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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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는 그 광경에 끝끝내 익숙해지지 못했으며,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p.1165)


  많은 분량의 책을 읽을 때는, 작가의 생각이 은연 중에 담겨 있는 한 문장에 꽂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주의깊게 읽지 않은 탓이겠지만 한 편의 에피소드가 강렬하게 기억이 남게 된다. 오래 전부터 독파하기를 고대했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내가 찾아낸 단 하나의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이 뒤죽박죽 우주를 창조해 낸 더글라스 애덤스는 책 전체를 통해 "익숙한 건 지루한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우주가 정체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곳은 항상 파괴되고, 재창조되어야 하며, 기존의 것은 폐기되고 새로운 질서가 부여되어야 한다. 시간, 공간, 방위, 선악의 구분조차 우주의 붕괴 속에서 무의미하다. 


 독자가 SF 장르에서 기대하는 대규모 전쟁이라던가, 미래에 존재할 법한 외계의 기술은 이 안내서에서 그저 하찮은 사건과 장치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과학과 논리의 탈을 쓰며 자신의 상상을 합리화하는 부류들을 향해 비웃고 있다. 우주를 뒤흔드는 재앙의 원인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하다. SF를 기대하고 왔더니, 공간만 다르지 지구의 일반 가정집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더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글라스 애덤스가 만든 이 뒤죽박죽 우주는 호불호가 꽤 갈린다. 나 역시 쉬지 않고 이어지는 넌센스에 잠시 지쳤지만, 은하수의 흐름을 타고 나니 한결 더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여행은 역시 '대체로 무해함(지구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주인공인 아서 덴트와 트릴리언 사이에서 태어난 랜덤은 존재론적 위기를 맞고 있었고, 가능성 투성이인 새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 중 가장 기묘하면서 흥미로운 장이었다. 아서가 익숙해지지 못한 것도 '대체로 무해함'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단지 그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한 평범한 인간의 흥미를 돋구기 위함이라면? 작가는 이런 민감한 질문을 보기 좋게 숨겨 두고 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안내서는 지루할 틈이 없다. 종종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동명의 안내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등장인물로 출현하니까). 그래서 왜 세상을 관통하는 지혜가 42인데? 어떤 기계가 대신 답을 해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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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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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살면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느낀다. 때로는 그 일이 너무 거대해서 손쓸 의지조차 잃어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은 어떻게든 흐름을 바꾸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상처를 받는다. 특히 인간관계는 사소한 변수가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리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확신할 수 없다. 연인이, 가족이, 친구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 괴로워진다. 그러나 그 나약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픔을 드러내면 관계에서 주도권을 뺏긴다는 두려움이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괴로워하다가, 가장 원하지 않은 순간에 최악의 방식으로 감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한다. 결과는 해결은 커녕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처음에 다자키 쓰쿠루는 친구들 사이에서 버림받은 일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은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그와 손절했다. 다자키는 그 아득한 부조리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버림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놈이라고, 나처럼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개성도 없는(그만 유일하게 이름에 색채가 없었으니까) 사람을 떠나는 게 당연하다고. 그 역시 처음에는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거의 몇 달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했다. 그러다 그의 연인인 사라가 쓰쿠루의 마음 속에 잠겨 있던 상처를 끌어올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졌다 해도 아픔의 깊이는 변함이 없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용기를 낸다. 다시 마음의 어두운 방에 거짓말을 쌓아올리는 대신, 더 상처가 깊어진다 해도 진실과 마주하자고. 나는 그의 진실함에 마음이 움직였다.


 나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과거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친구들은 고향에 남아 있고, 나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다자키 쓰쿠루와 평행선 상에 있다. 다만 나는 그 친구들과 갑자기 끊어지면 정말 힘들겠다는 상상만 해 보았고, 이름에 색채가 없는 청년은 실제로 이별을 겪은 뒤 오랜 시간 동안 아픔을 이겨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다. 그의 삶이 부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안타깝지도 않다. 다만 작은 희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솔직했다. 나와 그의 결과는 바꾼 것은 용기였다. 


 고통은 받아들여야 이해할 수 있다. 다자키 쓰쿠루가 차츰 밝혀낸 진실, 그것은 가볍지 않았다. 시로의 눈물로 시작된 그의 추방은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도망쳤고, 구루만이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자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다자키의 잘못이 되었다. 그때 아픔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솔직하게 다가갔다면 다섯 명의 미래는 바뀌었을까? 만약 내가 그룹의 구성원 중 일부였고 목격자의 입장이었다면 방관했을까, 아니면 어떻게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나는 대부분 전자를 택했다. 내 문제가 아닌 그들만의 문제라고 여겼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내가 목격자가 아닌 입장이라면,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 상처를 준 입장이라면, 나도 모르게 그랬을 것이다. 그 사람과 나는 다르다. 그래서 이해가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 잘못을 인정하자.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이 점점 커져 서로를 집어삼키기 전에 드러내자.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관계를 망가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대신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자.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음을 깨달은 뒤, 생각보다 단순한 방법이 떠올랐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자는 것이다. 다자키는 자신이 색채가 없고, 개성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다. 색채는 개성이 아니니까. 그 역시 자신만의 특징이 있었다. 그 다름을 인정한 뒤에야 슬픔을 나눌 수 있다. 고민하고 노력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관계가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다 받아들이는 일이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고통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구나, 라고. 용기와 비난 사이, 희망과 망상 사이, 신념과 고집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잠시 나를 내려놓자. 그리고 한 번의 기도를 올린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 그 사실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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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사물
조경란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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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쓰는 일을 사명이자 오락으로 생각하는 이에게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큰 모욕이다. 절대 저자와 같은 생각을 품을 수 없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뭐라도 적어야 한다. 소설가가 자신의 삶을 녹여내며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이런 사람이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을까? 아직 미완성되었다 해도 저항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사물에는 추억이 담겨 있다. 사물은 추억의 주인공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 틈에서 과거를 하나하나 추려내는 것은 현재를 조금만 희생하면 가능한 일이다. 사물 뒤로 시간과 공간이 함께 움직이고, 사람들이 나타나고, 감각들이 느껴지다가, 마침내 나의 생각이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것은 매개체일 뿐이다. 


 책, 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나 내 인생의 책을 고른 뒤, 그 사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진부하다. 서점에서 헌 책의 냄새를 맡으며 행복한 고민을 했던 기억은 이제 흐릿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읽었던 책을 떠올린다. 선생님 한 분을 탁자 가운데에 모시고 중고등학생 몇몇과 그들의 엄마(아빠는 없었다, 맹세코)들이 책 한 권의 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다같이 토론했었고, 그 청소년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당시 나는 꽤 적극적이었고 책의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그 독서 모임에 참석했다. 어쩌면 선생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5년 간의 수업은 꿈처럼 갑자기 끝났고, 여전히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와 함께 가는 것은 오직 『어린 왕자』뿐이다. 1년마다 나는 그를 찾아간다.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화투, 는 내가 계획한 기억의 파편들 중 일부다. 나는 그 순간을 기록해 놓았다. 2016년 9월 13일, 학교 과방에 모여 동기들과 선배들이 모여 화투 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나. 나는 여전히 화투 치는 법을 모른다. 만약 알았었다면 그 현장에 나도 참여했으리라. 선후배의 구분 없이, 삶의 고민을 잠시 전부 떨쳐버리고, 오직 화투를 치는 그 순간에만 집중했던 우리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화투 사진을 컬러로 뽑아 전시해 놓고, 제목은 '20160913'으로, 어떠한 부가 설명도 없이 감상하게 하고 싶었다. 과연 그 사진을 본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너무 궁금했다. 이해할 수 없어 비난하며 지나가거나, 나처럼 사물을 통해 추억 속으로 빠져들거나, 선택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보여준다. 말하지 않는다.

 

 사진, 을 글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니 풍경 묘사나 분위기에 대한 설명 따위는 하지 않겠다. 내가 올해에 기억하려는 것은 내 친구가 홀로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모습이 찍힌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기억하려는 나의 의지만 남아 있다. 글 쓰는 이의 주변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편한 일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록의 대상이 되어버리니까. 내 친구는 자신의 사진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까? 알게 되면 좋아할까, 아니면 꺼림칙할까? 하지만 내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다. 때로는 나도 이야깃거리가 되니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사물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묶여 있다.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느니, 한 사람 한 사람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더 빠르고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순간을 누군가 기억해 주었으면 싶다. 

 글 쓰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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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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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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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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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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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순간의 연속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생의 끝을 알았던 사람이다. 비극 속 주인공은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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