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종열이와  만났다. 30년 만에 보는 종열이 얼굴이 별로 안 변한 것 같아  놀랐다. 머리칼만 희끗희끗 셌을 뿐이다. 얼굴만 안 변한 게 아니다. 옷차림도 30년 전처럼 검정색 반코트 차림이었다. 다만대학 노트에 전위적(?)인 소설을 써 갖고나오지는 않았다.

태원이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종열이가 변함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학창시절에 소설 써서 상을 타고 그래서, 머지않아 대작가가 나타났다는 신문기사가 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선생 3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기만 했다니 참 어이가 없구나. 뭐 그래도 늦진 않았어. 요즈음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50대 중반은 젊은 나이거든.”

종렬이는 고향이 양구이다. 춘고로 진학해서 전태원 최종걸과 함께 셋이 춘고 미술반의 전통을 이었다. 태원이와 종걸이가 미대로 진학할 때 종열이는 진로를 바꾸었다. 그림을 그려서 캐나다로 수출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일컬어수출화 (輸出畵)’라 했다. 한때 잘나갔다. 태원이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종걸이와 나는 종렬이만 만나면 술값 걱정 없이 술 마셨지. 감자바위들이 돈 잘 버는 친구 하나 둔 덕에 호강했지.”

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나는 종렬이가 같은 회사 여직원과 늦게 결혼했으며 아직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니, 나이 50을 넘었는데 아직도 자식을 낳지 않았더니 너무 늦은 게 아냐?”

하는 내 말에 종열이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시로 중국 출장이라 어디 마누라 얼굴이나 볼 새가 있어야지.”

수출화 그리는 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쓰기에는 너무 고임금이라 하는 수 없이 저임금의 중국에서 현지 사람들을 써서 할 수밖에 없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바람에 수시로 중국 출장이란다. 밤늦게 투다리 앞에서 헤어질 때 내가 물었다. 그 물음은 사실 30년 전과 똑같았다.

춘천에 잠잘 데나 있어?”

종렬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늘한 가을 밤 거리로 사라졌다. 30년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누나 집이 있어. 거기서 잘 거야. 누나가 춘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거든.”

3년 지나 2008년경 가을이다. (연도를 확실하게 못 박지 못하는 건, ‘오래 전 일은 기억을 잘해내지만 근래 일은 기억이 분명치 않기때문이다. 노화의 한 현상일까?) 종열이가 불쑥 이른 아침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 지금 니네 동네에 와 있어. 해장국집이야. 이리 와.”

해장국 집으로 찾아가자 종열이가 이미 술 한 잔 걸친 얼굴이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내게 알렸다.

내가 중국 출장 갔다가 귀국해서 회사에 출근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니? 글쎄, 내 자리가 사라진 거야. 중국의 저임금이 고임금으로 바뀌자 회사에 적자가 나기 시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담당자인 나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다니! 회사에 사표 내라는 거거든. 나 참!”

비극을 쾌활하게 말하니, 나는 뭐라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듬해 종열이가 폐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결국 숨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다. 태원이, 종걸이가 그의 장례에 다녀온다 하여 나는 부의금이나 건네고 말았다. 당시 내게 무슨 바쁜 일이 있었을 게다.

이종열. 그는 내 기억 속에 가을바람처럼 허허로운 친구로 남았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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