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심문관의 비망록 -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소설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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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반드시 시대를 반영한다. 제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작가의 삶에 드리운 시대의 그림자는 그가 창조한 세계에 그대로 투영된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과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의 비망록을 보고 있자면, 포르투갈이라는 내가 한때 동경했던 나라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다.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으나, 힘을 갖지 못하면 섬과 같이 고립되어 버리는 나라, 제국주의의 무력으로 시대를 호령한 적 있으나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국가, 모든 개혁과 혁명에 대해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포르투갈의 지성들이 바라보는 조국의 적나라한 모습은 그들의 적대적인 비평가가 우려했던 사항들 그대로이다. 나는 『대심문관의 비망록』을 통해 길을 잃은 포르투갈의 현실을 엿본다.

 

 제목은 엄밀히 말하면, 대심문관의 매뉴얼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유명한 에피소드 탓인지, 또는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 때문인지 비망록이라는 무게가 주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독자를 매혹한다. 그러나 진술을 들어 보면, 종잡을 수 없는 화자들의 회고가 마치 강압과 고문에 의해 강제로 서술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침표 없이 끝없이 늘어지는 문장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사는 화자들의 정신 상태가 하나같이 온전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의 수기를 배껴 쓰는 느낌도 받았다.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세계관 속에 인물들의 이야기가 녹아들면서도 복잡하게 얽힌 관계도를 쉽게 정리하기 힘들었다.


 주요 화자로 등장하는 주앙, 티티나, 파울라, 밀라, 그리고 모든 사건의 원흉인 프란시스쿠는 모두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파시즘은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파괴했다. 시장에 거주하는 여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무고한 이들이 학살 당하고, 고문을 겪어야 했다. 올바르지 못한 자들에게 쥐어진 권력은 그토록 잔혹하게 사람들을 무너뜨린다. 인상 깊은 서술자는 호메우인데, 그는 정신지체를 앓는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그것이 꽤나 담담하게 진술되고 있어서 기괴한 인상을 준다. 이밖에도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학대와 고통을 진술하는 이들의 기저에 있는 고통이 전달된다. 그러면서도 악행을 저질렀던 프란시스쿠 역시 비참한 말로를 보내는 것을 보고 왜곡된 시대 정신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인생을 흔들어 놓는지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각 나라는 저마다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포르투갈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 전역을 휩쓰는 사상의 대립과 증오의 물결을 통과해야 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상처 받고 결핍이 있는 자들의 처절한 사투였다. 나는 그런 상황일수록 시대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문제인가? 나를 범죄자 취급하고, 폭행하고, 고문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이다. 시대의 흐름에 타협하는 것이 그토록 나쁜 일인가? 정확한 판단은 역사가 한다고 하지만, 그 말은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서로를 판결하고 처벌하는 20세기 최대의 사상 전쟁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판단이 어렵다.


 결국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선 시각을 가져야 한다. 안투네스는 시대 정신에 굴복한 자들의 비망록을 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지녀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적대자들을 용납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아야 하니까. 우리가 그토록 고되게 쟁취한 민주주의 본질은 결국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한다"가 아닌가?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상대를 통제하고 비난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을까? 그 정도로 지금의 사회는 성숙한가? 만약 이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은 역경을 거쳐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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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30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진국인 유럽도 17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종교전쟁과 영토전쟁 그리고 각 국가별 내전이 있어서 힘든 시기를 보낸적이 있다고 하지요.그런데 이웃 스페인 내전은 무척 유명한데 포루트갈은 어떤 아픈 역사가 있었는지 세계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당최 나질 않네요ㅜ.ㅜ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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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은 실로 인간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괴베클리 테페'나 고대 건축물 등은 건축이 인간이 살아가는 양식의 결정체이자 문명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장 공감했던 것은 도로의 차선이 늘어날 수록, 마주 보는 공간의 거리는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신호등과 지하 차도가 잘 발달되어 있어도, 우리는 건너지 못하는 차선 너머의 공간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도시를 바라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시각은 접근 자체가 다를 것이다.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유튜브를 통해서였다. 이 글을 쓸 당시인 2018년에는 유튜브 시장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아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약 4년 전부터 꾸준히 영상을 게시해 왔다. 그를 구독하지는 않았고, 내가 본 컨텐츠를 리뷰하는 영상으로 많이 접했는데, 건축가이지만 동시에 인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종종 보인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도 그의 철학적 단상이 종종 담겨 있는데, 정통 인문학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하는, 그러면서도 전문 지식이 부족하지 않은 저자의 역량에 놀랐다. 그는 건축가이자 교수지만,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목적도 "화목한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이 책은 건축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담기보다는 건축을 중심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인문 서적에 가깝다.


 우리 모두가 유현준 교수처럼 전문적으로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팔방미인처럼 다양한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분투할 수는 없다. 죄다 똑같이 생긴 건물은 많고, 예술성을 갖춘 건물은 적은 이유도 그것에 있다. 누군가는 돈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건축물은 특별한 목적성을 가지고 지어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창의성과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건축적 역량을 가진 인재가 드물다. 한편, 건축을 전공하면서 인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이 지으려는 건축과 전혀 무관해 보인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어떤 건축물이든 세상의 법칙과 문화와 무관하게 우뚝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고층 건물도, 초라해 보이는 주택도 모두 사회적 맥락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아직도 집을 그저 '거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인식에 대한 필자의 탄식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진 채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에는 책임이 있다. 한 번 알게 된 이상,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아는 만큼 바뀌어야 한다. 무단횡단과 불법 쓰레기 투기가 도시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또는 환경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 일을 멈추어야 한다. 도시마다 고유한 가치를 지녀야 하며, 선진국의 성공 사례를 무작정 답습하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말에 반응하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학교 공간을 시민들에게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아이들이 공원처럼 누비게 하라는, 감옥 같은 디자인에서 벗어나라는 조언을 실제 정책에 반영하려면, 정말로 내가 아닌 미래 세대의 아이들을 아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멀리 떨어져서 정보를 추출하는 데에 급급하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매체를 접할 때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교류할 때마다 기꺼이 삶의 기준을 바꿀 준비가 된 사람에게 세계에 대한 풍부한 인식이 열릴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살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뗄 수 없다. 모두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정답이라고 외칠 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집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답이라고 간주되는 인생의 경로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싶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은 똑같은 공간을 다른 식으로 사용할 것이다. 겉보기에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럴 때는 타인의 공간을 사용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살펴보자. 아무리 땅이 많은 사람이라도, 집 밖을 벗어나면 남들이 가진 땅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설령 모든 땅을 보유한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구축한 세상에서 영위해야 한다. 나는 그것에 감사해 하는가? 나를 있게 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인정하는가? 삶의 기준을 바꿀 때, 기존의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좋으니, 한 번쯤 내 세계관을 바꾸는 도전을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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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8
제인 오스틴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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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인 오스틴을 오랫동안 오해했다.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이성과 감성』,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여러 시기에 걸쳐 그녀의 작품을 읽었건만, 정작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몰랐다. 심지어는 오스틴의 작품 주제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대의 가치를 담지 못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소위 말해, "이게 왜 명작이야?"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설득』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가 염원했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연애 결혼, 즉 연인의 사랑이 발전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의 관점에서, 현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었고, 상상력이 뛰어났는지 보게 된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상속권은 장자에게만 있었고, 여자는 결혼하지 못하면 집안을 전전하며 가사를 보필하거나 가정교사를 일을 하며 하녀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결혼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고, 사랑에 이끌려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 또는 상호 간의 계산으로 결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스틴 역시 선택해야 했다. 청혼을 받았을 때, 그것을 택하고 당대의 많은 이들이 걸었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사랑 없는 결혼을 거절하고 어려운 길을 갈지. 그녀는 후자를 택했고, 친척의 집안일을 도우며 일부 못된 이들의 천대를 견뎠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모두가 감정이 아닌 의무로, 사랑이 아닌 계산으로 결혼을 하던 시기에 자신들의 감정을 충실히 따라가는 남녀의 로맨스는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현대식 로맨스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게 뭐라고 그렇게 대단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바로 그 해묵은 질문이 제인 오스틴을 위대한 작가로 만든다. 놀라운 상상력을 내세우지 않고,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힘, 우리가 시시콜콜한 대화로 여기는 장면들 하나하나조차 그녀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 각색하고 수정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로 제인 오스틴을 읽었다면, 큰 오산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근대식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 부드러운 힘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혁명이 좋았다. 현 시대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다소 급진적인 변화로 체제를 무너뜨리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부당함에 침묵하기보다는 그것에 치열하게 맞서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본질은 끝없는 투쟁과 불안이다. 『설득』에서 앤과 웬트워스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지만, "불안과 걱정이라는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는 결말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현실은 동화나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새로운 기득권이 탄생하고 그들은 또 다시 투쟁의 대상이 된다. '이번에는 다르겠지?'라고 기대해도, 세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불안은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드러운 힘을 의지한다. 누군가는 막연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르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 바람이 당장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점진적으로 나아질 것을 믿는다. 나에게 남은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부드럽다. 그 단어에 우리는 안도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도,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사랑 앞에서 녹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시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지도 않다. 사랑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는 문학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작품도,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과 욕망을 지적하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인간 본연이 지닌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도 귀중하다. 제인 오스틴은 바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혹자로부터 오해를 받았지만, 결국 그녀가 옳았음이 드러났다. 당대의 다른 연애 소설이나 정사보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로맨스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설득력 있는 까닭은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해도가 탁월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번째 작품인 『이성과 감성』과 『설득』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상황을 담아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귀족 가문의 개인사가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도록 했다. 또한, 여성 작가로서 시대의 불합리함과 불평등한 입지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한 시선조차 품어냈다. 남성의 결점을 특별하게 과장하지도 않았고, 여성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오스틴의 대담함과 솔직함은 이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만들었다. 요컨대, 제인 오스틴은 소수의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면서도 시대적 흐름을 놓치지 않아 당대의 어느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단과 약점을 균형감 있게 조명해 어느 시대의 독자라도 불편함 없이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작품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고, 그 대신 타인을 위해 헌신한 오스틴 자신의 삶이다.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우연히 좋은 작품 한 편을 쓰는 사람은 참 많다. 그런데 왜 그 재능이 오래 가지 못하는가? 왜 좋은 삶을 살아내는 작가는 이토록 부족한가? 이제는 알고 있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가진 것도, 현 시대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쓴 글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 소설가가 지닌 메시지가 미약해 보여도, 그것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리고 메시지와 삶이 서로 통한다면,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이 부디 사랑의 의미를 축소하지 않기를. 사랑을 그저 남녀 간의 이끌림이나 육체적 욕망으로 치부하지 않기를. 문학은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메시지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이미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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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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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요지경이라는 말을 체감하는 것은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된 이후였다.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될 때마다 나의 이해도가 참 보잘 것 없음을 느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사회로 나가면서 나의 인간 관계는 복잡해졌고 그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은 많아졌다. 돌이켜 보면, 왜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살아갔는지 놀랍다. 왜 그토록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 받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과 반드시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쩌면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퀴즈쇼』의 등장인물들이 퀴즈를 맞추는 일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정답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회자의 물음에 순발력과 정확성을 발휘하여 정답을 맞추면, 내 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을 패배시킬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은 승자의 영광을 정당하게 차지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부와 명예를 취한다. 그것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하나의 '쇼'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도무지 쓸모 없다고 여겨졌던 잡다한 지식과 평소에 허비했던 시간에 수집했던 정보들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순간, 사람들은 전례 없는 짜릿함과 성취감을 맛본다. "내 인생에 헛된 순간은 하나도 없었구나! 나의 방황과 실패도 이렇게 결실을 맺는구나"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 말을 하는 순간조차도 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또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불화와 음모와 폭력을 외면한 채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과 이름인 '이'와 '민수'를 사용하여 주인공의 이름을 설정한 까닭은, 그가 겪었던 기묘한 사건들이 사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금 대상을 좁히자면,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나서도 인생의 정답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 『퀴즈쇼』의 줄거리는 달콤한 환상과 같다. 대학원을 졸업했으나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짠내 나는 고시원 생활을 하는 이민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인터넷 채팅방에서 벌어지는 퀴즈 대결이었다. 그는 옆방 여자의 선의에 힘입어 퀴즈 프로그램 피디를 진행하는 서지원과 교제한다. 그녀는 부유하고, 여유도 많고, 사랑이 넘친다. 또한, 이춘성의 제안을 받아 약 세 달간 '회사'에서 퀴즈쇼 출전을 위한 시간을 보내며 잠깐이나마 성취감과 돈을 얻는다. 그곳을 극적으로 탈출한 후에 그는 평범하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다. 옆방 여자, 서지원, 회사, 이 모든 것은 이민수의 노력보다는 순전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주인공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만 반복한다. 김영하 작가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청춘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려는 듯 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청춘은 정말로 바보 같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인생을 낭비하고,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젊음은 실로 젊은이에게 주기에 아까운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정말로 완고해서, 아무리 충고를 듣고 고통을 겪어도 그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작가도 그 사실을 아는지, 『퀴즈쇼』에서 젊은이의 삶을 고스란히 담되 어떠한 조언이나 교훈을 이끌어낼 의도는 추호도 없다. 거듭해서 실패하는 이민수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여기고 보라는, 무언의 떠밀기만 느껴진다. 그것에 대해 젊은 독자는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한다. "나는 이 사람과 달라"라는 부인 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공감 속에서, 대개는 더 쉬운 길을 고른다. 그리고 창작자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서지원을 통해, 어떤 길을 택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의 청춘이 어리석은 이유는 언제나 정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라고 인정해 주는 사회자가 없을 뿐이다. 정해진 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계는 이춘성이 구현한 불완전한 퀴즈 지옥(나는 이민수가 다녀온 소사회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보다 이유가 중요하고, 결과보다 과정이 의미 있으며, 성공하는 법보다 실패를 극복하는 법이 삶을 살아가는 데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모든 청춘이 그 해답을 발견하면 좋겠지만, 고시원의 옆방 여자처럼 끝내 찾지 못한 이들도 있다. 나는 어떤 교훈도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든 인생을 살아가 주면 좋겠다. 남아 있는 기회가 있기에, 우리는 젊음을 낭비할 권리가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젊음이 지나가고 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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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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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줄곧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에 매료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고, 『페스트』가 그랬으며, 『율리시스』가 그랬다.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고, 다양한 군상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그 공간은 모순적으로 나를 매료한다. 나는 도시에 살기를 원치 않으면서 도시에 살기를 선택한다. 도시의 체계에 대해 늘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뒤에는 각종 추악한 범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만족한다. 현재로부터 약 100년 전에 묘사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속 베를린의 모습은 서울 내지는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이 고전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주인공 프란츠는 분명 선한 인물은 아니다. 전과가 있고, 출소한 이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의 주변 인물인 라인홀트나 미체도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다. 작중에 묘사되는 범죄자들 역시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도시는 이 모든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화려한 조명의 도시 아래에 그림자가 필연적이라는 듯,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작가인 알프레트 되블린이 묘사하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성경 구절과 한낱 유행가가 한데 어우러지는 장소가 된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한다.


 역사 의식에 대한 생각을 빼놓을 수 없다.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4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프란츠 비버코프의 행적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감과 가난에 고통 받았던 독일 자체를 연상시킨다. 서술자가 프란츠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듯이, 되블린은 독일의 과오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어딘지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그러나 피조물의 범죄를 지켜보는 창조주처럼, 프란츠의 범죄와 고통과 심판에 대해 작가는 냉정하게 그 흔적을 따라간다. 소설 내에서 전쟁에 대해 언급되는 장면은 많지 않아서 현대의 독자는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쟁의 여파가 모든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작중의 모든 인물은 패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소설가는 광고나 유행가 등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인용하여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려는 독일 시민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상징은 '도살장'이다. 도축되고 싶지 않아 저항하는 이들, 그러나 제사의 순서대로 정결하고 기계적으로 도축되는 가축들이 묘사된다. 어쩌면 작가는 도시 속의 인간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올라왔지만, 그래 봤자 먼저 도축될 뿐이라고. 도시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억압하는 자와 차별 받는 자를 모두 품어주는 이유는 그것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정하기 때문이라고. 분명 인간 속에는 한 도시, 한 우주와 같은 무수한 가능성과 생각이 있지만, 한낱 칼날 앞에 스러질 뿐이라고. 비관론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시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도시가 아니라면 사람들 틈에서)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가? 타인을 살해하고 난봉꾼처럼 살아가는 프란츠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가축과 같은 존재인가? 살아가도 된다는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작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인용해 본다.

 고인들에게 명복이 있기를. 베를린에서는 1927년에 사산아를 제외하고 4만 8782명이 죽었다.

 4570명은 결핵으로, 6443명은 암으로, 5656명은 심장병으로, 4818명은 혈관 질환으로, 5140명은 뇌졸중으로, 2419명은 폐렴으로, 961명은 백일해로 죽었고 어린아이들 중 562명은 디프테리아로, 123명은 성홍열로, 93명은 홍역으로 죽었으며 그 밖에 3640명의 영아가 죽었다. 총 출생 수는 4만 2696명이다.

 죽은 사람들은 공동묘지의 자기 무덤에 누워 있고, 묘지기는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다. (p.609)

 지금도 이 도시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그만큼 죽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숫자로 집계된 사람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도시와, 저마다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운행되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는데, 나의 삶은 전혀 변동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그 신비함에 다시 한 번 잠잠해진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나의 거창한 다짐과 행적은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이들에게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며, 죽음이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 일과 같이 일상적이다. 생명과 죽음, 쾌락과 고통, 편리와 불편이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나는 어떤 것을 보려고 하는가?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들은 나에게 언제나 질문한다. 그리고 말한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단지 선택하라고. 도시를 구성하는 통계 속의 인간이 될 것인지, 그 마음 안에 도시 전체를 품는 자로 살아갈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기에 적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와 책임은 내 삶에 고스란히 드러날 따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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