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구조론에 따르면, 지구의 육지라는 건 거대한 판 위에 올라가 있어서 그 판이 움직임에 따라 함께 이동한다고 한다. 두 개의 판이 부딪히면 높은 산맥으로 솟아오르거나, 한 쪽 판이 다른 쪽 판 아래로 깔려 내려가는데, 이 때 큰 충격이 일어나 지진이 일어나게 된다. 또 판이 부드럽게 위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엄청난 마찰력으로 인해 지표가 함께 끌려 내려가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이 영화 일본 침몰은 바로 그런 충격 때문에 일본 열도가 가라앉게 된다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다. ,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소재라는 것.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후지산의 분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고,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도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도 심심찮게 들린다. 확실히 일본은 이런 종류의 재난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 정도 규모의 재난이라면 그런 게 일어날 거라는 걸 미리 안다고 해서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영화 속에서는 엄청난 폭발력의 폭탄을 여러 개 동시에 터뜨려서 끌려 내려가는 판의 끝 부분을 분리시킨다는 설정을 보여주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당장 몇 년 전 경주와 포항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의 원인이 겨우 지열발전을 위해 땅속으로 물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라는데, 판을 끊어낼 정도의 폭발로 인한 뒷감당은 어지간할까.

 

     하지만 뭐 상업영화를 만들려다 보면, 뭔가 좀 허황되더라도 해답을 보여주어야 하고, 여기에 젊은 남녀 주인공들 사이의 연애도 넣어야 하고, 이런 성격의 영화라면 성격 좀 괴팍한 박사 한 명과 그 카운터 파트너가 될 차분한 정부측 인사도 넣고(그 둘이 전 부부라는 설정은 왠지 익숙하고) 해야 하는 거지 뭐

 

     여기 저기 익숙한 클리셰들의 남발에다, 2000년 대 중반에 나온 영화라고 하지만 대규모 재난영화에서 중요한 CG도 약하다. 전반적으로 만듦새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나마 최악을 막아 준 건 아역인 후쿠다 마유코가 맡은 미사키라는 캐릭터. 지진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동네의 어린들의 손으로 키워지고 있는 소녀인데, 영화 속 재난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주는 상징과 같은 존재다. 가끔씩만 비춰지지만 나올 때마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신 스틸러.

 

 

 

 

     영화 속 일본 총리가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각계의 전문가들과 함께 당면한 미증유의 위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 결론 중 하나로 나온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였다. 사실 전 국토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상황에서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영화와 동일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쩌면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죽은 사람만도 수만 명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그저 접촉을 줄인 채 집에 머무는 것뿐이니까

 

     ​바이러스는 결국 극복되겠지만, 이미 이곳저곳에서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들이 일어나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있고, 기상 이변은 빈도를 늘려 가 더 이상 이변이라고 부를 수 없어지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이제 태평양 한 가운데 섬을 만드는 것을 넘어 비에 섞여 내리고도 있고, 매일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도 쉽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영화 마션 속 대사처럼, 또다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영화의 감독은 늘 그래왔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아직 진짜 위기를 마주하지 못했을 뿐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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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을 수여했다. 그 중에서도 전장에 있는 풀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풀잎관은 혼자서 한 군단급 이상의 부대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다. 오늘날에는 머리에 관을 씌워주는 대신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요하게 여겨지는 미군 명예훈장은 아마 고대 로마의 풀잎관과 비슷한 영예일 것이다. 영화는 마땅히 명예훈장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그렇지 못한 비틀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 주인공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공군항공지원대 소속의 의무병 피츠였다. 당시 미군의 한 부대가 적들의 매복에 걸려 악전고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상자를 수송하기 위한 헬기에 타고 있던 피츠는 의무병이 실려올라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내려가 부상당한 의무병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뻔히 죽음이 예상되는 그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을 구하고 전사한다.

 

     ​수많은 부대원들이 피츠로 인해 용기와 영감을 얻고, 무엇보다 생명을 구했지만, 왜인지 피츠에게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이 아닌 낮은 등급의 훈장만이 수여되었다. 생각해 보면 대규모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은 전투는 분명 작전상의 실수나 오판이 개입되어 있을 게 분명했고,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쪽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게다. 훈장의 누락은 이 과정에서 매우 고의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안타깝지만 세상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 같다. 정치적인 이유로 공은 가려지고, 과는 부풀려지기도 한다. 손톱만한 잘못으로 충분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치적인 공격으로 낙마하기도 하는 모습을 우리는 봐오지 않았던가.

 

     장교로 군 생활을 하면서 몇 번인가 표창장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런데 이 표창장이라는 게 무슨 큰 훈련을 끝내거나, 아니면 그저 정기적으로 주는 식이어서, 내가 받았던 것들은 같은 병과에서 돌아가며 받는 식이었다. 진급에 아주 작은 점수가 더해지긴 하지만, 단기복무 후 전역할 예정이었던 나는 딱히 받을 필요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주라고 해도, 어차피 한 해에 같은 걸 몇 개를 받든 가점은 더 되지 않는다며 극구 받으라고 해서 받긴 했었다

 

     줄 이유가 없다면 안 주면 그만일 텐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건 또 안 된단다. 상이 남발되면 적절한 공적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고, 그러면 정말로 중요한 자리에 올라야 할 인재들이 묻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물론 겨우 표창장 몇 개를 가지고 진급이 결정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경향들, 말하지 않고 묻어가는 분위기들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3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당시 부대원들은 피츠에게 명예훈장이 추서되도록 많은 노력을 해왔다. 생각해 보면, 상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주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만한 공을 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일 것이다. 명예와 인간의 도리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한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해 헌신과 희생을 한 이들을 마땅히 칭송하는 게 유리할 테니까.

 

 

 

 

    한편으로 영화 속에는 전쟁으로 인한 다양한 부수적 영향들에 관한 이야기도 보인다. 최악의 전투에 참여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다양한 부대원들의 모습은 전쟁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들이 아니지만, 군인의 의무에 따라 명령을 수행한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감당해야 한다는 건,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반전운동이 한창이었던 60년대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향해 보여주던 냉소적인 반응 부분이다. 참전용사 중 한 명의 트라우마는 한 술집에서 그가 겪었던 적대적인 반응에 기인하고 있었다.

 

     물론 베트남전은 미국의 정략적 목적을 위해 비열한 속임수로 시작된 전쟁이었다(하지만 뭐 모든 전쟁이 대개 정략적 목적을 위한 이기적 판단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 전쟁에 참가해 군인으로서의 용기와 이타심, 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이들의 그 행동 자체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이 둘을 혼동하고 있었다. 실은 그들이 조롱하던 그런 자질들로 인해 그들의 삶이 지켜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명예를 받아 합당한 일들에 제대로 된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모든 제복이 경의를 받아야할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제복은 지금보다는 더 큰 영예를 얻는 게 맞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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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데, 영화 속 세상이 뭔가 익숙해 보이면서도 이질적이다. 화폐 가치는 폭락했고, 사람들은 실업으로 내몰려 시위에 나서고 있고, 사방에 빈 건물들 천지인데다, 치안도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 모습이다. 상상할 수 있는 안 좋은 모습들은 다 모아놓은 것 같은데, 뭐 감독도 제대로 설명하지는 않고 있으니까.

 

 

     아무튼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이제 막 교도소에서 나온 준석(이제훈)에게서 희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계속 되뇌던 하와이에 가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사설도박장을 강도질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러나 친구들은 곧 조직에 속한 킬러 한(박해수)에게 쫓기게 되고, 그는 마치 사냥을 하듯 친구들을 조여가기 시작한다.

 

 

 

 

     넷플릭스로 개봉한 영화인데, 평이 상당히 안 좋다.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구조가 허술하다는 것. 사실 그런 평가는 전혀 모른 채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 느낀 건 역시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영화는 좀처럼 몰입이 되지 못하고, 수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에 별다른 대답도 해 주지 않은 채 얼버무리듯 끝나고 만다.

 

     ​영화에 몰입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일행이 딱히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출소하자마자 또 다른 범죄를, 그것도 총기까지 동원하는 강도질을 계획하는 것도 황당하고, 여기에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데, 거기에 또 친구들이 설득이 된다. 허술한 계획이 또 성공하는 것도 우스운데, 그 뒤의 엉성한 대처도 한숨이 나오고... 도대체 조직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을 터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말이 되는가.

 

 

 

 

​     캐릭터들 하나하나의 매력을 살리는 데도 영화는 실패한 것 같다. 각자의 인물과 관련된 내러티브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그들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이 정도의 설명으로 어떤 정당성같은 걸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심이어 영화의 반대쪽 주요 축인 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어서 생뚱맞은 느낌도 든다. 무슨 생각으로 스크린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데?

 

      여기에 어지간히 겉멋 잔뜩 뜬 추격/대결 장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는데, 소총을 들고 아무데나 쏴대는 건 람보에서 배운 건가 싶고, /엄폐는 전혀 할 생각도 하지 않는 한심한 개인전술 움직임과 다음 수를 전혀 보지 못하는 듯한 판단의 연속들까지...

 

 

     이 영화의 제작에 90억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 촬영 기간 일자리는 창출됐으니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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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가, 최근 집 근처 영화관에서 재개봉을 하기에 냉큼 보고 왔다. 그래고 예상치 못하게, 이 영화는 개인적 기록을 세웠는데, 지난 10년 간 다양한 요일에,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장소에서 수백 편의 영화를 봤음에도 처음으로 영화관 전체에 딱 나 혼자만 앉아 있었다는 것. 이쯤이면 그냥 전체 대관을 한 정도. 코로나19 사태가 만들어준 기록이다.

 

 

 

 

     영화는 (기도로?) 제한된 시간동안 제한된 영역에 맑은 날씨를 불러올 수 있는 소녀 히나와 가출해 도쿄로 무작정 상경한 호다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 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도쿄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천성이 착했던지라 서로를 번갈아 도와주다 친해지게 된다. 호다카는 히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한 아르바이트 팀을 시작하지만... 얼마 후 또 일본 특유의 무슨 전설이 등장하면서 이 맑음 소녀는 일종의 인간 제물로, 그의 희생이 있어야 날씨가 평소처럼 돌아오게 된다는 게 밝혀진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고,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히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호다카를 떠나지만, 호다카는 그런 히나를 놓을 수가 없었다. 새드엔딩으로 치닫는 영화를 멱살 잡아 끌고 가는 호다카. 사실 이쯤에서는 이제 제대로 된 설명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듯하지만, 강렬한 음악과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그런 의문을 덮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만난 두 사람. (다행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라는, 전형적인 희생양 모티브가 놓여 있다. 보통은 이런 구도에서 마음 약한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면서 스스로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는 흐름이 많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만) 호다카의 결정으로 이야기의 흐름은 급히 바뀐다. 세상 따위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며, 자신은 히나를 구하겠다는 그의 결정은 자칫 개인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누구도 히나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히나를 구하기 위한 호다카의 결심을 비난할 수는 없을 터.

 

     사실 영화 속에서 히나에 대해서 희생의 압박을 가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강하게 그려지지 않은 것이 좋았다. 오히려 영화 속 두 명의 노인이 하는 말은 좀 다른 분위기까지 보여준다. 첫 번째는 인간 제물이라는 신화에 대해 설명해주는 신관(?) 비슷한 할아버지로, 그는 기상이변이라는 것도 다 인간들 기준으로, 그것도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관측에 근거해 내리는 판단이라며 역정을 낸다. 또 한 명은 호다카와 히나에게 의뢰를 했던 할머니로, 그녀는 영화 말미 3년이 넘는 연속적인 비로 일본 영토가 상당히 물에 잠긴 상태에서도(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달라진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희생양 이야기에서 희생의 대상이 되는 건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옛날이야기에서 마을을 괴롭히는 괴물에게 바쳐지는 건 젊은 여성이나 어린 아이인 경우가 많다.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불만인 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함께 고통을 나눠질 생각은 하지 않느냐는 건데, 적어도 영화 속 두 노인에게서 최소한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뻔뻔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게 인생을 충분히 산 사람들이 갖게 되는 염치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반면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본의 아베 총리를 보면서 우리가 구역질을 하는 이유는 이런 비열함을 부끄러움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구하지 못할 거라면, 최소한 염치는 갖고 살자.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영화 말미 일본 열도는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상당부분 물에 잠기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대충 상상했던 결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호다카가 내뱉은 말이 현실이 된 건데, 흥미로운 건 그것도 또 나름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영화 속 사람들이나, 그걸 보는 관객이나) 영원이니, 불멸이니 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을 쥐려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는다면, 얼마 간의 충격과 혼란은 있겠지만 또 나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비와 개인 날이라는, 날씨라는 소재를 이렇게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상상력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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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해 제작된 대만 영화. 뭐 이런 장르로는 대만 영화 쪽이 워낙 많이 만들고 또 분위기도 잘 살리는 편인지라 어느 정도 평타는 치겠지 했는데, 기대했던 것만큼의 완성도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개연성 따위는 1도 없는 만화 같은상황을 배경으로, 토닥거리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영 몰입되지 않는다. 그냥 집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편하게 보려고 선택했는데 말이지. (요새 네이버에서 주기적으로 영화를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감사.)

 

     성적에 따라서 차별대우를 공식적으로 하는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인물들은 터무니없고, 사고로 갈 데가 없다고 덜컥 다 큰 딸과 함께 친구네 집(이 아닌 저택)에 얹혀살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아빠나(그나마 별다른 일도 안 하는 듯?), 수년을 짝사랑하며 남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예쁜 여주인공이라는 부분도... 사실 처음부터 그냥 만화의 실사판, 판타지성 강한 만화적 설정과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런가보다 할 수 있을지도.

 

 

 

 

     마찬가지로 개연성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인물 중에서 가장 호감이 갔던 건,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 캐릭터. 영화의 초반부터 한결같이 여주인공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던 그녀는 조금의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주인공을 보고 있다. 약간의 푼수 캐릭터를 넣어두어서 볼 때마다 웃음이 나게 만들었지만, 가장 순수함이 느껴졌던 인물. 누군가를 편견 없이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듯.

 

     사실 엄청난 빈부격차와 이를 공식화하는 차별적 학교(사회)구조, 외모지상주의 같은 요소들이 범벅이 된 영화이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로 빈부의 문제를 두고 사람을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는 편이다(이 또한 만화 같은 설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의 차별은 성적에 국한되어 있고, 이 부분은 (여주인공이 보여주듯이) 자신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극복할 수 있는 요소였다.(물론 단지 성적이 계급을 나누기에 충분한 요소인가 하는 점은 남지만)

 

     덕분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인상을 찌푸려지게 만들기 보다는, 그저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일종의 경기’, 혹은 게임처럼 느껴진다. 한 리그 안에 강팀과 약팀이 있지만, 약팀이라고 해서 항상 강팀에게 지는 것만은 아니니까. 역전의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판은 훨씬 인간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다만 영화 말미 여주인공은 잠시 모두가 잊고 있던 재력이라는 큰 벽을 살짝 인식한다. 남주인공이 자신보다 더 가문 좋고, 돈도 많고, 미모도 훌륭하며, 남주인공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또 다른 여성 캐릭터와 관계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는 것. 개인적으로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 부분이 가장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사실 영화가 현실적으로 돌아가려면 여기에서 여주인공은 완전히 마음을 단념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야 했다. 사람은 감정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자신이 상대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 뒤로 물러서는 것도 꼭 비참한 일만은 아닌 거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여주인공이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또 그런 용기를 내는 아이가 있다면 열심히 격려하고 싶은 것도 사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너무 좌절하지 않도록.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으니까.

 

 

 

 

     딱히 추천목록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은 영화.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다면야... 주인공들의 우월한 외모 감상 목적이라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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