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철학개론 시간마다 맡아 놓고 가산점을 받는 식이 되면서 그런 계산은 어느 시점부터 무의미하게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녀석에게도 철학개론 시간의 의견발표는 즐거운 ‘기회부여의 시간’이었을 게다.

앞서 지적했던, 하마터면 별 볼 일 없는 과대표로 전락했을 것을 막아줌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맹자 왈 공자 왈 떠들어 대는 즐거움’을 계속 누리도록 한 기회 말이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열심히 철학개론 교재내용을 예습하고 그에 따른 자기의견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 같았다. 발표할 때마다 뭘 메모한 종이를 한 장 들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어려운 한자를 칠판에 써대는 빈도도 나날이 잦아지는 등, 날로 치밀해지던 모습이 입증한다.

그와 달리 나는 교재내용을 한 번 읽어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의견 준비를 하지 않았다. 녀석이 먼저 발표할 때 그 내용을 잘 듣고 나서 두 번째 발표자로서 나서서는, 녀석의 의견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내 의견을 즉흥적으로 마련했다. 좀, 비겁한 짓을 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으나 듣는 모두가 재미있어 하며 경청들 하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물며 철학교수마저 재미있게 경청하는 표정인 바에야.

초등학교 시절 장장 육 년 간이나 반장 하며 발표를 즐기던, 갖가지 다양한 언변 기술을 구사하던 내 숨은 이력이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이제는 놀랍게도 예의까지 갖추어 가며 직전 발표자를 공격하는, 발전된 모습이었다. ‘최군이 고전에 관한 해박한 지식까지 동원하며 의견발표를 하신 것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최군은 혹시, 이번에 다뤄질 주제와 상관없는 엉뚱한 고전을 참고로 한 것은 아닐까요?’하는 식이다. 그럴 때마다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고생하던 학우들. 그런 학우들을 짐짓 못 본 체, 능청스레 계속 발언하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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