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가, 최근 집 근처 영화관에서 재개봉을 하기에 냉큼 보고 왔다. 그래고 예상치 못하게, 이 영화는 개인적 기록을 세웠는데, 지난 10년 간 다양한 요일에,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장소에서 수백 편의 영화를 봤음에도 처음으로 영화관 전체에 딱 나 혼자만 앉아 있었다는 것. 이쯤이면 그냥 전체 대관을 한 정도. 코로나19 사태가 만들어준 기록이다.
영화는 (기도로?) 제한된 시간동안 제한된 영역에 맑은 날씨를 불러올 수 있는 소녀 히나와 가출해 도쿄로 무작정 상경한 호다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 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도쿄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천성이 착했던지라 서로를 번갈아 도와주다 친해지게 된다. 호다카는 히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한 아르바이트 팀을 시작하지만... 얼마 후 또 일본 특유의 무슨 전설이 등장하면서 이 ‘맑음 소녀’는 일종의 인간 제물로, 그의 희생이 있어야 날씨가 평소처럼 돌아오게 된다는 게 밝혀진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고,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히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호다카를 떠나지만, 호다카는 그런 히나를 놓을 수가 없었다. 새드엔딩으로 치닫는 영화를 멱살 잡아 끌고 가는 호다카. 사실 이쯤에서는 이제 제대로 된 설명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듯하지만, 강렬한 음악과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그런 의문을 덮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만난 두 사람. (다행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라는, 전형적인 희생양 모티브가 놓여 있다. 보통은 이런 구도에서 마음 약한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면서 스스로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는 흐름이 많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만) 호다카의 결정으로 이야기의 흐름은 급히 바뀐다. 세상 따위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며, 자신은 히나를 구하겠다는 그의 결정은 자칫 개인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누구도 히나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히나를 구하기 위한 호다카의 결심을 비난할 수는 없을 터.
사실 영화 속에서 히나에 대해서 희생의 압박을 가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강하게 그려지지 않은 것이 좋았다. 오히려 영화 속 두 명의 노인이 하는 말은 좀 다른 분위기까지 보여준다. 첫 번째는 인간 제물이라는 신화에 대해 설명해주는 신관(?) 비슷한 할아버지로, 그는 기상이변이라는 것도 다 인간들 기준으로, 그것도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관측에 근거해 내리는 판단이라며 역정을 낸다. 또 한 명은 호다카와 히나에게 의뢰를 했던 할머니로, 그녀는 영화 말미 3년이 넘는 연속적인 비로 일본 영토가 상당히 물에 잠긴 상태에서도(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달라진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희생양 이야기에서 희생의 대상이 되는 건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옛날이야기에서 마을을 괴롭히는 괴물에게 바쳐지는 건 젊은 여성이나 어린 아이인 경우가 많다.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불만인 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함께 고통을 나눠질 생각은 하지 않느냐는 건데, 적어도 영화 속 두 노인에게서 최소한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뻔뻔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게 인생을 충분히 산 사람들이 갖게 되는 ‘염치’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반면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본의 아베 총리를 보면서 우리가 구역질을 하는 이유는 이런 비열함을 부끄러움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구하지 못할 거라면, 최소한 염치는 갖고 살자.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영화 말미 일본 열도는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상당부분 물에 잠기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대충 상상했던 결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호다카가 내뱉은 말이 현실이 된 건데, 흥미로운 건 그것도 또 나름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영화 속 사람들이나, 그걸 보는 관객이나) 영원이니, 불멸이니 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을 쥐려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는다면, 얼마 간의 충격과 혼란은 있겠지만 또 나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비와 개인 날이라는, 날씨라는 소재를 이렇게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상상력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