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의 역사
리처드 실라.시드니 호머 지음, 이은주 옮김, 홍춘욱 감수 / 리딩리더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것에 있어 주저함이 있는 책이다. 한 눈에 봐도 쉽지 않은 책인데 책의 두께마저 절망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선택의 순간에 읽자는 생각을 1년도 더 된 예전에 결정을 했지만 결정을 하는 것과 직접 들고 읽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 차일 피일 미루다 이번에 도서관에 40일 정도 여유로 대여가 가능하여 빌렸는데 책욕심에 다른 책들도 열심히 대여해서 보다 그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 책을 볼까 말까 고민을 하다 읽을 수 있는데까지 읽자는 생각으로 읽다 결국에는 19세기까지 읽었다. 본격적으로 금리가 제대로 금융이라는 꽃을 피우기 시작할 즈음전까지 읽었다.

 

'금리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한 방대한 서사시(?)이다. 시대에 따라 이자율이 어떻게 변하고 금리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지라도 비슷한 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금융적인 거래를 했는지 알려주고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연체를 하거나 이에 따른 신용불량자가 되었을 때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하는 행동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돈을 주고 받고 이자를 주는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문서기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문서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갖지 못한 자보다는 가진자의 입장과 가진자들의 기록을 근거로 하기때문에 100%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는 없다.

 

이를테면, 책에는 거의 대부분 금리와 이자부분에 있어 일반 국민들의 자세한 거래는 알 수 없지만 왕이나 교황이나 국가들이 남긴 법정 이자율이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예측을 하기도 하고 기록의 부족함으로 정확한 금리는 알 수 없지만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할 때가 있다. 그렇다해도 역사중에 딱 한 부분만 짤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몇 년이나 몇 십년도 아니고 몇 천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나고도 크게 차이가 있지 않다면 이 책의 제목인 '금리의 역사'를 추적하고 알아보는 데 있어 큰 지장은 없다.

 

곡식의 씨앗을 빌려주고 추수한 후에 돌려 줄 때 빌려준 것에 근거하여 더 돌려받은 것이 최초의 이자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그런 개념으로 빌려주고 돌려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신용이라는 것을 근거로 빌려준다는 것을 잘 상상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더 신용으로 빌려 주었다. 이웃에 무엇인가 필요할 때 아무런 대가없이 빌려 주었다가 후에 받는 행위는 분명히 상대방의 신용만 보고 믿고 빌려 준 것이다. 이처럼 신용에 따른 대출(?)은 역사가 엄청 길다.

 

함무라비 법전이 생긴 후에 본격적인 역사탐구에 있어 제대로 된 이자에 대한 역사가 시작된다. 이런 걸 보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사소한 기록도 나중에는 다 역사가 된다. 이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돈을 빌려 준 후에 얼마 이상 받으면 안된다는 기록을 통해 유추가 가능한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 로마신화라는 표현을 하는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이자가 상당히 고이자였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자라는 것이 국가나 은행이라는 개념의 단체를 통해 이뤄지기 보다는 거의 대부분 개인과 개인들이 물건을 주고 받거나 돈을 빌릴 때 생기는 벌금 형태가 강하다 보니 상당한 고이자였는데 그런 이유는 갚지 못할 때 생기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이자가 높다는 것이지 그 당시에는 이자가 높다는 생각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더구나, 이자를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는 상황이니 이자가 높다 낮다의 관점보다는 갚을 수 있다 없다의 개념이 좀 더 강했으리라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할 때는 이자율이 낮고 흔들리고 한참 국가라는 개념으로 볼 때 건설중이면 이자율은 높다. 내가 살고 있는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고 이자나 저 이자로 빌릴 수 있는 시기가 달라진다. 어찌보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할 정도로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이자율이 변하니 부강한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이자는 기독교가 유럽을 대표하는 종교가 되면서 고리대금을 죄악시한다. 살아남기 위해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으로 진출을 하여 지금까지 금융을 장악하지만 일반인들은 이런 유대인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역사가 되어버린다. 중세에 센서스라고 하여 토지등에서 나오는 수익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데 분명히 이것도 이자개념이지만 그 당시에는 합법적인 일로 평생 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연금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시대가 시대인지라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이 여유있는 사람들에게 지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러다 종교개혁과 맞물리며 고리대금에 대한 개념도 갑론을박이 벌어져 결국에는 교리가 변화하게 된다. 중세시대에는 특별히 이자와 관련되어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이 당시에 템플기사단이나 성당기사단도 고리대금을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십자가 전쟁에 참여한 존재로만 알았는데 고리대금까지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한편으로는 이들도 귀족들의 연합체이고 오합지졸을 넘어 각 성의 성주들을 연합해서 불른 명칭이라 생각할 때 일견 이상하지 않게도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며 지금의 베네치아나 앤드워프같은 곳이 부상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상업이 발달하며 그에 따른 돈이 필요하니 서로간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지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이자를 받을 때 군주들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고이자라는 것이다. 얼핏보면 군주라면 신용도 믿을 만하고 군주들도 그처럼 많은 이자를 감수한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군주들은 확실한 신분일지라도 위험 요소가 너무 큰 존재이다. 그 이유는 군주들은 고이자를 감수하고 돈을 빌리지만 여차하면 돈을 갚지 않아 버릴 수 있다. 심지어 돈을 빌려준 사람을 추방할 수도 있다. 그러니, 고이자로 돈을 빌려도 상관이 없다. 이런 이유로 군주들에게 고이자로 대출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상당히 흥미롭게 재미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똑같이 행동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차라리 그때는 고이자였는데 지금은 반대로 저이자로 빌려주고 돈을 막 퍼주기까지 한다는 점이 다르지 않나 싶다.

 

18~19세기가 되면서 유럽과 미국이 국가라는 개념으로 탄생을 하며 지금과 같은 금융에 따른 이자들이 거래되기 시작한다. 여전히 지금과 같은 중앙은행이나 국가의 통제하에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금융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산업과 상업에 지대한 도움과 족쇄가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당시의 이자율을 보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이자율이 5~6%라면 지금 관점에서도 그다지 높다고까지는 할 수 없는데 이 당시가 그랬다. 특히, 뒤로 갈수록 각나라들의 이자율은 점점 내려가면서 2%대까지 갔다. 이자가 낮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돈을 마음놓고 빌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는 뜻이다. 이런 분위기이니 사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돈을 빌려 무엇인가 하면서 산업이 발달하고 상업이 꽃을 피우면서 국가가 발전을 한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 이자가 재미없을지라도 돈을 빌려 무엇인가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없이 벤처정신으로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당시에 유럽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한다. 책에서는 각 나라마다 이자율의 변화에 대해 표로 보여주는데 어느 나라나 빠짐없이 동일하게 20세기로 갈수록 이자율이 낮아진다. 다만, 지금도 강대국이 더 이자율이 낮은 것처럼 당시에는 영국이 가장 낮은 이자율을 보여주는 국가였다. 이런 시기를 오랫동안 거쳤기 때문에 영국이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금융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할 시기가 되는 토대인 20세기 직전에 읽는 것을 멈췄다. 후에 다시 빌려 20세기부터 읽을 생각이다. 읽다보니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까지는 나름 신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걸 읽을 수 있었는데 중세를 넘어 18~19세기부터는 더 많은 자료와 페이지에 걸쳐 알려주지만 크게 보면 이자율이 변화하고 그에 따라 이야기인데 반복되는 이야기로도 보인다. 20세기로 넘어가면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금융이 산업을 지배하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이라 판단된다.

 

솔직히, 읽는데 있어 중세까지는 재미있었는데 18~19세기는 재미없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걸 읽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읽으면서 몰랐던 몇 가지 지식도 알게되었으니 바로 이런 이유로 어렵지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싶다. 

 

p.s: 반 정도만 읽어 리뷰가 좀 그렇지만 나중에 올리도록 하면 연결하겠습니다.

 

 

연관이 있기도 없기도 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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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 - 위험, 기회, 미래가 공존하는
피터 L. 번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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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어려운 내용인지 쉬운 내용인지와 상관없이 이상하게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아무래도 어려운 내용이라 저절로 안 읽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렵다고 해도 의외로 재미있고 집중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딴 생각만 나고 읽는게 고역인 책이 아주 가끔 있다.

 

특히, 이번처럼 책을 읽어야 하는 시간상의 한계까지 있으면 더더욱 마음은 초조하고 읽히지는 않고 서서히 대강 읽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도 한 꺼번에 책을 왕창 빌리고도 다른 도서관에서도 빌려 그런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게다가 어려운 책을 몇 권 골라 더더욱 힘들었다. 솔직히 이 책을 300페이지까지는 집중해서 읽었지만 - 그래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 남은 200페이지 정도는 좀 날림으로 읽었다.

 

'투자 아이디어'라는 책과 어떻게 보면 연관성도 있고 비슷한 흐름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투자 아이디어'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 '리스크'는 무척 고역스럽게 읽었다. 펀드에 대한 역사를 자세하게 알 수 있는 '투자 아이디어'는 읽으면서 펀드가 지금과 같이 다양한 용어와 체계가 만들어진 이야기에 푹 빠졌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로 '리스크'와 관련된 이야기를 과거부터 최근 현대까지 관련된 인물을 한 명씩 소개하는데 반대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리스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위험이라는 단어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리스크'는 위험이라는 단어와는 약간 핀트가 어긋난다. 차라리 불확실성에 근접한 의미다. 어찌보면 '블랙스완'이라는 단어가 최근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블랙스완'과 같은 연상작용을 하는 것이 리스크에 가깝지 않나 한다.

 

특히, 리스크를 단순히 위험으로 치부한다면 지금까지 리스크를 연구한 사람들에게는 억울한 일이 아닐까 싶다. 리스크를 알아내기 위해 확률부터 시작을 한다. 우리는 리스크를 숫자로 치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어떤 것이든 궁금한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밝혀낸다는 것이다. 위대한 천재가 나타나도 그가 갖고 있는 생각과 상상의 한계는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한계를 세대가 이어지며 다음 세대가 전 세대가 풀지 못한 한계를 하나 둘씩 격파해 나가며 발전해 온 것이 바로 인류 역사의 위대함일 것이다.

 

리스크라는 것을 측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체념하고 순응한 사람들에 비해서 숫자에 푹 빠진 사람들은 리스크를 숫자로 풀어내서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런 끝에 나온 것이 확률이라고 할 수 있다. 확률이라는 것은 애매모호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숫자로 그보다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몇프로라는 표현이나 누군가 당선될 확률이 몇 프로라고 하고 표준오차 몇 프로 차이를 근거로 사람들의 생각을 유추하고 그에 따른 대비를 하면 대략적으로 큰 범위내에서는 실패하지 않는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기예보도 몇 프로라는 확률을 근거로 내일 날씨에 대해 예측을 한다. 

 

내가 주사위를 던져 숫자가 어떤 것이 나올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주사위가 총 여섯개의 숫자로 이뤄져 있다면 결국에는 6분의 1로 좁혀 진다. 어떤 숫자가 연속으로 나올수도 있지만 확률로 볼 때는 평균에 수렴한다. 다만, 그 평균이라는 것이 워낙 많은 던지기를 해야만 나올 수 있는 확률이라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확률과는 큰 괴리감이 생겨 잘 믿지 못할 뿐이다.

 

사람들이 어떤 숫자를 기입하거나 로또로 당첨될 확률은 똑같다. 연속된 숫자를 기입하거나 무작위로 컴퓨터가 선택한 숫자나 확률로는 똑같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신중하게 숫자를 고르거나 점을 쳐서 고르거나 하는 행동은 쓸데없는 행동이지만 인간은 어딘가 패턴을 만들기 좋아하고 의미를 부여하기에 확률을 무시하거나 믿지 못하고 자신의 직감을 믿는다. 자신의 직감을 믿고 행동할 때 직감대로 되면 그때부터 그는 확률이라는 걸 절대로 믿지 못한다.

 

아무리 위대하고 대단한 학자나 천재들이 확률을 연구하고 확률로 결과를 도출해도 그들의 결과를 사람들이 한 쪽 뒤로 흘려 버리는 것은 이러한 리스크의 측정불가능성에 있다. 아무리 리스크를 측정한다고 해도 측정할 수 없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스크는 위험보다 불확실성에 더 가깝고 예측 가능하지 않다.

 

아마도 리스크 책에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들었던 온갖 수학자들은 다 나오는 것 같다. 그들이 어떻게 숫자를 통해 세상을 바라봤고 그 숫자들을 통해 우리들은 유념하지 않았던 일들을 숫자로 풀어냈는지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무척 지겨웠다. 조금은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이야기까지 자세하게 다루다보니 책의 내용이 약간 산으로 가는 느낌도 들고 곁가지 이야기가 본 이야기보다 더 많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위대한 수학자 - 당시에는 철학자나 과학자에 가까웠을 - 들이 연구한 내용을 다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태어난 이야기도 하고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그다지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에피소드까지 다루니 가뜩이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내용에 더더욱 집중하지 못하고 집중도가 떨어졌다. 집중할만 하면 다른 사람이 나와 또 다시 곁가지 이야기하다 본론으로 들어오는 식이니 익숙하지도 않은 분야 - 특히 수학쪽은 나에게 쥐약이다 - 이야기라 읽는게 더욱 고역이 아니였을까 한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런 책을 저술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경외감마저 든다. 리스크라는 주제를 갖고 온갖 사람들을 끌여들여 그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리스크라는 의미가 어떤 식으로 지속적으로 조금씩 발전하고 측정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어 이런 긴 이야기를 머리속에 이미 전체적인 윤곽을 갖고서 저술했다는 생각을 하니 존경마저 든다.

 

이 책의 제목은 '리스크'이고 리스크는 불확실성에 근접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때 신기하게도 다른 책과 달리 유난히 이 책의 책 페이지 사이에는 머리카락이 많이 있었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고 이 책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 책을 계속 읽는 것이 지식에는 보탬이 되었겠지만 본인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엄청나게 책으로 쏟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과연 끝까지 책을 읽으려고 했을까? 어쩌면 지식보다 머리카락을 보존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리스크'라는 책을 읽어 지식을 넓히는 것에 비해 '리스크'라는 책을 읽어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 더 큰 리스크라고 보인다. 지식을 넓히는 것은 너무 불확실하지만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리스크를 없애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볼 때 읽지 않는 것이 '리스크'라는 책을 읽고 있는 사람으로 해야 할 행동이 아니였을까? 특히, 어떤 페이지에서는 거의 15페이지에 걸쳐서 계속 머리카락이 나올 정도라 읽으면서 그 머리카락을 계속 제거하며 읽었다.

 

이 책의 타이틀은 위험, 기회, 미래가 공존하는 리스크라고 한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은 책을 읽어 머리카락이 빠지는 위험에 빠졌고 스스로 머리카락이 이제 본격적으로 빠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제는 포기하고 미래를 위해 흑채를 사고 두피를 가꾸는 등의 행동을 해야 리스크를 감소시킬 것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내가 책에 나온 학자들처럼 리스크를 확률로 풀어낼 능력도 갖지 못했고 투자를 하기에 앞서 리스크를 측정할 수 있는 감각도 없고 오히려 책에 나온 것과는 정 반대로 대략적인 리스크를 감수하고 감각적으로 투자하는 것에 가까운 행동을 지금처럼 앞으로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다만, 불확실성이 크다면 하지 않는 것이 잃지 않는 투자이다. 모르면 하지 않으면 된다. 남이 알지 못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에는 엄청난 기회가 존재한다. 그럴 능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남들이 알지 못하고 나만 알고 있는 기회라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역으로 볼 때 실패하지 않는 지름길이다. 

 

리스크라는 책을 통해 고대부터 시작하는 역사를 배울 수 있지만 차라리 최근에 나오는 행동경제학 책을 비롯한 조금은 말랑말랑한 - 상대적으로 - 책을 읽어 리스크라는 개념을 아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을 듯 하다.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리스크를 제거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아니, 올바른 투자의 자세라 생각한다. 

 

어지간해서는 집중해서 읽는 정독까지는 아니라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날림으로 읽지 않는 스타일인데 하다보니 '리스크'는 후반 200페이지 정도는 좀 날림으로 읽어 읽었다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 약간 낯뜨겁지만 그래도 후반 200페이지는 잘 알지 못했던 내용이 아니라 이런 저런 책을 통해 알았던 내용들이라 그걸로 괜히 위안을 삼는다.

 

 

저자의 다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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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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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베르트 망구엘이라는 작가의 이력은 다소 특이하다. 보르헤스라고 하는 유명한 작가가 눈이 점점 멀어 더이상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왔을 때 망구엘이 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 후에 망구엘은 본인도 세계에서 알아주는 작가가 되었다고 하니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위대한 스승 밑에서 위대한 제자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인듯 하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책을 통해 알베르트 망구엘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인상깊었는지 머리속에 남아 있어 이 책을 보고 작가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알베르트 망구엘이 맞았다. 책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게 되었는데 정확하게는 책보다는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도,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만의 도서관을 갖고 싶어하는 소박한(??) 꿈을 갖는다. 도서관 정도는 힘들어도 온전히 자신만의 책으로된 서재를 갖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 책은 계속 생기고 책을 놓을 때는 점점 사라지면 책을 어떤 식으로 처분할 것인지 내지 자신만의 방법으로 책들을 구별해서 정리할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런 고민은 행복할 수 있지만 일부 책을 처분해야 한다는 고통을 책 주인에게 안겨주기도 한다.

 

좋은 방법중에 하나가 책 선물을 하는 것이지만 이또한 상대방의 의중이나 책 선호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주는 선물은 무례가 될 수도 있다. 원하지 않는 책을 선물받았으니 상대방을 생각하면 읽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읽고 싶지도 않은 책을 읽어야 하는 괴로움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런 고로 책 선물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유명한 사람들중에는 자신만의 서재를 만들어 본인만의 공간으로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곳으로 만드는 분들도 있다. 작가들중에는 자신의 집을 도서관처럼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밤의 도서관'에서는 독서가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드는 것은 평생 꿈꾸는 소원중에 하나일 수 있다.

 

망구엘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작가이자 독서가이자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어 꿈을 이룬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도서관을 만든다는 것은 흔하다 흔한 건물 하나가 새로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창의성을 발휘한 공간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존에는 없는 도서관을 건축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서 자신의 글을 쓴다는 사실은 창조력이 발휘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망구엘은 주로 오전이나 낮에 글을 쓰고 저녁이나 밤에 책을 읽는다고 하니 '밤의 도서관'이라는 표현은 맞는 듯 하다.


'밤의 도서관'에는 최초의 도서관부터 세계의 다양한 도서관에 대해 소개를 한다. 또한, 그 도서관들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고 의미에 대해 알려주고 역사에 미친 점들도 함께 잊지 않고 적어 놓았다. 자신의 도서관에 있는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펼쳐보기는 했다고 한다. 읽어보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꼭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읽지 않은 책들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 꼭 읽어야 만 책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다. 어떤 책은 그 책의 제목이나 분위기 광고를 읽고 작가의 의도와 쓴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만의 상상을 펼친다. 꼭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가지 일텐데 그 중에 하나가 상상력을 키워준다고 볼 때 꼭 책을 읽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면 책을 읽지는 않았어도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책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워낙 혜박한 지식의 소유자라 그런지 대부분의 책에 대한 책이 - 비록 도서관에 대한 책이지만 -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는데 반해 결코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제법 고통을 감내하며 읽어야 한다. 움베르트 에코의 책들이 방대한 지식을 - 삐땃한 시선으로 볼 때 - 좀 잘난체 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서술하는 것처럼 망구엘 역시 자신의 지식을 한껏 뽑내면서 이야기한다.

 

초기 도서관 사서들은 방문하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감시도 하는 존재였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책들을 분류하고 보다 책에 근접한 활동을 한다. 도서관마다 분류를 하는 방법이 약간씩 다르다. 처음 도서관들은 그런 분류가 너무 우후죽순이라 사서들도 찾는데 힘이 들었는데 지금과 같은 분류법을 통해 찾는 책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도 나라마다 도서관마다 분류를 달리한다고 한다. 실제로 각 도서관을 가면 거의 대부분 비슷하지만 일부 책들은 도서관마다 분류를 달리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그 부분이 도서관 고유의 정체성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밤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에 여러 종류를 설명하는데 공간과 시간의 제한이 없는 전자 도서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만 대체적으로 좀 부정적으로 보는데 색다르고 재미있는 도서관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상상의 도서관이다. 누구에게도 존재를 들킬 염려도 없고 분류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도서관이 바로 상상의 도서관이다. 심지어 그 도서관은 아직 출판되지도 않은 책들도 서재에 진열(?)될 수 있다.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서관이 각 사람에게 탄생할 것이라 보인다.

 

독서가들의 집에는 책들이 꽤 많이 있다. 이들의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관음증적인 재미도 제공하지만 나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책들도 발견할 때의 재미도 선사하다. 특히,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것 같아도 독서가들은 자기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책들을 요소 요소에 배치한 거다. 또한, 어떤 책이 어느 장소에 있는지 잘 찾는다. 무의식적으로도 책들이 자신의 분류에 따라 배치된 것이다. 그 어느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는 본인만의 분류법으로.

 

책에 대한 소개를 해 주거나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책이 있는 장소에 대한 소개와 책과 관련되고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해 주는 책이라 색다른 재미가 있다. 다만,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워낙 다양한 민족과 나라와 사람들이 나와 이에 대한 용어의 익숙함과도 서서히 친해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작가를 알려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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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2 루나의 예언 2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강만원 옮김 / 창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루나의 예언'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보면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는 역사 드라마같지만 정작 이 소설의 내용은 한 개인의 자아탐구라고 할 수 있다. 나란 누구인가? 한 개인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종교를 통해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이 서로 왜 그러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소설이 좋은 이유는 소설을 통해 우리는 전혀 접하지 않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 수 있고 - 내용이 팩트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치고 - 생각을 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특정분야의 전문가들보다는 깊고 심오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사건을 특정분야와 결부하여 생각해 보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고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 준다. 차라리 그들이 특정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오히려 더 참신하게 미처 눈여겨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루나의 예언'은 다빈치 코드라는 광고문구로 인해 완전히 착각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루나의 예언'이라는 제목은 신비스럽고 중세시대라는 배경은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만들지만 정작 소설은 예언을 보여주고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하나씩 보여주지만 예상을 했던 다빈치코드와 같은 추리, 탐정 소설류는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의 외피를 감싸안고 종교라는 것에 대해 종교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거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나 혼자의 개인으로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칠 수 있지만 '왜 저토록 선한 사람들이 그 힘든 고생을 겪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지'에 대해서 진정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런 질문에 대해 고민을 해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감히 말하건대 신을 믿고 있다고 말만 하는 사람일 것이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없겠지만 그래도 신이 있다면 저와 같은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거다. 또한, 저처럼 선한 사람이 저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해 할 수 없다. 지구상에 있는 종교중에 가장 숫자가 많은 기독교(카톨릭)와 이슬람이 결국에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교까지 - 서로 상대방에 대해 못 잡아 먹어 안달이고 모든 전쟁과 불화의 씨앗이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종교의 본질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효과의 지속력을 위해 하나씩 만들어지고 덧입혀진 것들이 어느덧 본질을 뛰어넘어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을 지켜볼 때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내용과 형식중에 형식은 내용을 빛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을 해야 하는데 내용보다는 형식을 갖고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하고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논란은 진정으로 신이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루나의 예언'에는 루나라는 예지력을 지닌 인물이 한 사람에게 예언을 하고 그는 자유 의지를 갖고 살아가지만 예언대로 하나씩 실현이 된다. 그러는 와중에 지식을 쌓고 무력을 갈고 믿음에 대해 탐구하지만 예언은 하나 둘 씩 이뤄진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는가에 대해 깊은 번민과 좌절을 겪게 된다. 우리가 부자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냐에 따라 운명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운명을 극복할 없는가에 대해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예언이 하나 둘씩 실현될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가에 대해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지만 운명의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분명히 있고 그 선택의 판단은 순전히 본인의 몫이다. 예언이 이뤄진 후에 예언이 이뤄졌다고 두려워하지만 분명히 예언대로 하지 않을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다. 분노를 삭힐 수 있었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증오를 안 낼수 있었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다.

 

두려워 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누군가를 증오한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질투할 것인가 이해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떤 판단을 하건 간에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다.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다. 인간은 결코 신의 꼭두가시가 아니기때문이다.

 

모든 종교에서는 온갖 좋은 말들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선사하지만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랑이 아닌가한다. 문제는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저주할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닐진대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표현처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십자군전쟁이 벌어졌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의 자살테러가 벌어진다. 과연, 이것들이 진정으로 신이 원한 것인지, 신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이 - 특정인간 - 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지식은 믿음의 정 반대 대착점에 있는 요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정 믿음을 더욱 밝혀주는 등대의 역할을 한다. 십자군 전쟁이나 자살테러를 자행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실행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믿음을 지식이라는 매개체로 투영했다면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싶기도 하다. 물론, 믿음과 지식은 어딘지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로 보인다.

 

지식인중에는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욱 신에 귀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신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태 신앙인 기독교라 그럴 수 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본다.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걸 신의 섭리로 간단하게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루나의 예언'에서도 지식이 쌓일수록 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존재유무에 대해 고민을 하지만 결론적으로 신을 믿는것처럼 솔직히 신을 믿는것이 난 더 좋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루나의 예언'은 버라이어티한 인생을 산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신에 대해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책이라 할 수 있다. 기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 고민하고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소설의 관점으로 책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루나의 예언 1편의 리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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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날 - 마음이 따스해지는 31가지 생일 이야기
소고 유카리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람마다 기쁜 날이나 소중한 날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다들 각자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아주 잠시동안 행복한 침묵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고 행복한 순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너무 많아 즉시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하고 감사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매사에 행복을 느끼면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자주 자주 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기쁜 날이나 소중한 날을 떠 올리라고 했는데 딱히 당장 생각나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태어난 생일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자신이 태어난 게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탄생은 축복이자 행복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 버린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누군가의 자녀이다. 부모는 자신을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태어난 생일은 그 어떤 날보다 소중하고 기쁜 날이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부모님의 은혜지만 정작 생일 주인공은 나이다. 내가 태어나 우리 부모님들은 행복했고 기쁜 날이였고 지금도 나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역시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나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고로, 생일은 그 어떤 날보다 소중하고 축하해야 할 날이다.

 

생일을 축하하는 문화가 점점 정착되고 있다. 나 어릴 때 생일 축하는 그저 식구들끼리 축하한다는 이야기가 전부였지 생일 케익을 먹는다거나 친구들을 모아 생일 파티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개념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생일에는 부모가 축하해 주고 친구들이 축하해 주고 동료들이 축하해준다. 어쩌면, 회사를 다니는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싫어도 회사 동료들이 생일 축하를 해 준다는 거다. 인사과나 직속 상관을 통해 알려지고 그 날을 축하한다.

 

생일을 축하하고 케익을 자른다는 사실에 어딘지 계면쩍은 것이 사실이라 될 수 있는 한 생일을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지만 식구들의 생일에는 축하를 한다. 우리집 같은 경우에 생일을 맞이하면 부모님부터 손자,손녀까지 모여 - 한 달에 한번 몰아서 -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게다가 아직도 생일에는 부모님이 나에게 몇 만원의 용돈을 주신다.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고맙다고 받는다. 부모님 스스로 용돈을 줄 수 있는 능력자라는 의미를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

 

딱히 내 생일에 대한 대단한 기억은 없다. 맞다. 문듯 기억하는게 20대 초반에 친구녀석이 자기 애인이랑 - 나랑 셋이 같이 친했다 - 나를 불러내서 커피숍에서 생일선물을 해 준 기억과 친한 친구중에 나랑 생일 차이가 이틀이라 서로 문물교환이라면서 교환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생일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기쁜 날이다.

 

하지만, 생일이라는 것이 소중하지만 꼭 기쁜 날은 아니다. 누군가가 기억나는 생일이지만 아련한 추억이나 슬픈 감정을 자아낼 때도 있다. 미처 이야기 못한 감정을 생일에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가 가능한 유일한 날이 생일이 될 수 있다. 기쁜 날 슬픈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생일에는 뭔가 모르는 정서가 서로간에 흐르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 밴드의 보컬로 공연 말미에 생일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했는데 그 중에 31가지를 추려 발표한 작품이다. 책 표지에서 풍기는 따뜻하고 정감있는 느낌처럼 누구나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한 차를 음미하며 소근 소근 담소하며 '그랬구나'하고 맞장구를 치며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글은 '그래? 괜찮아? 이제는 괜찮을꺼야!'하면서 등을 두들겨 주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처 전하지 못한 감정에 안타까움이 더해져 어딘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일어났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 사랑이 느껴져 더욱 안타까움을 동반한 사랑이 느껴지는 듯 했다.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책 내용과 어울리는 그림과 이미지들이 읽으며 내용에 동화되고 저절로 머리속에 상상이 되며 그림이 그려져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들기도 하고 '좋은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다시는 못 느낄 사랑이지만 남은 사람은 그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겠구나라는 애잔함을 느끼게 된다.

 

슬픈 일이 생기고 짜증나는 일이 생기고 화를 내고 싶을 때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속시원히 풀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먹먹하게 막혀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날'을 읽으면 아마도 읽는 동안 알 수 없는 체증이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조금씩 사라지고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나 혼자라고 생각되고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날'은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아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전부는 아니라도 나라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진실을 알려줄 것이라 보인다.

 

우리들은 소중한 날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공평하게 어떤 사람에게도 1년에 한 번은 어김없이 소중한 날이 온다. 스스로 소중하다고 느끼지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날이 되는 거다. 지금까지 생일을 조금은 시큰둥하게 보냈는데 책을 읽으니 올 해부터는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축하하고 축하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나는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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