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파편적인 삶, 잡초'란 제목의 글을 무심포토로 올린 적이 있다. 햇빛 한 점 받기 힘든 에어컨 실외기 뒤편, 시멘트 바닥에 자리잡은 잡초 얘기였다. 그 후 두 달 넘게 세월이 흘러 한겨울인 요즈음 그 잡초가 어떻게 됐는지 찾아봤다.  
  흔적처럼 완전히 시들어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잡초가 씨앗을 떨어뜨려 내년 봄에 후손 잡초가 그 자리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번식은 생명체의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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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개론 강의마저 사라진 그 이학기.

가을은 깊어 가는데 나는 재미도 없고 지루한 대학생활에, 그저 학우들과의 잦은 술자리 낙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에 대한 기억이, 그 기간에는 ‘어느 날 본 목깃의 때’이외에는 공백이나 다름없이 되고 만 것이다.

누가 내게‘어떻게 한 학기 동안, 어떤 학우에 대한 기억이라는 게 고작 목깃의 때뿐이라니, 그게 말이 되냐?’고 힐난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사실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남자들 세계에서는 술 담배를 할 수 있느냐 여부가 친구가 될 수 있느냐 여부와 일치한다. 나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그 즈음 술 담배에 젖어 살았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용돈을 주는 집안형편이 못되었으므로, ‘주말에 초등학생 세 명을 가르치는 과외지도’까지 하며 술 담배에 드는 경비를 스스로 충당했다.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하숙집으로 귀가해, 방 한복판에 책상을 펴놓고 앉아 고전들을 항시 읽는다’는 최봉석 녀석과는 전혀 어울릴 일이 없었다. 아쉬운 일이다.

어제 결혼식장의 식당에서 만나, 나중에 횟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술잔을 나눈 그 사내가 ‘최봉석이가 아마, 대학에서 자퇴하기 몇 달 전부터 어렵게 자취하며 살았을 겁니다’술회하는 순간 나는 속으로 ‘내가 당시에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더라면 그런 고생을 진작부터 알았을 텐데!’한탄했다.

하지만 녀석의 어려운 처지를 진작부터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을까? 나 또한 초등학생들을 주말에 가르치던 일이 사라져 버려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새벽까지 술을 마신 탓에, 애들을 지도하다 말고 책상에 엎드려 잔 뒤 그 날 이후로 ‘최초의 제자들이라 할’그 애들이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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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강의실에서 우연히 녀석의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직은 낮이 더운 가을 날씨라서 학우들 대부분이 여름옷 차림이었는데 녀석은 남다르게, 검남색 외투를 벌써부터 걸치고 점잖게 앉아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그 외투의 목깃 부분을 무심히 보다가 놀랐다.

목깃 너머로 보이는 또 하나의 목깃― 하얀 와이셔츠의 목깃이었던 듯싶다.― 부분이 땟자국으로 더러웠다. 밥풀 하나 외투자락에 묻히지 않고 항상 단정한 품위를 유지하는 녀석한테 그런 부분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천만뜻밖이었다.

녀석은 학교 부근에서 하숙한다는데, 다른 외지 출신 애들과 다르게 혼자 방을 쓴다 하였다. 경제적으로 괜찮게 사는 부모를 둔 덕에 객지생활일망정 호강하는 녀석 같았다. 그렇다면 녀석은‘등록금이 저렴한 대학을 찾아서 춘천의 사범대학으로 유학 온’애들과 달리 정말‘참된 사도를 실천하고자’유학 온 경우일지도 몰랐다.

녀석은 철학개론 시간에 의견발표를 할 때도 항상 건전하고 바른 내용이었다. 우울한 가정환경 탓인지 비비꼬인 의견을 구사하기 일쑤인 나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니까 녀석과 나는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다.

하는, 결론까지 혼자 내린 적이 있었기에 그 날 녀석의 땟자국으로 더러운 목깃을 발견하기란 뜻밖이었다. 하숙방도 혼자 쓸 정도라면 빨래 정도는 주인집아주머니가 도맡아 해 줄 텐데, 꾀죄죄한 목깃의 꼴은 최소한 일주일 이상 빨래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숙비가 밀려서 빨래거리를 내놓지 못했나?

지루한 강의 탓에 나는 쓸데없는 의문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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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에, 관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뜨겁게 박수 치는 영화가 어디 또 있을까.

12월 6일 저녁, 춘천 시내의 CGV(강원영상위원회 개최한 감자시네마토크)에서였다.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는데 객석이 꽉 차 있어서 입실 처음부터 나를 놀라게 하더니… 상영 내내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바다 속 장면의 영상미… 그러다가 주인공이 어두운 심해에서 밝은 수면으로 부상하는 마지막 장면에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가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든 감동의 박수들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지난 이제야‘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든 감동의 박수들’을 찬찬히 분석해 봤다.



첫째는, ‘주인공 박명호씨가 지난한 삶의 역정 끝에 희망적인 삶에 도달했구나!’하는 찬사의 표현이다. 그가 목숨 걸고 탈북에 성공했으나, 막상 남에서 맞닥뜨린 것은 가족을 온전히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업의 문제였다. 결국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는 위험한 직업‘머구리’일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안정적인 삶을 마련해 주기에 이르렀다. 어둡고 깊은 심해에서 햇살 환한 수면 위로 몸부림치듯 올라가는 영화 마지막 장면은 그의 지난한 삶이 마침내 희망을 찾은 모습으로 객석에 와 닿은 것이다. 찬사를 아낄 수가 없었다.


​

둘째는, ‘주인공 박명호씨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보여주는 한 치 부끄럼 없는 삶의 자세’에 대한 경탄의 표현이다. 북에서 그는 나름대로 대접받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의 안위만 행각한다면 힘들게 북을 떠나지 않아도 될 처지였다. 하지만 자식들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서 목숨 건 탈북 길에 나서야 했다는 고백. 그 후 남에서 험한 머구리 일을 하며 아내에게는 횟집을, 막내에게는 외국 유학을, 장남에게는 아비를 도와 배를 모는 선장 직을 하나하나 마련하면서 온 가족이 함께 잘사는 길로 이끄는 그의 대단한 노력. 이런 성실한 가장 모습에 어찌 남에서 함께 사는 동포들(관객들)이 경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셋째는,‘주인공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인간미’에 대한 자성의 표현이다. 그는‘가족 장례를 살던 집에서 치르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돈 들여 치르는 남쪽’의 편의위주, 낭비 심한 생활을 비판하며 살기는 힘들었어도 가족의 경조사만은 살던 집에서 치렀던 북쪽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남쪽이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경제발전이라는 성과를 얻은 반면에 순수한 인간성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자성을 그가 일깨워 준 것이다. 박명호 그는 비록 북에서 탈출했지만 그곳에 남은 소박한 인간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인간미. 남의 우리들에게 얼마나 오랜만에 와 닿는 단어일는지!



관객들이 뜨겁게 쳐준 박수의 또 한 쪽은, 이처럼 멋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진모영 감독에게 향한다. 탈북민 박명호씨가 연출이 아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면서 3년 가까이 카메라 앵글을 맞추는 일에 전력했고 그 결과물로 나온 500시간 분량 필름들을 85분 인간승리 드라마로 편집해 내는 데 그는 성공했다.

관객들에게 ‘지금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게 맞나?’하는 의문이 들게 뛰어난 영상미까지 구현한 진영모 감독. 아직 ‘올드마린보이’를 못 보신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내어 한 번 감상하실 것을 당부 드리고 싶다.


 

사족:‘올드마린보이’는 역대 다큐멘터리 흥행 1위를 기록 중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진모영 감독의 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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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석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가능한 것이고 당시에 나는‘나보다 더 잘생긴 것 같지도 않은 저 녀석한테 왜 항상 여학생들 몇몇이 팬처럼 따를까?’하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녀석의 그 미소라니. 솔직히 그 미소는 그토록 작위적일 수가 없었다. 넓적한 얼굴이 일시에 입가 중심으로 조작해냈다가 다시 얼른 원 상태로 돌아가는, 그런 조잡한 미소에 다 큰 여학생들이 반해서 따라다닌다는 건 정말 이해 못할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녀석은 강의실에서 뭘 발표할 때도 항상 그 미소를 잃지 않음으로써‘원주 치악산 골짜기에서 도를 닦다가 춘천에 등장한, 인자한 도사나 선비 같은 이미지’ 유지에 성공하였다.

그렇다. 화요일마다 있었던 철학개론 강의가 일학기 종료와 함께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녀석은 그렇게 구축된 인자한 이미지 하나로써 계속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이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비록 철학개론 시간은 사라졌지만 녀석 뒤로는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따르는 몇몇 여학생들이 여전히 존재하던 게 그 증거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캠퍼스 정원을 녀석이 점잖게 걸어가다가, 뒤를 따르는 몇몇 여학생들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여 그 말씀에 감동하는 탄식도 나오고 깔깔깔 웃게도 하던’그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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