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만남이 소중하지만 바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쩌면 우리는 일정한 얼굴과 체구를 갖춘 외형적 존재들을 접촉하는 데 익숙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마다 살아온 삶의 내력이 반드시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 어찌 만남을 소홀히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이겨낸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일 수 있고, 그 사람은 훗날 인류에 남길 귀중한 정신적 유산을 준비한 위인일 수 있고, 그 사람은 어쩌면 당신을 위기에서 구출해낸 의인일지도 모른다.

, 그 사람이 그냥 눈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갈 존재라 해도 만남의 소중함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십억 인구 중 방금 나와 유일하게 만난인연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에.

 

과거뿐만이 아니다. 당신처럼 그에게도 앞으로 전개될 미래가 있다. 눈앞의 그가 혹시 실망스런 모습이라도 당신이 그를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다치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당신처럼 말이다. 당신은 그를살며시 부는 바람이 책갈피를 소리 없이 하나하나 넘기듯정성껏 맞이해야 한다. 그의 마음을 다치지 않는 환대는 그렇게 이뤄진다.

 

이 시의 내용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뉠 수 있다. 전반부는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일생이 온다는 뜻이다는 내용으로, 후반부는살며시 부는 바람이 책갈피를 소리 없이 하나하나 넘기듯 그를 정성껏 맞이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간추릴 수 있다. 전후반부 모두,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듯하면서 점층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같거나 비슷한 리듬의 반복이라는 내재율(內在律)과 연관된다.

이 시의 주제는만남을 소중히 하자이다. 정현종 시인은 철학적이고 교훈적일 수 있는 주제를 극히 평이한 언어들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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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행복하다. () 내비게이션으로 tv 뉴스를 보기 때문이다.

 

물론 차에서 쓰던 내비였다. 그런데 지난 봄, 업그레이드 시키려고 판매점에 갔다가이 내비는 구형이라 업그레이드가 안 된다는 속상한 설명을 들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였다. 업그레이드 못한 채 그냥 차에 달고 다니거나, 새것을 사서 차에 달거나.

전자를 선택한다면 돈은 절약되겠지만 곳곳에 신설된 도로들을 안내받지 못하고 다녀야 되는 곤란이 문제였다. 머지않아 차를 몰고 동해안을 한 번 돌 계획인데 그 긴 거리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걱정됐다. 하는 수 없었다. 돈이 들더라도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새 내비를 차에 달자 이전 내비가 폐품이 돼버렸다. 그냥 내버리려다가농막 용 tv로 활용하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언젠가, ()씨가 컨테이너에서 지내면서 폐 내비를 tv로 활용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그의 손재주가 부러웠을 뿐만 아니라 비좁은 거처마저 묘하게 재미있어 보였던 거다.

우리(나와 아내)가 컨테이너 농막을 밭 가장자리에 갖다 놓고 농사지은 지 벌써 6년째. 농사 일 하다가 잠시 쉬는 5평 넓이 컨테이너라서 침낭과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조리 도구정도만 갖췄는데 우리도 이 기회에 모씨처럼 tv도 볼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었다.

나는 우선은, 비닐봉지에 폐 내비를 담아 우리 집 서재 선반 위에 갖다 놓았다. 적당한 기회에 모씨의 자문을 받아 농막에 tv로 설치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실행 못하고 봄이 지나갔다. 농사 일이 워낙 바쁜 철이었기 때문이다. 밭 갈고 비닐 멀칭하고 파종하고, 어디 그뿐인가 올해부터는 산짐승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물망까지 사서 담처럼 둘렀다.

여름이 되자 농사 일이 한가해졌다. 본격적으로폐 내비 농막 설치에 나섰는데 어럽쇼, 정작 폐 내비를 넣은 비닐봉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봄에 우리 집 서재 선반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은데 행방이 묘연했다. 서재 구석구석은 물론이고 집 층계 밑의 창고, 나중에는 혹시나 싶어 농막 안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폐 내비를 서재의 선반에 둔 건 확실하나?’

내 기억력을 의심까지 하게 됐다. 어디다 물건을 두고 찾지 못하는 상황이 치매의 전조라는 기사를 본 듯도 싶었다. 그놈의 폐 내비 때문에 내 자신까지 의심받고 있었다. 정처모를 울화가 치밀었다. ‘망할 놈의 내비 같으니라고!’ 결국 폐 내비 찾기를 단념했다.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집 층계 밑의 작은 창고에 들어가 뭘 찾다가 웬 작고 반듯한 사각 종이 백에 눈길이 갔다. 그 백을 열었더니 세상에, 그 폐 내비가 얌전히 들어 있지 않은가. 비로소 짐작이 갔다. 아내가 서재에 들어갔다가 서재에 어울리지 않은 그것을 발견하고는 창고로 옮겼으리라는 것을. 깔끔한 성격이라 그것이 허접한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반듯한 종이 백으로 옮겨 담기까지 했으리라는 것을.

그 동안 내가 층계 밑 창고를 숱하게 들락거리면서 이 종이 백을 여러 번 봤을 텐데 왜 한 번도 열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저 비닐봉지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듯싶다. 눈으로 봐도 보지 못한다는 시이불견(視而不見)이 이런 경우다. 사실, 내가 한 번만이라도 아내한테 여보, 혹시 비닐봉지에 내비게이션이 들어 있는 것, 못 봤나?’하고 물어봤더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은 아내한테서 핀잔맞을까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서재에 무슨 고물까지 갖다 놔요?’하는. 혹은 폐 내비 하나 갖고 너무 요란을 떠는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 침묵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폐 내비를 찾자 어서 우리 농막에 설치하자는 의욕에 불타올랐는데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농막에서 쓰는 전기도 집처럼 220볼트인데 폐 내비는 5볼트용 기계였다. 그렇다면 전압을 변환시키는 무슨 장치가 있어야지, 만일 그냥 연결했다가는 폐 내비가 터진다든가 하는 사고가 날 게 뻔했다. 천생 손재주 많은 모씨의 자문이 필요했다. 그런데 모씨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영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전형적인 인문계 성격으로 기계공학적인 분야는 꽝인 내가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컴퓨터를 켜 인터넷 검색이다. ‘내비게이션을 집에서 tv로 보려면?’이란 다소 긴 문장을 넣어 검색했다. 마땅한 답이 뜨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비는 기본적으로 차에 부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궁리 끝에 옆 동네에서 전업사 간판을 언뜻 본 기억을 떠올렸다. 부리나케 전업사를 찾아갔더니출장중이란 안내문이 문에 붙어 있었다. 다시 밤에 찾아가자 다행히 전업사 사장이 있었다. 내가 폐 내비를 보이며 말했다.

이걸, 집에서 보는 tv로 활용하려고 하거든요. 그냥 집의 전기를 이어서는 안 될 것 같고 무슨 연결 장치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그가 씽긋이 웃더니 답했다.

어댑터라는 걸 찾으시는 건데요, 어댑터는 이런 전업사가 아니라 전파사에 가야 합니다.”

비로소 내가 그 동안 찾은 게 어댑터라는 사실과, 전업사와 전파사가 다른 업종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 어디 좋은 전파사 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요즈음은 전파사가 대부분 사라져서 말입니다.”

맞는 말이다. 어느 때부턴가 그 많던 가전제품 판매점들이 사라져갔고 그와 함께 전파사들도 문을 닫았다. 세상이 변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전파사를 찾았다. 춘천에 남아있는 전파사 서너 곳이 화면에 떴다. 그 중 한 곳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지만 받지 않았다. 두 번이나 전화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새 폐업한 걸까? 다른 전파사에 전화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내 용건을 들은 사장이 허허허 웃더니 답했다.

어댑터가 있기는 한데요, 말씀하신 어댑터는 내비를 파는 곳에 가야 있습니다. 거기 가면 해결될 겁니다.”

결국 나는 돌고 돌아 새 내비를 산 폐 내비가 생기게 된 업체로 가게 된 거다. 지난봄에 새 내비를 사간 내 얼굴이 기억난 걸까? 사장은 혹시 자기가 판매한 내비가 잘못 됐나 잠시 긴장하는 기색 같았다. 하지만 내 용건을 얘기 듣고는 미소 지었다. 전업사 사장이나 전파사 사장이나 내비 사장이나 약속이라도 한 듯폐 내비를 집에서 보는 tv로 바꾸려는 내 의도에 웃음으로 대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른이 하는 짓치고는 아동스러워 보였던 때문이 아닐까? 하긴 나 역시 모씨가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폐 내비를 이용해 tv를 보는 모습을 본 순간 묘하게 재미있었다.

우리 어른들은 아동스러운 짓을 목격했을 때 오래 전 떠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에 미소 짓게 되는 게 아닐까.

마침내, 내비 사장이 부품들이 잡다한 상자에서 어댑터를 하나 꺼내더니 줄을 덧붙이는 작업을 하고서 220볼트 전기와 내 폐 내비를 이었다. 그러자 tv 화면이 떴다. 2만원 들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폐 내비 구하기가 막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밭으로 가 농막에 설치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흘 전 올해 밭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농막도 폐쇄했기 때문이다. 한 해 밭일의 마무리는 늦가을에 지하수 관정의 모터 속 물을 모조리 뺌으로써 이뤄진다. 모터 속 물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추운 겨울에 모터가 얼어터진다.

내년 3월 중순쯤 모터에 다시 물을 부어 작동시키면서 밭농사가 시작된다. 그 때 유여곡절 끝에 마련된 이 작은 tv를 농막 안에 설치할 거다. 적막한 컨테이너 농막 생활에 분명 활력을 줄 테다. 내가 서재 책상 가에 이 작은 tv를 놓고 뉴스를 보는데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한테 자랑했다.

여보. 이 내비가 원래는 버리는 건데 이렇게 tv로 바꾼 거야. 내년 3월에 농사를 시작할 때 농막에 갖다 놓고서 뉴스도 보고 그럴 거라고.”

당신도 참. 농사가 시작되면 그거 볼 틈이나 있겠수?”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년 봄 우리 농막에서 이 작은 tv를 볼 생각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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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배수가 잘된다. 사실 집에서 배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주방에서 쓰는 물이나 화장실 물이나, 만일 배수가 안 되고 관 중간에서 막힌다면 만사를 제치고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운 좋게 쉬 해결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기술자를 불러 돈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해결돼야지, 만일 기술자도 못해낸다면 배수관을 드러내기 위해 바닥파기 대 공사를 벌여야 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직하다.

우리 집은 20년 전에 지은 단독주택이다. 집을 직접 짓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건축청부업자한테 일임해 지었다. 학교에서 고 3 담임을 맡아 몹시 바빴을 뿐만 아니라 건축 분야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보다 다섯 살 위인 50세라는데 머리가 벌써 반백인 건축청부업자 김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건넨 설계도를 쭉 살펴보고는 첫마디가 이랬다.

걱정 마십쇼. 잘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뭐가 부끄러운지 반백의 머리를 한 손으로 긁적였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 말은집이 지어지는 동안은 물론이고 다 지어진 뒤에도 집 주인과 건축청부업자 간 분쟁이 빈번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열에 아홉은 그런 분쟁이 벌어진다고들 했다.

 

어쨌든 김 사장 책임 아래 우리 집 짓기가 시작되었다. 집이 지어지는 6개월 동안 내가 할 일은, 그에게 총 건축비를 나누어 틈틈이 건네기였다. 적지 않은 건축비였으므로 그 동안 통장에 모아놓았던 돈은 물론이고 아내까지 은행에서 융자내야 했다. 건축비를 건넬 때면 우선 그에게김 사장님, 제가 잠시 후 공사장을 들르겠습니다.’전화부터 해 놓고 학교에서 나서야 했다. 그가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다른 집까지 다른 동네에서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공사 현장에서 만나는 김 사장은 대개 부근 도로 가에 서서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시멘트 담당, 벽돌쌓기 담당, 미장 공, 타일 공, 전기기술자 등이 그의 눈길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설계도 상의 우리 집이 서서히 실현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는 바쁜 공사현장에서 특별히 맡은 일 없이, 뒷짐 지고 노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웬 일로 그가 손수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일하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을 마무리할 때였다. 시멘트 칼을 직접 쥐고 바닥을 다듬는 그에게 물었다.

김 사장님 손수, 웬 일이세요?”

제가 말입니다, 배수가 전공이거든요. 바닥이 잘 경사지게 해서 물을 쏟았을 때 가장자리에 물이 남는다든가 하는 일이 절대로 없게 합니다. 너무 가파르게 해서도 안 되고 아주 적당히 경사지게 해야 집 주인식구들이 미끄러져 다치는 일 없이 잘 쓰지요. 그리고 저는 배수 파이프도, 설계도 것보다 더 지름이 큰 것을 써서 시원하게 물이 잘 빠지게 합니다. 건축설계사가 현실을 잘 모르거든요. 사실 집을 완공했는데 뭣보다도 배수가 잘 안된다거나 하면 집 주인한테 욕은 욕대로 먹고 건축대금도 다 못 받을 수 있다니까요!”

습관대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바람에 반백머리 한 부분에 시멘트가 묻은 것도 모르며 하하하! 웃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후 오늘까지, 21년째 우리 집은 다른 것은 몰라도 배수에 관한 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물이 잘 빠진다. 샤워를 오래해도 바닥의 물이 조금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다 배수된다. 그렇다고 가파르게 경사진 바닥도 아니다. 김 사장 스스로 자부한 배수 전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후배 국어교사가 있었다. 그는 고장 난 손목시계나 만년필 같은 것을 고치기를 즐겼고 실제로 잘 고쳤다. 주위사람들한테서맥가이버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유감스런 상황이었다. 왜냐면 정작 전공인 국어교과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국어교사가 될 게 아니라 기술교사가 됐어야 하는 게 아닌가. 국가에서 교단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매달 봉급까지 줘 가며 생계걱정을 덜어주었다면 교무실에 앉아 시계를 고칠 게 아니라 국어교재연구에 몰두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전공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는 후배에 대해 나는 말은 못하고 늘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다.

그런 후배교사에 비해 건축청부업자 김 사장은 얼마나 멋진가. 화장실 바닥이고 주방이고 배수에 관한 한 20년 넘게 조금도 문제가 없는 그의 전공 실력. 대개 집이 다 지어지고 나면 여기저기 흠이 발견되면서 결국에는 집 주인과 건축청부업자 간에 불화가 발생하고, 그 결과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나쁜 사이가 된다는데…… 김 사장과 나 사이는 달랐다. 올봄에 우리 아들을 장가보낼 때 나는 김 사장한테도 청첩장을 보냈고 그는 쾌히 만사 제치고 하객으로 와 주었다. 이제는 완전한 백발이 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오늘 장가가는 신랑이, 제가 집을 지어드릴 때 초등학교 다니던 그 꼬마 맞죠?”

나는그럼요!’하면서 그의 투박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그 간의 21년 세월이 허망하기는커녕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김 사장 같은 분들 덕으로 우리 사회가 이만큼 발전해 왔고 그래서 우리 아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식장에서 신부를 맞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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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반의 중국사는 내가 지금까지 사 본 단행본 중 가장 비싼 책이다. 사실, 가격이 4만원이 넘는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결코 구입하지 않았을 게다.

 

그 시작은 이랬다.

인터넷으로 세상 소식들을 살피다가 우연히절반의 중국사라는 책이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격에 대한 안내 없이 중국 작가가오홍레이란 분이 쓴 책인데 (김선자박사가 번역)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를 다뤘다고 간략히 덧붙였다. 그렇다면 내 학창 시절 국사책에 등장하던 흉노, 거란, 몽골, 말갈……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이 책을 꼭 사 봐야겠다는 욕구에 불타올랐다.

중국은 좋으나 싫으나 우리 한반도에 항상 영향을 끼치는 거대한 나라다. 그런 나라의 역사를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식으로 중원 땅 위주로 안다는 게 얼마나 허술한 짓일까. 중원의 역사는 중원 내 역학관계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중원 밖의 힘에 의해서도 불가피하게 이뤄진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터. 이 기회에 중원 땅 주변의 오랑캐 나라들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보자고 작심했다.

곧바로 책 명절반의 중국사와 출판사 이름을 쪽지에 적어 컴퓨터 책상 위에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방에 있는 아내가 나중에 컴퓨터를 하려다가 그 쪽지를 보면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통해 책을 구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간서적을 구입할 때마다 인터넷 활용에 능한 아내의 힘을 빌린다.

이튿날 아침,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쪽지에 적어 놓은 책을 신청해 놓았어.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 않더라고.”

얼마인데 그래?”

“432백 원.”

뭐야?!”

나는 기겁해 소리쳤다. “취소해. 나는 그 정도로 비싼 책인 줄 몰랐어.”

아내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도 참! 글을 쓴다는 사람이,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값이야 어떻든 사 봐야지 안 그래? 그렇기도 하고 이미 내 카드를 긁었어. 사흘 내로 택배로 올 테니까 받아서 읽어 봐.”

남편의 지적 호기심을 존중하는 아내라니. 무척 고마웠지만 그래도 그렇지, 10만원의 반 가까이 되는 돈을 책 한 권 사는 데 쓰게 하다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내 지갑에서 거금 5만원 지폐 한 장을 꺼내 아내한테 건네며 말했다.

이거 그 책값이야.”

아내가괜찮아.’하면서 그 돈을 되돌려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책이 사흘 후 택배로 왔다. 과연 비싸게 가격을 매길 만했다. 뒤에 붙인 주석까지 총 1037 페이지나 되는 아주 두꺼운 책이었다. 작년 여름에 생애 처음으로숨죽이는 갈대밭’(창작 소설집)을 서점가에 배포해 본 귀중한 경험이 있는 나다. 그래서 이런 쓸쓸한 말을 아내 앞에서 뇌까렸다.

이 비싸고 두꺼운 책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팔릴까? 감히 말하건대 만일 이 책이 100권 넘게 팔린다면 우리나라의 인문학은 희망이 있는 거야.”

그 날부터 나는 거실 소파에 죽치고 앉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젊은 날이라면 맨눈으로 쉬 읽었겠지만 이제는 도수 높은 안경을 걸친 채로 읽어야 하므로 눈의 피로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쉬다가를 거듭했다.

고백하건데 재미없는 책이었다면 초반에 조금 보다가 서가에 팽개치듯 꽂아놓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게다. 아내한테는책의 활자가 너무 작아서 눈이 아파 못 읽겠어!”라는 핑계를 대고 말이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내용이 아주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넘게 걸려 800여 페이지 본문을 완독했다. 본문 뒤로는 역자가 자신의 의견을 담은 주석을 달았는데 이 부분만 깨알 같은 활자로 200페이지가 넘는다. 현재 이 주석까지 읽기 시작했다. 주석 또한 재미있어서다.

절반의 중국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재미있는, 중국의 소수 민족들 역사 이야기라 하겠다. 얼마나 재미있냐면주석을 다 읽고 나면 본문만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사실 하나로 알 수 있다. 이름부터 흥미로운 흉노, 거란, 몽골, 말갈……들의 별의별 이야기들을 한 번 보고서 읽었다고 말한다는 게 왠지 어불성설일 것 같았다.

이야기.

인류에게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천성이 있다. 그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있다. 아득한 옛날 원시인으로 살 때어느 곳으로 어떻게 길을 가야 먹을 게 많다는 정보가 아주 소중한 생존요건이었는데 그것이이야기의 모체이며 그 후 인류는 이야기라면 만사제치고 귀 기울이게 되었단다.

절반의 중국사에는 워낙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하다.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본다.

1. ‘절반의 중국사란 제목이 뜻하듯 사실 중국의 역사는 한족만의 역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2. 숱한 정변들이 소개되는데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려고 아버지(임금)를 해치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아비(임금)가 아들의 여자를 빼앗아 자기 여자로 삼기도 했다. 원한 맺힌 적의 우두머리를 잡으면 참수한 뒤, 말려서 해골바가지로 만들어 자기 요강으로 삼는 경우도 있어서…… 사람이 동물보다 못할 수 있음을 절감했다.

3. 절세미녀를 적()의 왕비로 보냄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사라지고 오랜 세월 평화가 유지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았다. 미녀 얘기 중서시에 관한 얘기가 기억난다. 그녀가 강물에 얼굴을 비치면 물속의 고기들이 그 미모에 놀라 숨쉬기를 멈춤으로써 강바닥으로 가라앉아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을 옮긴 것인데 얼마나 동화적이고 재미있는지!

 

이 정도만 적는다. 만일 구구절절하게 적는다면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질지 모르고 그 결과 모처럼 심혈을 기울여 서점가에 이 책을 만들어 내놓은 분들의 노고가 헛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인문학의 번성이며, 그러려면 인문학 계통의 책들이 많이 팔려야 한다는 소신을 나는 갖고 있다.

책 읽기 좋은, 선선한 가을은 아니다. 하지만절반의 중국사같은 이야기 풍성한 역사서를 선택해 읽는다면 무더워만 가는 이 여름을 무난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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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06-20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한 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나저나 사모님께서 5만원을 그냥 가져 가시다니...ㅎㅎ

무심이병욱 2017-06-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절반의 중국사‘에는 정말 많은 스토리들이 담겨 있더라고요. 돈 5만원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요즈음 했습니다.
 

 

 

 

 

 

60년대 중반, 춘천은 인구가 10만도 안 됐다. 텔레비전 있는 집도 귀하던 그 시절,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동네 애들과 소양강에 가 헤엄치다 오는 게 일과였다. 아마 시내버스란 것도 없었을 것 같은데 만일 있었다 해도 차비 걱정에 탈 엄두를 못 냈을 게다. 우리 동네에서 소양강까지는 십여 리 산길, 동네 애들과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먼 산길을 단지 '헤엄 치고 싶어서' 걸어 다녔다.

그 날도 소양강 변까지 힘겹게 걸어간 뒤 모래밭에 옷들을 벗어놓고는, 강물로 시원하게 뛰어들었다. 우리가 헤엄치는 장소는 외진 곳으로 사실, 수영금지 구역이었다. 요즘이야 경찰서장 이름으로 수영금지 구역팻말이라도 세워놓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나마 안전하게 물놀이를 하려면 당국에서 관리하는, 소양강 다리 건너 물 얕은 강변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땡볕에 몸이 지쳐있는 데다가 너무 멀었다.

동행하는 어른도 없이 아이들끼리 다니는 수영금지 구역이라, 언제고 한 번은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다. 강물이 회오리처럼 빙빙 도는 데도 있고 강바닥을 준설했는지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데도 있던 그 구역.

다른 날에는, 그런 위험한 데를 조심하며 헤엄들 치다가 강변으로 잘 나왔었는데 그 날은 그렇지 못했다. ‘동연이란 아이가 헤엄치는 방향을 잘못 잡았던지 수심이 깊은 데로 휘말리듯 들어가더니 얕은 데로 나오질 못하고 얼마 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놀라 강변으로 뛰쳐나와 우왕좌왕하는데 그 때 부근에서 낚시하던 웬 아저씨가 상황을 알아채고는 바지 입은 차림으로 강물에 뛰어들더니 동연이 모습이 사라진 쪽으로 급하게 헤엄쳐갔다. 평일 낮에도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모습으로 봐, 직업도 없이 소일하던 사람 같았다. 그 시절에는 무직자가 많았다.

그 아저씨가 깊은 강물 속에서 동연이를 찾아는 냈으나 이미 움직임 하나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주검을 목격한 순간이다.

얘네 집이 어디냐? 앞장들 서라.”

우리는 옷들을 챙겨 입고는, 축 늘어진 동연이를 두 팔로 안은 아저씨의 앞장을 섰다. 다른 날 같았으면 헤엄치느라 기진한 몸으로 걸어가느라그것도 땡볕 아래 십여 리 산길을 다시 걸어가느라 몹시 고달팠을 텐데 그 날은 그런 느낌도 잊었다. 좁아서 한 줄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산길을 우리가 앞장서고 뒤로 한 어린애 주검을 두 팔로 안은 채 묵묵히 따라오던 그 아저씨.

우리가 나이가 어려서들 무심했는데 사실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어른이었던가. 우리와 일면식도 없었음에도 낚싯대도 팽개친 채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 어린애의 주검을 수습해 그 먼 땡볕 아래 십여 리 산길을 동행해 주었으니.

동연이네 집 앞에 이르렀다. 대문이 없었다. 직감이었을까, 우리가동연이 어머니!’라고 부르자 뒤란에서 나타난 그녀는 신발도 흘린 맨발로 허겁지겁 뛰어나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의 두 팔에 안긴, 축 늘어진 동연이의 모습에 그녀는 이미 넋이 반은 나간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외동아들을 순식간에 잃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울부짖던 동연이 어머니 모습도 선하지만…… 낯모르는 아이의 사고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강물로 뛰어들던 그 아저씨 모습 또한 선하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의 주검을 두 팔로 안고서 땡볕의 십여 리 산길을 걸어와 유족에게 전하기까지.

60년대 중반의 춘천은 모든 게 미비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시내버스도 보기 힘들었고, 위험한 강가에서 수영금지 구역팻말 같은 건 더욱이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아저씨 같은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춘천을 생각하면 한 아이의 익사 사건이 있었음에도 왠지 그리워진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여생을 살았을 동연이 어머니께 정말 너무 늦었지만, 애도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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