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후배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형님 요즘 모하슈?”

정서법을 지킨다면 무엇하고 지냅니까인데 그냥 모하슈라고 간단히 줄여 표현한 것에 나는 감탄했다. 정서법을 모를 후배가 아니다. 하지만 모하슈라고 발음 나는 대로 적음으로써 기막힌 말맛을 맛보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친구가 내게 보낸 문자메시지에도 기막힌 표현들이 있었다. ‘진하게 그림자하네’ ’인생의 편린이 곳곳에 뿌리하니란 문장들이 그것이다. ’진하게 그림자하네라는 표현은 문맥으로 봐 진한 그림자처럼 언제나 영향을 주고 있네란 뜻일 테며 인생의 편린이 곳곳에 뿌리하니란 표현은 인생의 편린이 곳곳에 뿌리처럼 박혀 있으니란 뜻일 듯싶다.

정서법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그 말맛이 기가 막혔다. 하긴 어감(語感)이란 한자어보다 말맛이란 순수한 우리말 표현은 또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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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들 대부분이 불 꺼져 있는 데다가 보안등까지 고장 난 게 많아 아파트 단지는 어둠의 단지가 되었다.

철지난 검은 동복 차림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를 신고서 어둠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이. 삼십여 분 전에 돌발사건을 겪어서 경황없는 정신상태다. 이상한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되자 아이는 이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가 걸어올 때 도로 변 전주에 있는 불법주정차 단속카메라나 상점들의 방범카메라, 심지어는 지나가던 차량들의 감시카메라에도 그 모습이 잇달아 찍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돌발사건 현장에서 부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 골목은 감시카메라 하나 없이, 비좁고 긴 터널 같은 길로 이어져서 도피 로로써는 최적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넓은 보도를 걸어서…… 어둠의 단지 앞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둥 구조물들만 남은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양쪽 기둥 구조물에 설치한 등 두 개도 그 중 하나는 아예 켜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제 촉광을 잃고 일대의 어둠에 눈치 보듯 아주 흐릿하게 켜져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아이를 아무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는 단지 내 상가가 있다. 열 개 점포 중‘2단지 슈퍼마켓하나만 전등불을 켜놓아서 단지 내 상가임을 겨우 알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서 어둠 속 보도를 이십 미터쯤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 섰다. 긴 밤을 노숙하려면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이는 동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 한 장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학교에 잠깐 들른 형이 비상금 하라며 쥐어 준 돈 만 원이다. 형은 시내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아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한 달에 사십 만원 받는다는데, 아이와 함께 지낼 십 평 원룸의 전세 보증금 오백만 원을 목표로 그 돈 대부분을 예금하고 있다 했다.

  

 

 

아이는 방금 지나친 상가 쪽으로 되돌아 걷는다. 어두운 바닥의 보도블록도 깨지거나 파인 것들이 많아서 걷기가 편치 않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내려와 걷는데 그 때, 정문 쪽에서 웬 차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두 눈처럼 부라리며 들어왔다. 아이는 경찰차가 아닌가 싶어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는 전조등 불빛을 쏘면서 아이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휘발유 태우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옆으로 지나쳐 갔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상가 쪽으로 걷는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박쥐가 된 아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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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들 대부분이 불 꺼져 있는 데다가 보안등까지 고장 난 게 많아 아파트 단지는 어둠의 단지가 되었다.

철지난 검은 동복 차림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를 신고서 어둠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이. 삼십여 분 전에 돌발사건을 겪어서 경황없는 정신상태다. 이상한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되자 아이는 이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가 걸어올 때 도로 변 전주에 있는 불법주정차 단속카메라나 상점들의 방범카메라, 심지어는 지나가던 차량들의 감시카메라에도 그 모습이 잇달아 찍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돌발사건 현장에서 부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 골목은 감시카메라 하나 없이, 비좁고 긴 터널 같은 길로 이어져서 도피 로로써는 최적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넓은 보도를 걸어서…… 어둠의 단지 앞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둥 구조물들만 남은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양쪽 기둥 구조물에 설치한 등 두 개도 그 중 하나는 아예 켜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제 촉광을 잃고 일대의 어둠에 눈치 보듯 아주 흐릿하게 켜져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아이를 아무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는 단지 내 상가가 있다. 열 개 점포 중‘2단지 슈퍼마켓하나만 전등불을 켜놓아서 단지 내 상가임을 겨우 알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서 어둠 속 보도를 이십 미터쯤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 섰다. 긴 밤을 노숙하려면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이는 동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 한 장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학교에 잠깐 들른 형이 비상금 하라며 쥐어 준 돈 만 원이다. 형은 시내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아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한 달에 사십 만원 받는다는데, 아이와 함께 지낼 십 평 원룸의 전세 보증금 오백만 원을 목표로 그 돈 대부분을 예금하고 있다 했다.

아이는 방금 지나친 상가 쪽으로 되돌아 걷는다. 어두운 바닥의 보도블록도 깨지거나 파인 것들이 많아서 걷기가 편치 않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내려와 걷는데 그 때, 정문 쪽에서 웬 차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두 눈처럼 부라리며 들어왔다. 아이는 경찰차가 아닌가 싶어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는 전조등 불빛을 쏘면서 아이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휘발유 태우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옆으로 지나쳐 갔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상가 쪽으로 걷는다.

지린내 가득한 상가로 들어섰다. 문 닫은 점포 개수만큼이나 공허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2단지 슈퍼마켓’. 무덤덤한 표정으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앉은 주인 영감은, 아이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구운 것 하나를 고른 뒤 만 원을 건네자 잠시 갈등했다.‘까짓 거, 학생복을 입었다고 해도 부모 심부름으로 온 줄 알았다 하면 되는 거다고 속으로 다짐한 뒤 돈을 받았다.

아이는 상가를 나와서 다시 걷는다. 105동 아파트를 향하는 걸음이다. 그 몇 분 사이에 더욱 무거워진 어둠.

일 년 전만 해도 아이는 105동의‘3-4’현관을 향해 늦은 밤마다 이 길을 걸어갔었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까지 하고 오느라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항구에 닻을 내리는 배처럼 안온했었다. ‘우리 집에 다 왔으니까. 아버지가 105403호 안방에 혼자 해골처럼 누워 있어서, 썩어가는 몸 냄새로 십팔 평 공간이 진동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왔다는 생각에 아이 마음은 안온했었다.

지금 아이는 그런 안온한 닻 하나 내릴 데 없이 사는 삶이다. 오늘 105동 아파트의 밤 풍경이 생소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일 년 전보다 불 꺼진 빈 집들이 더욱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105동의 ‘3-4’ 현관이 코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와 예전의 꿈동산 유치원건물 사이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유치원은 현대 재활용 센터로 간판이 바뀌었다. 재갈대던 유치원 꼬마들 대신에 빈병과 폐휴지 따위가 와글거리며 모여 있는 걸까?

아이는 주공 2단지 아파트 열 개 동 중 가장 전망 좋고 양지바른 곳이라던 105, 그 중의 403호를 어둠 속에서 올려다본다. 예전에 중간고사라도 치르고 일찍 귀가하면 아이는 저 403호의 발코니에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한낮의 전경을 즐겼다. 멀리 단지 앞 차도를 느릿느릿 지나가는 시내버스들, 단지 내 상가의 다양한 간판들, 그리고 바로 앞의 꿈동산 유치원 꼬마들이 병아리들처럼 재갈대며 귀갓길을 서두르는 모습들…….

덥수룩한 머리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에, 철지나서 땀내 풀풀 나는 동복 차림으로 잠시 회상에 잠겨 있는 아이. 누가 아이의 지금 외양을 봤다가는 고등학생이기는커녕 밤거리의 노숙자인 줄 알고 기겁했을 게다. 하긴, 기숙사의 사감 선생이 오늘 낮에 아이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노숙자냐?”

사감 선생이 보기에 아이는, 당신이 기숙사 일을 맡은 지 세 달 만에 처음 보는용의 및 복장 상태가 100% 불량인 학생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식이 내 눈길을 피해서 기숙사에서 지내왔지?’하는 험한 눈빛으로 다시 아이한테 이렇게 물었었다. “그래, 너는 부모님도 없냐? 용돈이라도 타서 이발하고 운동화도 사 신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

아이는 답했다.“네에…… 부모님이 없는데요.”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쾅 맞은 듯했던 사감 선생의 표정을 떠올리면 아이는 우습다기보다 캄캄한 나락으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심정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게 다, 일 년여 전에 우리 집안이 해체된 후 벌어지는 일들이다. 조금 전의 돌발사건도 그렇다. 그 여자는 내가 어쩐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나와 마주치자 제풀에 놀라 차도 건너 편 보도로 달아나다가, 그 때 마침 달려오던 시내버스에 치인 것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버스가 뭐에 부딪힘과 동시에 급정거하는 소리를 내며 섰고 순식간에 일대가 소란스러워질 때 나는 그냥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이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냐면…… 그냥 가는 길이었다. 처음부터 그냥 가는 길이었는데 그렇듯 그 여자는 보도에서 나와 맞닥뜨리자 제풀에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랬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자리를 떠나 보도를 걸어 올 때 구급차가 경광등을 희뜩이며 내 옆의 차도로 허겁지겁 지나갔다. 그 여자를 수습하려고 가는 건지, 다른 일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 솔직히 나는 그 여자가 모르는 여자였다면 그 자리에 남아서 사건을 수습했을 테다. 여자가 숨이 붙어 있었다면 택시라도 잡아서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으로 갔을 테고, 그것도 아니라면 하다못해 그 자리에 남아서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한테 전후 사정을 진술했을 테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여자였으니까. 그냥 나는 내 갈 길을 걸어갔다. 오가던 차량들이 일제히 급정거하고 행인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어수선한 사고 현장을 나는 그렇듯 담담하게 벗어났다. 그때가 만일 대낮이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행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나를 붙잡고는 멱살을 쥐고 난리 치지 않았을까? 정말 어둡고 어수선하기가 천만다행이었다.

햇빛 환한 대낮은 내게 늘 두려운 시간이었다. 오늘 대낮만 해도 그렇다. 평상시였다면 교실이나 기숙사의 방 같은 그늘진 데서 편히 지냈을 대낮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연휴를 맞아 기숙사에서 ‘12일 전원 귀가'를 실시하니까, 갈 데가 없는 나는 대낮에 잘못 나온 박쥐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이 지경에 다다랐다.

기숙사 친구들이 인디언처럼 끼호끼호소리까지 지르며 신나게 귀갓길로 나설 때 나는 사감실을 찾아가 이번 연휴 동안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으면 안 되냐고 말씀 드리려 했다. 말씀드리기도 전에 사나운 얼굴로 내 용의복장의 불량부터 지적하던 사감 선생님. 급기야는 내가 부모님이 없다고 말씀 드리자 놀라서 입을 떡 벌린 그 표정이라니.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하는 그분의 대답이란 게 이랬다.“어찌 됐건…… 예외는 없다. 여하튼, 이 기숙사를 나가서 하루 지내고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 귀사 하는 거다. 이상 끝.”

일은 그렇게 꼬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번 사감 선생님이다. 먼젓번 사감 선생님은 달랐다. 작년 연휴 때 내가 그런 사정까지 다 말씀 드리자, 참 안 됐구나 하는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씀해 주었었다.“그렇다면 말이야,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지 말고 너만 혼자 남아 있어라. 다만, 내가 기숙사의 철문을 닫고 전원도 내려놓고 갈 거니까, 그런 불편은 참고 지내야 해. 웬만해서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그 동안 밀린 잠이나 열심히 자두는 게 어떻겠니?”

그 때가 작년 추석연휴 때였다. 그런 분도 있었는데 올해의 사감 선생님은 영 아니다. 교장선생님보다도 더 늙어보여서인자한 할아버지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까다롭기가 여간 아니다. 일이 그래서 꼬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얻고자 힘겹게 찾아간 아는 교회마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 년 전까지도 고등부 활동에 빠지지 않은 나였으니까 그것을 믿고 찾아간 것인데 그 모양이 되어 버렸다. 닫힌 교회의 문짝에는 이런 글이 A4 용지 한 장에 적혀서 달랑 붙어 있었다.‘연휴를 맞아 12일로 산상기도회를 갑니다. 연락처 011-’

교회 문 앞 층계에 맥이 쭉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햇살은 얼마나 무겁던지. 그래, 나는 한 마리 박쥐였다. 잘못돼서 대낮에 나온 박쥐. 환한 대낮이 그토록 끔찍할 줄이야.

, 내 책가방?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소주병과 구운 오징어뿐이다. 그럼, 기숙사를 나설 때부터 들었던 책가방을 내가 어디에 놓았지? 연휴 중에도 풀어야 할 문제집만 골라서 담은 책가방인데. 나 참. 여하튼 그 여자와 아까 마주친 것 하나만 봐도 오늘은 재수에 옴 붙은 날이다. 인구 이십만을 넘었다는데도 그 여자와 보도에서 딱 마주쳤으니 아직도 좁은 도시다. 그 여자나 우리 형제나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며 살아왔을 텐데, 오늘 참, 일이 더럽게 꼬여 버렸다. 나야 항상 교실이거나 기숙사에서 지냈고, 형은 독서실을 밤낮으로 지키면서 사는데 어떻게 내가 오늘 그 여자와 보도에서 맞닥뜨리는 재수 없는 일이 생겨났을까?

이게 다 늙은 사감 선생 새끼 때문이다. 개새끼. 기숙사에 빈대 붙어 사는 내 처지를 이해하고 그냥 넘어가 준다면 길어야 아홉 달 뒤에 수도권 대학에입학성적 우수 장학생으로 합격하면서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것인데…… 그거 하나 봐 주지 않아 내가 대낮부터 헤매다가 책가방도 잃고 이 고생이다. 에에 개새끼 퉤퉤퉤.

아이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분무되는 빛들에 몸을 반쯤 적시고 서서 침을 욕처럼 뱉다가, 105동의 ‘3-4’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웬 인기척 때문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아이는 방문할 집이라도 있는 양 바삐 걸어 ‘3-4’현관으로 들어갔다.

노인 한 분이 폐휴지 가득한 수레를 끌고 나타난 것이 웬 인기척의 정체였다. 공중전화 부스의 빛들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현대 재활용 센터건물 앞에 수레를 세워놓고서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박 선생은 화장실 좌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모처럼 연휴를 맞아 집에 와서 불고기를 많이 먹은 게 체한 듯싶다. 나 참, 그 아이가 그런 기막힌 사연으로 기숙사에 맡겨진 줄을 몰랐다. 삼월 인사이동으로 이 학교로 전근 오면서 맡은 기숙사 사감 일이다. 세 달째로 접어드는데 팔십 명 되는 기숙사 애들 중에 그런 애가 끼어있을 줄은 나는 정말 몰랐다. 진작부터 애들의 신상을 파악해 두었어야 하는데, 낮에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밤에는 기숙사를 지켜야 하니까 바빠서 그럴 사이가 없었다. 직접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사감실로 찾아온 그 아이. 처음 보는 얼굴에 복장까지 아주 불량해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단치려는데 그 아이가 하던 말. “네에…… 부모님이 없는데요.”

그런 충격적인 존재한테 무슨 꾸지람인가? 그 아이의 용의나 복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했고,‘연휴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나 묵살해 버렸다. 괜히 이런 이상한 자식을 남겨 두었다가, 전기도 내린 기숙사 방에서 무슨 사고라도 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촛불이라도 켜놓고 지내다가 잘못돼서 기숙사에 불이라도 낸다면 그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사고다. 사감인 내가 책임을 지게 되면서 최소한 교감으로 승진하고자 하는 노력이 하루아침에 무산될 게 뻔하다. 내 나이가 어언 오십육 세. 교장보다는 두 살 아래이지만 교감보다는 다섯 살 위다.

아이를 박정하게 처리해서 내 보냈는데, 뒤늦게 께름칙한 마음이다. 오갈 데 없는 그 아이가 그 꼴로 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사고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면서 생겨난 쓸 데 없는 노파심인가? 아니다. 아무래도 불길하다.

!

하고 힘을 주는데도 편치 않은 아래뱃속의 것이 나올 기미가 없다. 꾸럭꾸럭 속이 편찮은 대로 더 기다려 봐야 하나? 결국 일을 못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거실의 아내는 오전에 목욕탕에라도 다녀왔는지 허벅지 속살을 언뜻언뜻 보이며 이심전심의 욕정을 전한다. 제기랄, 보름 만에 서울 집으로 올라와 편히 쉬려도 아내 욕정을 달래줄 의무가 기다리고 있다니. 그 아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아서 뱃속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 의무가 가능할까?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는 있지만 그 아이 걱정뿐이다.

아비가 위암으로 삼 년이나 앓다 죽고, 그 바람에 집안이 거덜 나면서 엄마마저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산다는 막장 가정의 아이. 몇 안 되는 친척들도, 아이 아비가 사업할 때 보증 선 것이 잘못되면서 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아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라고는 독서실에서 총무를 한다는 형 하나. 그 형도 집안이 해체되자 숙식을 해결하고자 그 곳에 가 있단다.

기가 막힌 아이 사정이 학교에 파악된 게 작년 삼월 학기 초에 학급 별로가정환경조사 자료를 걷으면서였다고 했다. 그 때부터 학교에서는 아이를 기숙사에 넣어 숙식을 해결해 주는 한편으로학업성적은 우수하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한 장학금까지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 아이가 학교 측의 후의를 단단히 입게 된 것은,‘서울대 합격 가능성이 높은, 학업성적 우수 학생이라는 사실이 적극 고려된 때문이라 했다. 이런 사실들을 나는 오늘 오후에야 알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아이여서,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의 담임한테 전화를 걸어낮에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그렇게 그간의 사연을 일러주었다.

담임은 이런 말을 덧붙이며 통화를 마쳤다. “너무 염려 마세요. 요즈음 날씨가 더워졌으니까 아무 데서 잔들 얼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하하하. 애들은 말입니다, 야영가면 밤새 한 잠 안 자고 잘 놀잖아요? 그런 애들이니까…… 부장님,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만 끊습니다.”

담임은 사십 대 초반의 사내이다. 그런 나잇대 사람이니까 말을 쉽게 하는 것이지, 어디 나처럼 세상의 이런저런 풍파를 보거나 겪으면서 살아온 나이의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지금 어느 곳에서 헤매고 있을 그 아이.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그 아이가 안전하게 오늘 밤을 보낼 수 있을까.

그렇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내가 지갑 안에 접어서 넣어둔 유인물 한 장이 있지 않나. ‘기숙사 학생회 임원 명단 및 전화번호’.

회장 녀석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한다. 녀석은 뭔 바쁜 일이 있는지 일 분 넘게 있다가 전화를 받으며 내게 한 첫 마디가 이랬다. “, 누구니 새끼야?”

기가 막히지만 화를 억누르고 답한다. “나다, 사감 선생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제 친구가 건 줄 알고!”

괜찮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하나 물어볼 것이 있거든.”

예예 말씀하십시오.”

멋모르고 전화 받은 죄를 씻고자 회장 녀석은 아주 어조가 공손하다. 휴대폰을 들고 연실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싶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대며연락할 일이 있는데 혹시 휴대폰 번호라도 알지 않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 걔요. 걔는 휴대폰 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밤낮으로 공부만 하는 애에요. 왜 그러세요, 선생님?”

내가 꼭 연락할 게 있어서 그러거든.”

걔는 기숙사에 남아 공부하지 않나요? 작년 연휴 때도 걔는 특별히 봐 주는 것 같더라고요. , 걔는 엄마가 쌩까서 그렇게 된 애잖아요? , 안 된 애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쌩깐다는 말은 일부러 모른 척 한다거나 도망갔다는 뜻이 아닐까? 애들도 다 아는 그 아이의 가정사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굳이 조심스레 얘기할 것도 없겠다. 솔직하게 말하자.“그러면 너를 믿고 말하겠다. 다름이 아니고.”

하면서 낮에 그 아이가 사감실을 찾아와서 벌어진 일을 대강 말하고서,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장 녀석이 반문했다.“무슨 걱정이세요?”

그 아이가 잠자리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지. 그 아이한테 하나 있는 형이란 사람도 자기 몸 하나 해결하기 바쁜 처지라니…… 아이가 형한테 들를 것 같진 않고. 그래서 내가 그 아이와 연락이 닿으면, 거 뭐야, 학교 수위실에 딸린 방에서라도 하룻밤 잠을 자라고 일러주려는 거지. 그 방이야, 내가 수위 아저씨한테 전화 한 통 걸어주면 되니까.”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만일 그 애를 만나거나 연락이 닿으면 그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휴대폰으로 전해지는 바쁜 어조로 봐서 회장 녀석은 뭐 이런 시시한 일로 전화를 다 하시나?’하는 표정인 게 역력했다. 어찌 됐건 이만 하면 됐다. 내가 아이한테 여기 멀리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 그러면…… 가만 있자, 우리 아내가 어디 있나? 이제야 한 번 안아줄 마음이 생겨나는데 말이야.

 

앞뒤바퀴의 바람이 다 빠진 낡은 자전거가 105‘3-4’현관의 왼쪽 벽에 기대어 있다. 그 위쪽에 있는 각 호별 우편물 수취함.

아이는 수취함에서 403호 칸을 본다. 오래 되어‘403’이란 페인트 글씨는 흔적도 없고 이삿짐센터 스티커들만 겹겹이 붙어 있지만 아이는 403호 칸인 것을 안다. 그 칸 아가리에 무슨 유인물이 물려 있다. 아이는 아가리 덮개를 쳐들어 그것을 꺼내어 본다.‘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 고시

다른 칸의 아가리들도 같은 유인물을 물고 있다. 어떤 것은 상품 광고 전단들까지 물고 있어 구토하는 모양 같다.

일 년 전, 403호 칸의 아가리에는 기분 나쁜 우편물들이 끊임없이 물렸다.‘채무변제 3차 독촉’‘법적처리 통보’’신용불량자 등재를 예고함’‘파산신청 안내 등등. 해골이 다 되어 누워 있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날아들던 기분 나쁜 문서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아니 그 여자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어갔다.

아이는 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 고시유인물을 수취함 아가리에 다시 쳐 넣고서 층계에 발을 디딘다. 사 년 전인가, 일 층의 103호에 살던 귀여운 꼬마가 층계 벽에 그려놓은 그림이 여태 남아 있다. 빨강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꽃 한 송이. 그 즈음부터 이 아파트는최소한의 관리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이 층.

삼 층.

사 층으로 오르는 층계에서 아이는 가슴이 떨린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이제 층계를 다 올라서 403호 문을 열면 멀리 안방의 아버지가 희미한 기척으로 자기를 맞을 것 같다.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지내면서 힘이 다 빠져버려, 머리맡의 물병을 손으로 쓰러뜨려 소리 내거나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로 당신의 반가운 마음을 알렸다.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 저 왔습니다.”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책가방을 거실바닥에 내려놓고서 여기저기 창문들부터 활짝 엶으로써, 십팔 평 실내에 가득한 역한 냄새부터 환기시키는 첫 번째 집안일을 했다. 두 번째 집안일은 아버지의 병 수발이다. 병 수발이랬자, 아버지 샅에 채워진 기저귀를 갈아주고 죽 그릇을 설거지한 뒤 새 죽을 끓여 담아 놓는 일이다. 죽도 그냥 방치하면 곰팡이가 퍼렇게 껴서 내버려야 했다.

아이가 당신 샅의 기저귀를 갈 때 눈을 꾹 감고 마른 장작개비처럼 움직여지던 아버지 모습. 아이는 그 아픈 기억을 지울 듯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403호의 문 앞을 지나 오 층으로 향한다. 밤 열 시도 안 되었을 텐데 무덤처럼 어둡고 조용한 통로다. 텔레비전 소리나 어느 집 말다툼 소리 같은 것도 없다. 아까 공중전화 부스 옆에 서서 올려다봤을 때 열 가구 중 두 가구가 불을 켜고 있었는데…… 불 꺼진 가구들은 모두 다른 데로 이사 간 걸까?

이제 오 층이다. 층계가 끝났다. 여기서 벽에 있는 쇠사다리로 삼 미터쯤 오르면 자물쇠로 채워진 정사각형의 철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옥상이다. 그 열쇠가 아직도 있을까? 관리소 아저씨가 그 자물쇠의 열쇠를 층계 벽의 작은 환기창에 몰래 놓고 다니던 것을 아이는 기억해 냈다. 높은 환기창이라 아이는 발끝을 곧추세우고 오른팔을 바짝 올려 손바닥으로 더듬어 본다. 있다, 먼지 속에. 아이는 차가운 그 열쇠를 입에 물고서 쇠사다리 틀을 하나하나 잡으며 오른 뒤, 자물쇠를 따고 철문을 연다. “삐이이걱

낮에 달궈진 옥상의 더운 기운이 아이 얼굴을 공격한다. 아이는 철문을 열어놓은 채 다시 쇠사다리로 오 층까지 내려와 동복 상의를 벗는다. 팔소매들을 서로 잡아매자 상의는 광주리처럼 되었다. 그 안에, 아까 바닥에 놓았던 소주병과 오징어 구운 것을 담은 뒤 목에 걸고 조심조심 쇠사다리를 오른다.

지상은 어둠에 깔리면서 낮의 열기가 식었는데, 옥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는 뜨듯한 옥상 바닥에 주저앉은 뒤 소주병 마개를 따고서 꿀꺽꿀꺽 소주를 마신다. 점심은 기숙사 식당에서 먹고 나왔지만 저녁은 먹은 게 없어, 목구멍 너머로 들어간 소주는 이내 독한 기운으로 내장에 퍼진다. 아이는 벌써 흔들리는 눈길로 오징어를 찾아 두 손으로 뜯어 먹다가, 다시 소주병을 들어 마신다.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하게 보여야 할 옥상인데 그렇지 않다. 백여 미터 거리를 두고 지어진 이십오 층 고급 아파트의 휘황한 전등불빛들이 여기 옥상까지 날아오면서 밤하늘을 허연 그물처럼 막은 탓이다. 그 여자가 산다는 저 이십오 층 아파트의 어느 집. 그 여자는 아버지 화장한 재를 강물에다 뿌리고 돌아온 날 저녁에 우리 형제한테 이런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나는 네 아버지와 이혼해서 벌써부터 남이었다. 인제는 너희끼리 잘 살기 바란다.’

그 때부터 엄마는 그 여자가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한 사실은 우리도 아는 오래 전 일이었다. 아버지의 부채가 넘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문서상의 위장이혼이라 했는데…… 그것을 실제로 적용시킨 것이다. 아버지의 건강음료 판매사업이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었을 때 그 여자는 엄마였었다. 아파트 관리비니 전기료니 하는 것들을 꼬박꼬박 잘 내고 살 때는 좋은 엄마였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래도 오늘 밤, 예전에 십 년 넘게 살았던 105403호 가까운 위에서 지내게 되지 않았나. 403호 안방의 아랫목처럼 따듯한 옥상 바닥이라니……. 소주에 취한 탓일까, 아이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채로 앉아 있다가, 벗었던 상의를 이불처럼 뒤집어쓰며 옥상 바닥에 누웠다. 밤잠을 청한다. 뒤집어 쓴 상의가 검은색 동복이니까, 박쥐가 하늘로 날아오르려다가 쳐 놓은 빛 그물에 걸려 추락해 버린 꼴 같았다.

 

 

다음 날.

오후 다섯 시까지 학생들이 기숙사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박 선생은 서울 집에서 오후 세 시쯤 학교가 있는 지방 도시로 출발해도 될 텐데 오늘은 점심을 먹자마자 한 시에 바로 출발했다. 아무래도 그 아이가 마음에 걸려 집에 있느니 기숙사에 일찍 가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오후 세 시도 되기 전에 학교 내의 기숙사에 도착한 박 선생.

이 층 건물인 기숙사의 일층 출입구 옆에 전원박스가 있다. 그것을 열어 기숙사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고, 이어서 출입구를 가린 철제문의 잠금장치를 풂으로써 기숙사는 정상이 되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기숙사 내부. 박 선생은 뚜벅뚜벅 걸어 사감실로 들어가서는, 벽에 붙은각 실 별 명단부터 살핀다. 일 층에는 101호실부터 110호실까지 있고, 이 층은 201호실부터 210호실까지 있다. 그 아이 이름은 210호실에 들어 있었다. 이 층 맨 끝 구석방이다.

그 아이가 그 동안 내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게 맨 끝 구석방인 때문이었나? 그보다는 그 아이가 내 눈길을 피해 생활했을 개연성이 더 크겠다. 각 호실마다 네 명씩 배정되어 있는데, 애들은 기숙사를 수학여행 온 여관방처럼 여기는지 쉬지 않고 들락날락거리며 떠들어댄다. 그 아이가 그런 소란 속에 숨어 있으면 내가 몇 달 정도는 모르고 지낼 수도 있지.

박 선생은 사감실을 나와 어둑한 복도를 걸어 210호실에 다다랐다. 문을 열자,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한 악취. 한창 크는 애들이라 수컷의 냄새에다가 안 빤 양말 냄새, 땀 냄새 등이 뒤섞여 남아있다. 방의 왼쪽에는 사 단으로 설치된 침대가 있고 오른 쪽에는 네 조의 책걸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네 조의 책걸상 중 가장 구석에 있는 그 아이의 자리. 책상 앞 벽에는 아이가 형으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과, ‘서울대 합격!’이라고 검은 매직으로 굵게 쓴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박 선생이 놀란 것은 책상 밑에 가득한 책들이다. 어둑해서 미처 못 봤었는데 의자에 앉아 두 발을 뻗기 힘들게 책상 밑에 꽉 찼다. 극빈이라는 아이가 웬 책이 이렇게 많아?

궁금해서 책 하나를 꺼내 환한 창가에서 보니까 영어 문제집이다. 들쳐보자 지저분한 밑줄 긋기도 많은데다가, 책 표지에 적힌 이름도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 이름이다. 그제야 감이 잡혔다. 아이가 문제집을 살 돈이 없자 학교 쓰레기장에서 주운 것이다. 요즈음 애들은 학년이 오르거나 졸업하면 그 동안 보던 책들을 미련 없이 다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다. 조금 풀다가 말아서 새 것이나 다름없는 문제집도 그냥 다 내버린다. 여하튼 공부 하나는 열심히 하는 아이이구먼.

그런 아이를 기숙사에 남겨놓는다면, 내가 전기를 꺼 놓아도 양초라도 구해 밤새 공부했을 게 뻔하다. 그건 안 돼지. 이렇게 책들도 많고 좁은 방에서 그랬다가는, 자칫 양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기숙사 전체로 불이 번져 대형화재가 될 텐데. 안 됐지만, 내가 어제 아이한테 나가서 자고 오라 한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박 선생이 사감실로 돌아와 텔레비전의 재방 드라마를 보는 중에 오후 네 시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이들이 와글와글 기숙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다섯 시. 박 선생은 사감실의 방송장치를 켠 뒤 마이크를 잡고서 각 방의 대표들에게 현재인원을 즉각 보고하도록 알린다. 잠시 후 이십 명의 대표 모두 사감실 앞에 모여 101호실부터 보고하는데 210호실에 이르도록 단 한 명의 결원도 없었다. 일부러 210호실의 대표에게 재차 확인했으나 전원이 입사했단다.

그럼 됐구나. 어제 오후부터 편치 않은 박 선생의 마음이 확 풀렸다. 그 아이가 여하튼 들어왔으면 되었다. 박 선생은 기숙사 구내식당을 인터폰으로 불러기숙사생들의 여섯 시 저녁식사에 차질이 없도록당부해 놓고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갈등이 본격화될 때 그 아이가 왔다. 부은 듯한데 겁먹은 얼굴이다. “기숙사 학생회장 애가,(콜록) 사감 선생님이 어제부터 저를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콜록)”

내가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너를 학교 수위실 빈 방에 재울 것을 그랬나 싶더라고. 그래서 찾았지. 그래, 간밤에 잠은 어디서 잘 잤냐?”

.”

기침하는 것을 보아, 어디 공원 벤치 같은 데에서 잠잤을 듯싶다. 박 선생은 캐묻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고 손짓해서 보냈다. 그래놓고 생각해 보니, 녀석이 여전히 땀내 나는 동복 차림에다가 덥수룩한 머리인 게 어제처럼 용의복장 불량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런 녀석을 방치해서는 집단의 질서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지론이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고, 이놈의 기숙사 사감 짓도 못할 짓이다. 밤새 들락날락하며 떠드는 놈에다가, 배탈 났다고 찾아오는 놈, 물건 잃었다고 찾아오는 놈, 다른 호실에 들어가 잠자는 친구를 후려치고 도망 오다가 잡힌 놈 등등. 어디 그뿐인가? 수시로 막히는 화장실의 변기, 수시로 갈아주어야 하는 형광등, 수시로 시내 기술자를 불러들여 고쳐야 하는 고물 세탁기. 게다가, 화장실에 비치하는 두루마리 화장지는 하루나 이틀 만에 거덜 난다. 다섯 칸이나 되는 화장실에 비치되는 것들이 거의 동시에 그런다. 학교의 행정실장은 나만 보면 투덜거린다.“두루마리 화장지 비용으로 올해 기숙사 운영비가 다 나가겠습니다!”

객지의 하숙비도 아낄 겸, 교감 승진이 되기 위한 평가 하나 잘 받아보려고 자원한 고생치고는 고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사감이란 짓은 올 한 해로 끝이다. 내년에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하며 설렁설렁 출근하다가…… 교감 자격 연수로 들어가야 되겠지. 어쩌다가 마누라를 안아주는 일도 버거운 늙은 놈이 이제 무슨 낙이 있나. 교감, 교장이 되는 것, 그 낙밖에 없지.

박 선생이 신세타령을 속으로 하고 있을 때 누가 문을 노크한다. 문을 열자 이번 주 화장실 청소를 맡은 녀석이 서 있다. 이 녀석은 지난주에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 이번 주 화장실 청소 전담이라는 벌을 받았다. 이 녀석은 왜 왔나? “무슨 일이냐?”

선생님, 변기 구멍이 하나 막힌 것 같은데요.”

다음 날 오전.

학교 교무실로 형사 두 사람이 찾아 왔다. 한 사람은이 학교 동복을 입은 아이가 웬 여자를 시내버스 쪽으로 세차게 밀치는장면이 찍힌 감시카메라 사진 한 장을 손에 쥐었고 다른 한 사람은 헌 책가방을 들었다. 헌 책가방을 든 형사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사고현장에서 이 책가방을 채증해 왔기에 그 안의 책들을 보고 용의자를 특정하려 했는데 책마다 적힌 이름이 다 다르니,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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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우리는 건더기 하나 없는 멀건 국물처럼 시시한 놈을 멸건 놈이라고 불렀다. 맞춤법대로라면멀건 놈이라 해야 맞는데 왜 그랬을까? 단모음를 이중모음로 바꿔 발음해야만 그 놈의시시해 보임이 더 강조되었던 걸까?)

 

그 새끼는 멸건 놈이었다.

시골 중학교 출신인데 분명 그 학교에선 1,2등을 다툰 수재였을 테다. 하지만 이 도시의 우리 명문고에서는 그저 멸건 놈일 뿐이다. 왜냐면, 이 도시에 있는 여러 중학교들에서 배출된 공부깨나 한다는 애들모두가 우리 명문고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새끼 같은 시골 중학교 출신은 수재는커녕, 잘못되면 바보소리 듣기 딱 좋으니 그만 기죽어서 멸겋게 지낼 수밖에.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었다.

2학기 들어서 새끼와 내가 창가 분단에 같이 앉게 된 것이다. 담임선생이 자리 배치를 다시 한 결과였다. 그것도 하필, 내 자리 바로 뒤로 새끼가 앉게 되었으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가 분단은 1,2교시 수업 때 칠판 글씨가 푸르딩딩하게 보이는 어려움이 있는데 유리창을 통해 밀려드는 현란한 아침 햇살 탓이다. 쉬는 시간에 뒤돌아 앉아 얘기 나누다보면 그 햇살은 새끼의 빡빡 깎은 머리통부터 시작해서 한쪽 뺨, 한쪽 어깨, 오른손 손등으로 발광페인트처럼 흘렀다.

그런데 하필 새끼의 눈동자 색이 멸건 잿빛이었다.

현란한 햇살 속에서 이상스레 빛나는 잿빛 눈동자는, 골목어귀나 쓰레기장에서 맞닥뜨리곤 하던 허연 눈깔의 잡종 개를 연상케 했다. 얘기를 나누다 말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나의 괴상스레 변형된 얼굴이 새끼의 그 기분 나쁜 잿빛 눈동자 속에 빠져 있어서…… 나는 , 이 새끼야 네 눈깔 빛깔이 뭐 그러냐?’칵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새끼와 친해진 거다.

 

실토하자면 사실, 나도 전에는 멸건 놈이었다. 그러나 새끼와 달리 나는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도시의 어느 중학교로 진학한 경우. 이미 멸건 놈과정을 다 겪고 나서 이 명문고로 진학했기에, 그 새끼를 처음 봤을 때 멸건 놈인 줄을 단번에 안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는 새끼한테 비밀이다.

 

새끼와 나는 방과 후에도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 일찍 가 봐야 심심하니, 시내를 돌아치는 거다.

기껏해야 장날 구경이 고작인 시골 고향보다는 아무래도 구경거리도 많고 재미난 이 도시다. 우리는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서들 구경거리를 찾아서 돌아친다.

제일 먼저 극장 앞에 간다. ‘미성년자 관람불가홍보게시판에 붙은 야한 장면사진들을 구경하고, 다음 순으로 양공주 동네로 향한다. 야릇한 냄새가 나는 그 동네 골목을 지나가면서 도랑가에 버려진 콘돔 등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중앙시장에 들러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걸레 빵이나 순대를 사 먹는다.

그러다 보면 저녁이고, 우리는 그제야 헤어졌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저녁 때 쯤에 헤어지던 게 좋았다.

그런데 밤에도 또 만나 어울리면서 우리는 이상하게 변해간 거다.

그렇다. 공설운동장이 문제였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더라면……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하필 새끼와 나 사이에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공설운동장은, 내 하숙방에서 창문을 열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숙집이 공설운동장 옆 산동네에 있기 때문이다.

새끼가 자취하는 집은 공설운동장과 평지로 접하는 동네에 있었다. 내 하숙방에서 창문을 열면 우선 공설운동장이 보이고, 그 너머 동네에 새끼가 산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 때 헤어졌다가, 괜히 밤에 또다시 공설운동장에서 만나기 시작한 거다.

밤의 공설운동장.

정말, 낮과는 딴판인 공간이다.

낮에는 북괴 만행 규탄 시민 궐기대회나 시민체육대회 같은 큰 행사 이외에는 인적 하나 없다. 개 한 마리 다니지 않는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달라진다.

어둠이 내리면, 이런저런 사람들이 죽은 개구리 냄새를 맡은 개울가 가재들처럼 슬금슬금 모여든다. 그 거대한 어둠 속에 모습들을 가리고서 유행가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거나, 부시기를 쪼거나…… 혹은 데이트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하면서 통금 사이렌 직전까지 부산을 떤다.

낮과는 딴 판으로 변하는 그 이상한 세계.

바로 가까이에, 밤마다 그렇게 마술처럼 변하는 세계가 있으니까 새끼와 나는 그냥 방에 쳐 박혀 공부만 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도 가재처럼 기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가, 2학기 중간고사 시간표가 발표된 때였다.

 

새끼와 나는 각자 시험공부랍시고 한 시간 남짓 하고는 이내 어두운 공설운동장으로 나와서 한복판쯤에서 만나는 거다.

같이 휘파람 불면서 거들먹거리며 걸어가다가는, 장난을 친다.

각자 그것들을 꺼내어 잠시 밤의 시원한 바깥공기를 쐬어 주고는 다시 얼른 바지 속으로 넣는다. 내가 고안해낸 장난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스릴이 만점이다.

그런 장난을 치면서 어둠 속을 걸어 다닐 때 늘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여자들이 있다.

우선, 화장품 냄새 요란한 양공주들이다. 그녀들 서너 명 정도는 밤의 공설운동장에 나타나 자전거를 탄다. 중고자전거일 게다. 왜냐면 삐거덕거리는 잡음이 늘 나기 때문이다.

공순이들도 있다. 얘들은 합창으로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이나 불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이나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이나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 부르리까……유행가를 열심히 부르고들 다닌다.

걔네들한테 우리의 장난이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꽥 비명을 지르거나 경찰을 찾지 않을까?

그럴 일이 없도록 우리는 반드시 어두운 주위를 살피며 장난쳤다.

공설운동장에는 여자들만 있지 않았다. 양아치들도 있었다.

걔들은 대개 장발에다가 나팔바지 차림이었다. 낮에는 뭘 하며 보내는지 모르나 밤만 되면 나타나 거들먹거렸다.

걔들 숫자가 대여섯 명이라 우리를 다구리 놓기로 작정한다면 꼼짝 못하고 당할 테다. 그런 일은 아직 없었는데 비록 자기네는 건달이지만 공부 잘한다는 명문고 학삐리들은 그냥 놔두자는 데 뜻을 모은 듯싶었다. 마치 무림세계에서 협객들이 학식 높은 선비들을 아끼듯.

걸맞은 비유일까?

잘 모르겠다.

그런 패거리들 말고도 정체가 분명치 않은 사람들이 저녁 식사 후 바람을 쐰다며 나타나는 밤의 공설운동장. 이 도시에 이만한 넓이의, 밤에 쉬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여하튼 새끼와 나는 그런 밤의 공간을 한 시간 가까이 돌아치는 것으로 휴식시간을 갖고는 다시 귀가하여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지낼 때가 좋았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하고 우리는 양아치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였다.

 

양아치들은 늘 부시기를 쪼았다.

산수유열매같이 작고 빨간 부시기 불꽃들을 입에 물고 있다가 불티 같은 재를 떨기거나, 연기로 도넛 모양을 만들어 밤하늘에 올리거나 했다.

나는 걔들과 안면 정도는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가까운 산동네에서 4년째 하숙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 된 거다. 걔들과 마주치게 될 때 어이!’ 하는 반가운 소리를 하며 지나가는 식이었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새끼와 함께 나오면서걔들과 번번이 마주치게 되면서 새끼를 걔들에게 소개시켜줘야 될 것 같았다. 솔직히, 그러면서 새끼한테 내 가우도 한 번 세우고 싶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의 어느 날 밤이다.

걔들과 마주쳤을 때 나는 부시기 두 대만 달라고 했다. 나는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꼴로 걔들한테 부시기를 받아서 같이 쪼곤 했다. 그건 알고 지내는 관계임을 확인하는 행위다.

물론 새끼는 그런 걸 몰랐을 테다.

나는 걔들한테서 건네받은 부시기 두 대 중 하나는 내가 입에 물고 남은 하나는 새끼한테 주었다. 먼저 내가 불을 붙인 뒤 걔들과 함께 쪼기 시작하자, 놀라서 멍하니 서 있던 새끼라니. 얼마 후 새끼도 용기를 내어 부시기를 입에 물고는 내 부시기 끝에 대고 불을 붙였다.

같이 부시기를 빨더니 새끼는 이내 요란한 재치기를 몇 번이고 해댔다. 걔들과 나는 낄낄낄 웃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매운 담배연기 탓에 눈물이 그렁그렁할 새끼를, 걔들한테 정식으로 소개해 주었다.

나와 학교에서 제일 친한 친구야. 알고들 지내라고.”

서로 악수들을 나눈 뒤…… 걔들과 내가 뿜어대는 부시기 연기, 새끼의 콜록대며 튀어나오는 부시기 연기는 고향의 강가에서 던지던 허연 어망처럼 밤하늘에 흩뿌려져 어딘가로 날아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걔들의 나팔바지가 펄럭거리며 장발도 따라서 휘날리고 있었다.

 

걔들의 설러벌은 재미있었다.

대개, 깔치를 꼬셔먹었다는 설러벌들인데 주로 공순이나 식순이가 대상이었다. 당일로 먹었다는 경우도 있고 한 달은 걸려서 먹었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 공설운동장에 밤마다 나타나는 공순이들은 아직 먹히지 않은 애들인가?

글쎄, 아무래도 구라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대놓고정말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찌 됐건 그런 설러벌을 재미있어 하면서…… 새끼와 나는 걔들을 닮아갔다.

우선은 나팔바지다. 교복바지를, 세탁소 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밑동이 넓은 나팔바지로 만들어 입었다. 전부터, 걔들이 걸을 때마다 바람을 휘젓듯 펄럭거리는 나팔바지가 늘 부러웠었다.

머리도 스포츠형으로 길렀다. 학교 규정대로라면 바리캉으로 빡빡 밀어야 하지만 사실, 그건 너무 촌스러웠다. 바람 부는 날 같이 부시기를 쫄 때 바람에 날리던 걔들의 장발은 얼마나 폼 나던가.

교복바지도 그렇고 길어진 머리칼도 그렇고, 새끼와 나는 그런 모습으로 교문을 통과하기는 힘들었다. 교문에는 수시로 학생과 꼰대들이 교대로 나와 지켜서기 때문이다. 새끼와 나는 교문 대신에 뒷담을 넘거나 개구멍을 이용했다.

새끼와 나는 교모 안창을 뜯어내고 그 안에 부시기를 숨기는 방법도 터득했고, 미제 면도날을 구해 왼쪽 발목 안에 대고 양말을 신는무장도 마쳤다. 그래야 만일의 경우에 오른손으로 그것을 재빨리 빼내어 사용할 수 있단다.

물론 그럴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건 학교에서 퇴학당할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면도날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든든할 뿐이었다.

공설운동장의 양아치들도 제 각각 잭나이프니 송곳이니, 하나씩은 숨겨갖고들 있었다. 걔들도 굳이 사용하려기보다는 그것을 갖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차원 같았다.

그래야만 밤의 공설운동장을 휘어잡을 수 있지 않나?

괜히 멋모르고, 먼 동네의 애들이 공설운동장에 놀러와 거들먹거렸다가는 걔들한테 다구리 맞고 발길에 차인 똥개처럼 쫓겨나기 일쑤였다.

더러는, ‘애인과 데이트하러 온 사내를 따로 불러서 좋은 말로 부시기 살 돈을 꾸기도 하는 걔들.

그러한 일들은 걔들에게 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새끼와 나는 걔들한테서 그런 을 배우고 있었다.

 

.

4년 전 내가 이 도시로 유학 오면서, 처음 듣는 이상한 단어 중 하나가 이었다. 이 도시의 애들은 그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했으나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즈음 나는 기죽어 지내는 멸건놈이었으니까.

몇 달쯤 지나자 그 낯선 단어의 뜻을 짐작하게 되었다.

배짱과 비슷하지만 다른 구석이 있는 단어였다. ‘섬뜩한 적의를 품은 배짱이라고나 할까?

체구가 좋다거나 힘이 세다거나 하는 것은 과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왜소한 체구를 가진 경우에 있는 존재가 되기 쉬웠다. 아무래도 체구나 힘이 달리니 나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일 날 줄 알라는 섬뜩한 적의를 예비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왜소한 체구를 가진 애라면 누구나 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이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이 있는 존재가 되려면 다른 있는 존재들과 어울리면서 그 을 자연스레 체득해야 했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중세 유럽의 도제식 교육처럼 말이다.

새끼와 내가 밤마다 공설운동장에서 어울리는 양아치들이야말로 있는 존재들의 전형이 아닐까?

외양부터 드러나는 섬뜩한 적의.

얼굴의 반 가까이 가리는 장발과 걸을 때마다 펄럭소리 요란한 나팔바지. 그러면서 입에 달고 사는 음담, 수시로 쪼아대는 부시기. 게다가 각자 몸에 숨기고 있는 잭나이프나 송곳 같은 흉기들.

누가 잘못 건드렸다가는 험한 일을 겪을 것임을 직감케 하는 그 섬뜩한 분위기.

물론 새끼와 나도 걔들을 따라하고 있지만 아직은 조심스런 수준이었다. 감히 긴 장발은 못하고 스포츠형으로 한다거나, 나팔바지라 해도 그저 밑동만 조금 넓힌 교복바지라거나, 잭나이프 같은 것은 엄두내지 못하고 숨기기 쉬운 면도날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하튼 새끼와 나는, 양아치인 걔들과는 다른 학생 신분이니까.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렇기에 아무래도 새끼와 나의은 조심스런 이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정말 깡 있는 놈인지, ‘멸건 놈인지,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런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양아치들이 어느 날 한 번 놔야지, 그럼!’하면서 키득키득 한참 웃었는데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며칠 후 다시 한 번 놔야 하지 않겠어?’하면서 다시 킬킬킬 웃는 모습들일 때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빠구리를 놓자는 뜻이었다. 깔치 하나를 구해 집단으로 그 짓을 하자는 뜻.

새끼는 그런 뜻의 말들이 오가는 줄도 모르고 부시기를 쫘서 도넛 모양 연기를 띄워 올리기 바빴으나 나는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다.

그런 말들이 오갈 때부터, 양아치들과 거리를 두고 서서히 멀어져야 했다.

내가 새끼한테 걔들이 그런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리고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며 공설운동장에 나오는 일을 그만 두어야 했다. 물론 기말고사는 한 달 뒤에 치러지지만.

그런데 그러지를 못했다.

내 가우 때문이었다. 새끼 앞에서 내가 멸건 놈처럼 보일 수 없다는 가우.

설마?’하는 마음도 있었다. 양아치들이야 늘 깔치 먹은 얘기를 입에 달고 사는데…… 아무래도 심심해서 구라치는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러다가 그 날을 맞이한 거다.

 

그 날도 바람이 불었다.

밤공기가 차가와져 공설운동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들었는데, 그 날 밤 바람까지 불자 양아치들과 우리와 미친년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친년이 공설운동장 한 구석에 선, 오래 된 미루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 가마니 한 장을 바람막이 삼아 두르고서, 둘레가 두 발이 넘는 그 미루나무를 벽처럼 등 뒤로 기댄 채로였다.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 며칠 전부터 공설운동장을 맴돈다는 년. 년을 훤한 낮에 보았다는 누군가의 귀띔에 의하면 인물도 좋다고 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런 대로 옷가지들도 정갈하게 차려입은 년. 산발에 짝짝이 신발만 아니었더라면 정상인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연에 미치면서…… 가출한 게 아닐까?

년은 자기를 에워싼 우리 패거리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간간이 소리없이 웃었다. 물론 어두운 밤이라, 년의 흰 치아들이 씨익모양 짓는 것을 보며 짐작했다.

양아치들 중 한 녀석이 년이 두르고 있는 가마니를 뺏어 땅바닥에 깐 뒤, 년의 상체를 잡아 눕혔다. 그래도 연실 웃는 년.

마침내 녀석이 허겁지겁 바지를 내리더니…… 년의 치마를 벗기면서 덮쳤다.

짐승의 신음소리를 내면서 하체를 격하게 움직이는 녀석. 내 옆에서 꿀꺽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새끼였다.

아흐응 아흐으으흥…….”

년이 고양이 소리를 내며 녀석과 한 덩어리 몸이 되어 퍼드럭거렸다. 그런 어둠 속 광경을 에워싸고 있는데…… 다른 양아치 녀석이 자기 바지의 혁대를 풀면서 두 번째 타자로 뛰려는 채비다.

공설운동장에 바람이 거세지며 미루나무 잎들이 무수히 떨어져 날렸다.

그 중 두어 잎이 년을 덮친 녀석의 허연 엉덩이에 떨어졌다가, 격렬한 엉덩이 움직임 탓에 이내 아래로 미끄러져 버렸다. 얼마 후 그 녀석이 끄응!’외마디 소리를 내며 기절한 듯 년의 몸 위에 엎드려 있자, 두 번째 타자로 준비하고 선 녀석이 이런 말을 하며 나섰다.

내 차례야.”

첫 번째 녀석이 바지를 추스르며 물러나고 두 번째 그 녀석이 하체를 허옇게 드러내고 자빠져 있는 년에게 달려들었다. 그 광경이 뒷다리들을 쩍 벌리고 죽어 자빠진 개구리한테 달려드는 가재와 똑 같았다.

여기저기서 바지의 혁대를 풀면서 다음 순서를 차지하려는데 그 때 내 옆의 새끼가 뇌까렸다. 분명한 발음으로.

이번에는 내 차례.”

끼득끼득 웃으면서 양보하는 양아치들.

나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려운 오줌이라도 누고 오려는 듯 구부정한 자세로 물러나…… 바람 휘몰아치는 어둠 속을 걸었다.

공설운동장을 벗어났다.

그 때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늑대의 울음처럼 도시의 밤하늘에 퍼졌다.

으허엉으허엉…….”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산동네 골목으로 해서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방의 불도 안 켠 채 옷을 갈아입고는, 방문 고리를 안으로 잠근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억지 잠을 청했다.

 

새끼는승냥이가 되었다.

미친년을 집단으로 빠구리 놓던 그 날 밤 이후 얼마 안 지나 양아치들이 새끼한테 붙여주었다는 별명 승냥이'.

나는 그 날 밤 이후 창가 자리에서 복도 쪽 자리로 옮겼으므로 그런 새끼에 관한 소문은 다른 반의있는 애들한테서 들었다. 원래 제멋대로 자리를 바꿀 수 없지만 새끼와 가까이 있기 두려워 복도 쪽의 애와 자리를 맞바꾼 것이다. 그 애는 햇살 따듯한 창가 자리라며 좋아했다.

만일 담임선생이 뭐라 한다면 그 애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따듯한 자리에 앉았으면 했거든요.’이라고 둘러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담임선생은 뜻밖에 별 말이 없었다. 바빠서인지, 아니면 학생들끼리 자리 바꾼 것도 모를 만큼 무심한지, 둘 중 하나다.

내가 멀리 떨어져 앉자, 새끼가 점심시간에 와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새끼 얼굴을 마주보기도 두려워, 식곤증으로 졸린 듯 반쯤 눈감고 말했다.

기말고사를 잘 봐야 하거든. 눈부신 창가 자리보다는 여기가 공부 집중이 잘 되겠더라고. 고향 부모님이, 지난 번 중간고사 성적이 엉망이라고 하도 난리를 쳐서…….”

둘러댄 말이지만 반쯤은 맞는 말이다. 새끼가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돌아설 때 그 등에 대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당분간 공설운동장에도 못 나갈 것 같다야.”

며칠이 지났다.

교실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달라졌다. 초가을 때에는 1교시 전부터 강하게 들이쳤는데 이제는 2교시가 되어야 약해진 기세로 스며들 듯 한다.

나는, 남의 자리가 된 그 창가 자리를 넌지시 살피며 그런 변화를 깨달았다. 그렇다. 지학시간에 배웠듯이,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려하면서 해의 고도가 낮아진 탓이다.

학기 초에 비해 확실히 한기가 도는 교실.

특히 오전 시간이 그랬다. 그러자, 추위를 타는 애들이 햇볕을 쬐려고 창가로 쉬는 시간마다 몰려들었다. 물론 나는 그냥 어둑한 복도 쪽 내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무심히 창가 쪽을 보다가 새끼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이상하게 빛나던 잿빛 눈동자.

바로승냥이눈이었다. 공설운동장의 양아치들이 새끼한테 딱 어울리는 기막힌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암컷의 맛을 본 뒤 발정 난 승냥이.

잠시 후, 새끼는 두 눈을 감고서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 베개처럼 만든 뒤 엎드려 자는쉬는 시간 10분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잠에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쪽잠을 자는 새끼의 모습.

혹시 밤늦도록 빠구리 놓느라 밤잠을 설친 게 아닐까?

 

그 짐작이 맞았다.

새끼는 공설운동장의 색골 승냥이로 소문이 났다.

공순이건 식모건, 일단 접근하면 거의 백 퍼센트 당일치기에 성공한단다. 생각지도 못한 새끼의 놀라운 변신이다. 자신도 몰랐던 잠재능력을 찾은 걸까?

하긴, 새끼는 촌놈 치고는 잘생긴 얼굴이다. 이태리 무법자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프랑코네로를 연상케 하는 얼굴인데 흔치 않은 잿빛 눈동자까지 닮았을 줄이야.

그런 매력적인 외모에 명문고 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까지 갖추었으니 어떤 여자이건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 나를 따라서 주위를 살핀 뒤 얼른 그것을 꺼내어 밤바람 쐬어 주던 장난들을 생각하면그런 스릴 있는 장난을 고안해냈다고 새끼한테 가우 잡던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쪽팔리면서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진짜 멸건 놈은 나였다.

나는 그 집단으로 빠구리 놓던, 바람 불던 날이후로 밤마다 내 하숙방의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지낸다. 공설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으로 방의 불빛이 내비치면 걔들이 나를 찾아올까 두려워서다.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혹시 누가 저를 찾아오면 무조건 어디 가고 없다고 얘기 좀 해 달라.’는 당부도 단단히 해 놓았다.

양아치들이야 굳이 나를 찾아올 것 같지는 않고 문제는 새끼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때 수시로 내 하숙방에 놀러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방문도 안으로 단단히 걸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일이 없는 새끼.

그래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여하튼 해가 져서 서쪽 동네에서 생겨난 시커먼 땅거미가 스믈스믈 우리 산동네까지 기어 올라오면 나는 창을 담요로 가리고 방문까지 잠근다.

창문을 열면 거대한 어둠의 궁전처럼 가슴 뛰게 하던 공설운동장의 밤 풍경을 잃었다.

다른 먼 동네로 하숙을 옮겨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었다.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섬뜩한 일이 생겼다. 새끼가 결석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시험기간 중에는 책걸상 배열을 다시 해 출석번호순으로 앉기 때문이다. 예전의 창가 자리로 내 자리가 배정되었기에 공교롭다는 생각으로 그럼, 새끼는 어느 자리에 앉나?’둘러보았더니 끝내 보이지 않고 다만 교탁 부근 자리 하나가 빈 채로 1교시 시험이 치러지던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새끼가 결석한 자리였다.

2교시에도 새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닷새간의 기말고사가 끝났다.

그 동안 시험공부 하느라고 고생들 많았다는 뜻인지, 3교시로 시험이 종료되자 정상수업으로 잇는 일 없이 그대로 일과를 끝냈다.

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잘 치른 시험 같지 않았다.

시골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6년 간 1등을 놓치지 않던 나다. 반장도 도맡아 했다.

예전에는 그랬었다.

완전 정복’‘필수’ ‘정석’‘에센스등 갖가지 제목의 참고서나 문제집으로 터질 듯한 책가방을 들고서 교문을 나선다.

이제는 교복바지도 예전처럼 평범한 바지로 환원시켜 놓았다. 머리도 다시 빡빡 깎아 버렸다.

내 그림자를 끌고서 하숙집으로 향하는 발길.

머리가 지끈거린다. 요 며칠 간의 벼락치기 공부에 몸살이 난 걸까?

한낮의 산동네는 적막하다. 하숙집으로 들어와 세수도 않고 그냥 방에 누워 버렸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 이마에 열도 나는 것 같다.

어떡하나.

갑갑한 마음에 상체를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에 공설운동장이 침몰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거선의 돛대처럼 한구석에 서 있는 바람 불던 밤의 그 미루나무. 그 너머, 새끼가 자취하는 동네 풍경.

새끼가 병으로 자퇴한단다.

담임한테 학급일지를 도장 받으러 교무실에 갔다 온 주번 애가 전한 사실이다. 햇살에 눈부신 공설운동장이 달빛이 넘치는 야산 풍경처럼 보이더니 수컷 승냥이가 등장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암컷들을 쫓는 승냥이의 음산한 잿빛 눈, 바람에 찢기듯 날리는 갈기, 드러낸 흰 이빨들, 그리고 마침내 그 부분이 썩어가고 있었다.

매독 걸린 승냥이…….”

나는 창문을 닫고 다시 누웠다. 몸에 오한이 심해지며 낮은 하숙방 천장이 오르락내리락, 시작했다. 나도 공설운동장을 따라 침몰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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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일이다. 어느 선생님이 우리들 공책을 다 걷은 뒤 이틀 후 되돌려주었다. 공책마다 검사 도장이 한 곳씩 다 찍혀 있었는데 선생님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똑같은 검사 도장이 아니다. 공책에 필기를 얼마나 정성껏, 깨끗하게 잘했느냐에 따라 제 각기 다르게 검사 도장을 찍었다. 어떻게 다르게 찍었냐고? 그런 나만의 비밀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학급에서 공책 필기를 아주 잘하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의 공책을 나란히 펴놓고 어떻게, 찍힌 검사 도장이 다른지 비교해 봤다. 과연 검사 도장이 달랐다. 필기 잘하는 친구의 공책에 찍힌 검사 도장이 더 진했다. ‘선생님이, 공책 필기를 잘할수록 검사 도장을 진하게 찍는다고 쉬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또 다른 친구의 공책에는 검사 도장이 진하게 찍혀 있는데도 필기 상태가 엉망이었던 거다. 그런 친구들이 여럿 나타났다.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실장이 소리쳤다.

분명히, 검사 도장이 진하게 찍혔느냐 여부가 비밀의 열쇠가 아니다. 다른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걸 찾아라!”

그 결과 검사 도장이 바르게 찍혔느냐가 비밀의 열쇠다.’ ‘아니다, 검사 도장이 공책의 상단부에 찍혔느냐, 하단부에 찍혔느냐가 비밀의 열쇠다.’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속출했는데 그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게 비밀의 열쇠라고 확정 지으려는 순간 영락없이 예외의 경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밀의 열쇠를 찾다가 지친 우리는 결국 그 선생님한테 직접 여쭈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실장이 대표로서 나섰다.

선생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검사 도장이 공책에 어떻게 찍혀 있어야, 필기를 잘한 건가요?”

선생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나만의 비밀이다."

세월이 오래 흐른 후 나는 깨달았다. ‘애당초 비밀의 열쇠 따위는 없었다.’

바쁜 선생님이 어떻게 수많은 학생들의 공책 필기 상태를 일일이 다 보며 검사할 수 있는가. 그냥, 편하게 검사 도장을 찍고 공책들을 되돌려준 것이다. 선생님이 공책 필기 상태를 보며 검사 도장을 제 각기 다르게 찍었다.’고 한 말은 우리들이 공책 필기에 정성을 다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허언이었다.

 

어젯밤 외출했다가 귀가하는 길에 강냉이 튀기는 장수가 남겨놓은 물건들을 보았다. 튀겨놓은 강냉이 여러 포대와 튀기는 기계까지 한곳에 모아놓고 넓은 비닐로 꽁꽁 둘러싸 묵었는데, 그 장소가 외지고 어둑했다. 양심이 불량한 자들의 손을 탈지도 몰랐다. 그 때문일까, 강냉이 장수가 매직글씨로 쓴 경고판이 한 옆에 있었다. 종이상자의 한 면을 활용한 경고판인데 그 내용을 고대로 옮긴다.

“CCTV가 가동중임.”

순간 나는 중학교 때 공책 필기 상태에 따른 검사 도장 찍기사건이 떠올랐다. 하지만 양심 불량의 작자들한테 그 경고판이 엄하게 작용하길 바라며 밤길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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