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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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를 보고서는 눈에 들어온 작가가 요네스뵈이다. '헤드헌터'는 B급 장르가 생각나는 소설이였다. 상당히 기발하게 내용이 전개되었고 일반적인 추리, 스릴러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있었다. '스노우 맨'도 그런 종류의 책이라 생각을 했다. 무엇인가 좀 기발하고 허를 찌르는.

 

책이 두껍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리 길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무려 600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라 솔직히 좀 지겨웠다. 내용이 정말로 정말로 재미있었으면 덜 지루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재미는 있었으되 분량의 압박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스노우 맨'은 해리 홀레 시리즈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미 몇 편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와있다. 대부분 추리 스릴러 장르에서 유명한 작가의 소설은 반장이나 형사들이 주인공으로 시리즈로 나온 작품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이런 시리즈보다는 시리즈와 상관없는 책이 더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런지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예전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어 좀 답답했다. 당연히 시리즈를 읽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아는 내용이니 알려 줄 필요가 없었겠지만 나처럼 처음 읽는 사람은 그 간극을 스스로 메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다보면 살인범으로 협의를 받게 되는 인물이 3번 나오고 1명은 자살로 마무리되고 1명은 협의만 갈 뿐이고 1명은 잡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 누구도 연쇄 살인범이 아닌 것으로 나온다.

 

이러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다.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한 명 한 명이 범인으로 보여야하는 개연성과 당위성을 부여할테니 그에 따른 내용을 서술하다보니 그렇다. 당연히 이미 많은 페이지가 남았으니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읽는 사람으로 갖게 된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의 약20%는 자신의 아빠가 친아빠가 아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이 책의 모티브로 보인다. 세상인지 노르웨이인지 모르겠으나 부부사이에 가졌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실제로는 여성의 불륜으로 생겨난 아이라는 것이다. 그걸 아빠는 모르고 자란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로 보면 역시나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인 듯 하다.

 

대부분 추리 스릴러 장르에서 범인은 늘 가까운 곳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물론, 그런 이유는 이 범인이 워낙 똑똑하지만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자각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 주변에 똑똑한 사람들을 존경하기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 한다. 언제 나에게 헤꼬지를 할 지 모르니.

 

작가가 분량을 길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 책같은 경우 분량의 압박이 너무 크다보니 - 혹시 이 부분은 번역으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 좀 더 엑기스로 줄여도 될 부분들이 있어 보인다. 굳이 설명할 필요없는 개인 캐릭터에 대한 세부묘사는 생략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 부분이 캐릭터에게 더 풍성한 이야기를 심어주지만.

 

이 책인 '스노우맨'의 가장 큰 장점은 거의 끝까지 범인을 철저히 잘 숨겼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작품들이 중간정도부터 서서히 범인의 윤곽이 그려지면서 읽는 독자들이 어렴풋이 눈치를 채기 마련인데 연속적으로 범인으로 믿게 만드는 인물들이 한 명씩 나오니 그 인물에게 집중하느라 진짜 범인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그리하여 작품의 거의 끝까지 범인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고 읽게 된다. 여전히 남은 분량으로 인해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하는 거이지?라는 의문을 갖고 읽으면서 점점 그 의문이 해결되고 여전히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생각과 공범이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몰입도를 유지하게 만들어준다.

 

요네스뵈는 노르웨이에서 유명한 작가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북유럽 추리 스릴러 작품들이 소개되면서 같이 소개되었는데 읽을만한 작가이고 작품이다. 향후에도 '헬리 홀레시리즈'가 아마도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추리스릴러 책을 읽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작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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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맹자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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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을 하며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분명히 제목은 '소설 맹자'이다. 나는 이 책을 집으며 '소설 공자'라고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공자이야기가 처음부터 시작하여 의식의 아무런 방해없이 읽어 나가는데 어느순간부터 맹자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다시 들여다보니 공자가 아닌 맹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맹자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 수는 있지만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는 딱히 구분을 짓고 볼 필요가 없다. 내가 맹자라고 읽고 공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후대에 더 발전되어 전파한 인물이 바로 맹자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있었기에 맹자라는 사상가와 나올 수 있었지만 맹자가 없었다면 공자라는 사상가는 절대로 빛을 볼 수 없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집단이든 아무리 뛰어난 1인자가 있어도 1인자를 제대로 보좌해주는 2인자가 없다면 절대로 1인자는 1인자로써의 빛을 발하지 않는다. 이처럼 맹자는 스스로도 엄청난 인물이지만 공자라는 카테고리에 있을 때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공자 또한 맹자가 있었기에 공자라는 카테고리가 형성될 수 있었고.

 

인문학이 열풍이다. 서양의 다양한 철학자부터 중국의 사상가들까지. 이들이 저술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고 공부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하고 세상에 투영하면서 무엇인가 배우려고 한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은 든다. 자신이 필요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가방을 다들 들고 다녀 나도 질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갖고 다니는 것처럼 인문학탐구가 유행으로 번진다. 이렇게라도 관심을 갖게 되는 선순환구조가 된다면 분명히 좋을 것이지만.

 

이과출신이 아니라 문과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인문학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과 그 정신에 대해서는 자세하고도 확실히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의 이름과 전파한 사상의 핵심은 아는데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고 쉽게 접할 수 있고 자신들도 모르게 실 생활에서 지배당하고 있는 유교정신이 바로 공자와 맹자를 아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보자면 이 책은 소설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맹자의 평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또한, 딱히 맹자의 모든 이야기를 알려주고 그에 따른 정신에 대해 알려준다기 보다는 맹자를 위시로 비슷한 동시대의 사상가들에 대해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동양사상을 그것도 중국 동양사상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입문서적으로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단순하게 공자와 맹자에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맹자 당시에 유행했던 사상가들과 맹자가 어떤 이야기로 그들을 설복시켰는지 알려주면서 다양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아 그런지 몰라도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혀 새롭거나 처음 듣는 내용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어디선가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다. 특히, 한자와 함께 이야기를 전해 줄 때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예전에 한자라는 과목이 있어 저절로 들은 풍월들이 있을 것이고 국어시간에도 들은 것이 있을테고 살면서 동양을 살고 있기에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읽으면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렵다고 느끼기보다는. 실제로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결코 쉬운 내용은 아닐것이다. 조선시대에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로 등용되기 위해서 사서오경이라는 과목을 공부해야 했는데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어렵다는 것은 피부로 느껴진다.

 

공자와 맹자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심지어 서양의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철학자와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비교하면서 설명하여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인문학 입문서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로 인문학 입문서를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통해 접근방법에 대해 아는 것이 어줍짢은 책보다는 훨씬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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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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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보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왕 시대의 이야기라고 착각을 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그와는 전혀 상관없을 수도 약간 상관있을 수도 있는 내용이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 '솔로몬왕의 고뇌'라는 점에서 볼 때 최소한 현명한 사람을 솔로몬이라고 이야기할 듯 한데 책표지에 나온 사람이 바로 그 '솔로몬'이라는 착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진은 바로 작가인데.

 

대부분 소설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구술을 한다. 그런 이유는 일단 내용전개하기가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이니 모든 것은 작가의 마음이고 묘사되는 시대나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작가 마음대로 얼만든지 변화시킬 수 있기에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구술하는 것이 가장 편안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여 소설을 이끌어간다.

 

택시기사와 수리공인 주인공이 우연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우리나라로 치면 '사랑의 전화'와 같은 단체를 운영하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온갖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들어주는 전화를 개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나이는 80대 중반이니 세상에 대해 지혜도 있을 것이고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정확하지 않지만 세계인구를 40억이라고 하는 걸 보면 30년 전 정도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가 1979년에 사망을 했다고 하니 알아서 판단하면 된다.

 

소설의 제목은 솔로몬이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오로지 독학으로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섭렵하고 궁금한 단어는 늘 백과사전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 한마디로 겉으로 볼때는 무식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누구와도 지식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인물이다.

 

우연히 솔로몬과 인연이 되어 그의 부탁으로 단체를 도와주면서 솔로몬과 관계있는 여인을 도와주게 된다. 한물간 샹송가수로 솔로몬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인물에게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지만 따로 애인이 있다.

 

이런 점을 애인에게 설명하고도 애인이 받아들인다는 것에 우리와는 엄청나게 다른 문화를 보게된다. 분명히 지금보다 덜 개방된 예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구나, 실제로 솔로몬과 샹송가수는 서로 30년전부터 사랑해온 관계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만 여러가지 얽힌 문제를 풀 생각없이 그렇게 세월만 보내왔다.

 

아이가 자라 다시 아이인 노인으로 된다고 하지만 다른 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한다. 노인이 되더라도 자신의 고집과 아집은 버리지 않는다는 것. 아이들은 싸우고 다시 금방 화해하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놀지만 다시 아이가 된 노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 감정의 실타래를 쉽게 풀지 못한다.

 

심지어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의 감정을 알고 있고 상대방도 그럴것이라 어느정도 눈치를 채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남은 인생이 엄청나게 많은 것처럼 행동한다. 내일 당장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젊은이도 사랑을 하고 노인도 사랑을 한다. 육체가 늙는다는 것이 감정이 없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반응속도가 조금 느리고 조금 더 여유있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게 될 때가 많다.

 

이 책에서 말한 솔로몬왕의 고뇌는 결국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자기 혼자 누구를 짝사랑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 짝사랑은 얼마든지 진짜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외사랑은 힘들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최소한 인간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죽어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우리는 살면서 사랑할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 사랑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사랑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상에 대한 사랑도 우리를 살만하게 만들어준다. 타인에 대한 증오도 살아갈 동력은 되지만 사랑만큼 우리에게 큰 동력이 되지 못한다.

 

살아가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불행은 우리도 모르게 저멀리 도망간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그렇게 믿고 살아갈 때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공간이 된다. 사랑도 고민과 번뇌를 가져다 준다. 그래도 사랑을 위한 고통만큼 좋은 고통도 없을 듯 하다. 책에 나온 솔로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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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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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품성(??)있는 소설과 대중 소설로 구분할 때 어떤 점을 갖고 해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중에 하나가 세부적인 묘사가 포함되지 않을까 한다. 특히, 추리 스릴러 장르에서는 직구처럼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서 세부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다.

 

작품성 있는 소설이 아주 아주 별 것 아닌 내용을 갖고도 이리저리 세부적인 묘사를 할 때에 장르소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을 해야 하기에 대략적인 캐릭컬처로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점이 바로 대중소설을 읽는 이유일 수도 있다. 다음 내용을 궁금해 하며 한 장 한 장 넘기는 맛.

 

그런 점에서 이 책 '알렉스'는 별종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싶다. 상당히 세부적인 묘사가 많이 나온다. 장르소설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역으로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빨리 빨리 내용전개를 읽으면서 몰입하고 그래서? 그 다음은? 누군데?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데 장황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실컷 하면서 천천히 진행이 되니 별로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듯 하다.

 

소설은 총 3부로 진행이 되는데 3부가 전부 연결이 되지만 다른 이야기로 읽어도 될 정도이다. 어지간해서 내용을 리뷰로 쓰지는 않는데 하자면 1부는 어느 한 여인이 아무런 이유도없이 한 남성에게 납치되어 새장처럼 만든 박스에 알몸으로 갖혀 서서히 죽어간다. 남자는 그 모습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즉 알렉스가 말라죽어가는 걸 본다.

 

여기까지 보면 남성이 살인자라는 생각이 들지만 분명히 내가 집어 든 책 광고에는 여성이 살인자이다. 1부에서는 특별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서서히 말라죽고 있는 여인과 이를 가둬둔 남자를 경찰이 겨우 찾아내지만 남자는 그 즉시 자살을 한다. 그리고 겨우 여성을 경찰들이 찾아낸다.

 

여기서 아주 살짝 멘붕이 온다. 아니, 이거 뭐야. 아직 읽어야 할 분량은 3분의 2이상이 남았는데 사건이 종료가 된다. 물론, 여자는 경찰이 발견하지만 그 흔적만 있을 뿐이다. 엄청난 살인자라고 생각되는 인물은 자살했고 여자는 자유를 얻었는데 더이상 무슨 이야기가 진행된다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냥 이대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지만 피해자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에 추적하는데 이 여자는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연쇄살인을 벌인다. 이 여자가 진정한 살인자였다. 읽으면서 특별한 동기를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의 즉흥적으로 아무 사람이나 막 죽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가장 끔찍한 황산을 입에 불어넣어서.

 

그렇게 여러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죽이고 경찰은 점점 이 여자를 조금씩 조금씩 쫓아온다. 그러다 더이상 힘들었는지 외국으로 나갈 모든 준비를 끝낸 시점에 뜬금없이 자살을 한다. 아~~~ 두 번째 멘붕이 온다. 아직도 3부가 남아 있는데 연쇄살인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죽는다는 것은 소설이 더이상 전개될 이유가 없다는 뜻이 되는데 도대체 이거 뭐야한다.

 

그렇게 3부가 시작되며 알렉스의 가족들을 부른다. 여기서부터 그 이유를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준다. 이전까지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죽였다고 생각한 여성은 그게 아니였다. 목적을 갖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계획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서는 엄청난 비밀이 가족과 함께 숨겨져 있었다. 이 비밀을 하나씩 경찰들이 밝히면서 그 음모가 드러나고 서서히 동정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결국 끝에 가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면서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알렉스는 타살로 밝혀지지만 이 또한 알렉스가 만든 거대한 계획의 하나라는 것은 읽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복수를 멋드러지게 하면서 갈 길을 간것이다.

 

추리스릴러 장르의 소설이지만 상당히 특이한 소설이다. 어쩌면 이 소설을 추리스릴러장르로 한다는 것이 약간 모순이라고 느껴 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장르에서의 추리스릴러 장르로 착각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냥 일반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이 강한 책이다.

 

워낙 템포가 느리게 천천히 진행이 되어 답답함이 많이 느껴진 소설이다. 내가 생각했던 장르의 템포가 아니라 말이다. 미니시리즈를 생각하고 읽었는데 일일 연속극의 템포로 진행되니 말이다.

 

나쁜 놈들은 하나같이 남김없이 처벌을 받는 것이 분명히 올바른 일이라 보인다. 그 처벌이 사회합의를 통한 법에 의해 받는 것인지 한 개인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처벌인지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소설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써 짐승된 짓은 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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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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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소설은 처음 읽는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이라 마약도 어느정도 허용을 하고 가장 키가 큰 국민이고 축구에 관련되 여러 이야기가 있는 정도의 선입견내지 상식을 갖고 있는데 그냥 나도 모르는 끌림에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밤을 지새우게 한다는 광고문구만큼의 책은 아니다. 솔직하게 그런 책들은 흥미로운 추리 스릴러 소설에 해당되지 이 소설과 같은 진지한 소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실제로도 이 소설의 템포는 느리고 4명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다. 우리들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지하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의미로 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녁식사는 본격적인 이야기전에 하는 가벼운 배 채움의 의미가 있고 이후에 펼쳐지는 술자리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

 

가 본적이 없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보면 서양에서는 레스토랑에서 오랜 시간동안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동서양에서 저녁식사는 정신없이 먹는 아침과 약간은 쫓기듯이 먹는 점심과는 달리 편안하고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다.

 

디너는 4명이 모인다. 이들은 형제지간이고 서로 부부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수상으로 당선이 확실한 형과 정신병으로 쉬고 있는 동생이 모여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인 듯 싶었지만 저녁식사라는 의미처럼 결코 가벼운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의례 그렇듯이 가볍게 영화와 같은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서서히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끊임없이 플래시백이 되어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동생의 관점으로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게다가 우습지도 않게 중요한 지명이나 이름은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알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지만 가장 중심에 되는 이야기는 바로 자식을 둔 부모가 자녀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행동은 우리가 어쩌다 겪기는 해도 웃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살인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소설에서 자녀들의 행동은 우발적이고 약간 술에 취한 즉흥적이였다. 다만,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단순한 행동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부모가 된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책에는 당연히 두가지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써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니, 이미 답은 뻔하다. 하지만, 바로 내 자녀가 그랬다면 그때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가 핵심이다. 정말로 교과서에 나오는 정답을 내릴 것인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부모라는 이름은 순간적으로 모든 선과 악을 완전히 잊어 버리고 오로지 내리사랑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특수한 존재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잘한 부정행위에 우리는 얼마든지 쉽게 잊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나게 큰 부정행위는 두고 두고 가슴에 남는다. 이 부분은 직접 경험한 적이 없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못하다. 다만, 여러 작품이나 기사를 통해 유추를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도 찜찜하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빨리 해결하고 편안하게 사는 걸 추구하기에 아마도 내 자식이지만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배우자와 자녀들을 설득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행동이 결코 이타심이 아니라 내 이기심에 의한 발로이다. 내가 평생 찜찜하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냥 알리자는 것이다. 결코, 배우자와 자녀들의 마음상태와 심적고통을 헤아린 것이 아니다.

 

이처럼 각자 자신에게 더 편한 방법으로 결과를 도출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책에서는 각자 자신이 정한 결론으로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그 이후에 그들이 어떤 마음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에필로그는 없다. 그냥 보이기에는 헤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부모로써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저렇게 하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어김없이 어기는 일들을 많이 한다. 이를테면, 건널목에서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고 자녀들과 함께 건너는 행동과 같은 사소한 일부터 자신들은 TV를 보면서 아이들에게는 공부하라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내리 사랑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동일하게 갖는 원초적인 본능에 해당하겠지만 과연 어떤 행동이 자녀들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고 올바른 사람으로 키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따라 다르고 알고 있는 정도에 따라 행하는 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자녀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것이 그나마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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