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도, 윤리도, 철학도, 그런 건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다들 삶에 지쳐서 자극과 치유만을 원하고 있죠.
그런 사회에서 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책 자체가 모습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말하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팔리는 거라고!
아무리 걸작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 나쓰카와 소스케,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중에서
전작인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해”에서 청소년과 초심자를 대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쉽게 소개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같은 독자들을 위해 성경의 전반적인 개론을 가능한 쉽게 풀어놓은 책을 내놓았다. 일종의 성경 개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좀 더 강한 그런 책이다.
1부와 2부에서는 성경에 관한 큰 그림을 그려주고, 3부에서는 구약을, 4부에서는 신약의 흐름을 잡아준다. 마지막 5부에서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과 이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팁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구성은 짜임새가 있다.
사실 책의 내용 자체는 기본적인 것들이라 특별히 새로운 부분은 없었지만, 그 풀이 방식이 재미있다. 특히 구약과 신약을 지하철 노선도처럼 배열해서 이미지화 한 부분은 기발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신약을 다이어그램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공관복음서를 일반 열차라고 하면, 요한복음은 테마 열차”라고 설명한 부분은 탁월했다.
각 장의 말미에 성경에 관한 질문들이 하나씩 덧붙여 있고 이에 대한 저자의 간략한 대답들이 나오는데, 본문의 내용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성상) 살짝 아쉽지만, 전편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신학 아래 나름 충실한 대답들을 담고 있다.
성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고작 몇 개의 장들에 다 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저자는 몇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각각 다섯 개) 구약과 신약을 요약하는데, 뭐 초심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선은 이 정도의 요약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새해 첫 책을 좀 우울하고 슬픈 책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인물의 성범죄와 이를 공식적으로 올바로 처리하지 못했던 한 교단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요더가 쓴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자서전(“한나의 아이”)에서 그가 요더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받고 요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그랬던 요더가, 실은 수십 년 동안 매우 많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였고, 그가 속한 재세례파 교단(메노나이트)에서 이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우어워스와 마찬가지로 요더 역시 기독교 윤리학자였고, 그것도 평화신학의 거두이자 재세례파 교단을 대표하는 학자였다는 것이 이 사건의 기이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사실 요더의 성범죄는 그가 교수로 있던 대학에서부터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당시 총장과 교단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약 4년 동안의 징계절차가 있었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서 교단은 요더가 가진 지적 은사를 적극 활용할 것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4년 동안 이어졌던 목회직 중단은 애초에 요더가 목회를 수행하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의미가 없는 조치였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상황이 바뀐 것은 요더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가 재직했던 대학에 사라 웽어 쉥크라는 여성 총장이 부임했고, 그녀는 이전의 총장들과 다르게 이 학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외부자였다.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는 것. 결국 그녀는 요더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했고, 수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학교와 교단의 공식적인 사과와 회복을 위한 조치를 추동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전 조직과 사건에 관한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인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려야 하고, 특히 성범죄 같은 문제들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좀 더 존중받을 수 있는 분위기(예컨대 사라 같은 여성이 중심이 된 대책조직 같은)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때 피해자 중심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방적인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최근 몇몇 예들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정직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 성범죄와 관련해서 이 부분이 참 어렵다)
요더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였다. 그렇기에 그가 저지른 범죄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데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은 변했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전처럼 정보를 숨기고 감추는 것이 쉽지만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요더처럼 큰 명성이 없더라도,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히 나가면 무슨 수를 써도 처리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해 한 대형 교단 총회장이 불륜으로 담임목사자리에서 사임하면서 수 억 원 대의 전별금을 당당히 요구하고, 교회에서는 그를 내보내기 위해 이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또 책에도 언급되었던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는 아예 교단 차원에서 별다른 처벌을 하는 걸 포기하기도 했으니, 비슷한 사건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에게 퍽 용기를 불어넣어 줄 만한 상황이다.
분명 요더가 남긴 저작들과 그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따로 떼어서 놓고 볼 수는 없다. 나쁜 사람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너무나 타당하다. 책에서 저자는 초보적이나마 요더가 그의 신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그의 신학이 가진 문제점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이는 재세례파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일 수도 있는 지점인데, 그들은 너무 빨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비슷한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많은 주요 리더들이 여전히 많은 윤리적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고, 그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뭔가 개별적인 일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젠 너무 확연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