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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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에 이 책 전집(3권)이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올라왔을 때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주제도 워낙 관심이 갔고, 저자도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확실히 글재주가 있는 시오노 나나미였으니까. 확실히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었고, 한참 만에 꺼내 읽기 시작하다 과연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십자군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거의 200년 동안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사건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그 중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 1095년 시작된 첫 번째 십자군이다. 당시 유럽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대립이 꽤나 격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던(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것이 바로 몇 년 전이었고,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황제는 곧 자신을 무릎 꿇린 교황을 몰아내버렸다.


같은 시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일종의 상수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한쪽 구석에서 시작된 이슬람 세력은 곧 아라비아 반도 전체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전역, 그리고 이 시기에는 북아프리카 전체와 유럽의 일부(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황이었다.


십자군은 이 두 가지 상황을 한 번에 타개해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레고리우스 8세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 세력에 의한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파괴와 순례자들에 대한 공격을 명목으로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을 주창한다. 그리고 여기에 유럽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면서, 교황의 권위는 전 유럽에 떨쳐지게 된다.


1차 십자군은 사실상 성지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유일한 십자군이었다. 사실 여기에는 프랑스나 잉글랜드의 왕이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같은 군주들이 직접 나서는 대신,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의 영주들이 주축이 되어 자칫 오합지졸이 될 뻔했던 구성이었지만, 노르만족 출신의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와 그 조카인 탄그레디, 또 독일 지역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와 그 동생 보두앵 등 전술과 전략에 뛰어난 지휘관들과 오히려 사분오열 된 이슬람 세력의 상황으로 지중해 동부 연안을 점령하고 일종의 기독교 연방 국가들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전체 3권 중 첫 번째 책인 이번 권의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였다.





뭐 이 정도의 간략한 이야기는 인터넷을 조그만 뒤지면 누구나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역시 시오노 나나미의 글이라면 디테일한 사건의 전개 과정 묘사, 그리고 이 과정이 흡입력 있게 재구성되어 있다는 장점 아니겠는가. 기록으로만은 쉽게 파악하기 힘든, 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그들이 내린 결정에 어떤 사고과정이 있었을지 하는 부분들은 인상적이다.


물론 “로마인 이야기” 때부터 은근 자주 보였던 군국주의 전통을 가진 국가(일본)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다운 제국주의적 관점이 여기에서도 틈틈이 보이긴 한다. 예컨대 ‘지즈야’라는 비무슬림에게만 부과되는 세금을 내면서 살아야 했던 이슬람 세계 속 기독교인들의 처지를 나름 나쁘지 않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묘사하는 부분(30)은, 과거 일제의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도 조금 피해를 입긴 했으나 나름 살 만했다는 어느 무지한 이들의 망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 대체로 힘의 원리를 신봉하고 있고, 정복자, 특히나 인상적인 전과를 올리는 정복자들에게 우호적인 서술을 한다거나,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은근한 폄하도 있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없는 걸로 생각하고 무시해버리는 케케묵은 계몽주의 시대 똑똑이들의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1차 십자군의 과정에 관해서 이보다 재미있게 풀어놓은 책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약간은 애증의 감정으로 계속 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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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시절 간도사진관 1
류은규.도다 이쿠코 지음 / 토향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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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간도에서 태어나 일본의 형무소에서 20대에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에 관한 책이다. 책 제목에 있는 ‘동주’는 바로 그를 가리킨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사진집이다. 특히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랐던 간도 지역의 20세기 초중반의 여러 모습들이 담긴 흑백사진들이 잔뜩 담겨 있다.


책은 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주요 시기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각각의 시대에 찍은 간도의 여러 인물과 풍경 사진이 배치되어 있다. 처음엔 이게 다 윤동주와 그의 가족, 이웃의 사진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고, 그 시대의 윤동주가 살던 지역 인근의 여러 사람들이 보인다. 물론 이 책의 작가가 직접 찍은 건 아니고, 이런저런 경로로 수집한 사진들을 모은 것.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윤동주가 쓴 시기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치해두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시’나 ‘별 헤는 밤’ 같은 유명한 시들도 있고, 그보다 앞서 쓰인 동시들도 제법 많이 실려 있다. 흥미로운 건 책에 오늘날 맞춤법이 아닌 (아마도) 당시 윤동주가 썼던 그대로의 말법을 따라 적어둔 부분이다. 좀 더 현장감이 느껴진 달까.


윤동주의 인생을 쭉 따라가며 옮긴 사진이지만, 또 하나 간도를 중심으로 한 사진집이기에, 그가 경성이나 일본으로 넘어가서 보냈던 학창시절의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간도를 떠난 이야기 다음에 바로 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저자는 아주 담담하게 이 스토리와 사진들을 배치해 나간다.


윤동주의 시들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20세기 초 힘겨운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삶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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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보고 싶긴하지만 책값이 장난 아니군요.ㅠ

노란가방 2023-01-30 16:29   좋아요 0 | URL
네 사진집이라 그렇겠죠... 저는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봤습니다. 강남도서관에 곧 반납합니다 ㅋ
 
책을 불태우다 - 고대 알렉산드리아부터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
리처드 오벤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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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도서관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과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책 제목에도 나와 있듯 ‘파괴된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잇다는 점이다. 저자는 도서관 파괴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이 야만적 행위가 일으킨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나아가 도서관이 갖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어간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세계 최초의 도서관으로 알려진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이 세운 도서관이다. 참고로 이 왕의 이름은 구약성경에도 딱 한 번 등장한다. 흔히 고대 도서관 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떠올리지만, 시기상으로는 이쪽이 훨씬 오래됐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했던 신아시리아 제국 말기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아슈르바니팔이 세운 이 도서관에는 쐐기문자가 잔뜩 새겨진 점토판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그 다음 지배자인 바빌로니아의 정복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적들의 지식을 파괴하는 것은 그들을 약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나 국가가 가진 지적 자산을 파괴해버리면 그 사람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두 번째 등장하는 파괴된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바로 그 도서관으로, 그리스인들이 세운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에 세워진 시설이다. 이 도서관의 파괴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들이 전해져 오는데, 카이사르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고, 기독교인, 혹은 무슬림들에 의한 파괴라는 설도 존재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국력이 쇠퇴하면서 도서관에 대한 관리와 지원이 부족해지면서 서서히 쇠퇴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도서관은 스스로 알아서 유지, 성장하는 게 아니다. 적절한 금전적 지원이 없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특히나 책값이 적잖이 오르고 있는 이즈음, 공공도서관에 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과 지원은 평범한 시민들의 교양수준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외에도 책은 다양한 이유로 파괴된 도서관들의 이야기가 더 등장한다.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많은 책들이 사라졌고, 1814년 그 유명한 워싱턴 방화사건 당시 영국군에 의해 미국의 수도 워싱턴이 점령되는 과정에서 많은 공공시설들이 불에 타버렸고, 그 중에는 의회도서관도 있었다.(이 도서관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6천 권 이상의 책을 당시로서는 거금인 2만 4000달러에 팔아먹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비슷한 사건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두 번이나 파괴된 벨기에의 루뱅도서관에서도, 1990년대 일어난 발칸 전쟁 당시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사라예보에서도 일어났다. 또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프랑스 같은 열강들은 아프리카의 여러 식민지들에서 자신들의 통치에 필요하지 않은 많은 기록들을 파괴하고, 또 중요한 기록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약탈해 가기도 했다.


특히 시대가 변하면서 최근에는 디지털 형태의 자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데, 이쪽을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된 해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임의로 파괴되거나 사라지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는데,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일일 터.





개인적으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들 중 하나로 도서관이 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앞에 문자와 종이, 언어와 건축술 같은 다양한 선행 발명들이 있어야겠지만, 그렇게 생성된 지식을 한데 모아서 서로가 시너지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참고해 다음 단계의 연구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도서관이 파괴되고 사라지는 일은, 그래서 단순히 어떤 건물과 그 안의 자료들이 사라지는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피해만이 아니다. 그건 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사회적 공동가치 및 미래의 성장역량까지 파괴하는 일이다.


도서관이 하는 일은 단지 책을 구입하고 분류해 저장, 대여하는 것만이 아니다. 책 말미에 저자는 오늘날 도서관이 할 수 있는 일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는 교육기능이고, 두 번째는 지식과 사상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일, 세 번째는 다양한 자료를 보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시민의 자유로운 삶과 행복을 뒷받침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도록 하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한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도서관의 기능과 역할이 이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도서관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들이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적어지는 것만 같다. 아쉽게도. 책은 휴대폰 따위가 가져다 줄 수 없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영영 잊어버리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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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2-07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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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그 중에서도 중세 서양사를 이해하려면 자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다. 두 종교 모두 아브라함에게서 그 정신적 뿌리를 찾고 있는(여기에 유대교까지 포함해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 종교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실제 관계를 맺는 방식은 매우 미숙했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남아있는 십자군이나 지하드가 그 대표적인 이미지고.


그러면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싸우기만 했을까? 이 책은 이슬람교가 시작된 7세기부터 양측이 세력이 동쪽으로는 오스만제국의 진출로 유럽이 위기감에 휩싸이고, 반면 서쪽으로는 레콩키스타의 완성으로 이슬람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나게 된 15세기까지의 약 9백 년 간의 이야기를 크게 훑어가며 다룬다.



사실 이 정도의 내용을 담자면 전체적으로 책의 볼륨이 상당히 두꺼워져야 할 텐데, 이 책은 생각만큼 두껍지 않다. 에필로그에 번역자 후기까지 합쳐도 280쪽이 안 되는 정도다. 하지만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꽤 짜임새가 있다. 이슬람의 발흥부터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양편의 상황을 오고가며 잘 서술하고 있다.


특히 서술의 방식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한두 개의 사료에 근거해서 당시 시대상을 단정 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기록이 있다면 그 기록의 진위를 먼저 판별해야 하고, 그 기록이 담고 있는 사실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사실인지도 가려야 한다. 또, 일회성을 갖는 사건인지, 아니면 저변에 두루 퍼져있던 관행인지도 알아야 하고.


저자는 자주,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기록이 그것을 남긴 당사자들만의 기록인지 좀 더 널리 퍼져있는 관행인지 분명치 않다고 덧붙인다. 이런 태도는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를 다루는 데도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 서술은 최대한 중립적인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면서도,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던 십자군과 지하드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종교가 언제나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역사라는 건 대부분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들, 군주들과 영주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기록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두 문화권 사이의 직간접적인 교류와 (때로는) 우호관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는 황제 취임 축하선물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로부터 코끼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로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슬람 문화의 찬란한 발전은 기독교 국가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서로 대립하면서 싸워 온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상대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심지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도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반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런 미개하고 이단적인 유럽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교류의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쇄술로, 구텐베르크의 발명이후 50년 만에 유럽은 인쇄소를 갖춘 도시가 100개가 넘고 나온 출판물이 600만 부를 넘었지만,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인쇄술을 배우려는 시도 자체를 처벌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학문과 사상이 발전할 길을 막아버렸다.





책의 말미에, 왜 그렇게 두 문화권은 서로를 경계하고 적대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가 답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 갖게 되는 태도에는 이전에 겪었던 경험이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정복자로서 처음 대면했었고, 자연히 그들을 깎아내리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신의 최종적인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에 충만해서, 기독교인들을 낮춰보는 오만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실 당시 그들이 만났던 유럽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었기에, 뭔가 배울 만한 게 없었다고 여길 만도 했고.


결국 서로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과 이해의 부족이 오랜 적대관계를 낳았다는 말인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지라도 분명 일리가 있는 지적인 것 같다. 교통과 통신이 이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이해가 부족하다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언제쯤 이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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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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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카이사르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시작된다. 다른 시리즈처럼 이번 시리즈 역시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게 꽤나 노골적이다. ‘카이사르의 여자들’이라... 그가 바람둥이로 유명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대 로마에서 그게 엄청난 추문이 되어서 정치적으로 매장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새삼 흥미롭다. 문득 몇 년 전 박근혜 정권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검찰총장을 찍어내기 위해 혼외자 스캔들을 터뜨렸던 것도 생각나고.



그럼 이번 시리즈에는 어떤 여자들이 등장할까? 우선은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가 있다. 우아하고 고상한 성격으로 젊은 시절 술라가 반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까지 가지고 있던 그녀도 이제 늙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카이사르가 상담을 할 수 있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다.


또,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아름다운 외모에 생각도 깊은 캐릭터로 등장한다. 카이사르는 그를 브루투스(바로 그 브루투스다!)와 약혼을 시킨다.


그리고 세르빌리아가 있다. 카이사르와 오랫동안 내연관계를 유지하던 인물로, 앞선 시리즈에서 오직 자신의 아버지에게만 호감을 느끼는 꽤나 괄괄한 여자 아이였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카이사르의 딸과 약혼을 한 브루투스의 어머니... 상당히 주도면밀하면서, 감정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독특했던 인물.


여기에 율리아를 낳고 죽은 카이사르의 아내의 자리에 새로 들어오게 된, 술라의 손녀딸 폼페이아가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머리는 텅텅 빈 캐릭터. 평판이 좋지 못한 부인들만 만나면서, 곧 일어날 그 사건(“카이사르의 아내는 작은 흠조차 있으면 안 됩니다”를 내뱉게 할)을 내다보게 한다.


이 중에서도 단연 눈에 들어오는 건 세르빌리아다. 카이사르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배고도 (병약한) 남편과의 협상을 통해 남편의 아이로 삼게 하는 모습은 뜨억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당당한 불륜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결혼이 가문 사이의 정치적, 경제적 계약이었던 고대 로마에서 이런 케이스가 단지 세르빌리아 하나뿐이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 편에서는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지중해 전체에 확산시켰던 그 유명한 해적소탕 작전이 등장하고, 그 말미에 유대 지역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초라한 최후도 폼페이우스의 편지 형태로 살짝 등장한다. 카이사르는 착실하게 관직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중으로, 고등조영관이 되어 또 그 유명한 초호화 축제를 개최했고, 마침내 최고신관의 자리에 오른다.


사실 전임 사제 계층이 없었던 로마에서 신관이란 다른 일들을 하다가 제사가 있을 때만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겸직 신분이었지만, 최고신관만큼은 종신직으로 관저까지 주어졌다. 한창 빚에 쪼들리고 있었던 카이사르에게는, 빚쟁이들에게 자신이 좀 더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빚독촉을 늦추는 효과도 있었고, 하층민들의 주거지인 수부라 지역을 떠나 최고신관 관저로 집을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유익이었다.


아, 이번 편에서 유독 눈에 띠었던 것 중 하나는 카이사르의 큰 빚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가 평생 엄청난 빚을 지고 살았던 그였지만 별 걱정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식으로만 묘사했었는데, 여기에선 점점 복리로 불어나는 빚을 당장에 감당하지 못해 초초해 하는 모습도 보인다. 사실 원로원 의원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 금액 이상의 재산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관직의 사다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위기이기도 했으니 이 쪽이 좀 더 사실과 가깝지 않았을까.


여기에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소(小) 카토에 대한 묘사나 우직하지만 뛰어난 장군으로만 알고 있었던 루쿨루스의 새로운 모습, 그리고 음습한 음모꾼과 장난꾼 사이를 위태롭게 오고가는 듯한 클로디우스 등 새로운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로마의 정치판이 신나게 묘사되어 간다. 역사덕후는 그저 즐겁게 책장을 넘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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