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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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서사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서사의 위기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정보만 남는 현상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가늠할 틈이 없이 그저 눈앞의 뉴스에 온통 관심을 빼앗겨 버린다. 서사의 큰 특징인 원격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일의 전모를 파악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창 다음(Daum)의 카페가 유행했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얼마 후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옮겨갔고, 또 네이버 블로그로 이동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의 관심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얼마 전 X로 이름을 바꾼)와 같은 매체로 넘어가더니, 이제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이 대세다. 이 흐름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는데, 바로 “점점 더 짧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짧게 요약된 내용, 그나마 글이 아닌 영상, 혹은 해시태그가 포함된 사진 몇 장으로 모든 걸 파악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짧은 정보뭉치로는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끝없는 자극만 있는 정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차 몽롱해진 채로 알고리즘에 예속되고 만다.


그뿐 아니다. 저자는 정보만 남은 사회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65)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배우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마약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검사에서는 마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전후해 경찰은 큰 소리로 해당 배우의 혐의를 떠들어 댔고, 소위 사이버 렉카라고 불리는 저열한 유튜버들은 날마다 온갖 개인적인 사안을 폭로하며 돈을 구걸했다. 정보의 자극성, 그리고 그 자극을 위해 한 사람을 발가벗기고 구경하는 집단적인 관음증, 포르노였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보와 소통에 취해버린 대중은 그럴 의지도, 사고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또한 서사의 위기가 낳은 결과 중 하나였다.




저자는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22)고 말한다. 오늘날 보이는 서사의 위기는 모든 것을 인과율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근대의 대 프로젝트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소위 과학주의가 절대적인 도그마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담긴 이야기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부정되고 잊혔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오로지 인과율로만 만들어진 관계에서는 깊은 교류가 일어날 수 없다.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 있는 곳에서 우리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허무함을 토로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책은 서사의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그리 분명한 조언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문제 제기 속에서 어느 정도 대안도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파편적인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 세계에서 나와, 실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주류 문화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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