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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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형제 동화전집』과 『안데르센 동화전집』을 한 번에 사서 각각 비교하며 읽는 체험은 분명 특별했다. 전자가 동화치고 훨씬 잔인하고, 후자가 따뜻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나, 넓게 보면 독일의 동화와 덴마크의 동화는 그 대담함이나 상상력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은 당대의 통념을 깬 이야기를 제시했으며, 그 방식이 다양했을 뿐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자신에게 인상을 남긴 이야기를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에 이어서 성냥팔이 소녀와 인어공주의 사연을 들은 이들은 동화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안데르센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한다. 


 당연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동화들은 이미 익히 알려진 우화들은 아니다. 얼마 전에 안데르센의 생애에 대한 연극을 관람하기도 해서, 그가 쓴 이야기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찾아내는 대신, 그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관점을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가 거짓말쟁이와 어리석은 인물에 대한 웃픈 동화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또 유명한 「눈의 여왕」이 여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악마의 거울 파편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저 바깥 세상에는 아직도 작은 거울 파편들이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거울 파편들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릴 것이다"(267쪽)이라는 구절은 세상에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 많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안데르센의 동화들 중에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것들도 있지만, 상상의 파편들을 엮어놓은 동화들이 적잖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160번째 이야기인 「ABC 책」이다. 여기에는 언어의 힘에 대한 안데르센의 생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알파벳이 갖는 힘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모든 것이 알파벳이 나열되는 순서에 의존한다. 알파벳은 생명을 주거나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줄 수 있는 힘도 있다"(1153쪽)는 구절에 이어서 A부터 Z까지 각 철자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나열하는 장면은 흥미로우면서도 날카롭다. 확실히 그의 이야기들에는 당대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풍자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 동화에 대한 나의 감상은 여전히 "따뜻하다"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가난과 모욕, 외로움과 오해 속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동화 속에는 좌절과 절망을 담지 않았다. 혹자는 인어공주와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이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어른들의 생각이야말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안데르센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도피처 같은 환상의 세계나 하품부터 나오는 교훈 대신, 냉철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기에,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상의 조각도 기꺼이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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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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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터 캐리』는 서로 다른 꿈을 향해 달려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캐리는 가족을 등지고 도시로 향했고, 허스트우드는 그런 그녀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대도시로 간다. 하지만 그 선택은 자신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비정한 세계에서 헛된 꿈을 좇은 자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캐리에게는 능력과 야망이 남아 있었고, 그것을 간직한 채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비평가들은 부도덕한 캐리가 도리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작품의 도덕관이 잘못 되었다고 비난했지만, 그들은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드라이저가 제시한 냉혹한 사회에서 젊음과 능력을 모두 잃은 캐리에게 어떤 미래가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노력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에 잇따르는 보상을 얻는다는 허황된 꿈을 믿었을 것이다.


 내가 『시스터 캐리』를 보면서 가장 피부로 와 닿았던 점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비전이 결국은 헛되다는 지점이었다. 캐리가 드루에의 도움을 받기 전, 그녀는 구두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지만, 열악한 생활 환경과 낮은 임금은 삶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드루에와 허스트우드과 관계를 맺고, 그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캐리의 모습, 마침내 허스트우드의 제안을 따라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옮겨갔을 때 그녀가 느낀 가난의 압박들은 어떤 스릴러보다 숨이 막힌다. 벌이는 없는데 잔고는 줄어들고, 일자리를 구한다고 장담하던 허스트우드가 빈 말만 반복했을 때, 캐리는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투쟁해야 했다. 이 도시에서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녀가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뒷줄 어딘가에 배치되었다가, 동료들을 제치고 앞줄에 서게 되고, 마침내 조명을 받는 주연 배우로 성장하는 데에는 열정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요소가 존재했다.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성공한다는 환상은 사실 선택받은 계층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이 작품에서 드라이저는 캐리의 내면에 대해 치밀한 묘사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서사에 반영한다. 대표적인 것이 전차 파업과 허스트우드였다. 한때 호텔의 매니저였던 그는 생전 다루어보지도 않은 전차 운전을 급하게 배워서 현장에 투입된다. 그러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배신자로 간주하여 그를 비난하고, 급기야 그를 끌어내어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군중들이었다. 이로 인해 간신히 직장을 구하나 했던 허스트우드는 더 곤궁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중산층인 허스트우드가 빈곤층으로 몰락하는 과정 속에 혼란스러운 미국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어 등장인물들이 시대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캐리와 드루에, 허스트우드는 모두 제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캐리는 배 위에 타서 목숨을 건지지만, 흔들의자에 앉아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 자신이 추구했던 목표가 헛됨을 인식한다. 드루에는 예전처럼 부도덕하게 살아가고, 허스트우드는 그 물살에 휩쓸려 익사한다. 그외에도 그들의 주변 인물로 언급되었던 이들은 유령처럼 소모된다.


 확실히 나는 자연주의 소설들이 품고 있는 냉철한 시각에 매료되었다. 신의 은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 오직 개인의 힘으로 생존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조차 자연의 힘에 의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다는 인식, 그렇기에 미래나 과거에 대한 감상에 젖지 않고 지금의 상황에 충실하는 모습 등은 나에게 몇 가지 영감을 준다. 그래서 내가 작가들이 취하는 입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약자에게 한없이 냉혹한 것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복지의 체계화로 설명할 수 없는, 가난하고 약한 자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에 힘을 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가끔은 기꺼이 손해 보고, 기꺼이 실패해도 괜찮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위해 손을 뻗어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믿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손을 뻗어야겠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이들은 시스터 캐리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결말을 맞이할 테니 말이다. 어쩌면 허스트우드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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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형제 동화전집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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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완역본을 보고 들떠서 이 시리즈를 구매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책의 뒷면에 소개된 『그림형제 동화전집』과 『안데르센 동화전집』에 매료되었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거의 다 유랑한 지금, 나의 마음속에는 안데르센의 동화가 훨씬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라는 결론과 그림형제 동화가 조금 더 많은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결론을 동시에 품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기에, 지나간 이야기를 보는 것은 어쩌면 고리타분하거나 뒤처진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영감을 준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이 책을 되짚어보려고 한다.


 19번째 이야기, 「어부와 그의 아내」는 소원을 들어주는 가자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부가 우연히 가자미를 잡게 되는데, 그 가자미는 자신을 놓아주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 어부는 소원을 빌지 않고 가자미를 놓아주고, 이 사실을 아내한테 말하자 아내는 당장 가자미를 다시 잡아 소원을 빌라고 재촉한다. 실제로 가자미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어부의 아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더 큰 소원을 요청한다. 마침내 그녀는 신이 되게 해달라고 어부를 재촉하고, 어부가 그 말을 가자미에 전달하는 순간,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동화의 오랜 소재인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어쩌면 그 흔한 소재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동화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78번째 이야기인 「노인과 손자」는 효(孝)와 관련된 동화이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있었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를 난로 뒤편에서 밥을 먹게 하고 진흙으로 빚은 접시에 음식을 준다. 어느 날 노인이 접시를 깨뜨리자, 며느리가 잔소리를 퍼붓는다. 얼마 후 어린 손자가 방바닥에서 나뭇조각을 짜맞춘다.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크면 부모님께 드릴 음식을 담을 여물통을 만들고 있다고 대답한다. 즉, 아이는 자신의 부모가 할아버지에게 가한 푸대접을 보고, 나중에 똑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부모는 눈물을 쏟고, 이후 아버지를 정성으로 보필한다. 불효자들은 자식들에게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할 수 있는 사실을 1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으로 풀어내어서, 꽤 여운이 남았다. 


 164번째 이야기인 「게으른 하인츠」는 말 그대로 게으른 성격의 하인츠와 그의 아내 트리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로 게을러서 집안일을 소홀히 하고, 자신들의 게으름에 대해 변명하는 모습이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167번째 이야기인 「천국에 간 농부」에서는 가난한 농부가 천국문의 입구에 도착한다. 그는 먼저 입장한 부자가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똑같이 대접받을 것을 기대했지만,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이에 그는 성 베드로에게 천국이 지상에서처럼 일부 사람만이 편애를 받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천만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당신은 부자와 똑같이 천국의 모든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당신처럼 가난한 사람은 매일 오지만, 아까 온 사람 같은 부자는 백 년에 겨우 한 사람밖에 오지 않는답니다. (873쪽)

 그림형제 동화와 안데르센 동화 모두 성경의 가치관에 기반한 동화가 많다. 그중에서 이 동화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성경 구절에 영감을 받은 듯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이 176번째 이야기인 「수명」이다. 신이 모든 피조물의 수명을 정하고 있을 때, 나귀와 개와 원숭이는 수명을 줄여달라고 요청하고, 인간은 30년이었던 자신의 수명을 늘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처음 30년은 인간의 수명으로, 이후의 18년은 나귀의 수명으로, 다음 12년은 개의 수명으로, 나머지 10년은 원숭이의 수명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귀의 수명일 때는 온갖 수고를 맡고, 개의 수명일 때는 구석에서 불평만 늘어놓고, 원숭이의 수명일 때는 바보가 되어 웃음거리로 살아간다. 아이들의 동화라기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림형제 동화가 인생에 대한 성찰을 풍부하게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의 동화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무겁거나 지나치게 잔인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안데르센 동화보다 훨씬 냉혹하게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상력은 언제나 세계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동화 전집을 읽은 이유도 그 당시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하지 않았는가? 나에게도 큰 도전이고, 이러한 동화들을 모아 출판하려는 출판사의 의지도 큰 도전이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전 세계 곳곳에서 시작한 생각의 흐름을 이어보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찾아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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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 나사의 회전 외 7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1
헨리 제임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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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제임스 조이스를 필두로 한 모더니즘 문학에 굉장히 매료되었다. 나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자와 주인공의 경계를 넘어서며 독자를 이야기에 참여하게 하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쓰기는 쉽고, 읽기는 어려운" 기법에 익숙해졌다. 이것을 너무 관성적으로 쓰다 보니, 작중 인물의 의식을 파고드는 행위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더니즘 문학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작중의 세계와 현실이, 독자와 등장인물이 철저히 구분되기를 원했고, 만약 작가가 실제와 소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1인칭 시점을 써야 했다. 이 문학적 전통을 함부로 깨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떤 이들은 취미 생활을 위해 글을 썼지만, 역사에 기록된 소설가들은 대개 인생을 걸고 창작에 임했다. 그들에게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고 누가 강요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헨리 제임스를 너무 늦게 알았다. 『데이지 밀러』나 『나사의 회전』 등의 작품에 대한 소문만 얼핏 들었지, 그 작품들을 직접 읽지도 않았고, 그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현대 소설을 정의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배운 것이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만 파고들고,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배우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악습이 다시 나왔다. 영미권 독자들도 그의 소설을 어려워 한다. 아무리 번역이 유려하게 되었다 한들,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을 연단한 장인의 솜씨를 단번에 깨우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나사의 회전』은 공포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 무수한 재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지 않은가? 그 분량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은, 헨리 제임스가 소설 곳곳에 치밀한 장치를 배치했음을 알게 한다. 역자의 해석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이 소설을 평범한 공포 소설로 이해했으리라. 


 역자는 「중년」의 가장 유명한 문장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로 시작되는 덴콤의 말이라고 설명하지만, 나에게 더 인상 깊은 것은 그 이후의 대화이다.


 "만약 선생님이 의심을 하고, 절망을 했다 하더라도, 선생님은 언제나 그것을 '해내셨습니다.'" 방문객이 미묘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을 합니다." 덴콤이 인정했다.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이 결국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럴 법한 것이고, 그것은 선생님 당신입니다."

 "위로를 주려고 하는 자여!" 불쌍한 덴콤이 냉소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진실입니다." 그의 친구가 고집했다.

 "그건 진실이지요. 좌절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좌절이야말로 삶입니다." 휴 선생이 말했다. (p. 290)


 대화 중간에 언급되는 '어떤 것 혹은 다른 것'(something or other)이 결국 모더니즘 문학의 정수이다. 소설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고갈되었다는 이론이 유행하던 당시, 헨리 제임스는 아직 우리가 표현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고 주장했다. 단지 그것을 언어로 포착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의 역량이 부족할 뿐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문학들은 모두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이해에 가까워진다. 그 미묘한 과정을 카버는 '어떤 것'(something)의 변화로 설명한다. '어떤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직접 말하는 대신,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황의 변화, 등장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독자가 유추하게 만든다. 헨리 제임스는 그 추리의 과정에 독자가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설에 참여하는 것이라 믿었다.


 혹자는 이러한 알쏭달쏭한 기법에 질색을 하기도 한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떠맡기다니,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머리를 식히려고 소설을 읽는데, 왜 굳이 어렵게 쓰느냐?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따지기도 한다. 그렇다. 창작자보다 예술을 진지하게 임하는 이는 없다. 모두에게 남의 예술은 가벼운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현실의 일과 무관하다는 주장에는 반박하고 싶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이 결국 이 삶의 실천에 이바지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거의 모든 소설가에게 적용되는 가치관이다. 타인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삶에 충고하고 간섭하겠는가? 단지 "이렇게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할 뿐이다.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철저히 독자의 몫이다. 예술이 선전이나 세뇌를 위해 사용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의 가치를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작품이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창작되기를 원치 않으리라.


 의식의 흐름 기법은 헨리 제임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작가를 설명하는 수십 가지 방법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현대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문학적 관습과 전통을 깨기 위해 그는 많은 비난을 감수했다. 그가 걸었던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그의 노력 덕분에 뒤이은 모더니즘 문학들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로 채워졌다. 누군가가 그 길을 걸었기에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가 길을 터주었기에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어떤 한 사람이 세운 공에 눈길이 갔다면, 지금은 그 공을 이루기까지의 배경에 더 관심이 간다. 텍스트(text)보다 맥락(context)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평이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그 말에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은빛 라이닝은 일반인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 비교해 보면 너무 추상적이라고 거듭 말하면서 그것을 피난처로 삼았다. "그건 당신이 그것을 흘낏이라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것을 한 번이라도 엿본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것이 당신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될 겁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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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프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알렉산더 포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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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확실히 영화를 보든, 소설을 보든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것에 더 여운을 느낀다. 물론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알렉산더 포프가 어느 시대에 활동했고, 토리당 소속이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각 시에 담겨 있는 의미까지 알 수는 없었다. 해설을 보고 나서야 그가 왜 이런 식으로 시를 썼는지, 이런 내용을 담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나의 부족한 문학적 역량이 어느 정도 보완되고 나니, 그가 꽤 뛰어난 시인임을 알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포프가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속한 토리당은 일종의 보수 정당이었기에, 그가 시대의 변화와 그것을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시의 소재들로 귀족에 대한 찬사와 칭찬, 안정된 사회에 대한 소망 등을 담았다. 시의 구조 역시 2행 연구 형식으로 동일성과 조화, 균형을 추구했다. 이러한 해설의 내용들은 나에게 꽤 좋은 정보를 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보면서, 왜 그가 이렇게 이 인물들에게 헌정시를 바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노력들이 모두 기존의 사회 질서를 곤고히 하려는 의도였다니, 시 내부에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 사실들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선 포프의 노력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다시 조명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풍자적 시선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성찰할 지점을 제공한다. 그의 대표작인 「윈저 숲」이 그러한 경우인데, 마지막 부분인 "우리의 영광은 지구의 먼 끝 지역을 바라볼 것이며, 신세계는 구세계를 보기 위하여 배를 진수할 것이다"에서 그는 무역과 항해로 전 세계에 영국의 미래를 꿈꾼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사실상 식민지에 대한 주도권을 얻으려는 전쟁이었고, 토리당은 전쟁이 끝난 후 맺는 조약으로 자유무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포프에게는 그 소식이 상당히 희망적이었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윈저 숲」의 마지막 부분은 마냥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포프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당대 시대의 변화에 맞선 행위가 오늘날에 재평가된 것이다. 


 포프는 상당히 정치적인 시인이다. 그래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대를 비판한 시인들에 비해, 그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문학은 대부분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권력 계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필요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구절들이 지금에 와서는 납득이 되듯이, 당장의 언행으로 어떤 사람의 행적을 판단하는 일은 다소 무모하다. 스위프트 역시 정치적으로 굉장히 편향되어 있으나,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걸리버 여행기』에 담긴 불멸의 풍자로 기억되지 않은가? 언젠가 알렉산더 포프도 그러한 통찰력으로 조명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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