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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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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존경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가 나에겐 다소 낯설었다.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문학은 보통의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본문 뒤에 실린 심사평들은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10년 전에 비해 청소년 문학의 지평이 꽤 넓어졌고, 응모작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심사평을 보면 『시간을 파는 상점』이 선택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소년을 위한 소설도 일반적인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세상에 대해 조금 더 거칠고 솔직한 시선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었던 온조와 그녀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 성장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과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동시에 읽었다. 어른을 위한 문학, 청소년을 위한 문학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어렵다'는 것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주인공의 성별이나 나이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어디에나 돋보였다. 어린 시절 한국 문학에 대해 지녔던 따분했던 편견은 어느새 사라졌다. 조만간 서평을 남기겠지만, 단편소설에 담긴 깊은 사유는 꽤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편소설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분석했다. 청소년 소설에서는 어떤 어휘를 쓰고, 대화를 할 때는 문장에 무엇을 채워넣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판타지를 어떻게 구현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시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라는 심사평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소설은 말을 아낀다는 것이었다. 온조는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이지만, 시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의뢰인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실천한 것이 전부였다. 모든 관계가 한 번에 풀리지 않았다. 한 아이의 미래에 대해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작가는 수수께끼를 여백에 남겨두었다.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여기서 『시간을 파는 상점』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청소년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 역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의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이것은 어머니가 딸을 위해 바치는 선물이다. 만약 이 소설이 상에 당선되지 않았다 해도, 적어도 작가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리라.


 『당신의 정원』을 완성한 후에 『시간을 파는 상점』을 보았다. 나는 그 소설을 내가 쓴 최초의 청소년 소설이라고 구분했다. 처음부터 청소년을 위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을 담아내다 보니 작가 자신이 치유되었고, 그 기쁨의 순간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검증된 작품을 읽고 나니, 내 습작의 완성도는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우선 심사평에서 강력하게 지적한 사항을 위반했다. "청소년문학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은, 등장인물인 청소년의 입을 통해 작가의 설교를 듣게 되는 것이다." 즉, 등장인물인 청소년을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 작가의 대변인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소설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문학이 아닌 우화가 되고 만다. 나는 우화를 그리고 있었다. 


 같은 범주 안에서 두 작품에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창작자로서는 신비한 경험이었지만, 독자에게는 분명 반갑지는 않은 상황이리라. 이미 수없이 많은 청소년 문학에 등장한 요소들이 반복되니까 말이다. 온조에게 홍난주가 있었듯이, 루이에게는 김원주가 있었다. 들꽃자유가 꽃들의 이름을 보내주었듯 아이들은 사계절의 꽃들과 함께 했다. 바람의 언덕에서 그 아이를 만났듯, 당신의 정원에서 기적은 일어났다. 그러나 온조와 루이는 다른 인물이다. 오히려 전자는 온의 어린 시절 모습과 유사하다. '딸을 위해', 즉 '온조를 위해' 작가는 시간을 파는 상점을 개업했다. 나는 루이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당신의 정원』은 나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루이를 통해 다시 한 번 글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감사하다. 나는 오늘도 루이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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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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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왼손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남편의 눈에 분명 그녀의 왼손은 그대로였지만, 아내는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남자는 이 부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김숨의 「왼손잡이 여인」이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망상과 신념의 대립은 「채식주의자」에서 더 거칠게 표현된다. '나'는 아내가 꿈에서 날고기를 먹는 자신을 발견한 뒤, 고기류를 일절 먹지 않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선 그는 그게 말이 되느냐며 화부터 낸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아내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행한다. 그녀를 '채식주의자'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폭력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된다.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온 밤이면 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아내를 덮쳐보기도 했다. 저항하는 팔을 누르고 바지를 벗길 때는 뜻밖의 흥분을 느꼈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아내에게 낮은 욕설을 뱉어가며 세 번에 한 번은 삽입에 성공했다. 그럴 때 아내는 마치 자신이 끌려온 종군위안부라도 되는 듯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행위가 끝나는 즉시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 속에 얼굴을 숨겼다(p.39~40).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급기야 영혜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그래도 여자는 침묵을 지킨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단서가 나온다. 그녀는 날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혜의 행동 뒤에는 저항하려는 욕구가 담겨 있었다.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섬김을 강요하는 남편, 아내가 남편을 보필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시선(마치 모든 인간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듯이)들에 말이다. 물론 이 저항 방식이 현명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각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언제나 여지를 남기고, 나는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몽고반점」에서도 이어진다. 이번에도 남자의 일방적인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전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욕망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를 밝힌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p.143).


 다소 모호한 답변을 남긴 영혜의 진실은 「나무불꽃」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영혜의 마음과 가장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선택을 한 언니의 시선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 역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존재다. 「몽고반점」에서 그녀의 남편은 영혜를 예술의 도구이자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다가, 아내에게 발각되고 만다. 그로 인해 남편은 도망치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두 자매를 버린다. 영혜의 언니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 때문이었다. 두 여자는 아직도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또 다시 폭력을 당하는 영혜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p.192). 

 

 영혜의 행동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 폭력의 씨앗은 아버지였다. 손이 거친 그녀의 아버지는 유독 영혜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그 주먹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가족모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영혜의 기억 저편에는 자신을 물었던 개가 아버지에 의해 끔찍하게 죽는 장면이 남아 있다. 자신도 그 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육식을 끊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먹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남편은 고기반찬을 해 주지 않는 아내에게 화를 냈고, 회사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폭력의 순환이 아버지를 통해 되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의 삶은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굴레는 끝나지 않는다. 처제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그의 폭력은 상당히 무섭고 피부에 와 닿는다. "저 여자가 먼저 허락했으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일상에 도처한 폭력의 변명거리다.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저 사람은 이제 내 것이다. 영혜가 승낙한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친족이 아니라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변한다. 권력을 이용한 폭력의 현장이 꽃의 형상과 어우러지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영혜의 언니가 등장하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명백한 억압이었다. 그리고 영혜에 마지막 남은 신체적 자유가 박탈당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병원에서 그녀에게 미음을 먹이려던 이들은, 오래 전 나무가 되어버린 존재에게 고기를 강요하는 정신이상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이 여자에게 닥칠 폭력의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주변 인물들이 그러하듯.


 이 추측은 틀릴지 모른다. 영혜의 생각이 직접 드러난 적은 없었으니까. 꿈들조차 장면의 사실적인 묘사였을 뿐이다.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녀는 말하지 않고, 단지 보여줬을 뿐이다.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이해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나무라고 여기는 여자를, 폭력으로 얼룩진 그녀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평론가도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이해의 한 방편이라고. 고기를 먹는 나는 채식주의자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너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침묵한다. 때로는 침묵이 수만 마디를 대신한다. 그러니 지켜보자. 기다리자.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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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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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고 있는 사피엔스는 모두 잠재적 혁명가이다. 혹시 자신이 호모 에렉투스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필수 교과목이 된 한국사의 첫 장만 펼치면 예전의 인종은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당신, 호모 사피엔스는 언제든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혁명을 과거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전쟁처럼 피 튀기는 과격한 전투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소리없는, 그러나 폭발적인 지식의 혁명이다.


 역사는 초점을 누구에게 맞추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마치 인간의 몸을 전체적으로 볼 때와 눈 밑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볼 때가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한 인간의 역사 또는 한 국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굴곡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공동체마다 성공하는 시기와 실패하는 시기가 다르다. 하지만 확대경을 저 멀리 치우고, 사피엔스 전체의 역사를 정리하면, 눈부신 진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속도는 잠시 늦춰질지언정 진보를 향한 발걸음은 멈춘 적이 없었다. 사피엔스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였다.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의 정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미래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움직임'이다.


 즉 혁명을 정의하려면 미래의 어떤 호모 사피엔스에게 판결권을 줘야 한다. 반대로 미래의 인간은 자신의 입장을 과거의 개인에게 대입하면 안 된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금의 우리에게 미친 결과만 확인하면 된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봤을 때, 우리 조상이 했던 일들이 모두 옳았을까? 당연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현대 이전까지의 '혁명'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했다. 희생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희생으로 인해 살아가니까. 그러나 희생의 대상이 우리가 속한 종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혁명은 미래의 세대를 위한 일이었지만, 그 동기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이들의 욕망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존을 위해 다른 인종과 대형 생물들을 멸종시켰고, 농업 혁명 이후 체제 유지를 위해 피지배층을 착취했고, 과학 혁명 이후 기술의 발전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그 이유가 어떻든 인간은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뒤 얻은 보석을 자랑스럽게 후손에게 넘겼다. 보석은 곡물이 되었다가 왕관이 되었다가, 거대한 증기관으로 변하더니 곧 손톱만 한 크기의 마이크로칩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제 우리는 어떤 희생을 통해 이 보석을 변형시켜야 할까? 아니면 모두가 공존하는 기적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까?

 

 시간이 그렇듯, 역사는 끊임없이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달려간다. 이미 이루어진 업적과 세워진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농업 혁명은 1만 2천년 전에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류는 농경 사회의 식단을 따른다. 그 식단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이다. "한국인은 밥심이지"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다소 충격적으로 들린다.

 농부는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한 식사를 한다. 특히 현대 이전에 농업 인구를 먹여 살린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 작물에서 왔다. 여기에는 일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중국 전통 사회의 전형적 농부는 아침, 점심, 저녁에 쌀밥을 먹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날도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대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p.85~86).

 그렇지만 현대인들 중 그 누구도 수렵채집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아니, 당장 1970~80년대를 살았던 어른들도 그때처럼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 슬프게도, 아니면 다행이게도 인류는 계속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존에 풀지 못한 문제점을 해결하기도 전에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무엇이 혁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호모 사피엔스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변함이 없으니까. 바로 행복을 향한 갈망이다. 자유, 정의, 사랑, 이런 것들은 너무 추상적이다. 혁명은 행복을 위한 개인의, 공동체의, 인류의 투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재적 혁명가이다.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실제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현대의 사피엔스가 몇 안 되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라는 사피엔스는 행복 지수를 인용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피엔스의 역사와는 다르게 개인의 삶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또 사피엔스의 역사처럼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의 서사시와 열린 결말을 본 뒤 내린 결론은 아주 사소하고 간단하다. 지금처럼 살아라. 나의 행복을 위해 전념하고, 가족과 국가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는 발전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p.553)"고? 그럼 그 망상을 믿으며 살라.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은 네안데르탈인과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수만 년 전에 이미 멸종했다. 당신은 호모 사피엔스, 혁명의 종족이다. 삶에서 얻은 지식을 행복을 위한 지혜로 바꾸는 습성이 당신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고 잠깐 흠칫, 하고 놀랐다가 다시 예전과 똑같은 일상을 살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혁명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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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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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어디죠?"

 "쉼터에요, 윌.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별 생각 없이 떠드는 곳이랄까요. 아무튼 반가워요. 전 테사라고 해요. 당신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요." 

 그녀가 윌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윌이 코웃음을 쳤다.

 "저에 대해 많이 들었다더니, 한참 모르시네요. 전 사지마비 환자에요. 남들이 흔히 하는 악수나 포옹, 키스, 이런 것들을 저는 할 수 없단 말이에요. 제가 먼저 손을 내민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아니에요, 윌. 당신은 자유로워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요."

 "이해가 안 되나 본데, 난 휠체어에 묶여......." 

 윌 트레이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서 있었다. 그는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쉼터 주변을 마음껏 뛰어다녔다. 그리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다 윌은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는 테사와 눈이 마주쳤고, 급격히 침울해진 얼굴로 그 자리에 섰다. 

 "죽어서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니, 참 웃기네." 

 "말 놓는 건가요?"

 "상관 없어. 죽은 사람들끼리 예의를 차리다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사실 사지마비 환자 판정을 받는 순간, 난 내가 속해 있던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됐어." 

 "그 기분 알아.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 얼마 안 가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조차 잊게 된다는 사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절망과 분노로 온 몸이 뒤틀리는 순간을 말이야." 

 "테사라고 했던가? 넌 어떤 삶을 살았지?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난 남들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던 평범한 소녀였어. 내 몸에 병이 나기 전까진. 암 판정을 받는 순간, 내 삶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남아 있던 의지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쓸려 나갔어." 

 "나와 마찬가지였구나." 

 테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기적처럼 한 남자가 찾아왔어. 그 이의 이름은 아담.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남자였어. 아담은 나를 위해 모든 걸 해줬고, 나는 모든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어. 나의 이름을 세상에 남겨 주었고, 내가 겪을 수 없었던 삶을 선물해 줬지. 난 떠나면서 아담과의 추억을 계속 간직하려고."


 now is good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모든 순간이 끝을 향한 여정이다. 내버려 두면 된다. 그냥 놔두면 된다." -테사


 "내 얘기는 이미 들었는데 다시 해도 괜찮아?"

 "당연하지. 본인한테 듣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딨어."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를 머금었다.

 "너의 아름다운 이별에 비하면 나와 루의 만남은 엉망진창이네. 우린 처음에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싸웠어. 그리고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 내가 그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어. 이별 직전에 루이자가 다시 찾아왔지만 나는 또 다시 비겁한 변명을 했어. 솔직히 마음이 아직도 불안해.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후회돼?" 

 "조금은. 아니, 어쩌면 그 마음이 너무 커서, 그동안 세상을 앉아서 내려다보던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걸지도 몰라."

 윌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는 손으로 얼른 눈물을 감췄다.

 "우리는 같은 처지였지만 참 달랐구나. 나는 더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너는 더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결국 결과를 떠맡는 건 우리니까. 그 누구도 너의 삶을, 그리고 나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으니까."

 "그래. 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거의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했잖아. 그게 조금 잘못된 일이라도 직접 해 냈어. 난 그 점이 부러워. 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죽음뿐이었어. 다른 어떤 것도 직접 할 수 없었다고. 아니, 삶을 그만두겠다는 의지가 곧 나였어. 불치병이 예고없이 찾아오듯, 교통사고도 내가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현듯 닥친 거야. 그때 이미 윌 트레이너는 죽었어. 루이자는 그저 6개월 뒤 사라지겠다는 의지와 사랑에 빠졌던 거야." 

 "윌." 

 윌 트레이너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테사는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울음을 멈추길 계속 기다렸다. 어느 순간 윌은 마음이 가라앉았음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테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윌, 너는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괴로워 하고 있어.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을게. 이것만 알아 둬. 멀쩡한 몸으로 뜨거운 삶을 살았던 너도, 불구의 몸으로 절망 속에 빠져있던 너도, 모두 너 자신이었어. 넌 항상 너의 주인이었어. 모든 건 네가 선택헀고, 너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변화된 거야. 네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주체가 되었던 그 순간들이 의미 있는 거야. 모든 지금이었던 시절을 소중히 여겨. 지금이 좋다고 생각하면 너의 삶은 좋게 기억될 거야. 너뿐만 아니라 네이선, 부모님, 다른 사람들, 그리고 루이자에게도."

 "넌 만족해?"

 테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았어. 또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사람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도 날아갈 것 같이 기뻐."

 "넌 정말 밝은 영혼이야. 함께 하니 꽤 위안이 됐어. 고마워, 테사." 

 그녀는 손을 모았다 풀고 윌을 바라보았다.

 "가 볼게."

 "먼저 가. 이제 보니 넌 오랫동안 기다렸구나. 너와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 올 때까지 말이야. 서로 이야기하면서 치유됐길 바라. 나처럼." 

 테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윌 트레이너는 잠시 그를 둘러 싼 적막을 즐겼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쉰 뒤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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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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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매 분마다 새로운 기사가 올라오고 한때 최신이었던 소식은 과거의 뉴스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곧 새로운 글이 헤드라인을 장악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옳다. 

 

 개인적인 관찰의 결과이긴 하지만,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뉴스를 본다. 그 종류는 연예, 스포츠 기사부터 민감한 시사 문제까지 다양하다. 우리는 계획없이 TV 채널을 돌리다 볼 게 없으면 결국 뉴스 채널을 고정한다(챙겨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였을 때 갈등 없이 다같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 역시 뉴스이다. 사람들은 뉴스를 매일 보며 정보를 얻고 나 역시 세상의 움직임을 그것으로 확인한다. 뉴스를 오래 보지 않으면, 혹은 신문을 한동안 읽지 않으면 세상과 단절될 것처럼. 

  

 news는 약자가 아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들'이다. 여기엔 정말 세상에 없었던 일이 있는가 하면 이전의 기사를 재조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모든 것이 새롭다. 인간은 예전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전령과 봉화, 편지 등을 사용했고 오늘날에는 SNS나 E-Mail, TV 프로그램 등으로 새로운 소식을 나눌 수 있다. 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원하는가? 바로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뉴스의 시대』를 쓴 알랭 드 보통도 그러한 사실을 지적한다. "분노는 겉보기에 어떤 상황에 대한 비관적인 반응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징후다(p.72)."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p.296~297)." 뉴스는 우리에게 행복한 소식보다는 조금은 충격적인 내용의 소식을 전해준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일 뿐이며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우선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 뉴스를 비롯한 모든 소식에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 뉴스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기사에서 다루는 내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발전의 여지가 존재한다. 또한 우리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해외 뉴스에서는 글씨에 나타나지 않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해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작가는 직접 낯선 나라로 떠났다. 저널리스트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의 수단인 사진으로 접근한다. 수많은 다른 것 속에 본질이 있다. 연예인 기사가 난무하는 지금, 현명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변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잠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볼 때 습관적으로 여는 SNS나 뉴스 앱에서 손가락을 잠시 떼고 TV에서 뉴스 채널 대신 영화나 드라마, 예능을 보자. 이러한 행동은 결국 미술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찌 됐든 세상에 속해 있고,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나무에만 몰두하지 말고 숲을 관찰해 보자. 그 순간, 변화는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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