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품위 있게 살고
참을성 있게 일하며
마음껏 놀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 계절이었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레드먼드의 앤』 중에서
저자의 직장으로 보이는 “커뮤니케이션 에이젼시”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광고대행사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집단 말이다.
책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좀 더 크리에이티브하게, 즉 창의적으로 볼 수 있을까라는 주제 아래 저자의 다양한 조언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실패를 해봤고, 실패를 하고 있고, 실패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실패 가운데서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면 대 반전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책에는 다양한 사진들, 이미지들이 컬러 도판으로 잔뜩 실려 있다. 사진을 찍다가 손가락이 렌즈를 막아서 엄청나게 큰 분홍색 소시지가 주요 장면을 가리는 사진들은 분명 망친 사진이겠지만, 또 그런 사진들만 모아두면 뭔가 ‘작품 같은’ 냄새가 난다. 그저 잘못 생산된 프레즐이나, 엉터리 설계로 만들어진 쓸모없는(혹은 사용할 수 없는) 건축구조물들, 혹은 그냥 반으로 찢어 버려진 사진들을 잘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기발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책의 특성상 말의 양이 길지 않다. 목차에 나와 있는 소제목들만 훑어도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에 함께 실려 있는 사진들을 함께 보면 이해도도 급상승.
물론 여기 나오는 조언이 당연히 모든 상황에서 환영을 받기는 힘들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부분. 다분히 저자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세계에서, 본격적인 승부에 앞에서 다양한 “실패들”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지, 저자도 자신의 회사가 번번이 외부 경쟁에서 실패만 거듭한다면 쉽게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잘 깔려진 판 위에서의 실패라는 말.
다만 그렇다고 저자의 조언이 영 쓸모없는 건 아니다. 우선은 관련 업계에서 일한다면, 또는 확실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한 일이라면 이런저런 조언들을 한 번 적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자체는 묘한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개혁주의 신학에 푹 빠져 있는,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 시리즈를 작정하고 내고 있는 다함출판사에서 또 한 권의 카이퍼 책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카이퍼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그의 유명한 “칼빈주의 강연”에 관한 책이다. 아홉 명의 현대 학자들이 “칼빈주의 강연”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일단 표지가 예쁘다. 파스텔톤의 연보라색을 메인으로 해서, 이 시리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연필로 그린 것 같은 카이퍼의 이미지가 중앙을 장식한다. 앞서 나온 두 권의 책과 비슷한 콘셉트인데 컬러만 바뀐 모양이다. 계속 이런 느낌으로 가도 조을 듯. 예전에 홍성사에서 루이스 책을 냈을 때처럼.
총 9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반의 여섯 개 장은 칼빈주의 강연의 순서와 똑같다. 각 장을 맡은 저자들은 그에 해당하는 “칼빈주의 강연”의 장을 맡아 분석하고, 비평한다. 7장은 조금 독특한데, “칼빈주의 강연” 속 인종차별적 문장들을 끄집어 내 이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은 장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시대적 한계였다고 보면 되지 않아 싶은데,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서면 이 부분도 설명이 길어지는가 보다.
8장에서는 원래 네덜란드어로 작성된 “강연”의 원고가 어떻게 영어로 번역되었는지 과정을 재구성해 보고 있고, 마지막 9장은 이 책의 번역자이기도 한 신국원 교수가 칼뱅주의가 한국교회에 끼친 다양한 영향을 돌아보고 있다.
책을 읽어 나가며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건 (각 장의 저자들이 신학자인 때문도 있겠지만) 좋은(바른)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부분이다. 바른 신학이란 지적인 영역에서의 정밀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적 사고를 하도록 만들고, 결국 세상에서의 바른 실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 장인 9장에는 흥미로운 예가 하나 등장한다.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장로교는 칼뱅주의에서 기인한 교회정치제도다. 초기 선교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들어왔는데, 신학 대신 실천을 강조했던 감리교보다 장로교가 우세하게 된 것에는 확실히 신학적 강조와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신학이 현실을 떠나 탁상공론으로 넘어가 스콜라주의로 치닫는 것 또한 문제겠지만, 이즈음 보이는 신학적 혼돈이 결코 교회의 미래에 도움이 될 리는 없을 것 같으니까.
책 자체가 카이퍼의 “칼빈주의 걍연”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강연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을 이해하는 데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독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앞서 나온 “강연”의 보충설명을 담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장에서 다루는 주제를 카이퍼가 어떻게 다루었는지와 함께, 그의 주장에 담긴 신학적 함의를 풀어주는 내용도 담고 있어서, “강연”을 좀 더 깊이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도움이 될 듯하다.
신이 하나라고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이 하나라는 것은 사람들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려는 경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도 작용하지 않는가?
하나의 신을 향한 믿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람이 ‘안’에 있게 되고 모든 사람이
정확하게 같은 관계성 ‘안’에 있게 된다.
-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