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여자들 2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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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 이번 책에서는 키케로가 집정관이었을 당시 벌어졌던, 공화정 말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카틸리나 반란”이 중심 소재다. 파트리키 출신이었지만 좀처럼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했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지방 출신으로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키케로는 그런 파트리키 카틸리나를 체제전복세력의 수장으로 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질투만 작용했던 건 아니고, 키케로 자신은 정말로 자신이 공화국 로마를 (말로) 지키는 수호자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카틸리나의 “음모”를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적었고,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어 했던 키케로는 결국 로마의 법체계를 넘어서는 초법적 방식인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계엄령과 비슷한 조치였다. 현행 법률보다도 상위에 있는 특별한 명령. 키케로는 이 조치를 근거로 카틸리나의 공모자 다섯 명을 기존의 법에 규정된 재판 과정 없이 살해해버렸다. 물론 그들이 아예 혐의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권력을 유지해왔던 원로원 계급 대다수보다 특별히 더 부패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건 그저 동족혐오나 근친살해와 비슷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조치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모자들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모자 격이었던 카틸리나는 북쪽으로 도망쳐 병력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키케로는 최종권고를 카틸리나 사건이 끝날 때까지로 연장시켰고, 그 동안은 원로원 독재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런 조치에 반발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시리즈의 주인공 카이사르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제대로 된 힘이 없었고, 오래 전 호민관 사투르니우스를 원로원 최종권고로 살해했던 사건을 들어 한 늙은 원로원 의원을 재판에 회부하는 식으로, 그 조치가 가진 법적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권고”가 유효한 상황에서 원로원파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한 자잘한 음모를 꾸미지만, 노련하게 위기를 빠져나간 카이사르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떠난다.




이번 책의 핵심은 “원로원 최종 권고”의 적법성이다. 키케로는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일종의 편법을, 아니 법적 근거가 없는 특별 조치를 감행해도 상관없다는 뒤틀린 확신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현대에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법 위에 존재한다는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채, 혹은 자신이 나라를 구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온갖 권력기관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 소시오패스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가 호헌파였으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역시 당시의 현존 체제의 불완전성을 느끼고 그걸 해속하기 위해 나섰으니까. 역사를 아는 우리야 훗날 그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종신 집정관이 되어 사실상 제정을 수립한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뭐. 하지만 그런 결단은 어쩌면 기존의 원로원 계급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볼 수도 있고.


쉴 새 없는 정치적 대립과 머리싸움을 보는 맛이 있는 시리즈. 다음 권 이야기가 기대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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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대, 중세 - 폭력과 아름다움, 문명과 종교가 교차하던 중세 이야기
매슈 게이브리얼.데이비드 M. 페리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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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는 멸칭으로 부르곤 한다. 암흑의 시대, 즉 아무 것도 볼 게 없고, 기억해 둘 만한 것도 없는 낙후되고 뒤떨어진 미신의 시대, 인류의 진보 역사에 도움될 게 하나 없는 무지와 야만의 시대라는 의미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너무 매도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렇게 답이 없는, 절망적인 느낌으로 와 닿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그런 중세에 관한 이미지를 뒤집고자 했다는 것을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라는 것. 이 책의 저자들은 중세 곳곳에서 빛을 발했던 자리들을 크게 보면 연대순으로 살펴나가면서, 중세에 관한 일종의 역사적 스케치를 진행해 나간다.




사실 이런 내용 자체야 크게 드물지 않다. 이제 진지하게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중세를 “암흑의 시대”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으로 부르지 않을 테니까. 역시 관건은 그러면 어떻게 이 작업을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 내면서도 학문적 성과를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느냐 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실을 기술하는 방식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어쩌면 책을 쓰면서, 여기에 실린 문장들을 반드시 자주 인용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있다. 단순히 미사여구를 잔뜩 붙여서 과장스럽게 표현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안의 핵심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도, 질질 끄는 식으로 이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원문 자체가 뛰어났을 수도 있고, 번역자가 훌륭하게 작업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고. 책을 읽는 입장에서 문장의 질은 의외로 중요한 요소다.


단순히 문장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도 나쁘지 않지만, 군데군데 박혀 있는 탁월한 통찰은 책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 예를 중세의 여러 민족단위의 개종에 정치적인 고려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야 많이들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당시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선택지―아리우스파와 가톨릭파―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른 각각의 이익에 관해서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리우스파를 선택할 경우 정통파에 속한 황제나 대주교, 교황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고, 반대로 가톨릭파를 선택할 경우 기존의 권력망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리우스파 선택에 따른 독특한 이익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또, 중세에 수없이 건설되었던 성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의 재고(대개는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성이었다)나, 또 자주 개최되었던 공의회에는 당대 약화되었던 왕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신앙에 기초한 일종의 대안 질서를 세운 것이라는 설명도 흥미롭다.




물론 천 년에 달하는 그 시기 전체가 환하게 밝기만 했던 건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어디 하나 빛나는 곳 없이 어둡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당시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지식의 원천으로부터 얻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나름의 합리적 사고에 따라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빛은 그 시대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중세에 관한 잘못된 이미지는 단지 과거에 대한 정보 오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늘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 부분을 제대로 지적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중세에 투사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고 애쓴다. 그 중 하나는 중세를 어둠의 시대로만 봄으로써 근대의 이성주의적 사고의 위엄을 뽐내려 하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인종이나 종교관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중세를 윤색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면을 조명하는 책들이 자주 나오는 것 같아 반갑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퀄리티까지 좋으니 금상첨화다. 중세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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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초승달 동맹 -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 이슬람 연합 전쟁사
이언 아몬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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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 서양사를 보는 여러 프레임 중 하나가 “기독교 vs 이슬람교”라는 대립구도다. 십자군이라는 종교에 기초한 대규모 군사원정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유럽은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질긴 투쟁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내부의 복잡한 세력다툼이 있던 시대이기도 했으니까.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이 지속적으로 대립(하기만)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는 그런 역사적 사실만 영향을 주는 건 아닌 듯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들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9.11테러와 그에 이어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ISIS를 비롯한 다양한 이슬람 무장테러단체들의 만행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과격하고 호전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굳어져버렸고, 이런 인식이 과거를 바라보는 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통념이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은 그 시기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같은 편에 서서 함께 싸우는 일도 잦았다는 것. 앞서 읽었던 비슷한 제목의 책(『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에서도 크게 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사실 추천을 받아 구입했는데, 비슷한 제목의 책이 나와 그냥 두 권 다 사버렸다), 그 책이 주로 문화적 차원에서의 교류를 다뤘다면, 이 책은 군사적 차원에서의 교류가 중심이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면을 중심으로 설명을 한다. 첫 번째는 한창 레콘키스타가 벌어지고 있던 11세기 이베리아 반도다. 첫 번째 이슬람 왕조였던 우마이아 왕조가 이베리아반도 중남부를 차지한 이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밀려난 기독교 세력이 끊임없이 남부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던 것 같지만, 실은 양측 사이에 길고 질긴 협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 특히 이슬람 세력이 약화된 후에는 기독교국가들이 일종의 보호비를 받으면서 쪼개진 이슬람 자치국을 도와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두 번째는 13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심에 무슬림들의 집단 거주구역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북아프리카와 가까워서 일찍부터 그곳의 무슬림들이 많이 이주해 있던 시칠리아의 안정을 위해, 그곳에 살던 무슬림들을 집단으로 내륙의 루체라로 이주시켰고, 여기에서 황제의 군대를 위한 무기를 제조하거나, 군에서 직접 싸우기도 했다는 것.


세 번째는 좀 더 동쪽으로 위치를 옮겨 동로마제국 후반기를 다룬다. 제국 말기 동로마제국은 소아시아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고,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세르비아나 헝가리와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 중이었는데, 여러 황제들이 왕실의 여성들을 이슬람 세력가들에게 시집을 보내곤 했다는 것.(당연히 군사적 교류도 많았다) 그 수가 하도 많아서, 왕조 자체가 자주 바뀌었던 동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오히려 무슬림의 지도자 쪽이 혈통적으로 더 황제의 자리를 주장하기에 적합했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네 번째는 16세기다 종교개혁과 그 후속 전쟁으로 복잡했던 유럽을 크게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전을 다룬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정면충돌로 보이지만,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오스만군에도 기독교인들이 적잖게 있었고, 빈을 돕는 군사세력 중에서도 무슬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은 크림 전쟁이라고 불리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충돌을 다룬다. 19세기가 되면 오래된 나무가 서서히 죽어가든 오스만 제국도 거의 무너질 즈음이었는데, 러시아의 서진을 염려한 서방국가들이 그런 오스만을 도와 러시아와 맞서 싸우게 되었고, 당연히 이슬람 중심의 오스만군과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함께 싸웠다는 말이다. 사실 이 부분으 앞서의 이야기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임팩트가 살짝 적긴 했다.




두 종교 사이의 이 오랜 군사적 교류들의 이야기를 보노라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평소부터 자주 두 종교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지역에서 이런 교류들이 잦았다는 것. 뭐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접촉의 형태가 대립과 충돌, 그리고 정복의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봐왔지만 실상은 좀 달랐던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일상적인 접촉이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더 격렬한 적대감이 나타나는 것 같다. 상대와 직접 만날 일이 없으니 얼마든지 과격한 말을 내뱉기도 하고, 그런 오류를 교정해 줄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니 시간 지날수록 확증편향이 심해진다. 이건 유튜브에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저자도 여러 번 짚고 넘어가듯,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양측의 협력관계가 아름답고, 정의롭고, 완전히 서로 호혜적이기만 한 관계였던 것처럼 미화할 필요까지는 없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고. 다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한없이 고립된 채 모두를 적대시하는 일종의 자폐상태에 스스로 빠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주는 데 이 책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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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23-07-22 0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있는 책이네요. 오랫만에 알라딘 들어왔다가 인사하고 갑니다.

노란가방 2023-07-22 08:2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 오랫만이시네요.
 
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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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노오 나나미 십자군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다. 앞서 1권과 2권이 제1차와 2차 십자군을 다뤘다면, 이번 세 번째 책은 제3차부터 마지막 9차 십자군까지의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았다. 뭐랄까, 후반부로 갈수록 십자군의 성과가 미미했던 것도 있고, 저자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사료도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3차 십자군 이후는 아주 별 볼일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장 3차 십자군은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살라딘과 일전을 벌여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으니까.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에 다시 기독교 거점들을 항구를 중심으로 확보해 냈다. 비겁하게 먼저 본국으로 돌아가 리처드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만 아니었다면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처드와 맺은 불가침 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심지어 성지에서 싸우고 있는 리처드의 왕위를 흔들기 위해 그의 동생인 존까지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게까지 했던 필리프는 십자군 전체의 성공이나 리처드의 입장에는 비겁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필리프 2세도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영토를 크게 넓힌 왕이기도 하니 참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구나 싶다.


비슷한 이야기로, 물론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살라딘을 궁지로 몰아넣은 리처드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지만, 반대로 무슬림측에서 보면 멀쩡하게 살던 땅을 침략해 온 프랑크인들을 몰아낸 살라딘이 또 영웅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절대적인 기준인 양 착각하곤 한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던 제4차 십자군과 이집트를 공격하다 실패했던 제5차 십자군을 넘어, 제6차 십자군으로 넘어가면, 십자군 세력은 다시 예루살렘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고, 여기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력이 있었다.


하지만 성지는 오직 피를 흘려 얻어내야만 한다는 약간은 변태적 사고에 빠져있었던 교황과 그의 대리자들은 이미 확보한 예루살렘을 인정하지 않기로(?) 고집하면서 황제와 적대관계를 이어간다. 예컨대 예루살렘 대주교는 자신의 교구인 예루살렘에 끝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전형적인 판단력이 어두운 사람들의 모습인데, 이 시기 교회가 그랬다. 너무 높이 올라가다 보니 발밑이 보이지 않는 상황과 비슷했던 거다.


이미 손에 들어온 예루살렘을 부정할 건 또 뭔가. 적을 악마화 하는데 열심을 내다보면, 내가 어떤 꼴이 되는지 모르기 십상이다. 다 이것도 그만큼 자신이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자만심 때문인 거고. "그런즉 선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그리고 마침내 교황의 눈에 쏙 든 인물을 중심으로 또 다른 십자군이 이어지는데, 바로 프랑스 왕 루이 9세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은 강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영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과는 대참사로 끝나고 만다. 그는 단지 자기가 가져온 병력만 날린 것이 아니라,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성지의 기독교 세력마저 소진시켜버렸고, 결국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일어선 맘루크 왕조에 의해 성지에 남아있던 마지막 기독교의 도시 아코가 함락되면서 상황은 1차 십자군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여기서 또 하나 아이러니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십자군의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서 시원하게 말아먹은 루이 9세가 얼마 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책에는 설명되지 않은 정치적인 문제가 깔려 있긴 했지만, 그가 십자군과 관련해서 남긴 소득은커녕 피해만 입혔던 걸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다. 실은 “성인”이라는 제도가 결국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이용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랄까.


책에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십자군 기지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간략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템플기사단의 최후가 퍽 서글프다. 200년 넘게 성지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워왔던 기사단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계략과 교황청의 묵인 아래 말 그대로 순식간에 파멸된다. 모든 재산은 압류당하고, 소속된 기사들은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다 처형되었던 것이다.


여기엔 십자군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찾으려는 목적과, 템플 기사단에게서 빌린 거액의 돈을 갚지 않으려는 프랑스 왕실의 검은 속내가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었다. 용기와 명예가 탐욕과 비겁함에 의해 더럽혀지는 일은 뭐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들의 최후는 왜 십자군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책으로는 3권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관해 쓸 때마다 늘 더하는 표현이지만, 정말 글은 재미있게 잘 쓴다. 물론 십자군이라는 종교성 짙은 이야기를 신앙이 없는 작가가 써 내려간다는 게 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거리감이 상상력을 좀 더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글은 기록된 사실만 모아놓는 게 다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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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필립 프리먼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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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유명한 장군이다. 그는 선대의 유지를 이어 로마를 굴복시키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고, 마침내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기른 병사들을 이끌고 육로로 이동해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간 인물이다. 단지 들어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후 무려 15년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로마인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던 독보적인 장군이었다.


이 책은 그 한니발의 일대기다. 어린 시절 바알 신전에서 아버지에 의해 로마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유명한 이야기부터, 코끼리까지 동원한 채로 알프스 산맥을 넘고,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에서 수만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키고 로마 성벽 바로 앞까지 갔던 이야기... 하지만 결국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본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는 이야기까지...(내용은 그의 죽음까지 나온다)





말 그대로 한니발의 일생을 차분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야 새로운 뭔가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개 한정적이고, 그걸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인데 나름 성실하게 정리해 놓은 듯. 다만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 쪽이 재미도, 그리고 오히려 전문성도 좀 더 높아 보인다는 게 아니러니하달까.


물론 학자와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차이가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한니발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맛깔나게 쓰는 좋은 작가도 아니라는 점이전반적인 평점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책의 영문제목은 “Rome's Greatest Enemy", 즉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한니발)인데, 한니발이 어째서 로마의 ‘위대한 적’이었는지는 단순히 설명으로 서술할 게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을 쓰는 쪽이 훨씬 흥미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훨씬 더 낫다.


그렇다고 책 전체에 걸쳐서 당시 상황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닌지라 굳이 읽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몇 가지 사소한 정보들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한니발 전쟁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니발에 편에 섰다고 말하는데, 이건 로마빠인 시노오 나나미의 책에서 보이는 일사불란한 로마연합의 이미지를 깨준다. 또, 한니발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북아프리카 출신의 황제인 셉티미우스가 한니발을 자신의 선조로 보고 그의 무덤을 복원했다는 내용은 새로웠고.


다만 저자는 한니발이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의 일반적인 전쟁 관례와 달리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 즉 로마가 당시의 전쟁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건 좀 빈약한 설명 같다. “한니발이 이기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게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는 건지..





책 표지가 멋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주는 점수에서 1점은 표지 디자이너의 공이다. 영문판 원서 표지도 동일한 이미지(검은 코끼리 위에 올라탄 고대 장수, 아마도 한니발?)를 사용하지만, 한글판 쪽이 영문 폰트라든지 배색이 훨씬 감각적이다. 영문판 쪽은 그냥 외국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페이퍼백 느낌의(실제로 페이버백이긴 하다) 허전한 표지랄까.


고대 로마사를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긴 하겠지만, 본격적인 전사(戰史) 연구서도, 그렇다고 고대 문명사에 대한 전문적인 안내서도, 실감난 묘사가 들어간 소설도 아닌 좀 어정쩡한 포지션이라는 게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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