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왜 그랬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돌이켜보면 그럴 만한 동기들이 있었다.

첫째로, 생각지도 못한 나의 영웅심이다. 그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 그럼 두 번째 발표자는?’했을 때 나는, 난감한 침묵으로 있는 학우들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4기 영어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할까? 더구나 최봉석 녀석이 그 상투적이고 케케묵은 의견을 발표하고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마치 학우들의 난감한 침묵을 내심 즐기는 표정 같아 나는 더 이상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자식아, 그깟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자, 이제부터 지켜 봐.’하듯이.

이런 심리도 겸했을 수 있다. 수만 많았지 정작 아무 것도 아닌 세력처럼 된 우리 불쌍한 춘천의 모 고등학교 출신들을 대표해 무언가를 보여주자는 심리. 나중에 깨달았지만 영어과로 들어온 우리 동기들은 한결같이 양순한 애들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다 발표자로 나섰을까?

둘째로, 오랜 세월 드러내지 못했던 나의 발표욕구이다. 맞다. 이 동기가 더 확실하다. 이 부분을 얘기하자면 사연이 좀 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만, ‘길게’시간을 끌어주지 못하고 십여 분 정도밖에 안 됐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으나‘시간을 길게 끌지 못했기’ 때문에 여학생들, 특히 출석번호가 빠른 학우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과연 그분은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최군이 첫 번째로 나와서 자기 의견까지, 발표를 잘했습니다. 그에 따른 평은 나중에 제가 하겠습니다. 자, 그럼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설 학생은?”

그 어조는, 만일 발표학생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난주에 공언했듯이 출석번호 순으로 그냥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학우들끼리 서로 보며‘네가 두 번째 발표자로 나가면 안 되겠니?’하는 애타는 표정들인데 그분이 재차 촉구했다.

“자, 그럼 두 번째 발표자는?”

조용한, 곤혹스런 침묵이 강의실에 자리 잡는가 싶을 때다. 불쑥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학우들이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표정인데, 나는 앞서 녀석이 그랬듯 그분한테 학번과 이름을 대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오늘 배울 교재 내용은 앞서 최봉석군이 발표한 대로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최봉석군이 주장하는 의견과 다르다는 입장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미 세상은 삼강오륜 같은 옛 성현의 말씀들로는 어쩌지 못하는 복잡다단한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삼강 중 부위부강이라 하여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말하는데 어디 그런 것이 ‘만인이 평등하다’는 현 시대에 들어맞겠습니까?”

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윤리의식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거창한 결론을 내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언뜻 들어서는 참신한 주장인 듯싶지만 사실 녀석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진부한 내용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뒤이어 발표자로 나섰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얼핏 보면 극히 평범한 숲이다. 하지만 나는 저 숲에서 산토끼를 두 마리나 봤다. 두더지도 봤다. 땅 위로  나온 그 놈이 퇴화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게 지금도 선하다. 보호색을 믿고 낙엽들 사이로 산책하던 까투리까지.
  동네 가까이 있는, 극히 평범해 보이는 저 숲. 비밀이 숨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점잖게 앉아 있는 최봉석한테 몰려가‘우리 과대표님께서 다음 주 철학시간에 발표자로 나서서 아주 멋지고, 길게, 길게 발표해 주세요!’하며 매달렸다. ‘길게’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교수가 자기네까지 발표시킬 시간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다른 학우였다면 부담스러워 고개를 저었을 텐데 녀석은 달랐다. 정갈한 검남색 외투의 목깃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리더니 ‘잘 알았으니 걱정들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 화요일, 문제의 철학개론 시간이다.

강의시작 시간에 맞춰 시계바늘처럼 등장한 철학교수. 그분은 작은 체구에 번뜩이는 눈빛으로 우리를 둘러보고는 칠판 앞을 지나, 창가에 빈 의자 하나를 갖다 놓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쥐 죽은 듯이 있는 우리를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자아, 지난주에 예고한 대로 오늘 배울 ‘제 2장 인간의 본성’에 관해, 앞에 나와 발표할 희망자는?”

그러자 여학생들의 눈길이 일시에 과대표 최봉석에게 쏠렸다. ‘으흠!’헛기침을 한 번 한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남색 외투자락을 잔잔하게 팔락이면서 칠판 앞으로 나아갔다. 교수한테 자기 학번과 이름을 대며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는, 학우들을 향하여 그 넓적한 얼굴에 잠깐 ‘미소’를 띤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착했다는 성선설이 있습니다. 이는 맹자께서 하신 말씀이고요, 그러나 인간은 본래 악하게 태어났다는 이른 바 성악설도 있는데 이것은 순자께서 말씀하셨지요. 교재의 내용은 이런 두 가지 인간성에 대한 설명을 다뤘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성악설을 중심으로 제 의견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못됐습니까? 오늘날 사방에서 벌어지는 흉악한 범죄들만 보아도”

하면서 장황하게 자기의견을 발표하는데 결론은‘인간성 타락이 극에 달한 것 같은 오늘날, 우리 모두는 삼강오륜의 참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였다. 솔직히, 어버이날 같은 때 국영방송의 해설시간에나 나올 진부한 내용이었다. 젊은 대학 일년생의 발표내용 치고는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어둑한 낯으로 간간이 눈빛을 번뜩이는 철학교수가 가까운 창가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별 실수 없이 첫 발표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녀석은 언변 좋은 과대표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다진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땅콩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다 아는 장면일 게다.

아름답게 핀 노란 꽃이 그대로 땅 위에 있다가 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땅을 향하는 그 기괴한 모습을. 그 기괴한 장면에 놀랐을 때 아내가 농업센터에서 배운 지식을 말했다.

“그 아래 비닐을 찢어줘야 된대요.”

파종하기 전에, 잡초 방지를 위해 비닐부터 씌워놓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로 두었다가는 땅을 향하던 게 비닐에 막혀 결실을 맺는 데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꽃 바로 아래의 비닐을, 이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찢어주자 과연 그 노란 꽃들이 떨어지며 뾰족한 줄기처럼 되더니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뿌리도 아닌 줄기가 땅속으로 파고들던 광경 또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우리가 농사짓는 데가 인적 없는 산속이라 한낮이라 해도 그 으스스함은 어쩔 수 없었다.

몇 달 후 그 줄기들은 뿌리처럼 땅 속에서 많은 땅콩들을 달아, 포기를 뽑으며 수확할 때 주렁주렁 나오던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하 이래서 한자로 땅콩을 낙화생(落花生)이라 하는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낙화생이란 한자어보다 더 멋진 표현이 우리 말 ‘땅콩’이었다. 대부분의 콩 류(類)가 지상에서 결실을 맺지만 이것만은 땅속에서 결실을 맺질 않던가? 그러니 ‘땅콩’이라 지칭한 우리말만큼 간단명료한 것도 없을 듯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