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서해클래식 4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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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뜻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는 바다이야기가 쓰인 16세기 당시의 판단으로여러 분야의 가장 좋은 모습을 떠올려 콜라주처럼 모아놓은 세계가 유토피아다하지만 각각의 영역만 생각하면 이게 좋겠다 싶어도그것들이 여러 개 복잡하게 결합되면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발견되는 게 세상이다때문에 이야기를 한참 읽다 보면 정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하지만 애초에 이야기가 어떤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6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다양한 문제를 풍자적으로 비판하기 위함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아귀가 좀 헐거운 부분들을 지적하며 골라내는 대신나름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다영국에서 고위공직생활을 했던 작가 토머스 모어는 당시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이 점만 해도 작가를 인정할 만하다원래 특권에 익숙해지면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점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책은 분명 작가가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가상의 나라를 묘사하고 있지만그 안에는 당대 유럽의 상황을 반어법적으로 담아내는일종의 역사책처럼 읽히기도 한다왕과 귀족성직자들의 부를 지탱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빈민의 처지에 몰려 매일 중노동을 하는 상황그마저 일자리가 없어 결국 도둑이나 걸인으로 전락해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게 강한 처벌로 억누르기만 하는 당국자들물질주의에 물들어 부를 쌓는 데 여념이 없는 권력자들과그들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지는 법률 등.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은 하루 여섯 시간만 일하고그러면서도 모두가 다 노동에 참여하기에 생필품에 부족함이 없고금을 노예를 묶어두거나 죄인을 표시할 때 사용함으로써 금을 귀하지 않게 여기려 한다는 장면은일부러 쇠로 화폐를 만들어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고대 스파르타에서 추진되었다는 리쿠르고스의 개혁을 떠올리게 한다.


     곳곳에 피식 웃게 만드는 문장들이 자주 보이기도 한다어떤 게 진짜 보석인지 감정서를 써주지 않으면 사지도 않을 정도로진짜와 가짜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냥 모조품을 지니고 있어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지적은 사람들의 허영심을 통렬하게 때린다다른 사람들이 먼저 인사해주는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삐걱거리는 내 무릎이 낫는 것도 아니고돈 머리가 치료되는 것도 아니니 무슨 소용이냐는 표현도 꼭 누구를 가리키며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전히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유토피아적'이다그건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과 그 결과로 다시 한 번 형성되고 있는 특권계급도이제 자연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빈부의 엄청난 격차도극심한 물질주의로 인해 희생되어 가는 사람들의 뉴스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문제는 물질주의에 있고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두가 계획적으로 함께 일하고 소득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해결책은 언뜻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체제를 떠올리게 한다물론 앞서도 썼지만이 책이 구체적인 사회구조 개혁을 위해 쓴 것은 아니기에빠진 부분도 많고(예를 들면 장애인이나 노인처럼 생산능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생활할까그리 솜씨가 좋지 못한 작가나 시인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온전한 그림을 다 그리기는 쉽지 않지만문제인식 자체에는 공감이 된다.


     오늘도 수많은 "유토피아"들이 쓰이고 있다저마다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지만여전히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건우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지가 부족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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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1-0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노란가방 2021-01-08 20:33   좋아요 0 | URL
ㅎㅎ 갑자기 무슨 축하인가 하고 한참을 찾아봤더니..
이달의 리뷰로 뽑혔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
M. 스캇 펙 지음, 조종상 옮김 / 율리시즈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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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생명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이 두드러지고 있다사형제를 두고 벌어지는 토론은 벌써 오래된 일이고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인해 촉발된 논쟁도 작은 문제는 아니다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주제는 안락사일 것이다서양의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법적으로 허용되기도 했던 안락사 혹은 조력자살은갈수록 고령화 되고 있는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스캇 펙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오래 전부터 많은 고민을 하며 책을 써왔다꽤 오래 전 영혼의 부정이라는 책에서 아주 좋은 통찰을 얻었던 적이 있었는데새로운 책이 나와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다그런데 아뿔싸원제를 보니 같은 책이었다이 책의 영어제목이 “Denial of the Soul”, 즉 영혼의 부정이었다애초의 제목이 영어제목을 직역한 것이라면새로 낸 이 책은 그게 좀 어렵다고 느꼈는지 새로운 제목을 붙였는데사실 책의 내용을 다 읽고 보면 이 또한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긴 한다.

 


     저자는 우선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의 근거로 제시하는 삶의 질’ 문제가 안락사를 시행하는 이유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오늘날 많은 (마약성진통제는 충분히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문제는 중독의 위험을 과장해 처방과 투약을 늦추거나 주저하는 의료계의 관행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2장과 3장에서 저자는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에도 적극적으로 진통제를 사용한 완화치료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외부생명유지장치와 같은 과도한 의료조치로 수명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의료적 관행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치유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저자는 여기에 플러그를 뽑는다는 표현을 사용한다얼핏 모순되는 것 같지만저자의 입장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환자가 겪는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방법으로의 제한적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보인다.


     요컨대 저자는 안락사를 피할 가장 나중에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로 미뤄두고자 한다심지어 고통(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도 안락사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오히려 고통은 우리에게 인생에 관해 뭔가를 배울 수 있게 만드는 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해는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우리를 이끈다저자는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오히려 인생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제안하는데인간 정체성의 핵심으로서의 영혼을 강조하면서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영혼을 성숙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한다그에 따르면 성급한 안락사는 이러한 성숙을 도리어 방해한다.

 


     십수 년 전 읽었을 때보다 조금 더 저자의 주장이 선명하게 와 닿는다아마도 그 기간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인 것 같다수년 동안 집중치료실과 일반병실그리고 집 사이를 오고가시며 앓으시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병원에서 돌아가셨다입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와 가족 모두 쇠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병실이 몇 개인지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종합병원에서도 막상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수두룩하다는 걸 깨달으면 허탈해진다.


     생각해 보면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집중치료실에 누워있는 것도 일종의 고문이 아니었을까사람이 그런 곳에 며칠을 머물면 정신착란이 일어난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몇 번이나 연속해서 고비를 넘던 중병원에서 다시 한 번 위험한 상태가 되었을 때 소생술을 실시할지 여부를 가족에게 물었고어머니와 여동생을 대신해 내가 결정을 내렸다의식도 없이 누워계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말했던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고통은 자연스럽게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배움의 양이 많든 적든사람은 그런 상태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해또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듯하다어차피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음이라는 문에 도착할 수밖에 없고저자처럼(그리고 나처럼)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상태로 그 문 앞에 서게 되느냐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너무 성급하게 그 문을 열려고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해 보이긴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나의 고통은 누구와도 직접 나눌 수 없는 것이니까저자의 말처럼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충분한 의료적약물적 처치가 좀 더 적극적으로 제공된다면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막바지를 찬찬히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내가 그런 상태가 되어 입원한다면꼭 진통제 자기조절장치를 제공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관련 주제를 함께 읽고 이야기 해 보기 좋은 책이다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여러 견해와 주장들을 무조건 신봉할 필요는 없지만확실히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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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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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의 일부는 남아 있던 마리우스는 갑자기 소아시아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물론 이건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고최근 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일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소아시아 북동부의 폰투스 왕국에 미트리다테스라는 이름의 새 왕이 나타나 국력을 기르며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여섯 번이나 집정관이 되었지만예언에 따르면(그리고 역사에 따르면아직 한 번의 집정관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이야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술라는 여전히 음침한 구석이 있지만조금씩 사회적 명망을 얻어가고 있었다여전히 여자와 관련된 스캔들 때문에 최고참의원의 눈 밖에 나서 잠시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수도 담당 법무관이 되고이어서 앞서 마리우스가 느꼈던 의혹이 점점 실현되어 가고 있던 소아시아에서의 문제를 멋진 연극으로 해결해 낸다.

 


     이 번 책에서 작가는 소아시아를 새로운 무대로 삼고 있다정치적으로민족적으로또 혈통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지역의 여러 나라들의 문제는 어느 한 가지 해법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어 보인다재미있는 포인트는나름 계몽된 군주로 보였던 미트리다테스를 만난 마리우스와 술라의 태도인데그들은 수 십 만의 대군을 부릴 수 있는 미트리다테스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일견 로마인들의 자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후반에 술라와 미트리다테스가 직접 만나는 장면에서 그 이유가 설명된다술라의 군대가 도로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에 미트리다테스는 병사들은 쓰고 버리면 그만인데다가어떤 길이든 있기만 하면 채찍을 써서 병사들을 이동시킬 수 있다.”며 구태여 길을 더 낫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한다애초에 잘 훈련된 병사들의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이후 원활한 보급활동을 통해 지속적인 작전을 꾀할 수 있다는 군사적 목적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미트리다테스는 로마를 이길 수 없었다.

 


     또 한 가지는 이 시기 결혼에 관한 부분이다드루수스와 카이피오 집안의 결혼 중 하나(드루수르와 카이피오는 서로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다)는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오빠의 명령으로 카이피오와 원하지 않은 결혼을 했던 리비아는 결국 남편이 없는 사이 불륜관계를 맺다가 발각되어 이혼을 당한다(리비아는 기꺼이 응하고불륜 상대와 결혼해 몇 년간 즐겁게 살다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비단 리비아의 불행한 결혼을 가부장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그 시대 수많은 가정들은 그런 식으로 맺어졌고모두가 리비아의 경우처럼 이혼으로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그보다는 결혼에 대한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졌던 고대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로 여기면 좋을 것 같다결혼과 이혼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고정치적인 이유로경제적인 이유로 맺어지는 커플에 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사실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이런 모습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이었다결혼에서 그 당사자들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개념은 오롯이 기독교의 산물이다.

 


     이번 권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주제는 로마 시민권이다특히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시민권도그보다 낮은 급의 (투표 참여가 불가능한) ‘라티움 시민권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반면 그들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병력제공을 요구받았고시민권자가 아니기에 세금(직접세)의 부담도 가지고 있었다전쟁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전사하는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땅은 로마에서 온 돈 많은 귀족들이 차지하는 결과가 반복되면서 이들의 불만은 점점 늘어간다소위 동맹시 전쟁이 일어날 전조가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귀족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자신들이 마치 태초부터 신성한 피를 가지고 태어나기라도 한 양이탈리아인들의 불만을 어이없는 일로 무시해버린다동맹시 전쟁으로 서로간의 엄청난 피해가 생긴 이후에야 비로소 시민권 확대를 생각했으니어느 시대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사람은 소수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로마의 귀족들이 이탈리아인들을 접할 기회 자체가 적었다는 점에 있었다사업상 매우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만났을 뿐이고이런 사회적 차단벽은 문제 해결을 막는 위험요소였다생각해 보면 이런 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듯하다로마 공화정이라는 거대한 고목이 서서히 쓰러지는 과정을 다양한 장면을 통해 보여주는 기술이 훌륭하다마치 드라마를 보듯큰 줄기와 거기에서 뻗어나오는 지류가 교차되면서 지루함도 덜어주고흥미로운 건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이 시점이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였다는 부분이다전성기 로마는 동시에 쓰려지고 있었다.


     여전히 큰 그림에서의 분석은 부족하지만이게 역사 소설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제 그런 불만은 묻어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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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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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인 유현준을 처음 본 건그가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밖에도 몇몇 교양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고 하는데 잘 보지 않는지라..) 도시와 건축 같은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데단순히 건축이라는 주제만이 아니라 관련된 인문학적 고찰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것이 좋았다그의 주장에 전부 동의가 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공감은 되었달까계속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결론을 유도하는 진행자의 질문에번번이 자신은 건축학자로서 말하는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낮추는 모습도 호감이었고.


     이 책은 그런 저자의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을 도시건축과 연결 지어서 풀어낸 책이다왜 강남의 큰 길은 걷고 싶지 않지만 명동의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지도시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도시의 요소들은 어떤 게 있는지 등등 다양한 주제를 그리 길지 않은 꼭지들로 엮어냈다.



     사실 워낙에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기에책을 읽으면서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예컨대 도시 건축에 있어서 교차로의 배치가 얼마나 중요한지(24), 거리의 상가들과 그 상가의 데크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같은 내용(43)들은 신선했다국보 1호 남대문 방화와 전소 과정에 보여준 우리 국민들의 과도한 열광이랄까 뭐 그런 태도에 대해서도건축 문화재의 본질은 그 자재가 아니라 그것을 건축한 이들의 생각(116)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크게 공감이 됐다문화재 그 자체를 우상화할 것까지는 없는 거니까.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작년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물론 숭례문처럼 전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복원공사가 필요한 상황이었고그런데 이 때 제안된 아이디어들이 매우 신박했다. (대통령까지 포함된일부에서는 단지 이전에 존재했던 그대로의 복원이 아니라매우 현대적인 형태로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다는 것물론 일부 제안은 기과한 포스트모던적 모양이었고최근 소식에 따르면 결국 이전 모양대로 복원하기로 했다고 전해지지만문화재를 대하는 사고방식이 훨씬 더 자유롭고 즐겁다는 느낌마저 주었다반면 우리는 지나치게 엄숙한 건 아닌지...



     책 전반에 걸쳐서 사람이 중심이 된 도시와 건축이라는 개념이 반복된다어차피 도시화라는 거대한 추세를 거스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렇다면 이왕이면 천편일률적인 도시계획에 따라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든눈감고 도착한다면 어디가 어딘지 구별도 안 되는 그런 재미없는 공간 말고사람들이 거닐고 싶고함께 모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좀 더 창의적이고피부에 와 닿는 도시계획또 건축이 필요한데건축이라는 영역이 온갖 사람들의 욕망이 얽혀 있는 큰 판의 도박판이 된지가 오래인지라 뭔가 다른 식으로 생각하기가 참 어렵지 않나 싶다안타까운 부분인데뭐 한 사회의 발전과 쇠락이야 어차피 그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식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니까... 다같이 부동산 끌어안고 죽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도시와 건축에 관한 다양한 상식과 비전을 읽을 수 있는 괜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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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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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는 어디일까정답은 대영제국이다그러면 그 다음은바로 몽골제국이다근대의 발달한 통신과 교통수단그리고 무기를 통해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대영제국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도 있지만어떻게 몽골은 그보다 5백 년이나 앞서서 아시아와 동부 유럽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울루스라는 체제가 있었다당연히 그 당시 이렇게 넓은 영토를 중앙집권식으로 다스릴 수는 없었고때문에 각지를 울루스라고 불리는 일종의 하위 영역으로 나누어서 일종의 봉건제 국가로 운영했다시간이 지나면서 각 울루스들의 독자성이 강화되는 동시에 서로 분화되었고주변 세력들과의 대결을 거치며 하나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비록 새로운 나라로 이름을 바꾸긴 했으나 몽골 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몽골을 계승해 왔다고 말한다역사책을 읽다 보면 한 번씩은 접하게 될 이름들인 무굴제국티무르제국오스만제국 같은 나라들까지도 언급되고 있으니 일단 흥미가 생긴다.



     어떤 나라를 후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전에 존재했던 나라의 백성들이 이후 그 자리에 세워진 나라로 편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단지 그 정도로 후계국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물론 저자도 단지 그 정도의 주장만을 하는 건 아니다여기에 후계국으로 소개되는 나라들은 상당수가 몽골을 자신들의 전신으로 스스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인 무굴제국을 보면애초에 무굴이란 몽골이란 뜻의 인도어이었고사실 그 나라의 정식 명칭은 티무르 왕조나 구르칸 왕조라고 불려야 한다고 한다이 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는 자신을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자부했다.(관련 삽화만 봐도오늘날 인도인들의 외형과는 사뭇 다른정말 동아시아쪽 외형이 뚜렷한 바부르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중앙아시아에 수립된 여러 왕조들이 공통적으로 자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그만큼 몽골제국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중앙아시아에 건설된 여러 후계국들이 곧바로 투르크화된 것으로 생각하지만(지금도 위키백과에는 실제로 그런 식의 서술이 보인다), 저자는 여기에서 당시 투르크라는 명칭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오늘날과는 달랐다는 주장을 한다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투르크인이라는 집단명을 티무르 제국의 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사용했다는 것(75). 그리고 아예 오늘날과 같은 투르크인의 정체성은 근대 이후에야 발생한 것이고 그 이전에는 내륙아시아 유목민을 좀 더 폭넓게 지칭했다는 주장도 더해진다.(42-43) 그렇다면 이들 계승국가들에서 몽골제국 계승의식은 좀 더 강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오스만제국까지 계승국의 범위를 넓힌 것은 솔직히 약간 무리처럼 느껴진다애초에 오스만 왕조가 일 칸국의 제후국이었고후에 오스만 제국의 제위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인근의 또 다른 몽골제국 계승국인 크림칸국의 군주가 그 제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 정도는 충분한 근거라고 보기엔 약하다.


     또위에서 말한 투르크화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해도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현지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혈통이라든지문화라든지 현지화가 이루어졌던 면도 아예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무굴제국만 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면서 왕의 외모에서도 더 이상 몽골족의 외형이 사라지기도 했다.


     사실 애초에 계승국이라는 개념을 종주국과 피종주국혹은 문화적 침략의 수단 같은 걸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얼마든지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인접국혹은 후계국이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고몽골제국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긴 국가들의 영향이 이후 세워진 나라들에 남아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니까.


     이 외에도 수많은 칸국들에 관한 언급도 약간은 생소하게 느껴졌지만동시에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이제까지 역사라고 하면 보통 서유럽 중심의 역사와 우리나라가 포함된 동아시아 역사 정도였기에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동부 유럽이라든지남아시아라든지)의 역사 쪽은 아는 게 별로 없었다좀 더 폭넓은 독서 욕구를 북돋게 해 준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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