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도 초겨울, 예비고사가 끝난 날 자취방에 모여서 소주 파티를 벌였던 미술 문학 연합 팀 5명 중 둘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종열이와 학천이다. 그나마 종열이는 친구들의 애도 속에 삶을 마감했지만 학천이는 그렇지 못했다. 85년경 낙향해서날마다 술만 마시다가 병을 얻어 급작스레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운 소문이 그의 마지막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이학천’.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의 한자 이름은 李鶴川이었다. 우리보다 한두 살 위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나기는 춘고에 입학한 67년도 봄 문예반에서다. 처음부터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우선 고향과 출신중학교가 달랐다. 나는 춘천 토박이에 춘중을 거쳐 춘고에 들어왔고 그는 인제 출신으로 인제의 어느 중학교를 거쳐 춘고로 들어왔다. 외모만 봐도 나이가 나보다 훨씬 위로 보여서 친근감을 갖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로 급격히 친해졌으니 그 해 가을 도교육위원회에서 주최한도내 고등학생 대상 예능 실기대회, 문예 부문에 학교 대표로 함께 선정된 일이다. 대개는 2학년이나 3학년 생 중에서 학교 대표를 정하는데 그 해는 달랐다. 담당교사인김병덕 선생님이 이런 선정 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선배라 하여 선정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실제 실력으로 선정돼야 한다. 문예부원들은 이번 주 내로 각자 쓰고 싶은 글 한 편씩 써서 내게 제출해라. 그 글들을 보고서 산문과 운문 별로 각 한 명씩 학교 대표를 선정하겠다.”

그랬더니 뜻밖에 산문부로는 내가, 운문부로는 학천이가 선정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1학년생이었으니 문예반 23학년 선배들의 체면이 한순간에 꾸겨지고 말았다. 김병덕 선생님의 특별한 선정에 부응하듯 얼마 후 홍천에서 열린 대회에서 학천이는 운문부 장원 상을, 나는 산문부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학천이와 나는 급격히 친해졌다. 아니, 수정한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학천이를 내 문학수련의 모델로 삼고 따랐다. 같은 1학년이긴 하지만 도 실기대회 첫 번 참가에장원이라니. 게다가 학천이 사는 모습은 소문으로나 들었던 문학하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태원이도 나와 똑같이 기억한다.

우선 학천이는 가난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당시가난은 문학인의 첫 번째 필수조건처럼 여겨졌다. 학천이는 인제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부쳐주는 월() 생활비가 넉넉지 못했고, 그마저도 늦을 때가 잦아서 효자동에서 하는 자취생활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일요일에 그의 자취방을 찾아가면 밥 대신에 간장을 몇 방울 떨어뜨린 냉수 한 사발을 끼니 삼아 들이키고서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가난한 모습으로만 일관했다면 나는 교동 우리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던 그 자취방을 그만 다녔을 게다. 학천이는 그런 모습으로 문학하는 이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배를 굶주리면서도 담배 피우기를 잊지 않았고 게다가, 소주나 막걸리도 틈틈이 마셨다. 그럴 때 방 한 구석에는창작과 비평같은, 전문문학인이 구독하는 잡지들과 습작시를 가득 적어놓은 대학노트가 사법고시생 대학노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 쌀이나 연탄을 못 사더라도 문학을 향한 일념만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니 막연하나마 소설가가 되는 꿈을 품은 내가 어찌 학천이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점은 태원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만난 태원이가 한 말이다.

춘고 시절 학천이야말로 어떤 모습이 예술가의 모습인지를, 우리 미술반 친구들한테 보여주었지! 정말 그 친구가 꿈도 못 펴보고 그리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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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에게는 절대 금할 게 몇 있다. 그 중 하나가피부병 약복용이다. 만일 임산부가 실수로 피부병 약을 먹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낙태수술을 받아야 하는 불행을 겪는다.

우리는 자식을 살붙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살갗병을 다루는 피부병 약이 뱃속의 아기한테 해악이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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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8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9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아오면서 몇 번 죽을 뻔했다. 그 중 한 번이 영월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인 1990년 겨울이다. 88올림픽 해에 운전면허를 따자 바로 차까지 구입했으니 차 운전 2년째 되던 때다. 돌풍처럼 휘몰아친 마이카 붐 탓이다. 돌이켜보면 초보 운전이라 조심 운전을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1990년 겨울 그 날 모처럼 가족들을 차에 다 태우고 청령포 쪽으로 운전해 갔다. 춥던 날씨가 이틀간의 화창한 햇살에 많이 누그러진 듯싶었다. 읍내 중심도로로 차를 몰고 나설 때만 해도 도로에 있던 얼음이 모두 녹아 있어서 방심할 만도 했다.

청령포로 가는 도로도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눈앞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느라 편하게 속력을 냈는데 아뿔싸! 고개 너머 도로는 음지였던 탓에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던 것이다. 차 사고는 순간이다. 차바퀴들이 접지력을 잃으면서 차가 얼음판 도로를 크게 돌기 시작했다. 빙빙 도는 주변 풍경에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 그 때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솔직히, 그 비명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 시끄러워.’

다행히 도로 난간의 나지막한 시멘트 구조물에 차바퀴가 걸리면서 벼랑으로 추락하는 참사를 모면했다. 차는 망가졌지만 가족들은 무사했다. 천운이었다.

 

몇 년 후 춘천의 모 학교로 전근 와서다. 어느 날 동료교사가 여선생들 앞에서 자신의 차 사고 순간을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내용이었다.

차가 빗길에 전복되는 순간 내 눈앞에 가족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더군요.”

모성애가 본능인 여선생들을 감동시킬 의도로 하는 얘기 같았다. 즉각 내가 한 마디 했다.

아니, 나는 그런 순간에 가족들 얼굴이 떠오르기는커녕 옆에 앉은 아내가 지르는 외마디 비명이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던데.”

여선생들이 내 말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글쎄 그 웃음들이 내 말에 동감한 건지, 그냥 재미나 웃은 건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결코 꾸며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 내가 가족 사랑이 남보다 못한 걸까?

절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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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5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외수형의 추천사를 받았다. 이메일로 받았다. 올 연말 발간예정인 두 번째 단편소설집 ‘K의 고개추천사다. 19727월 어느 날 석사동 허름한 대폿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형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감사합니다고 전화하려다가 참았다. 형이 밤을 새운 뒤 먼동이 트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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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종열이와  만났다. 30년 만에 보는 종열이 얼굴이 별로 안 변한 것 같아  놀랐다. 머리칼만 희끗희끗 셌을 뿐이다. 얼굴만 안 변한 게 아니다. 옷차림도 30년 전처럼 검정색 반코트 차림이었다. 다만대학 노트에 전위적(?)인 소설을 써 갖고나오지는 않았다.

태원이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종열이가 변함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학창시절에 소설 써서 상을 타고 그래서, 머지않아 대작가가 나타났다는 신문기사가 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선생 3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기만 했다니 참 어이가 없구나. 뭐 그래도 늦진 않았어. 요즈음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50대 중반은 젊은 나이거든.”

종렬이는 고향이 양구이다. 춘고로 진학해서 전태원 최종걸과 함께 셋이 춘고 미술반의 전통을 이었다. 태원이와 종걸이가 미대로 진학할 때 종열이는 진로를 바꾸었다. 그림을 그려서 캐나다로 수출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일컬어수출화 (輸出畵)’라 했다. 한때 잘나갔다. 태원이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종걸이와 나는 종렬이만 만나면 술값 걱정 없이 술 마셨지. 감자바위들이 돈 잘 버는 친구 하나 둔 덕에 호강했지.”

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나는 종렬이가 같은 회사 여직원과 늦게 결혼했으며 아직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니, 나이 50을 넘었는데 아직도 자식을 낳지 않았더니 너무 늦은 게 아냐?”

하는 내 말에 종열이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시로 중국 출장이라 어디 마누라 얼굴이나 볼 새가 있어야지.”

수출화 그리는 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쓰기에는 너무 고임금이라 하는 수 없이 저임금의 중국에서 현지 사람들을 써서 할 수밖에 없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바람에 수시로 중국 출장이란다. 밤늦게 투다리 앞에서 헤어질 때 내가 물었다. 그 물음은 사실 30년 전과 똑같았다.

춘천에 잠잘 데나 있어?”

종렬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늘한 가을 밤 거리로 사라졌다. 30년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누나 집이 있어. 거기서 잘 거야. 누나가 춘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거든.”

3년 지나 2008년경 가을이다. (연도를 확실하게 못 박지 못하는 건, ‘오래 전 일은 기억을 잘해내지만 근래 일은 기억이 분명치 않기때문이다. 노화의 한 현상일까?) 종열이가 불쑥 이른 아침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 지금 니네 동네에 와 있어. 해장국집이야. 이리 와.”

해장국 집으로 찾아가자 종열이가 이미 술 한 잔 걸친 얼굴이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내게 알렸다.

내가 중국 출장 갔다가 귀국해서 회사에 출근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니? 글쎄, 내 자리가 사라진 거야. 중국의 저임금이 고임금으로 바뀌자 회사에 적자가 나기 시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담당자인 나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다니! 회사에 사표 내라는 거거든. 나 참!”

비극을 쾌활하게 말하니, 나는 뭐라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듬해 종열이가 폐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결국 숨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다. 태원이, 종걸이가 그의 장례에 다녀온다 하여 나는 부의금이나 건네고 말았다. 당시 내게 무슨 바쁜 일이 있었을 게다.

이종열. 그는 내 기억 속에 가을바람처럼 허허로운 친구로 남았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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