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조선 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는 정통성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유명한 살생부에 적힌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고, 이는 세조 자신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민심이었으니,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왕에 대한 악평과 저주 섞인 이야기들은 권력자의 칼로 막을 수가 없는 종류의 위협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이해 발탁된 것이 영화 속 덕호(조진웅)를 비롯한 다섯 명의 광대들이었다. 이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각종 기계장치를 통해 그럼직하게 만들어 냄으로써 소문이 퍼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는데, 세조대의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가 이들의 재주를 눈여겨보고 왕위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한다는 내용.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이 광대패들이 꾸며내는 각종 기이한 사건들이다. 영화는 세조실록에 실려 있는 수십 가지의 기적들이 실은 이들 광대들이 꾸며낸 작전의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그 유명한 정이품송은 줄을 매달아 끌어당긴 것이고, 금강산에 나타났다는 수많은 부처의 형상도, 온천에서 세조를 만나 그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보살들도 모두

 

     ​포인트는 어떻게 그런 형태를 만들어내었는가 하는 과정 부분인데, 영화적 상상력을 잔뜩 동원해서는 당시에 있었을 법하지 않은 다양한 기계장치와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꾸며내는 세트 분위기가 꽤나 흥미롭다. 여기에 번번이 큰 귀를 달고 나와 적당히 연기를 하며 보살인 척 해내는 김슬기의 능청스러움도 눈에 들어오고.

 

 

 

 

 

​     처음에는 그렇게 유쾌하게만 진행될 것 같은 영화는, 물론 반전의 기미가 살살 드러난다. 사실 한명회 같은 인물과 함께 일하면서 끝까지 버텨내려면 어지간한 처세술이 필요한 게 아닌데, 이들 광대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니까. 다만 감독은 이들 사이의 간격을 벌리기 위해 광대패 중 한 명의, 조금은 뜬금없고 무모해 보이는 반발을 억지로 욱여넣는다.

 

     그리고 영화는 곧 회맹을 중심으로 한 궁중에서의 정치투쟁으로 성격을 바꾼다. 그 과정에서 광대패는 급격히 영화의 중심부에서 밀려나는데, 사실 이건 애초에 영화를 보러 간 사람들이 기대했던 부분이 아니니까... 살짝 당혹스러운 감도 없지 않다.(굳이 이들이 회맹을 망가뜨리려고 목숨을 걸고 나설 이유가 뭐란 말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광대들이 벌이는 놀이로 채웠더라면 어땠을까

 

 

 

 

 

​     영화는 소문의 중요성에 관해 말한다.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들을 가리고, 허구의 소식을 사실로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소문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지 보다는 사람들 입에 어떤 식으로 오르내리느냐가 더 중요한 게 이 즈음의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그렇게 몰아가는 거짓된 이들의 악한 계획과 정파적 이익을 위해 옳고 그름의 기준을 일부러 무디게 만드는 태도도 한 몫을 할 게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런 거짓 소문의 물결을 일으키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꽤나 아프게 느껴진다.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할 책임(5:37)을 받은 이들이지 않던가. 물론 어떤 이들은 단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일도 딱히 선처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한동안 교회에서 한 주간의 뉴스를 보며 기도제목을 만드는 역할을 했었다. 그 때 새삼 절실하게 느꼈던 건, 세상에는 좋은 뉴스보다 악한 뉴스, 선에 관한 소식보다 악에 관한 소문이 훨씬 더 많이 떠돈다는 점이었다. 소위 미담 뉴스는 정말로 찾아내기 어렵고, 온통 싸움과 분노, 학대와 거짓으로 쌓은 탑에 관한 소식만 널려있었다. 물론 저쪽은 뉴스꺼리가 되지 않으니까 다루지 않는 것이겠지만, 씁쓸한 마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언제쯤 우리는 좋은 소식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알리는 소문들로 즐거워하게 될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한 발 먼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게 조작된 소문이어서는 안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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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봉오동 일대에서 일제의 월강추격대를 패퇴시킨 독립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고등학생 시절 당시 대표적인 독립군의 승전으로 청산리 대첩과 함께 기억해 두었던 내용인데, 영화로 만들어졌다니 안 볼 수가 없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친구로부터 구성이 별로였다는 감상평을 들은 지라,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들어갔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나쁜 구성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주연을 맡은 유해진이 확실하게 중심을 잡으면서 극을 이끌어 가고 있으니 확실히 몰입도는 있고, 여기에 일단 칼을 뽑아들으면 평소의 허당끼가 사라지고 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매력도 보인다. 여기에 틱틱 거리며 함께 움직이는 파트너로 류준열이 출연하는데, (이젠 너무 자주 보여서 살짝 지겨워지는) 평소처럼 혼자 고민하고 행동하는 까칠한 캐릭터를 맡는다. 이젠 좀 연기 변신을 꾀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영화는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지형 안으로 어떻게 일본군을 끌어들일지를 놓고 벌이는 유인작전이 주를 이룬다. 약간은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마지막 전투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증대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봤다. 예상보다 하드코어 한 면이 좀 있다는 건 기억.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전투에서의 열세가 확인된 후 월강추격대의 대장이 내뱉은 문장이었다. ‘오늘의 일이 저들(독립군과 그 후예들)의 입으로 기록되지 않게 하라는 정도의 내용이었던 듯하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일제의 후예들의 역사왜곡의 베이스가 되는 문장이라고도 할 만하다. 과거의 사건을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영해 멋대로 다시 쓰는 작업을 통해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일종의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중에서도 굉장히 악질적인 쪽의).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서울대 교수 출신인 이 모씨가 쓴 책도 이런 입장에서 멋대로 재구성해 낸 소설 중 하나다.(정작 이 사람은 역사 전공자도 아니다) 흥미로운 건 그게 정확히 현재 일본의 군국주의 잔재세력의 시도와 동일하다는 것. 물론 역사라는 게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그대로 글로 옮길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만,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 검증도 도외시한 채 그저 자신에게 돈(혹은 이에 상응하는 무엇)을 대주는 이들의 입장에 맞춰 기술하는 건, 그냥 홍보전단 그 이상이 아니지 아닐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철학과 함께 역사에 관한 이런 임의적 재구성이 일종의 놀이처럼 여겨지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쉽게 발견되는 듯하다.(모든 권위를 부정해 버리면 남는 건 순간적인 즐거움을 주는 놀이들밖에 없다) 물론 이게 단지놀이의 차원에 머문다면, 그리고 그게 여러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정도라면 무리가 없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니 말이다

 

 

 

 

 

     오늘도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이들을 향해 내밀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역시 성실하게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가려내기 위한 노력이다. 역사가 저들에 의해서만 기록되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허튼 이들의 허튼 소리가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일도 필요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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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때로는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강력계 형사가, 정보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살인을 무마해 달라는 요구에 넘어가면서 곤경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영화 포스터에 쓰여 있는 'Who is the beast?'라는 문구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범인과 그를 잡기 위해 살인을 눈앞에서 보고도 묻고 넘어가려는 형사 사이에 도덕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 않느냐는 물음을 담고 있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런 종류의 수사물에서 익히 사용되는 관용구 같은 것이라, 중심소재만으로 특별함을 보이기엔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렇다면 확실한 연기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구성력 같은 부분에서 차별화를 보였어야 할텐데... 감독이 처음에 어떤 걸 떠올리면서 영화를 만들었는지 감이 안 잡힌다

 

     ​영화는 거의 상영시간 내내 어두운 분위기의 영상으로 진행되는데, 나름 옛 범죄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구성이 워낙에 산만해서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정보에 주연이라고 소개되는 최다니엘이 맡은 종찬 역은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다가 갑작스레 죽어버리고, 이상민이 맡은 주연 정한수라는 캐릭터는 영화 속 동료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도 불친절한지라, 그의 수사방식도 잘 와 닿지 않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지만, 거기에는 신분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신분이 높은 경우 정확히 동일한 수준의 처벌(혹은 보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 정확한 문장은 구약성경 레위기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정의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표현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는 건, 그 안에 담긴 간명하고 분명한 정의의 개념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결합되면서 쉽게 변질된다. 그 결과 보복의 강도는 훨씬 더 커지고, 처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부적절한 상황들이 벌어지곤 한다. 악에 대한 분노가 지나쳐 또 다른 악을 도구삼아 그 악을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이제 우리는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악인을 잡는다는 건 사회 전체에서 악의 절대량을 줄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그 자신이 또 다른 악인이 되어버린다면 애초부터 총량에는 변화가 없어져 버리는 셈이다.

 

     ​때문에 예수는 이 규정을 인용하면서 새로운 원칙을 세운다. 차라리 악한 이를 대적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을 내어주어라.(5:38-42) 성경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근원이다. 사실 이건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본성에 배치되는 명령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기 재세례파에 속한 이들은 그 절대적 평화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를,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들은 유럽에서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흔히 비폭력 평화주의를 나약한 사람들의 변명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이상을 위해 일주일만 살아보더라도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우선은 우리 안에 있는 충동과의 지난한 싸움이고, 악에 대항해 스스로 악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진지하고 강한 노력이다. 평화주의는 순간적인 낭만이나 이상주의가 아니라 매우 굳은 결의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영화 속 한수는 사실 어정쩡한 자세로 춘배의 계획에 말려들어간 면이 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갑자기 접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적인 결정에서 그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살인 사건에 눈을 감아버린다. 하지만 이건 사람이 악을 수용하고 이에 동화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대단한 의지가 아니면,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으려 하게 된다.

 

     ​괴물이 되지 않고 살아가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듯하다. 여기엔 다분히 자극적인 뉴스거리만 찾아다니는 언론사들도 한 몫을 하고 있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악함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고찰이 사라져버린 상황이 보다 중요한 것 같다. 물론 이건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우리가 언제라도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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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 전부터 역사 왜곡이라고 말이 많았던 작품이다. 개봉에 임박해서는 한 소설가가 자신의 책의 내용을 표절했다고 상여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고. 문제를 삼는 이들이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역시 한글의 창제에 신미라는 이름의 승려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찾아봤더니, 2002년에 어떤 사람이 훈민정음보다 몇 년 앞서, 신미가 한글을 사용한 불교서적을 집필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시작된 내용이었다.(관련 내용은 현대불교라는 신문에 실렸다.) 이걸 가지고 불교계 일부에서는(전부는 아니다) 한글 창제에 불교계의 공헌 운운했는데...

 

     문제는 이 책이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복사본만 나도는데, 그나마 이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후대에 만든 위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던 글꼴과 표기법, 잘못 사용된 문장부호 등등(어떤 이들은 그 발견자가 위작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기도 하더라). 당연히 실록에는 신미와 한글창제를 연결시킬 만한 어떤 단서도 없다. 요새는 이 정도면 팩트 체크에 걸리는 수준이다.

 

     다만 세종의 아들들이었던 안평과 수양에 스승처럼 모셨던 것은 사실인 것 같고, 한글 창제 후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힘을 썼던 것도 맞다. 영화 속에서 대장경을 달라고 떼를 쓰는 일본 승려들의 입을 단번에 막아버리는 장면에서 신미가 산스크리트어(범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데, 실제로도 언어 쪽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왕 조선왕조실록을 열었으니 이런 저런 것들을 좀 더 찾아봤다. 재미있는 기록이 좀 더 나왔는데, 우선 신미에게는 동생이 있었는데, 세종 대에 이미 여러 관식들을 경험하고는, 그 험한 계유정난 이후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성종 대에는 영중추부사(보통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같은 최고위직을 했던 사람들이 받는 명예직이다)까지 오른다. 어느 정도 능력도 인정받은 것이겠지만, 처세도 잘 했던 편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무슨 엄청나게 억울한 혐의로 멸문을 당해 신미가 승려가 되어 숨어살았던 게 아니라는 말. (혼자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는 왜 지르신거요.)

 

     ​그러면 그의 아버지는 무슨 잘못을 했느냐, 신미의 부친인 김훈은 태종 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에는 가지 않고 수원의 관기를 한양으로 불러 놀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가게 됐다. 이 사건이 꽤나 큰 스캔들이었는지 이후에도 수많은 간관들이 그에게 벌을 더 주라고 상소를 했다. 심지어 김훈을 추천해(어느 정도 싸움은 좀 했던 듯) 전쟁에 데리고 나갔던 이종무(대마도정벌의 지휘관이었던)마저도 벌을 받게 될 정도. 또 그 전에는 당대의 권력자 하륜과 공모해서 나름 땅도 좀 챙겼던 모양이다. 갈수록 가관이다.(청문회 통과는 쉽지 않을 듯)

 

     ​확실히 영화 속 주요 설정은 허구다. 주장의 근거도 없고. 동시에 그렇게 주장을 하면서 애초에 한글의 창제자로 알려진 세종의 업적을 깎아내린 것까지는 아니라도 축소시켜놓은 것만은 분명하다. 과장만이 아니라 사실과 먼 축소도 왜곡이긴 마찬가지다. 세종이 이름 없는 범부 중 하나라면 영화적 상상력이든, 작은 개연성을 극화시켰을 뿐이든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은, 그냥 흥미꺼리로 명백한 업적을 고치는 건 불편하긴 하다.

 

 

 

 

     이런 논란과는 조금 떨어져서 보면, 영화는 세종의 노쇠한 모습과 깊은 고뇌를, 왕을 둘러싼 무거운 분위기를(태종이 아들 앞길을 내준다고 워낙에 숙청을 많이 해놓아서...) 잘 그려냈다. 오랜 격무와 스트레스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백성들에게 글을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는, 심지어 무례하게 대드는 승려(실록에서는 자주 요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불쾌감을 담은 표현일 것이다)에게도 한 수 접어주고는 그의 재능을 쓰려고 하는 모습은 우리가 익히 떠올리는 세종의 그런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색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습을 표현하는 송강호의 연기력은 걸작이다.

 

      또 한 가지,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 특히 궁궐 안에서 입는 누빔옷이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용포도 저렇게 만들기도 하는구나 싶은 느낌이 들어서, 화면에 나올 때마다 유심히 보게 된다. 이런 디테일이 영화를 좀 더 격조 있게 만드는 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해일이 연기한 신미...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신미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과장되어 있는데, 그 때문인지 박해일의 연기도 꽤나 과장되게 느껴진다. 만약 그의 캐릭터가 조금만 더 겸손했다면 이 정도로 욕을 먹지는 않았을 텐데 싶은 느낌.

 

 

 

 

 

      솔직히 영화 속 드라마는 봐줄 만했다. 다만 대중을 타겟으로 한 상업영화라면, 감독이나 제작자의 자기주장만 할 게 아니라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움직임이 좀 더 필요했다. 특히 개연성 있는 설정 부분에선 더더욱. 요샌 무료로 볼 수 있는 웹툰도 작품의 설정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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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남부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조직폭력배 두목 장동수(마동석)와 연쇄살인범을 쫓는 경찰 정태석(김무열)이 손을 잡게 된 건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다짜고짜 추돌사고를 일으키고 앞 차의 운전자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살인범이 하필 장동수를 공격했던 것. 엄청난 완력으로 공격에서 살아남은 후 범인을 찾던 그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잔뜩 독이 오른 형사와 일종의 거래를 시작한다.

     조폭과 경찰의 협력이라는 구도가 신선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 정당화 될 수 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은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의 사고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걸까. 현실을 무시하고 도덕적 완전주의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어딘가 부족한 부분, 종종 악의 경계까지 가는 그런 부분이 있다), 최소한의 정당성의 선마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영화 속에서 워낙 좋게 그려놔서 그렇지, 조폭두목과 경찰이 같이 앉아 대작을 한다는 설정은 현실세계에서라면 바로 조사가 들어가야 할 일이 아닌가.

 

 

     영화 속 형사 캐릭터가 너무 가볍다. 시종일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함’(마동석이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 속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할 때 사용했던 표현이다)이 넘치는 장동수 캐릭터에 꿇리지 않기 위해 보이는 과장된 행동이 거슬린다. 수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단서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고, 거의 뒤따라 다니다가 얻어먹는 느낌?

 

     ​뭐 제목부터가 악인전이었으니까. 조폭두목이라는 거악이 연쇄살인범이라는 또 다른 악을 잡아서 처리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여기에서 주요 동인은 자신의 가오를 상하게 한행위에 대한 사적 보복일 뿐.

 

     ​, 내용을 한 가지 더 짚고 간다면, 연쇄살인범의 이야기가 너무 부실하다. 대충 어떤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소개되지만, 그 경험이 썩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도 별 맥락도 부족하고

 

 

     ​마동석 장르는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딱 위협적으로 보이는 마동석이 실은 굉장히 착한 캐릭터였다는, 외모와 성격 사이의 부조화에서 주는 재미로 승부를 건다는 특징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마동석이 제대로 악한 캐릭터가 된다면 어떨까 하는 일종의 변주를 주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위장된 선역이 되어버렸으니 애써 만든 그림을 스스로 누그러트린 것 같다. 그래도 마동석의 을 보려는 사람이라면 나름 괜찮게 넘어갔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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