵분열은 순간적이지만, 그 연쇄반응은 한없이 길고 고통스럽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웠지만, 누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존경받는 롤 모델로 생각할까?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지만, 누구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과학은 분명 사고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넓힌다.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인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각각 생물학과 물리학에서 대담한 시도를 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생명을 만들었고, 오펜하이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의 분열과 융합이 가시 세계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들의 창조물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미약했으나, 발명가들은 인류에게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다. 이 평전의 저자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행동의 결과를 담담하게 제시한다. 그 서사시 앞에서 독자는 절로 숙연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남아 있는 자들이다. 어떻게든 교훈을 얻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핵전쟁의 공포와 위협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러니 거대한 서사는 역사에 맡겨놓기로 하자. 원자폭탄이나 미시물리학이 주는 위압감이 강해질수록, 오펜하이머의 삶이 주는 여운은 약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기억하고 싶다. 평전의 특성상, 어떤 인물의 좋은 점과 업적만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이 책에서 오펜하이머의 결함을 더 많이 발견한다. 그의 정신적, 육체적 나약함, 광기와 일탈, 편협함과 무책임(특히 가장으로서의)은 원자폭탄을 떼어놓았을 때, 오펜하이머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나는 자신의 부족한 면모를 독특한 방식으로 극복해 가는 정신을 발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기 전, 오펜하이머는 저명한 물리학 교수였다. 그가 처음부터 강의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강의는 마치 기도문을 읊는 것처럼 단조로웠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한편의 "공연"을 열었다. 드디어 음조의 변화가 생겼다. 중요한 부분일 때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는 것이 흠이었지만. 강의록이 없이 말하다 보니 꽤 더듬기도 했지만, 항상 유명한 과학자나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273쪽) 오펜하이머는 나름대로의 강의 방식을 고안했고, 이것은 그의 천재성과 결합하여 많은 제자들을 물리학의 길로 인도하며 자신의 조력자로 만든다. 저자들이 뚜렷하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페이지 너머에 실존하는 그의 카리스마와 통찰력을 엿본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어떨까? 키티는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 병으로 사망한다. 아들인 피터는 아버지의 정체를 숨기며 평범하게 살고, 딸인 토니는 연약한 자아에 괴로워하다가 마음의 고향인 세인트존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메카시즘의 광풍 및 오펜하이머에게 닥친 불운의 여파로 학계에서 추방된 동생 프랭크는 대학교에 복직을 한다. 그리고 그는 1969년에 '익스플로러토리움'(Exploratorium)이라는 과학 박물관을 설립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박물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두 형제가 예술, 정치에 몰두하며 사는 동안 배운 모든 것들이 익스플로러토리움에 집약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익스플로러토리움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해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면, 사회적, 정치적 세계 역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면 모두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892쪽)

 

 이 "모든 사람에게 권력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세워진 과학 박물관은 현재까지 계속 운영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단순히 샌 프란시스코의 작은 만에서서 유지되는 박물관 하나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세상이 멸망한 위협을 무릅쓰고 원자폭탄을 발명하려고 애썼던 이유가 동생의 염원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비롯한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남아 있는 자들은 이해하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꼭 물리학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곳에 내장되어 있는 원자폭탄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떨까? 그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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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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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망각의 반대편에 서 있다. 잊힘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 한다. 죽음은 망각으로의 지름길이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전방의 최전선에서 매일의 죽음을 목격하는 병사에게 간만의 휴가란 얼마나 달콤할까! 선전 속에서 늘 승리하는 조국의 품에 돌아가는 것, 아니 솔직해지자면 2년 만에 가족을 볼 수 있다니, 그래버가 느낄 환희란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괴된 고향과 실종된 부모였다. 그의 가족은 전쟁의 폭격 속에서 소실된다. 이야기가 경과되면서 그래버의 가족도, 그래버 본인도 망각의 물결에 휩쓸린다. 누가 그들을 기억해 줄까? 


 나는 유럽 문학이 너무도 좋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문학을 사랑하기 시작한 계기도 유럽 작가의 소설들이었다. 영국의 조지 오웰, 프랑스의 카뮈와 생텍쥐페리,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 등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읽었던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준 인상이 여전히 선명하다. 전쟁 속에서도 꽃피우는 사랑은 늘 강렬한 느낌을 준다. 역경을 뚫고 희망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레마르크가 독일 작가였다는 사실은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반전 소설의 대가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치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국적을 박탈당했다는 사실 역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와 전개는 여느 전쟁 소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생생한 묘사는 레마르크의 특기이며, 그로 인해 상실되는 인간성과 참혹함은 많은 전쟁 문학에서 봐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어놓은 전쟁의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중간 장면들이었다.『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구성은 '러시아-독일-러시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히려 그래버를 절망과 위기에 몰아넣는 공간은 전장 한복판이 아닌 그의 고향 일대이다. 특히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작정한 그래버가 그녀의 아버지가 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분은 전쟁이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독일의 시민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재 체제는 독일 군인들과 국민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동시에 피해자로 바꾸었다.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비밀 경찰에 폭로하며 전국민적 세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불편한 진실까지 고발하는 것이 반전 문학의 의무임을 생각한다면, 레마르크는 제 역할에 충실한 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삶과 망각 사이를 누비는 그래버의 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삶이란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는 부모님의 존재를 기억해야 했고, 파괴된 옛 집을 간직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의 사랑을 통해 미래를 기약하고 싶었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가 무슨 보람이란 말인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겠지만, 조국의 영광이니 총통의 인정 따위는 아무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래버에게 아이를 낳자고 설득하는 부분은 이 소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 중 하나인데, 여기에서도 그녀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아기라고! 우리가 이 전쟁에 적응한 것처럼 그 애도 자라면서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될 테지. 그 애가 태어날 세상이 얼마나 비참할지 한번 생각해 봐. (…) 평화로운 시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온통 황폐해졌고 대지는 오랫동안 독으로 가득할 거야. 그런데 어떻게 어린애를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왜?" 

 "애들을 그런 환경에 맞서 싸우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죠. 만일 현재와 같은 사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 (p. 478~479)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확고한 입장을 띤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래버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도 숨어 있다. 이번에 휴가가 끝나서 전장으로 떠나면 부모님을 잃은 그래버를 누구도 기억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가 기억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죽음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과거에 남겨두기만 할 뿐이다. 그녀는 그래버의 자식을 낳음으로써 그를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그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기억 방식은 아주 대담하고 거친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망각 대신 삶을 택했다. 그래버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듯이, 엘리자베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지켜준다.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를 지금의 삶에 끌어들이려는 빠듯한 노력이다. 나는 그래버와 엘리자베스 부부처럼 전쟁을 겪은 사람도 아니고, 큰 상실을 겪은 적도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기억해야 하는 책임감을 느낀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타인을 위해서라도, 기억의 행위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 기억이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돌이켜 볼까? 아, 우리는 기억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잊고 있었나 보다. 제목은 바뀌어야 마땅하다. 기억과 잊힘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나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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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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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번뜩이는 상상력 뒤에 당대 사회의 모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가이다. 자전적 소설인 『킵스』(Kipps)에서는 신사(gentleman) 계급의 허울을 폭로하고,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octor Moreau)은 생체 실험 및 동물 학대를 비판하며,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은 제국주의와 일상적인 삶에 매몰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의 과학적 상상력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의 유무는 어떻게 보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웰스에게 특별한 소재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아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의 본질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이다. 과학적인 장치들이 말이 되면 그 나름대로 섬뜩한 일이다. 소설 속의 일이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도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도 인간에 포함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묻고 있다. 그리핀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투명인간이 되는 데에 성공하지만, 투명화를 해제하는 법을 몰라 그대로 살아간다. 곧 그는 한계에 봉착한다. 옷을 구하지 못해 추위에 떨고, 물과 음식을 얻기 위해 곳곳을 전전한다. 사람들과 마차들은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투명인간은 그들에게 화낼 수조차 없다. 어차피 그들은 영원히 남자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투명인간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그를 유령 또는 목소리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결국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은 그리핀은 폭력을 써서 마블을 자신의 시종으로 삼지만, 마블은 끊임없이 남자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또한, 자신의 조력자가 될 것 같았던 켐프는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후반부는 켐프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투명인간의 죽음에 안심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남는다. 무엇이 그 평범한 과학자를 폭군으로 만들었을까?


 돌이켜 보면, 투명인간의 이야기는 신화에 이미 언급된 바 있다. 하데스의 모자를 쓰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플라톤이 쓴 『국가』에는 기게스의 반지를 낀 자가 투명해진다. 후자의 경우, 평범한 양치기였던 기게스가 끝내 왕국을 찬탈하는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극중 그리핀은 공포정치를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하는데, 우리가 섬뜩함을 느껴야 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웰스가 창조한 투명인간은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지만, 투명하지 않은 사람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과 언제든지 그에게 죽을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핀은 정치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살인도 불사하게 된다. 극한의 생존 위기와 사람들의 공포감이 그를 폭군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그 심리를 이용하여 마을을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음식과 잘 곳을 구하는 불쌍한 인물이 계속되는 억압을 거쳐 서로를 사냥하는 지경에 이른다. 웰스는 이러한 현대의 비극, 현대 신화를 훌륭하게 매듭 짓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다양한 매체들로부터 익히 들어온 투명인간이라는 소재, 그리고 『투명인간』이 보이지 않는 인간을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21세기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힘에 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강렬한 힘이 있다. 불완전한 시야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은 과학 소설임에도 스릴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소재의 과학적 설득력은 다소 빈약하지만, 웰스는 자신이 설정한 투명인간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사용한다. 독자는 출간된 지 120년 가까이 된 이 소설로부터 장르문학의 쾌감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 한편, 이야기와 소재의 결합만으로 논의할 수 있는 거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투명인간』은 과학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웰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어떤 컨텐츠는 참신한 소재로 시작해서 다소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실망감보다는 씁쓸함에 가깝다. 참신한 소재는 반드시 익숙한 이야기로 끝나게 되어 있다. 단지 시작하는 지점이 달라서 "이번에는 특별함을 유지하지 않을까?"라고 기대할 뿐이다. 그러나 소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이야기의 힘이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무수한 컨텐츠들이 단순한 '우화'나 '신화'로 종결된다면, 그것들은 힘을 잃는다. 왜 창작자는, 예술가는 정신적, 물질적 고난 속에서 이야기를 짜내는가? 그것이 미약하게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동기야말로 위대한 서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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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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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몇 단어를 써야 하는가?" 이것이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글을 쓰는 노동자로 일컬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런던은 끊임없이 글을 써야 했고 그 결과가 200여편의 소설들과 500여편의 기사들, 그리고 수백 통에 달하는 편지들이었다. 창작의 결과로 돈과 명예를 원없이 쌓았지만, 말년에는 약물 중독과 지병으로 고통받다가 사망한, 삶의 모든 구간에 모순과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잭 런던의 삶은 그가 쓴 『마틴 에덴』(Martin Eden, 1909) 속 주인공과 매우 유사하다. 


 잭 런던은 먼지가 아닌 재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말마따나 이루어졌다. 40년의 생애 안에서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굴을 약탈하는 해적이었다가 그 해적을 잡는 순찰대원이 되었고, 사회주의자로 오랜 기간 활동했으나 백만장자였고, 남태평양 제도를 일주하고 한국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으나 백인우월주의를 놓지 않았다. 그밖에도 금을 캐기 위해 알래스카로 여정을 떠났다가 실패한 일, 시장 선거에서 낙마한 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랑자 감옥에 수감된 일 등이 있었지만, 생애 전반을 보았을 때는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제3자의 시선에서 잭 런던을 판단할 때, 무엇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삶에서 어떤 요소가 의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 준다. "어떻게 해서 그는 글을 쓰는 노동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왜 아직도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지칭하는가?"라는 두 가지 물음을 해소해 준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은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루스를 만나기 전, 마틴 에덴의 삶은 단순하고 육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교육받지 못했기에 구사하는 언어부터 풍습까지 소위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루스를 동경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속한 세계가 곧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곳이라고 인식했다. 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마틴 에덴은 책을 마구 해치우는 것으로 지식의 갈망을 해소했다. 하지만 마틴은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무지만 확인할 뿐이었고 책에서 배우는 내용이 실제의 삶과 괴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루스의 일가와 그들이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때 그는 언제나 실망했다. 마틴 에덴이 지향하는 가치는 궁극적인 진리를 얻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이었으나 다른 이들의 마음은 시간을 적당히 때우는 소재의 별볼일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루스,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어느새 마틴의 정신을 잠식한, 지식에 대한 강박관념과 잠재적인 특권의식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에덴은 스스로를 노동자의 세계에 있다고 간주했다. 어느새 그가 쓴 글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부와 명예를 순식간에 거머쥐었지만, 그는 상류층이나 지식인들과의 모임을 경멸했다. 그가 굶주리기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썼을 때 거절당했던 글들이, 명예 때문에 갑자기 엄청난 판권을 받는 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는 지식만으로,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루스와의 사랑이 그랬고, 작가로서의 성공이 그랬다. 마틴은 루스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마틴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결국 남들보다 높은 곳에 섰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설의 결말부에 깊은 물로 스스로 뛰어드는 것은 원래 그가 속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헛된 발버둥에 가까웠다. 죽음의 찰나에 그는 어떤 빛과 희망을 발견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어둠뿐이었다. 잭 런던의 삶이 그랬듯, 마틴 에덴의 삶은 모순투성이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았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활동할 당시에는 비평가들로부터, 동료 작가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시간이 지났을 때, 어떤 대중도 그를 기억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21세기의 독자들이 『마틴 에덴』을, 그리고 잭 런던을 다시 읽어야 할까? 작가가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흙이 아닌 물거품으로 살아가기'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잭 런던과 마틴 에덴)처럼 매 순간에 전력을 다해 살아갈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이 지녔던 편협한 사고방식까지 계승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았고 작가가 품었던 사고방식이 언제나 옳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활자를 비집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향한 의지를 본다. 강력한 정신은 시대와 공간, 그리고 언어를 초월하는 법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의 희열과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기대, 그리고 타인에게 이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애틋함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때로 그에게 글쓰기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으로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렸을 적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읽었던 책들이 그의 세계를 형성했듯이, 마지막에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쓰기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언제 재가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 속에서 기억하고 싶은 스스로의 조각을 적어놓기를 원했으리라. 그는 스스로 흔적이 남지 않은 물거품이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읽혀짐으로써 기억되기를 바랐을 테다. 그렇다, 당신의 의지는 어쨌든 전송되었다. 어떻게 끝날지는 몰라도 나 역시 마음 닿는 데까지 가보겠다. 당신이 굳게 믿었던 사랑의 힘을 기억하며.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나요?" 그녀는 속삭였다.

 "처음부터, 당신을 처음부터 본 바로 그 순간부터, 그때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미쳐 버렸고, 그 이후로 점점 더 미쳐갔어요. 지금 나는 최고로 미쳐서, 거의 정신 이상이에요. 너무 좋아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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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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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았어. 네가 본 산은 처량하게, 나목으로 남아 있었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꽃이 꺾였고 나무들이 베였어. 전쟁 중에는 군인들의 피와 포탄 자국을 품었고 격전지가 바뀌면서 나무 뿌리까지 캐먹으려는 굶주린 이들이 찾아왔지. 그때마다 그 산은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어주었어. 비가 오면 쌓인 흙이 점점 벗겨지고 누구도 돌보지 않아 계절의 변화에 야위어 갔대. 하지만 그 산은 단지 그곳에 우뚝 서 있었어. 여전히 생명을 품은 채 말이야.

 

 젊은 남자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방식의 전쟁을 치러야 했어. 어린 나이의 너는 그 모든 현장에 목격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참여했지. 오빠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돌아와 존경했던 모습을 상실했고 너는 올케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처지에 놓였어. 북한군이 점령한 버려진 서울의 광경은 실로 암울했어. 너와 올케는 담을 넘어 빈 집에서 양식과 팔 것을 훔쳤고 공산당의 앞잡이에게 굽신거리며 버텼지.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구려 예술에 기꺼이 박수를 치고 불편한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사는 것쯤이야 감당할 수 있었지.


 오빠가 죽고 나서 너희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기억해. 오빠가 무덤 틈으로 다시 기어나오는 악몽은 올케와 엄마의 갈등으로 현실이 되었어. 문득 내가 올케였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곤 해.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폈지만, 그이는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어. 생계를 위해 올케는 양놈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 뒤, 그 역겨움을 이기지 못해 입을 게워내야 했지.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너의 눈에는 동정심이 없었어. 올케 역시 험난한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인물이라는 그 평정심이 오히려 나에게 위로가 되었어. 그래서 올케와 엄마가 그 문제로 싸운 뒤, 홀로 걸으며 네가 품었던 생각이 더욱 와 닿는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을까? 엄마는 건강하여 손자들을 잘 돌보고, 올케는 사나흘에 한 번씩 주머니마다 돈을 하나 가득 벌어 오고, 아이들은 살지고 기름이 흐르고, 나는 한 달에 사십만 원이나 되는 수입이 보장돼 있고, 집 안에는 구메구메 양키 물건이고, 오빠가 살아 있어도, 전쟁이 안 났어도 이보다 잘 살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은 점점 추비하고 남루해지는 걸까. 도둑질해서 먹고 살 떄도 이렇지는 않았다. 온 식구가 양키한테 붙어먹고 사는 거야말로 남루와 비참의 극한이구나 싶었다. (p.279~280)


 그때 나는 네가 본 산이 무엇인지 알았어. 네가 왜 과거를 돌아보는 기록들 사이에서 선명하게 기억날 이름을 담지 않았는지도.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몸과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헤맸어. 하지만 자신들을 보호할 줄 알았던 산은 나목 투성이였고, 이미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 도시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미군에게 빌어먹으며 불법을 일삼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다시 빌어먹는 양아치들과 부랑자들로 가득 차 있었어. 그속에서도 악착같이 희망을 보려 하는 너의 집요하게 객관적인 시선이 기억 난다. 백목련, 교하, 박수근, 지섭, 그이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병든 사람들 틈에서 너는 그 시들지 않는 향기를 담아냈어.


 왜 너의 고백은 이토록 생생할까? 누구에게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지. 변한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사라진 사람들의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 테면, 숙모가 쑨 시뻘겋고 걸쭉한 팥죽을 아귀아귀 먹기 위해 달라붙은 식구들의 체취나 출근할 때마다 살색 스펀지를 달고 캐넌 중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티나 김의 목소리, 그런 것들. 세상을 잘 몰랐던 시절에 체험했던 과격한 기억들이 그동안 얼마나 깊이 너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을까? 나는 글의 힘을 믿는다. 어떤 글을 통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치유되는 존재는 바로 작가 자신이야. 이제 네가 본 산의 모습을 모두 담아내어 너를 괴롭혔던 기억들을 털어놓으렴. 세상의 파도에 마모되고 싶지 않았던, 최소한의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너를 위해서. 


 -비로소 산을 찾은, 누구보다 험난했지만 아름다웠던 20대를 보낸 이를 기억하며.

이렇게 그이는 멋이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섭이와 그이를 비교하다가 뭣 하러 비교를 하는지 자신을 의심스러워하곤 했다. 아무리 비교해 봤댔자, 그이가 지섭이보다 나은 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나은 점이라기보다는 명확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그이하고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전혀 부담이 안 된다는 거였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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