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 - 지구를 살리는 어느 가족 이야기
그레타 툰베리 외 지음, 고영아 옮김 / 책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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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레타 툰베리가 직접 쓴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저자 이름에는 가족 네 명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어서 마치 균형 있게 그들의 시선을 담은 것 같지만, 오페라 가수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말레나 에른만이 중심이 된 구조라서 균형을 조절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레타가 어떤 계기로 등교 거부를 시작했는지 내막이 궁금했고 베아타의 숨겨진 이야기가 알고 싶었으며, 남편인 스반테는 어떤 희생을 감수했는지 듣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평범하지 않은 이 스웨덴 가족을 알려면 더 많은 요일이 필요한 듯 싶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벨평화상 후보이자 환경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레타 툰베리는 사실 결함 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은 언제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레타는 섭식 장애를 오랫동안 앓아 왔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소위 문제아였고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지구를 생각하는 그녀의 외로운 투쟁이 결실을 맺었다. 지나고 보니, 그레타 가족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고, 우리와 같은 금요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흔히들 메시지를 반대하기 위해서 메신저를 공격하는 전략을 택한다. "지구를 지켜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에 대해, 반대자들은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떳떳하냐"고 따진다. 당신 논리라면, 당신 역시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냐고 말이다. 어쩌면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탄소 배출과 바다의 산성화와 다양한 생태계의 멸종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가 지구의 파멸을 앞당기고 있다.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다가올 미래에 대해 체념하고 오늘만 살 것처럼 살아야 하는가?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불평등과 환경 위기 앞에서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와 성공지상주의에 매몰될 것인가?


 어느새 기후 위기는 훌륭한 정치적 도구이자 마케팅의 수단이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획기적인 기후 정책과 그에 대한 법안의 필요성을 촉구한다. 한편, 친환경 제품이라고 속이며, "우리 제품을 쓰면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현혹하는 그린워싱을 강력히 비판한다. '우리'에게는 정치인들의 프로파간다를 분별하고, 무엇이 환경에 이득이 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지식과 고민의 시간이 부족한가? 환경 문제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철저한 근거를 들어 주장하는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가? 애초에 '그들'과 '우리'가 다른 존재인가? 적어도 『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이 주는 작은 희망은 그러한 것이다. 툰베리와 에른만 가정 역시 처음부터 유별나지 않았다. 작은 실천과 인식의 전환이 쌓이고 쌓여 확신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와 실천이 미약해 보이고 부족해 보일 수 있다. 혹자에게는 위선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건대, 타인을 비판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레타 가정을 옹호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불편함을 드러내도 된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환경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삶의 사소한 영역에서라도 변화했으면 좋겠다.


 태양광 요트로 대서양을 건너면서 그레타 툰베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행기를 탔으면 편하게 뉴욕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후회? 무엇 때문에 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냐는 자괴감? 눈앞의 세상을 살아가기에 급급한 자들이 보기에,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자들은 더없이 미련하고 어리석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라도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남긴 것은 결국 잊히고 만다. 남은 것은 오직 생태 발자국 뿐이다. 나도, 너도 같은 요일을 살아가지만, 생각하는 바는 너무 다르다. 환경을 지키지 않았다고 상대를 비난할 수도, 환경을 지키는 데에 유별나다고 손가락질 할 수도 없다.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세상은 언제쯤 닥쳐올까?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자. 편리함은 언제나 우리의 도덕성을 실추시킨다. "나만 잘 살면 돼"라는 무시무시한 종교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부디 자기 자신을 넘어선 세상을 모두가 목격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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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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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란 보이는 결과와 보이지 않는 과정의 종합이다. 기억하는 자가 해야 할 일은 보이는 것 이면을 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피상적인 세계만 접하는 이들은 과거를 추측할 수도,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 동시에 어떤 이도 양쪽의 입장을 공평하게 헤아릴 수 없다. 관측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해야 하고, 고유한 가치관에 스스로를 맡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명한 역사학자인 E.H.카(E.H.Carr)는 역사 자체에 대해 논하기보다 역사가의 의무에 대해 말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로 유명한 그의 통찰에는 본질적으로 역사가의 선택이 곧 역사를 만든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주장을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역사의 사례들을 든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반했다거나,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물려 사망한 것은 마치 대안적인 결과(alternative result)가 그 이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기록되지만, 작가는 이런 종류의 문제가 결정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못 박는다. 왜냐하면 어떤 결과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원인이 존재하며,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꼽으라 할 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특정한 원인 한 가지를 지적하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후세인은 별 수 없이 결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카는 여기에 몇 가지 제약을 둔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연적인 요소를 인과 관계에 포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는 남성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담배를 피우면 교통사고를 당한다"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역사적 결과를 논의할 때, 지나치게 지엽적이거나 우연한 요소를 대입한다면, 소위 말해 그것은 끼워 맞추기 내지는 음모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관측자마다 평가가 다를 뿐, 사실은 동일해야 한다. 카는 역사학에서(또는 이 세상에서) 절대적 진리도 절대적 오류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의 왜곡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진실은 뚜렷하게 서 있어야 한다. 본질이 훼손되면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모두 헛되게 된다.


 나아가 저자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답변한다. 이 책에는 선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결국 그가 하고자 했던 말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그랬듯이, 미래의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리라. 역사가 오늘과 어제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라면, 오늘 역시 미래와 꾸준히 교류하고 있음이 분명하니까. 지금의 사회는 위기인가, 기회인가? 그저 절망하고 좌절할 텐가, 아니면 희망이 존재하는 미래를 향해 박차고 나설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지식과 기술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시대이다. 다가올 결과에 주목하지 않고, 과정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비로소 대안적인 세계(alternative world)가 임하지 않을까?

 

 조금은 거시적으로 인류사를 돌아본다. 성경을 예로 들고 싶다. 나는 그동안 시편이나 복음서의 말씀은 달게 여겼으나, 민수기나 역대기의 기록, 족보 속의 인물들, 전쟁 속에서 희생된 인물들에 대한 서술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더 살았거나 죽었다면, 그리하여 그들의 후손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었다면, 우리가 아는 세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그토록 정교하고 치밀하다. 내가 보는 영상 한 편, 한 구절의 글, 사소한 선행과 악행이 인류의 운명을 영구히 바꾼다. 이 막대하고 불편한 진실의 실마리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버겁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결과로 다가온다. 나의 처절한 실패는 타인의 극적인 성취이고, 나의 가난과 좌절은 누군가의 부와 명예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이고 손해인가? 오히려 서로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에 사회가 유지된다. 어떤 이는 정치를, 어떤 이는 예술을, 누군가는 교육을, 또 다른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소와 하수 처리와 배달과 제조와 화장과 훈련을 해야 한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는 모두를 포용한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무의미하지 않다. 한 사람이 힘들게 버틴 하루가 또 다른 이의 멋진 미래를 보장하기도 한다. 드러나는 존재에 대해서만 이해하려 한다면, 글쎄, 역사는 100분의 1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까? 만약 그것이 결과라면, 나는 오늘이라는 과정에 충실할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최선을 여지없이 다하리라. 막연한 미래가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인류나 지구의 앞날을 고민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닥친 나의 가난과 입지가 더 위태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환경은 파괴되었고, 우리는 많은 것을 잃을 것이다. 그것이 공기이든, 깨끗한 물이든, 화석연료나 에너지든, 또는 사랑하는 이들이든, 우리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절은 곧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 위기 속에서 나는 좌절하고 싶지 않다. 닥쳐온 현실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싶다. 그때 되서야 알게 될까? 결과는 과정의 집합체에 불과함을, 결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곧 결과임을 납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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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2-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90년대 까치본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적이 있는데 좋은 책인 것은 맞지만 지금도 까치에서 독점 계약으로 출간하고 있다니 좀 놀랍긴 하네요.
 
사랑이 전부는 아니에요 - 16명의 영미 여성 시인선 소명출판영미시인선 8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외 지음, 김천봉 옮김 / 소명출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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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분명 독자를 순수하게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결코 순진무구함이 아니다. 나의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눈으로 세상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순수함이다. 시는 희곡, 수필, 소설 등 다양한 문학의 장르 중에서도 가장 순수함이 압축된 결정체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치 있다. 글자 수와 적절한 배열, 운율과 구성을 철저히 신경 쓰는 장르가 어떻게 '계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어떠한 형식 속에서도 정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답하리라. 시에는 언제나 차가운 글자 안에 뜨거운 진심을 담는다. 이러한 모순의 공존은 문학이 아니면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문학 밖의 세상은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인종과 언어는 물론이요, 이해 관계와 가치관이 다르면 서로를 배척하고 억압하기에 바쁘다.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칼날만 들이미는 현실 속에서 문학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가르쳐 준다. 그 순수함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문학은 아직도 유효하다.


 『사랑이 전부는 아니에요』는 영미시를 잊은 나에게 그것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로 유명한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의 숨겨진 감상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나 에밀리 디킨슨과 같은 저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오롯이 맛볼 수 있었다. 영문학도였던 시절, 다양한 시대의 시를 공부하고 분석했으나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나는 희곡과 소설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그나마 기억이 남은 것은 사무엘 콜리지(Samuel T. Coleridge) 의 「늙은 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였는데, 이 작품은 일종의 환상 문학으로서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이지, 그 안에 담긴 감정이나 표현이 뚜렷하게 각인되지는 않았다.


 이 시집은 16명의 여성 시인의 주요한 작품들을 엄선해서 그들의 작품 세계 및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게 구성되었다. 소설로만 접했던 시인들의 일상적인 시와 감상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시대상과 그에 대한 고찰도 소중했다. 본격적으로 나를 매료시킨 존재는 에밀리 디킨슨이었다. 「달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The Moon is Distant from the Sea)부터 시작해서 「가을에 당신이 오신다면」(If You Were Coming in the Fall)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첫 번째 시는 자연물인 달을 이용해서, 두 번째 시는 시간대를 확장하여 애절함을 강조한다. 특히 후자의 마지막 연인 "그런데 당장, 아련한 날개에 길이조차 모르는 시간이 언제 침을 쏠지 모르는 도깨비 벌처럼 나를 콕콕 찔러대네요"는 화자의 본심을 드러낸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몇백 년이라도, 영원이라도 기다릴 수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림은 너무나 쓰라리다. 


 한편으로 영미 문화권답게 종교시도 종종 보였다. 루이자 메이 올컷은 「나의 왕국」(My Kingdom)에서 감정 조절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데, 이 고백의 대상이 친아버지(father)인지, 아버지 하나님(Father)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원문을 찾아 보니 대문자로 표현된 것을 보아, 신에게 호소하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그밖에 자연물을 이용한 에이미 로웰의 서정시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서정적인 「공상」(Fancies)은 강렬하게 나를 매료시켰다. 개중에는 처음 듣는 이들도 있었고, 익숙한 이들도 있었지만, 각자의 시가 개성이 뚜렷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적으로 잘 전달되어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한 편의 시가 내 인생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시의 감상은 반드시 축적된다. 말하자면, 때묻은 영혼을 한 차례 닦아 준다고 해야 할까? 시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선택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사람들이 낯선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실제로 나는 아이들에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히고, 암송하게 하여 감상을 물어본 적이 있다. 「만약 내가 아픈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If I can stop heart from breaking)이라는 시에 대해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고 대답한 학생이 있다. 또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말한 아이들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존중한다. 그러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들에게 칭찬하고 싶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그 열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당장 그것을 실천하지 못해도, 결국 발현될 테니까. 세상은 언제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꾸는 것이니까. 시를 잊은 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시를 읽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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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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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어찌 됐든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 인간성이 모든 소설을 불완전하지만, 매력적으로 만든다. 아니, 정말로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소설이 존재할까? 시대 중심으로 보든, 작가 중심으로 보든, 독자 중심으로 보든, 어떤 작품이나 고유한 결점과 장점이 있다. 그럴 때 창작하는 자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결점을 보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볼 수 있는 세상 너머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상상이야 가능하겠지만). 선택지는 매력을 강화하는 일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객관적인 눈과 자기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차가운 벽」을 쓴 트루먼 커포티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 혼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유년 시절을 지나, 소설의 성공으로 잠시 환락을 누렸으나, 이후의 실패는 그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배경 설명을 알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그의 단편 소설 속에서는 그가 지닌 결핍과 불안이 발견된다. 표제작인 「차가운 벽」을 포함한, 첫 10편의 단편 소설은 뒤틀린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 부분을 통과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작가에게 뭔가 커다란 결핍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 기이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찾아올 수 있지만, 그것을 글로 담아내고 계속 고치면서 내면화하기란 보통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설 쓰기란 삶이 반영된 하나의 실험이자, 끝없는 자기 혐오와의 싸움이다. 문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외롭고 독특한 삶을 산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갔을 뿐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소위 말해, "왜 그리 인생을 피곤하게 사느냐?"라는 질문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태어나기를, 또 배우기를 그렇게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자신이 느낀 모든 생각과 느낌을 곱씹고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상상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이 가볍게 핥고 삼킨다면, 작가들은 그 생각을 수백 번, 수천 번 되새김질하며 새로운 음식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그 결과물이 오물이 되기도 하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독창적인 예술이 되기도 한다. 그 경계선, 즉 '완벽함'의 기준을 누구도 정할 수 없기에 소설가의 여정은 늘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다.


 그런 측면에서 커포티의 고민이 가장 잘 느껴진 작품은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이었다. 이 소설은 "어디 한번 비열함의 정수를 보여줄까. 오드 헨더슨이야말로 내 경험상 가장 비열한 인간이다."(p.350)로 시작된다. 오드 헨더슨이라는 인물을 비판하며 독자들을 기선제압한다. 이 기세에 눌린 독자들은 "대체 오드 헨더슨이 어떤 사람이고, 왜 비열한 건데?"라는 호기심을 품으며 나아가거나, "네가 뭔데 이 사람에 대해 쉽게 판단해?"라는 반발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의 가장 이상적인 시작점은 371쪽에 쓰인 "생명력이 넘치는 날이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은."이라는 문장이었다. 제목이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인 데다가, 추수감사절에 대한 서술자의 기대감과 감상이 담긴 훌륭한 표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추수감사절 대신 오드 헨더슨을 택했다. 내가 적절한 첫 문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20쪽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단편 소설이 소설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량상 다룰 수 있는 이야기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거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또 대단한 이야기라고 해도 일부만 표현할 수 있다.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영역이다. 대신, 작가는 기법과 배치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떤 단락을 어디에 두는지가 단편 소설을 쓰는 이들에게는 늘 치열한 고민의 대상이 된다. 정직하게 사건의 시작을 초반부에 서술하는가 하면, 이 작품처럼 서술자의 감상을 우선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선택도 정답이 없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그 자유로움 속에 책임이 담겨 있으니까.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으니, 그 삶이 반영된 실험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여러모로 즐거운 체험이었다. 트루먼 커포티, 당신의 생애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는 결국 말보다는 글로, 글보다는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참 어렵다. 당신의 실패는 내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담담하게 전한다. 네가 네 삶의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여겨져도, 끈질기게 살아내자. 마음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다시 훨훨 날아오르자. 어떤 고독과 결핍도 너를 제거할 수 없으니, 비록 짓눌리고 위축되어도 펴자. 이제 당신은 죽어서 대답할 수 없으나, 살아 있는 나는 담대히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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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공격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3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빛소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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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는 비정한 자연의 원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양식으로 알려져 있고, 에밀 졸라는 그것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그의 장편 소설에 익숙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졸라의 단편선에 사뭇 놀랐다. 처음에는 「방앗간 공격」이 장편 소설인 줄 알고,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음 장에서 바뀌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대로 끝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갓 약혼한 도미니크와 아버지, 그리고 삶의 터전이었던 방앗간이 프로이센군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의 운명이 가혹한 탓에 소설가가 그것을 보상해 주길 바랐으나, 전쟁은 현실에서도 그랬듯이, 평범한 자들이 영위한 터전을 앗아가 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참혹함에 분노했다.


 첫 번째 작품의 여운이 가시고, 내가 구매한 이 책이 단편선임을 알게 된 이후에는 조금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작품은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이었는데,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붕괴 사고가 일어남으로써 주인공은 흙더미에 깔려 생존을 갈망한다. 오늘날에는 각종 시나리오에서 많이 다루어져서 신선한 맛이 덜하지만, 터널과 기차라는 문명의 이기가 군중의 삶을 파괴한다는 소재는 꽤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 주인공의 사투를 무릅쓰고 그를 끝내 죽이는 결말은 나에게 씁쓸한 여운을 주었다. 


 이 두 작품의 비극에 비해 나머지 세 작품은 비교적 일상적이다. 그렇다고 「나이스 미쿨랭」에서 주인공이 내린 결단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폄하할 수 없다. 또한, 「샤브르 씨의 조개」에서 은밀한 일탈을 저지른 엑토르와 에스텔, 수르디 부부의 합작이 사소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건들은 그들의 인생에 매우 중대한 일들이었다. 에밀 졸라는 각 인물이 내리는 선택이 서로에게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 세밀하고 정감 있게 묘사한다. 때로는 차가운 사실만 전달하다가도, 따뜻한 유머를 섞기도 하다.

 

 결국 하나의 '주의'로 작가의 모든 경향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연주의는 배경이자 지향점일 뿐이다. 에밀 졸라 역시 조금 모자라지만, 기꺼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친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반드시 혁명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소설만 쓸 필요는 없다. 작가가 행동적인 삶을 살았고,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인 것은 진작에 알았다. 이 단편집을 통해 에밀 졸라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다. 그는 경직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는 친절한 이야기꾼이다. 때로는 마음을 쓰리게 하고, 때로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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