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동네 부근의 작은 산을 매일 다녔다. 노년의 건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운동이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움직임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삭막한 겨울 산이라 여겼다. 풀벌레는 물론이고 갖가지 야생화, 산새, 하다못해 흉측한 뱀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겨울이 끝나가는 요즈음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사철 푸른 소나무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생물들이 겨울 산에 분명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뱀들은 분명히 어느 바위 밑 같은 데 모여 겨울잠을 자고 있을 것이며, 산새들은 잠시 다른 따듯한 데로 피신해 있을 것이며, 야생화들 특히 진달래나 철쭉은 꽃들을 피우진 않았지만 가지들마다 살아서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솔길 가의 하찮은 잡초들은 또 어떤가. 자신은 겨울 추위에 흔적도 없이 부스러져 버렸지만 겨울이 닥치기 전인 지난가을에 풀씨들을 사방으로 날려 몇 달 뒤의 새봄을 준비하지 않았나?

지난해 아들을 장가보내면서아비로서 할 일을 마쳤다는 감회가 밀려들던 나 자신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별나게 추웠던 이번 겨울. 동네 부근의 자그마한 산일지언정 산의 생물들은 하나도 겨울 추위에 죽거나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갖가지 방법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겨울에도 산은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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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연주자 둘이 나란히 서서 어제 내린 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그 동영상을 지켜보던 K는 자기도 모르게 놀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에서 온 연주자들이 감성 짙은 곡을 연주하다니……. K는 그 가사를 잘 알고 있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비가 내렸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마치 서울 어느 유명 카페에서 출장 온 연주자들처럼 몸을 흐느적이기도 하며 색소폰 연주에 심취해 있는 북에서 온 사람들. 살벌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 같았던 그들도사람이었다. ‘어제 내린 비의 촉촉한 감성에 젖어 있는 모습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환갑 넘은 K어제 내린 비연주에 쉬 빠져든 까닭이 있다. K의 젊은 시절, 몇 번을 데이트해도 K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던 여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K에 대한 경계심이라기보다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라 봐야 했다. 그것은 자신을 지켜가며 좋은 남자를 맞으려는 여자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비가 촉촉이 내리던 그 날 거리에서, 여자는 K의 어깨에 자신을 기대었다. 몇 번을 데이트해도 항상 일정 거리를 두고 걷던 여자의 투항(投降)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K가 든 우산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여자는 비에 젖을 판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 촉촉이 내리는 비에 여자 마음이 이미 젖어 있었으니까.

여보. 애 좀 봐요!”

아내가 방문을 열고 소리치는 바람에 K는 화들짝 놀랐다. 아내가,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맡긴 손주를 데려오며 말을 이었다.

장 좀 보고 올게.”

K가 하는 수 없이 동영상의 볼륨을 바짝 낮추고 손주를 인수받는데 웬 지린내가 풍긴다. 손주가 그 새 오줌을 쌌나 보다. 어제 내린 비 동영상에 촉촉하게 젖던 K는 한숨을 내쉬며 손주의 축축한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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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월이 되면 우리 동네 공원 담장은 철쭉꽃들이 만발한다. 극성맞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만발한다. 이 겨울에 그 까닭을 깨달았다. 종일 햇볕 잘 드는 남향의 담장이어서----- 겨우내 받은 은총의 기쁨을 봄이 되자 온몸으로 되갚는 광경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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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말했다.

당신 입가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어.”

사실 그런 일이 있다면 굳이 말로 할 게 아니라 여자가 슬그머니 자기 손수건으로 K의 입가를 닦아주면 되지 않나? 둘이 나란히 창가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K도 어지간한 사내다. 미소 띠며 그 고춧가루를 닦아 달라는 뜻으로 얼굴을 여자한테 더 가까이 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한 번 문질러버리곤 그만이다. 여자가 이번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춧가루가 그대로 남아있어.”

마침내 K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춧가루 묻은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정 보기 싫으면 당신이 직접 닦아주면 안 되냐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하면서 여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칠칠치 못하긴!’이란 뒷말을 우물거리는 듯싶다. K는 더 이상 여자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통보하듯 말했다.

더 앉아있을 거야? 나는 갈 거야. 창가라 추워서 더 앉아 있기도 힘들어.”

여자는 창밖 풍경을 보며 말이 없다. K는 여자가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기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코트 주머니 속의 자동차 키를 꺼내 들고는 카페의 계산대로 가는 K. 먼저 나가더라도 둘이 마신 찻값은 치러야 예의다.

호수 카페는 넓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바지에 있어서 데이트 족들의 명소다. 문제는, 영하의 날씨가 보름 넘게 이어지며 호수 물빛이 검푸르다 못해 음산한 납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입가에 고춧가루따위의 기분 나쁜 말을 툭 뱉은 것은 이런 음울한 풍경 탓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카페에 다른 때보다 손님들도 몇 없었다.

젠장, 애당초 이런 추운 호숫가 카페를 찾아온 게 잘못이지.’

K는 카페 옆 공터에 주차돼 있는 차 문을 열었다. 시동을 걸어 호숫가를 떠났다. 보름 전 내린 눈이 빙판이 돼 차를 아주 천천히 몰아야 한다. 여자하고의 일로 기분이 상해 호숫가를 훌쩍 떠나고 싶은 K의 심정을 전혀 몰라주는 빙판 길. 이래저래 기분 되게 나쁜 오후다.

한 시간 후.

K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다가 인터폰 소리를 들었다. 수화기를 들자 대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K는 얼른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대문이 열리게 했다.

호숫가에서부터 걸어왔는지 여자가 얼굴이 파랗게 언 모습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K는 여자의 가죽코트를 받아들며 여자보다 먼저 서둘러 말했다.

전화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차를 몰고 태우러 갔을 텐데. …… 아까 미안했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더라고.”

고혈압 환자를 남편으로 둔 내 팔자지.”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탓에 텅 빈 느낌의 단독주택. 모처럼, 오랜만에 젊었을 적 데이트 하던 기분을 내려했던 부부는 다시 적적한 현실로 돌아왔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듯 여자가 말했다.

당신 배고프지 않나?”

응 배고파.”

조금 기다려.”

여자는 주방에 들어가 라면 두 개를 끓일 채비에 들어갔다. K는 소파에 앉아 다시 TV 뉴스 보기에 집중했는데 여전히 고춧가루 한 점이 입가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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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전화번호가 액정화면에 떠서 얼떨떨한 채로 수신에 응하자 낯선 이가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2018년도 퇴비 배달 건으로 전화 드렸습니다.”

순간 내 눈앞에 파란 싹들이 돋기 시작하는 우리 밭 봄 풍경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신청하신 퇴비가 백 포대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3월에 퇴비를 받으신다고 하셨습니까? 대개 2월에 퇴비들을 받거든요.”

예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밭으로 가는 길이 산 밑이라 그늘져서 눈이 다른 데보다 늦게 녹는 편이거든요. 괜히 그런 길에 퇴비 트럭이 들어왔다가는 바퀴가 미끄러지고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잘 알겠습니다. 제가 3월 들어 다시 전화 드리고 찾아가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전화 받는 즉시 밭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해마다 농사는 1월말이나 2월 초에 퇴비 배달 운송 담당자가 불쑥 거는 전화로 시작된다. 종다리가 울거나 꽃들이 피거나 하면서 농사가 시작되는 게 아니다. 퇴비 배달 담당자는 해마다 다르다. 농부가 전년도에 면사무소에 들러서, 수많은 퇴비회사 중 선택한 한 퇴비회사에서 시행하는 일이라 그 까닭은 모른다.

3월 어느 날 나는 퇴비를 가득 싣고 우리 밭을 찾아오는 트럭을 맞이할 것이다. 한반도의 위기란 이런 소소한 일상의 붕괴를 뜻하는 게 아닐까? 머지않은 3월 어느 날 퇴비 배달 트럭이 별 일 없이, 무심하게 밭에 나타나는 광경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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