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한가운데 - 윈스턴 처칠 수상록
윈스턴 처칠 지음, 조원영 옮김 / 아침이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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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통에도 책은 읽어야 한다. 아니, 전쟁이 한창일수록 책을 읽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는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안타깝지만, 그 지혜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좋은 책만 읽는다고 얻어지지도 않는다. 많은 좋은 책과 소수의 나쁜 책을 읽음으로써 비판적인 사고를 확보해야 하며, 어떤 현상에 공감하는 동시에 거리를 두고 분석하는 힘을 얻는다. 그 끝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으로 주변 사물과 사람을 이해하는 어떤 '정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은 꽤 일리가 있다. 윈스턴 처칠의 수상록을 보고 있자면, 그의 글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끔, 그리하여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설득하고 있다.


 처칠은 실패도 많이 겪었고, 실수도 많았다. 대신, 그만큼 역사에 기록될 업적과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의 개인사가 이토록 굴곡진데,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었을까? 하지만 그의 정신은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고취되었다. 역경과 갈등을 겪을수록 그는 무엇이 더욱 중요한지 선명하게 보았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힘을 가졌다. 현재 사람들의 동향과 지향점에 대해 유독 민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십년 후의 세계'라는 장에서 처칠의 통찰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물질적이 풍요도 인류의 이성이 눈뜬 이래로 품어온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풀어주지 못한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p.404~405)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문제에 직면하고 부딪혀야 한다. 처칠은 정치가였기에 그의 모든 도전들이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에 아파하긴 했으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를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혹자는 그를 영웅으로 여기지만, 그는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았다. 

 영웅이 역사를 만들어내는가, 아니면 그들은 단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거대한 집단의 선두에 서 있을 뿐인가? 인류의 발전은 개개인의 불굴의 의지와 그들이 이룬 업적의 결과인가, 아니면 이러한 의지와 업적 자체도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낸 작품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란 걸출한 남녀의 연대기인가, 아니면 단지 시대의 흐름과 성향, 기회 등에 부응해온 그들 삶의 기록인가? 세상을 밝혀주는 이상과 지혜를 몇몇 탁월한 개인의 작품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말없는 다수의 삶이 농축된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p.367)

 당연하게도 개인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개인이 역사의 주체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그라진 이들의 삶과 행적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인간의 미약한 지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처칠의 사소한 선택 또는 중대한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보는 세계사이며, 거기서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당장은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반드시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선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에 살았던 모든 조상들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모두 껴안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까닭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갈수록 "나는 중요하다"라고 외치는 것이 많아지는 시대이다. 일시적 명예에 만족하지 못한 시대는 구독을 요구한다. 자본의 충성이야말로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어서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것들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정말로 옳은 길이 맞을까?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늦지 않으려면, 돌이킬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야말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최적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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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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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면 물리학에 관련된 책처럼 보이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아니나 다를까 인류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열역학 제1법칙(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없다"와 제2법칙(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을 이용해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어찌 보면 대담하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21세기에도 그는 불변의 법칙을 정립하여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무질서를 없애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무질서를 더할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접근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라니,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니, 얼마나 절망적인가?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맞으면 좋겠다. 20세기 말미에 나온 이 책의 예측이 틀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리프킨의 예측이 점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왜일까? 엔트로피 법칙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세상은 안녕한가? 인류의 지식이 이토록 축적된 적이 없는데, 이제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알 것 같아서 두려워 한다. 무질서를 불러일으킬 요소는 더욱 많아진다. 팬데믹, 세계대전, 자원 고갈, 태양 폭풍, 인공지능.......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수 있는 변수는 예측할 수 없이 늘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류학자가 지적하는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자원 고갈이다. 그는 전 인류가 쓸 수 있는 자원이 50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앞으로의 인구 증가를 감안하면 석유나 석탄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낙관주의자들은 재생가능한 에너지나 친환경 에너지를 내세우지만, 앞으로의 인류가 소모할 자원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지구에 쌓인 엔트로피가 절정에 달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할 무질서를 무엇이 막을 수 있을까? 정말로 인류는 다가올 재앙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기를 어렴풋이 바랄 뿐일까?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없을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을까?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모든 잠재적 변수를 담아 놓았다. 정답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만,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교육'과 '노동'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어떤 가능성을 엿본다. 쓸모없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시험 기간에 엔트로피를 최대로 축적했다가 끝나고 나면 모두 비워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소모적이다. 그러한 교육이 반복되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정보만 취하려고 하는 선별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오는 모든 정보에 회의적으로 변한다. "그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는데?" 다시 말해, 정보에게 자신의 쓸모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모든 것을 취사 선택하려는 어른으로 자란다. 하지만 누가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까? 다른 어른들 역시 "너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주입 당하면서 자라온 것을. 누군가의 성공에는 다른 이의 실패가 전제되어 있고, 누군가의 휴식은 또 다른 사람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을. 수십 년간, 아니 수천 년간 인류를 지탱해 온 그 잘난 이기심의 법칙이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을 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이타심이라는, 와 닿지도 않는 교훈을 내세우지 않겠다. 대신 '엔트로피의 순환'이라는 가치를 믿고 싶다. 정말로 물질과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만 간다면, 나의 엔트로피를 필요 이상으로 축적할 때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물질의 총량이 지나치게 축적되었다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 방식은 쇼핑, 기부, 콘서트 가기, 도서 구매, 후배에게 밥 사주기 등 다양한 방식이 될 것이다. 지식의 총량이 필요 이상으로 있다면,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글쓰기나 강의, 아니면 대화와 경청이 좋은 방법이 되리라. 행복의 총량이 나에게 넘친다면, 기꺼이 흘러 보내야 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자. 그리고 누군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보자. 나를 떠난 엔트로피가 어떤 식으로 역사를 작동시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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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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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라는 단어는 인간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간에 처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학기나 직장의 첫 번째 날, 첫 사랑, 아니면 최초의 음악과 문학 등등에. 아마 그것은 처음의 그 기대와 설렘 또는 순수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열망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처음의 감정은 결코 유지될 수 없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처음이란 것도 사실 삶의 수많은 조각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 그것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효과가 과장되기도 한다.


 나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이 궁금했다. 기록상으로는 인류 최초의 신화이자 문학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고대어를 해독하고 문헌과 자료를 낱낱이 뒤진 인류학자들의 노고에 감탄하며, 과연 처음 이야기가 무엇을 다루는지 참으로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지 많지 않은 텍스트를 모두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뭐야, 별 거 없네?"였다. 물론 기원전 4000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시대에 이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한 고대인의 역량은 감탄할 만하지만, 시대를 아우르는 통찰력은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가 나에게 얼마나 유효한가?"를 따져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 어렵다. 물론 이 질문이 고전 문학에게 향하는 주요한 공격임을 안다. 고전이 현대가 요구하는 문제에 답해줄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기 마련이다. 내가 편견에 차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초의 신화라는 이름만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의 가치가 다른 신화, 예컨대 중국 신화나 그리스 신화보다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양한 고전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것은 각 시대에 있어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시대에 동시에 여러 고전을 배치하면 상대적인 우월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스포츠팀이 국제 무대에서 힘을 못 쓰는 것과 비슷하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소위 말해 제일 '잘 나갔던'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다. 가장 보편적인 주제인 죽음에 대한 투쟁과 굴복 역시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다루어진 지 오래이다. 설령 최초의 문학이 이후의 모든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그 작품이 이후의 작품보다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19세기와 20세기에 탄생한 문학이 오늘날에 있어서 훨씬 중요하다는 내 의견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길가메쉬 서사시를 지나치게 무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여러 수식어를 제거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충분히 탁월한 이야기이다. 길가메쉬가 자신의 조상인 우트나피쉬팀을 조우한 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은 서사시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사랑했던 저의 친구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누워,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못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에서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 나아가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소멸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페이지 너머로 느껴진다. 길가메쉬는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이 너무 많았기에, 오히려 그가 너무 뛰어났기에 두려움이 더욱 컸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삶에 대한 집착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역자와 연구자들의 상세한 설명과 참고 자료가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더욱 멋없게 느껴졌으리라. 고대인의 삶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고 문명이 발전했어도 묘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별 거 없다는 것, 대단한 모험이나 뛰어난 업적은 개개인의 삶에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다는 것이 그렇다. 일상의 튼튼함이 보장되어야 우리는 성장한다. 누구나 길가메쉬처럼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며,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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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1-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가메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근동 신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홍수설화는 구약의 노아의 홍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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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인간됨의 기술만이 필요하다. 인간이라면,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의 차이, 감정적 이끌림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성이 결합된 종합적 형태의 사랑, 연애와 결혼의 차이 등을 능숙히 이해한다.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면, 배워야 한다. 자신만이 이해하는 방식을 사랑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을 상대에게 강요한다면, 단언컨대 그 사람은 먼저 인간이 될 필요가 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사랑을 시작했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물론 사랑의 어려운 점이라면, 그것을 실패한 경험이 거의 전 인류에게 동일하게 해당된다는 것이리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는 소위 말하는 '원하는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 따위는 없다. 애초에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나의 이상을 상대에 맞추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같은 방향을 걷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니까.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소개된 그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하여 프롬이 주장하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사랑하는 사람, 주변 사람,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찔림이 된 말은 사랑하는 상대'만'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흔히 우리는 착각한다.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이들을 보며 참 순애보 같고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없고 무모한 사랑의 방식이다. 진정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세계를 사랑한다. <인터스텔라>에서 만 박사가 지적한 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위 외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어쩌면 작중 세계를 위태롭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가 아니었는지 돌이켜 본다.


 이 책은 수십 년 전에 쓰였지만,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고하기도 한다. 현대에 사랑은 물질보다 분명 아래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감각으로 접해지는 가치에 잠식 당한 시대이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주장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부자라고. 상호호혜주의를 환상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시스템으로 인간 세계를 구성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그러한 세상은 오직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고층 건물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 감히 사랑의 원리를, 인간 본능에 각인된 호혜의 원리를 원시적이라고 폄하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견고한 유리벽에 가두는 자들이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때로는 자신의 인생이 조금 힘들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남을 돕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1원도, 1초도 소중히 여기면서 타인을 위해 쓰는 돈과 시간은 1원도, 1초도 아까워 한다. 나는 인간과 기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서로를 사랑하는가의 여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볼 때 세상에는 인간의 탈을 쓴 기계가 너무 많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성숙하다고 여기는 무리에게 한 번 더 비판을 던진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진정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라는,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며, 수동적인 소비에 취해 있다고 지적한다. 여전히 우리는 사랑을 먼저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번 그것을 받고 나면 거기에 안주해 버린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지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다움이 고갈되어 간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다. 단순한 감정적 이끌림도 아닌, 육체적 욕구의 해소도 아닌,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방향성의 변화가 그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 변화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사를 했을 때, 또는 이민을 갔을 때 어른들보다 적응을 어려워하거나 도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어른의 몸을 하고 있지만,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변화 시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이대로 지내도 별 문제 없다는 환상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그 세계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양보하는 것을, 약간의 손해를, 잠깐의 시간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사랑의 실패보다 더 두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 나의 일부를 내어주고 사랑을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 있는 교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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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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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상상에 즐겨 빠지며,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자기 자신에게 병적으로 엄격하다. 그들이 쓰는 정신적 수고는 때로 그들을 병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눈으로 보기에 소설가는 너무나 태평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편협한 존재, 내지는 사회의 생산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도태된 부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혹자는 쓸데없는 상상을 할 시간에 뭐라도 하라는 조소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영역에 진입한 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한가로이 소설의 영감을 구상하는 시대, 소수의 독자 또는 자기 만족을 위한 글을 쓰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 보잘 것 없고 짧다는 것을. 한때는 무모한 이상을 좇기도 했으나, 현실과 타협하면서 그 꿈을 포기하는 이름 없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이들은 멸종 위기 직전인 순수 소설가의 생태에 한숨을 쉴 뿐이다.


 나에게 잭 런던은 소설이 이상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 소중한 작가들 중 한 명이었다. 알베르 카뮈, 조지 오웰 등의 20세기에 나타난 걸출한 문인들은 문학이 현실 도피나 이상의 맹목적인 추구가 아닌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요, 사회를 비판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잭 런던은 자신의 유성과도 같은 삶을 통해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인생을 걸어 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독자를 위해,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소설가는 현실을 견뎌 내며 그가 겪었던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필요가 있음을, 그는 후기 과학 소설을 통해 드러냈다. 『암살주식회사』는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미완성된 후기작으로,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수작이다. 


 2020년대 초반부터 영화, 드라마, 웹툰, 웹소설을 망라하는 주요한 트렌드는 이른바 '사이다 서사'로 불리는 '정의 구현'이었다. 악한 인물이 더 잔인하고 비열할 수록, 그들이 몰락하는 서사는 컨텐츠를 소비하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 독자들과 시청자들은 악한 인물을 '참교육'하는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며, 때로는 답답한 자신의 현실을, 때로는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절망적인 사회의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러한 정의의 구현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악한 이들은 대개 자신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으로 악인을 심판하던 고대의 법전이 연상되는 전개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로 '정의'의 구현일까? 자신을 정의라고 포장하는 또 다른 악의 반복이 아닐까?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 폭력을 감행한 이는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암살주식회사』에서 잭 런던이 던지는 물음이 이런 것이다. 사회적인 악한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들이 얼마나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는지 작가는 관심이 없다.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회주의와 자연주의를 신봉했던 그에게 인간의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으니까. 암살주식회사를 운영하는 드라고밀로프는 죽어 마땅한 자를 죽여 달라는 청부를 받으면, 그 임무를 반드시 수행한다. 오늘날 액션 스릴러의 단골 소재인 '사적 제재'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셈인데, 여기서 딜레마는 드라고밀로프와 그의 부하들은 "죽어 마땅한 자"의 범주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드라고밀로프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신념에 휩쓸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세운 이상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기까지 한다. 누가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런던이 완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비판을 잠시 하고 싶다. 런던이 만든 메모 등의 여러 가지 맥락으로 보아, 드라고밀로프의 오른손인 하스가 마차 사고로 죽는 결말은 지나치게 허무하다. 또한, 단체의 근간을 흔들었던 윈터 홀과 드라고밀로프의 딸인 그루냐의 사랑 이야기가 그녀의 아버지의 추적극과 따로 논다는 느낌이 강했다. 차라리 홀이든, 그루냐든 단체의 이상을 따라서 드라고밀로프를 독으로 살해하는 결말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드라고밀로프가 죽이지 못했던 하스가 끝내 그의 상사를 처단하는 결말도 좋았을 것이다. 작가가 생전에 완성했더라면 분명 그의 주요한 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을 텐데,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피시가 완성한 플롯도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암살주식회사』가 지닌 근원적인 물음을 변질시키지도 않는다. 암살주식회사의 인물들은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적 제재를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하는 일에 주력한다. 심지어 그들은 살해를 사고나 자살 등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적 영향력이나 파장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암살주식회사의 시작과 끝을 아무도 알지 못한 채로, 그들이 만든 이상의 왕국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현실을 전혀 바꿀 수 없는 이상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에게, 그들의 지식 수준이나 육체적 능력이 탁월한다 한들, 어떻게 희망을 걸 수 있을까? 드라고밀로프는 많은 부를 거머쥐고 있었으나, 그의 이상에 의해 사랑을 잃고, 동료를 잃었다. 신념의 차이로 동료를 죽이는 자를 나는 결코 옹호할 수 없다. 다르다면, 그대로 두어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 내 이상이 틀렸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정당화하는 자는 어리석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쌓으면 쌓을수록 나는 이 땅에 주어진 현실을 감당해야 함을 느낀다. 궁극적인 이상과 비전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상 속에서 사느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지나친 이상은 우리를 눈 멀게 한다. 그 안에 있으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 눈앞에 있는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은 이상으로 현실을 덮는 속임수가 아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으로부터 작은 희망은 출발한다.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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