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녀석이 내게 말했다.
“이군. 이제는 나도 이군의 의견을 비판하는 그런 재미 좀 보고 싶은데……?”
쉬는 시간, 201 강의실 옆 복도 창가에서였다. 201 강의실은 4기 영어과의‘중․고등학교 적 교실’처럼 애용되던 장소이다. 녀석이 예의‘미소’를 빠트리지 않고 제의하는 것이라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하기로 순서를 바꾸어 봤는데…… 학우들이 사적으로 ‘과대표가 하는 공격은 너무 점잖고 시시하다’고 항의하면서 다시 순서를 환원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 그분까지 학우들과 같은 생각이었던 듯, 발표순서가 환원되자 안도하는 표정 같았다. 역시 그 성향으로 봐도 거창하게 공자 왈 맹자 왈 하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먼저 발표하고, ‘눈앞의 현실에 근거하여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내가 그 다음으로 발표순을 갖는 게 훨씬 긴장되고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녀석과 내가 척지고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과 나는 일단 철학개론 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발표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지냈다. 마치 링에서 한바탕 맞붙은 권투선수들이 게임이 끝난 뒤 별 일 없이 지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녀석과 나는 가까이 어울리며 지내지도 않았는데 그건 여러 모로 다른 둘의 차이 때문이라 여겨진다.
출신지뿐만 아니라 성향도 다르고 하다못해 술 담배 문제까지 달랐으니 딱히 어울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 들어오면서 술 담배를 시작했는데 녀석은 그런 면에서는 청교도나 다름없었다. 남학생들 세계에서 술 담배를 즐기느냐 여부는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되느냐’ 여부와 일치했다.
사적으로 늘 ‘이군’ ‘최군’이라고 서로를 호칭하던 일도 그렇다. 철학교수가 학생들을 그리 부르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학생인 우리끼리 그런다면 얼마나 촌스러운가. 나는 녀석한테 ‘그러지 말고 다른 애들처럼 그냥 이름을 부르자.’고 제의하고 싶었지만 결국 못했다. 녀석이 워낙 한결같이 점잖은 목소리로 ‘이군!’하고 불러대니 말이다. 그 때 나는‘일단 어떤 어조로써 이뤄진 인간관계에서 그 어조를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해가 바뀌어 이학년으로 접어들면 그런 어쭙잖은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는, 편하게 부르는 상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일 년 이상을 같은 강의실에서 대하는 얼굴이었으니.
끝내 그러지 못하고 만 것은, 녀석이 일학년이 끝나자마자 자퇴해 버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참 안타깝다. 만일 녀석이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호칭만이라도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편한 사이가 되었을 것 같아서다.
결국 그런 미해결의 호칭 문제 또한 그대로 남아서, 몇 년 뒤 녀석과 동해안 묵호읍에서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갖게 되었을 때 여전히 거리감을 갖고서 대화하다가 인연이 악연으로 바뀐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